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먹고 살기 힘든 때, 사람들은 사랑을 표시할 때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밥 먹었냐?”고 했습니다. 부모는 밥을 먹이려고 자녀를 위해 조용히 서빙(serving)했습니다. 조용한 서빙이 깊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침묵도 조용한 서빙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침묵이 힘듭니다. “하나님! 왜 제 고통을 외면합니까?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의 죄대로 일일이 정의의 칼을 빼면 그 칼은 자신도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침묵에서 ‘회의’보다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 부모가 야단치기보다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야단의 목적이 사람의 변화에 있다면 부모의 침묵 중에 표현된 사랑처럼 더 무서운 야단은 없습니다. 말이 있어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쓰레기를 주울 때 “이렇게 쓰레기를 버리면 어떡해?”하고 주우면 쓰레기를 버린 사람도 미안해지고, 쓰레기를 안 주운 사람도 미안해집니다. 그냥 조용히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삶에서 거대한 장벽을 느끼며 무력감이 들 때마다 소리 없는 사랑의 손길이 나를 일으켰습니다. 사랑에는 꼭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조용한 사랑의 손길에 더 큰 사랑의 음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이 더 큰 사랑의 표시입니다. 즉각적인 기도 응답이 없는 것도 나를 위한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이 준비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소리 없는 사랑’은 ‘말이 많은 사랑’보다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관심과 존경과 이해를 주는 것이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소리가 필요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을 말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사랑에는 헌장이 필요 없습니다. 말은 사랑의 극히 적은 수단입니다. 사랑은 말과 논리와 이해관계를 떠나야 비로소 이해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저 사랑한다는 것으로 행복합니다. 사랑은 ‘서로 마주봄’이 아니라 ‘같이 바라봄’입니다. 사랑에는 사랑을 확인하려는 대화가 불필요합니다. “너를 사랑한다!”고 목청을 높일수록 허구가 느껴집니다. 사랑은 입이 아닌 가슴으로 전달됩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칭찬하는 입’보다는 ‘그윽한 눈길’과 ‘열린 가슴’이 생깁니다. 칭찬을 분석할 때 자신을 분별합니다. 깊은 사랑은 깊은 침묵을 재촉합니다. ‘큰 소리’에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아침이슬과 같습니다. 풀잎들은 아침이슬로 생명력이 커집니다. 아침이슬과 함께 풀을 뜯는 소는 튼튼해집니다. 조용히 내리는 아침이슬로 대지는 매일 새로운 기운을 받습니다. 사랑은 조용히 매일의 삶에 기적을 만듭니다. 사랑은 말을 즐기지 않고 실행할 뿐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할 때’가 ‘사랑을 알 때’입니다. 사랑은 소리 없이 다만 사랑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070123)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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