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인의 삶을 통한 교훈 >
오늘 본문에는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있었던 가인의 언행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도전을 받게 됩니다. 가인의 삶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특별히 형제 사랑과 관련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형제를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단순히 “하나님께 자신의 예배가 열납되지 않았다”는 것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가인의 말을 보면 가인의 열등감과 시기심이 살인을 불러 일으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성도가 서로 비교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참으로 싫어하십니다. 영적 전투에서 형제가 서로 협력해도 쉽지 않은 싸움인데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면 사단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시기하는 마음은 살인죄 이전에 있었던 죄입니다. 그 말은 사람이 시기가 타락의 가장 뚜렷한 표시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기심과 부단히 싸워야 하고, 특별히 남과 비교해가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주님을 따르고, 나는 나대로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삼각관계의 상대적인 관계’로 하지 말고 ‘일대일 관계의 절대적인 관계’로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고 나에 대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 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나만의 특징이 있고 나만의 성공 길이 있습니다. 기죽을 필요도 없고, 우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답게 살면 됩니다. 은혜를 체험했다는 말은 비교의식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이 자기보다 잘 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은혜 받고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의 운명에는 초연해야 하고 나의 사명에는 집중해야 합니다. 잘 나가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어떻게 되든지 나의 사명에 충실한 것이 중요합니다. 내 사명에 충실하면 나에게도 그 사람 이상으로 성공하는 길이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2. 형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본문 9절에서 가인은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우와 같은 연약한 사람을 지켜주고 돌봐주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게 견고한 믿음을 주었을까요?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도우라는 뜻입니다. 왜 교회에 먼저 있게 하셨을까요? 나중에 온 사람을 돌봐주고 최대한 양보하라는 사명인 줄 믿습니다. 왜 나에게 물질을 주셨을까요? 선교와 구제에 더욱 힘쓰라는 뜻입니다.
형이 되게 하신 이유는 동생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크게 보면 성도들은 다 한 가족입니다. 누가 나보다 뒤쳐져 있으면 그를 잘 이끌어주고 누가 나보다 앞서 있으면 그를 칭찬해주고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넉넉한 믿음과 좋은 행실을 가진 신앙 모델들이 되어 배우자와 자녀를 인도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믿는 배우자 때문에 교회에 대해 반감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아내가 없는 곳이 천국이라고 하며 아내 때문에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나쁜 신앙의 모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와 가정에서는 행동을 더욱 조심하고 남 세워주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의 후원이 사람에게 큰 힘을 주고, 주님에게 큰 기쁨을 주고, 결국 그것이 내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3. 형제를 희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인한테 억울하게 맞아죽은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호소를 듣고 하나님이 아벨을 도로 살려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아벨의 피가 하늘에 호소함으로 가인이 저주를 받아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억울한 희생을 묵과하지 않고 의인의 희생을 절대로 눈감아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 본분과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산을 끝까지 지키는 못생긴 나무가 결국 거목이 됩니다. 우리는 남을 희생시키고 혼자 성공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혼자 성공하면 상처뿐인 영광만 얻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추구하며 성공의 길을 가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적인 역사관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를 중심으로 섭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선행을 반드시 기억해주시 고 은밀하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알고, 하나님이 침묵하실 것처럼 보일 때에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끔 이런 고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 나에게는 나의 행위 이상의 고난이 즉각적으로 올까?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많은 죄를 지어도 저렇게 멀쩡한데...” 진부한 말인 것 같지만 정말 이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에게 관심이 없으시면 추수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천국만 잘 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바르고 잘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련을 만나도 너무 상심하지 말고 나의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다른 형제를 희생시키는 모습이 없어야 합니다.
4.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형제 사이의 시기심과 관련된 장면으로 언뜻 생각하는 본문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그 장면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쁘게 잔치를 벌였지만 그때 밭에 있다가 돌아온 맏아들은 그 잔치를 보고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왜 창기와 지내며 재산을 다 날린 저런 자식을 위해 잔치를 벌이느냐?”고 합니다.
이 맏아들의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은 아버지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면 형제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용서처럼 중요한 것은 없고, 또한 용서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예배는 잘 드리지만 미운 사람 용서하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예배고 용서는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이 예배 후에 일어났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입니까? 예배로 미움이 없어져야지 미움이 생기면 됩니까? 우리는 그처럼 하나님 관계와 인간관계를 분리한 신앙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 더욱 크신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천천히 자살을 행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형제와 부모를 용서할 수 있어야 영혼도 살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 자기를 버리십시오 >
우리는 누구를 미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내 주위의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가인은 자기 경쟁 상대가 아벨이 아니었는데도, 경쟁상대로 알고 아벨을 죽입니다. 사실 가인이 싸워야 할 상대는 자기 안에 있는 시기와 불신, 미움과 분노였습니다.
사울의 싸움 상대도 다윗이 아니라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기의 시기심이었습니다. 야곱의 총애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레아가 해야 할 일은 남편의 마음을 얻으려고 라헬과 다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 잘 믿는 성숙한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면 시간이 문제일 뿐 사람의 마음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받는 싸움, 사랑 받는 경쟁에 너무 몰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했지 “사랑 받으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받으려는 자신을 극복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만 받아도 충분합니다. 그것이 있다면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의 문을 여실 것입니다.
너무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보고 낙심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을 누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승리는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사실상 자기를 망하게 하고 실패케 하는 대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승리는 자신을 다스리는데 있고, 자신 안의 죄를 이기는데 있습니다.
내가 불행하다면 그 이유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나의 불행의 이유를 내 안에 있는 욕망과 죄 때문이라고 보면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신앙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불신앙적인 것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가룟 유다를 제거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죄의 대표적인 표시는 형제에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의 대표적인 표시는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돌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믿음은 형제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선한 역사와 섭리를 바라보고, 넉넉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힘쓰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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