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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장 16-17절)

by 【고동엽】 2022. 12. 9.

< 복음이 무엇입니까? >

오늘 본문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복음이 무엇이며, 복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복음이 무엇입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세상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의롭게 변화되는 능력과 각종 불행과 저주와 어둠과 탄식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돈과 명예와 같은 외적인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행복하게 됩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사 사장은 불행하지만 그 회사의 수위는 행복한 경우도 많습니다.

세상 복은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다 똑같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세상적인 복을 내세워서 전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으면 병이 낫습니다.”라고 전도합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 안 믿어도 건강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또 어떤 분은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 중에 부자가 더 많다!”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복을 가지고 전도하면 금방 전도의 밑천이 다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행복합니다. 예수 안에 진정한 자유와 평강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이 기갈과 불행을 느끼는 이유는 돈이 없고 집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불행은 복음의 능력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과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특별히 본문 16절에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말한 것은 헬라인보다 유대인이 낫다는 말이 아니라 먼저 복음이 유대인에게 전해지고 그 다음으로 헬라인에게 전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먼저 복음을 받았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복음 안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30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 복음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

우리는 복음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2가지를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15절 말씀처럼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습니까? 14절에 있는 대로 은혜에 대한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동생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독신으로 지내며 헌신한 한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누나의 결혼을 독촉했고, 주위 사람들도 너무 지나치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오직 동생만 위해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렇게 한 이유를 고백했습니다.

그녀가 사춘기 때, 갑자기 수혈을 받게 되었는데 피를 급히 구하기 어려웠을 때 어린 남동생의 자원으로 수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혈 후, 남동생이 입원실에서 의사선생님에게 뜻밖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언제 죽나요?” 알고 보니까 어린 남동생은 누나를 위해 피를 뽑아주면 죽는 줄 알면서 수혈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녀는 평생 동생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기를 위해 죽을 결심을 하고 수혈에 임한 동생에게 평생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살면서 동생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 평생 빚진 자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려고 했고, 오늘 본문 16절 말씀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고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인생 최대의 사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2.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야 합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은 쉽게 말하면 믿음 외에는 사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고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진리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변질되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돈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중세 가톨릭교회는 진리에서 이탈해서 루터 때에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비 마련을 위해 속죄권을 파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조상의 이름으로 속죄권을 사면 연옥에 죄인들이 낙원으로 올라간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속죄권을 파는 사람 중에 티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헌금함에 돈을 땡그랑 넣을 때에 그 땡그랑 소리와 함께 연옥에 있는 형제들이 뛰쳐나와 해방된다.”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해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95개 조항으로 중세교회를 반박했습니다. 루터의 주장을 3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직 성경’을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표준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오직 은혜’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율법이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셋째, ‘오직 믿음’을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루터의 이 주장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얘기였습니다.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라틴어 성경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면 이단이라고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만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처럼 일반 교인들에게 성경을 주지 않고 신부들만 절대 해석권을 가지고 교인들을 이끌었습니다.

반면에 루터는 성직자나 평신도나 똑같이 자신의 직분이 아닌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평신도를 말씀과 믿음 위에 굳게 서게 만들기 위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첫 번째로 한 일은 라틴어 성경을 자국 말인 독일말로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성경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세 교회는 믿음의 원리에서 이탈해 점차 행위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행을 중시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가톨릭교회에서는 고난 받는 예수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형상이 많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부활을 강조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왜 십자가에 매달아 놓느냐 하는 뜻입니다. 가톨릭은 고행을 강조하고, 기독교는 은혜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진리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행위에 이르지 말고, 믿음으로 시작해서 감정에 이르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믿음은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하기 쉽습니다. 신비주의는 겉으로는 가장 신앙적인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가장 믿음과 반대되는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흔들립니까?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행위나 감정이나 경험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믿음의 사람을 발견했을 때, 예수님은 마치 광부가 금맥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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