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하나님의 소원은 오직 전도입니다! (마 28:11-20)

by 【고동엽】 2022. 3. 28.
목록가기
 

 하나님의 소원은 오직 전도입니다! (마 28:11-20)

 

  사람들마다 소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가  소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 잡기를, 어떤 사람은 건강을, 어떤 사람은 아들 낳기를, 어떤 사람은 장가가고 시집가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소원이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다윗은 시37:4절에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할/
  그런데 우리 인간들만 소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소원이 있습니다. 아니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본문 19-20절에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쉽게 말하면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라,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라' 하나님의 소원은 오직 전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시간표는 오직 전도에 포커스를 맞춰 흘러가고 있습니다.
  마24:14절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전도의 명령을 우리 주님이 내리셨습니다. 이 명령을 주시면서 '하늘과 땅에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으며 전도하는 자에게 '세상 끝 날까지 우리 주님이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할/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을 통하여 이루시기를 소원하십니다. 빌2: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도의 소원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사도 바울에게 주셨고, 스데반 집사에게 주셨고, 바나바에게 주셨고, D.L. 무디에게 주셨고, 최권능 목사에게 주셨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줄 믿습니다. /아멘!/ ◀제목 소개!▶ 

 

  오늘로 마태복음의 마지막을 강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우리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할/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입니다. 1-15절까지는 부활하신 주님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파수꾼을 매수하여 도난설을 조작하는 부분과 16-20절은 하나님의 소원인 세계 복음화를 소원하신 명령입니다. /할/
  본문의 배경입니다. 1절을 보면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6시 빌라도에 의하여 사형확정판결을 받으시고 심한 학대와 매를 맞으시고 골고다 형장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9시입니다. 그리고 정오까지 십자가상에서 로마군인들에게 갖은 모욕과 고난을 받으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상의 마지막 말씀은 요19:30절에 보면 '내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시고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제 안식일이 다 지나가고 그 다음날 그러니까 '주일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일찍이 찾아 왔는데, 예수님의 무덤에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을 눈같이 희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로마의 파수꾼들은 무거워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천사가 마리아에게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무덤에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면서 '너희는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이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때 부활의 주님께서 여인들에게 오셔서 '평안 하뇨?' 하시면서 다시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할/
  이제 여자들이 제자들을 향하여 떠나갈 때 기절한 파수꾼들이 깨어나서 한 행동입니다.

 

  ▶11절 "여자들이 갈 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전하려 갈 때, 파숫꾼 몇 명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덤의 바위에 붙어 두었던 로마 총독의 인 봉이 찢겨졌고, 바위는 굴러 치워져 버렸고,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이들 눈에는 시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 당시 로마법은 군데에 지키는 죄수가 도망가거나 지키던 시체가 없어지면 파수꾼을 죽이는 것이 그 당시 로마법입니다.
  이 중대한 사건은 빌라도에게나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유대제사장들에게 보고했습니다. 만약 상관에게 보고하면 당장 죽게 되지만 제자장에게 보고하면 자기들처럼 이 기적을 숨기려고 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어 살 길이 있음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할/
  보고를 받은 제자장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12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그들이 모여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얻기를 파수꾼들을 돈으로 매수하자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검은 돈이 권력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군병들에게 큰돈을 주면서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할/

 

  ▶13-14절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성경에는 기록에 없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파수꾼의 보고를 그냥 믿지 않고 그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가서 자신들의 눈으로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해 보았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순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느낀 공포감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들은 그때 깨닫고 회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모략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듭 뇌물 공세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가롯 유다에게 은 30냥을 주었으며, 이제 또 다시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부인하게 하고 백성들을 미혹하도록 사주를 한 것입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율법을 잘 지키며 사는 자들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인데 지금은 율법의 가장 큰 죄인 '거짓말하는 죄, 거짓 증거 하는 죄'를 스스로 범하면서 뇌물공세를 하고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뜻밖에 횡재를 만났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돈까지 받았으니 사력을 다하여 이 소문을 퍼뜨리고 확신시켰을 것입니다. /할/ 

 

  ▶15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서양 속담에 '진실이 신발 끈을 매고 있는 동안 거짓말은 세상을 한바퀴 돈다'는 말처럼 돈 받은 군인들이 제사장과 장로들이 가르쳐 준대로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었습니다.
  ①도난 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몰래와서 시체를 비밀히 도적질해갔다는 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용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그들은 무서워 모두 도망을 갔고, 따라갔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런 비겁한 겁쟁이 제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시신을 가지고 오겠습니까?
  ②기절 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일시적으로 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무덤 안의 찬 기운과 또 세마포와 함께 둘러싼 향품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냄새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금 정신을 차리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군병들이 만약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사형 집행의 전문가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죄수를 죽이지 않고, 살려 내보내면 자기들이 처벌을 받거나 죽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예수님을 살려 내보냈겠습니까?
  그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돌아가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안전하게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은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허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분명해서 준 것입니다. /할/
  ③매장 부인 설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실제로는 무덤에 안치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생각되었던 곳이 빈 무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당초부터 무덤에 시신이 없었으니까 제자들이 가 본 무덤이 비어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설입니다.
  이것도 논리에 맞지를 않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있지도 않은데, 큰돌로 무덤의 입구를 막아놓고 인 봉까지 합니까? 거기다가 파수꾼들이 밤새도록 그 앞을 지킵니까? 그러니까 매장 부인 설도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론입니다. 

  ④환각 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너무나도 갈망한 나머지 헛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한 두 사람에게 나타났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15:6절을 보세요!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착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⑤허보 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근거 없는 거짓말로 꾸며낸 말이라는 설입니다.
  ⑥유령 설입니다. 이것은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유령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란 이 군병들이 소문 낸 것처럼 거짓으로 기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보면 인류의 역사란 것이 얼마나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 거짓된 역사가 바르게 수정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정된 것보다 수정되지 않고 묻히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인간이 바로 잡는 역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한 역사에 죄의 역사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감추어진 역사 잘못된 역사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류 최대의 사기 극은 진화론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역사적인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기 극은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사람들이 믿던 안 믿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사람들이 믿던 안 믿던 우리 주님은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할/
  예수님의 시신은 결코 도둑맞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성령으로 와 계십니다. 주님은 불안해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평강이 그대 안에 있을지어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 가서 전하라,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서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너희는 내 증인이 되어라, 성령을 받으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믿/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이요, 주님이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 생명, 예수 능력, 오직 예수'입니다. /할/

 

  ▶16-17절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갈릴리의 한 산에 모였습니다. 그 산은 예수님이 명하신 바로 그 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 급히 제자들에게 뛰어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갈릴리 한 산에 모였습니다.

  16절을 보면 두 가지 사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열 둘이 아니라 열한 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누가 빠졌습니까? 가롯 유다가 빠졌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배신할 가롯 유다만 빠졌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만이 갈릴리에 갔습니다.
  즉 부활하신 주님을 지금도 누구나 만날 수 있지만 그러나 의심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만날 수 없습니다. 가롯유다는 시작은 예수님의 제자로 잘했는데 끝은 배신자로 끝났습니다.
  여러분!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작을 잘 하는데 끝은 잘못 맺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가롯유다는 시작을 잘했는데 결국 사탄의 유혹에 빠져 예수님을 팔게 되었고, 그 결과 비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⑴교만 때문입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이 없었습니다. 교만한 자의 극치입니다. 그 다음 자기 주장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도 교만한 자의 극치입니다. 
  ⑵욕심 때문에 망했습니다. 오직 돈밖에 몰랐습니다. 그는 오직 돈궤에 관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물질 때문에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16절에서 또 한가지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왜 예루살렘에서 부르지 아니하시고 갈릴리를 부르셨을까요?
  여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은 예수님에게도, 기독교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 모든 사건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예루살렘 주변 베들레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곳도, 부활하신 곳도 예루살렘입니다.
  기독교의 탄생이라 할 수 있는 오순절 사건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릴리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을 세 지역으로 나누는데 남부 지역이 유대 지역이었고, 중부 지역이 사마리아 지역이었고, 북부 지역이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과 같은 지역이었고 이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 살던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 관심은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의 사역의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 받기를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지만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열 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시고 마지막 지상 명령을 부여하신 곳이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 가서 주님을 마지막으로 뵈옵고 주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었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를 뵈옵고' /할/
  ⑴갈릴리에 대한 관심이 선지자 이사야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 탄생을 예언하면서 메시야 탄생을 통한 큰 빛이 이방의 땅 갈릴리에 비췬다고 예언했습니다. 사9:1-2절에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⑵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신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 바로 갈릴리였고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애굽에 피난 갔다가 오셔서 사신 곳이 바로 갈리리 나사렛이었습니다.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마2:22,23).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가난한 자들과 천민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신 후에는 갈릴리 북쪽인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셔서 사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 갈릴리에서 안드레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가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4:18,19).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전하신 곳도 가장 중요한 이적을 행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산상 설교를 하신 곳도 갈릴리였고,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곳도 갈릴리의 가나였고, 백부장의 하인과 베드로의 장모와 가나안 여자의 딸과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곳도 모두 갈릴리였습니다. 오 천 명을 먹이선 곳도 갈릴리의 벳세다 광야였고 물 위를 걸으시고 폭풍을 잔잔케 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의 모든 가르침과 거의 모든 이적과 거의 모든 사역을 갈릴리에서 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⑶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이시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갈릴리는 보잘 것 없는 시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울며 함께 웃고 기적을 베풀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던 곳이 갈릴리입니다. 한마디로 갈릴리는 제자들이 훈련받은 장소입니다. 그들의 영혼의 고향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것은 세계 정복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보잘 것 없는 갈릴리 촌놈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갈릴리 사람들처럼 부족한 자를 불러서 강하게 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같이 연약한 자를 들어서 강하게 쓰십니다. /믿/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것은 제 2의 사명을 주시려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직접 훈련을 받았지만 1차 훈련을 받았던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해변 가를 거닐며 함께 말씀을 나누시며 병든 자를 고쳐 주시며 배고픈 자를 먹이시며 죄인들은 용서해 주시며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던 날 밤에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시작하자는 격려와 함께 제 2의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모두다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할/
  오늘 이 자리가 갈릴리의 한 산입니다. 이 곳에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미직끈 해서는 안됩니다. 계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책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계3:15-16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우리 신앙을 다시 세웁시다. 기도로 세우고, 말씀으로 세우고, 헌신으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안일하게 빠져 있으면 안됩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예수 생명, 예수 능력'을 받아 다시 시작하면 우리 모두 승리자가 될 수 잇고,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할/ 
  예수님이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것은 이제는 예전의 모습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다시 한 번 제2의 선택, 제 2의 부름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사명에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바로 이 갈릴리에서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새롭게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자'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그 권능과 영광을 가지시고 우리를 새롭게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니까 부활의 주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17절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첫째 반응은 경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순간, 그들은 기적의 현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만이 그리스도이요 참 구세주이십니다. 당신은 죽음을 이기신 인간 근본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당신만이 승리자이십니다.' 그런 마음으로 경배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일어납니다. 우리나라는 조상에게,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는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죽은 자를 제사하는 것 같은 그런 예배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안됩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2: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할/
  두 번 째 반응은 '의심'입니다. 의심은 한마디로 불 신앙의 마음이요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의심이 깊어지면 의처증이 되고 의부증이 됩니다.
  ▶한 의처증 환자가 자기 부인의 술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의 잔에 독약을 넣어 생사람을 잡았습니다. 신앙도 의심이 깊어지면 불 신앙이 되고 반역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파도에 휩쓸려 들어가던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의심의 원 뜻은 '철저하게 분리하다, 철수하다, 주저하다'입니다. 의심은 하나님과 나를 철저하게 분리시킵니다. 의심은 나에게서 믿음과 안정과 기쁨과 소망을 완전히 철수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은 주저앉게 만들어버립니다. 의심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호히 이 의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할/
  이제 오늘의 결론 부분과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는 말씀은 더 이상 갈릴리에 머물러 있지 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가서' 유대전역으로 나아가서 전 세계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족속'은 나라와 언어를 달리하는 전 세계 사람들 즉, 선교의 대상을 의미합니다. 또 '제자 삼아라'는 그들에게 복음을 주고 또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시켜라는 명령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가르치는 궁극적인 목적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군인은 훈련시키는 것은 전투하는 힘과 기를 길러주는 것이고, 선수를 가르치는 것은 경기를 치러 내는 기술과 힘을 길러 주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킨다'는 말은 '수호하다, 유지하다, 실천하다'는 말입니다.
  ⑴나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딤전5:22절에서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⑵내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딤후4:7절에서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⑶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요14: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아멘!/

 

  ▶다시 주님의 말씀은 세계 정복에 전도방법을 다섯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⑴'너희는' 요원 화입니다. 여기 너희는 우리 모두를 가르칩니다. 저와 여러분, 기존 성도가 복음의 요원이 되라는 것입니다.
  ⑵'가서' 지역화입니다. 내가 처한 직정, 가정, 현장에서 복음으로 장악하라는 명령입니다.
  ⑶'제자 삼아' 제자 화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를 이해한 자들입니다. 그 이름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은 자가 바른 메시지를 가지고 현장에서 '예수 생명, 예수 능력'을 주라는 것입니다.
  ⑷'세례를 주고' 전도 화입니다. 여기 '세례를 주고'는 계속 세례를 주어 교회가 채워져야 합니다. 세례는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선포식 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로 할례를 받았고, 신약시대에는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됨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게되면 주어지는 몇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한다'는 점입니다. 세례는 결코 형식이 아닙니다. 사람이 귀신을 섬기면 귀신의 영의 지배를 받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의 인도와 섭리를 받으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세례자들이 받는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또 책임감이 주어집니다. 세례는 때로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작용을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타락된 삶을 살아가다가도 어느 날 옛날에 받았던 세례의 힘이 작용하여 주의 길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례인은 절제의 삶을 살고 근신하고 조심하며 살아가게 하는 은혜를 입고 살아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는 신앙인으로 하여금 분명한 소속감을 갖게 해 줍니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듭니다. 태도가 분명해집니다. 자세가 진지해 집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소속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할/
  ⑸'가르쳐 지키게 하라' 재생산화입니다. 지속적인 제자훈련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전도의 요원을 만들라고 당부했습니다. /할/ 여러분, 신앙인이 아는 것만으로 끝나버리게 되면 그 신앙은 힘을 잃게 됩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받는 것은 모두 아는 것만으로 끝나 버리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알고 난 후에는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뭐니, 뭐니 해도 생명 살리는 복음운동입니다. 쉽게 말하면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소원을 이루시려고 전도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권세 받았습니다. /믿/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도자에게 영원히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탄생과 마지막을 임마누엘로 장식한 것입니다. '나는 임마누엘로 세상에 왔으며 지금 가지만 임마누엘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겠다.' 그래서 오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약속해주신 '나는 제자인 너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이 약속하나를 움켜잡고 하나님의 역사에 몸을 바치는 자들입니다. /아멘!/
  제자 화된 사람, 제자 화된 교회! 주님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오래 전에 나옴 명화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격동기 시절을 배경으로 해서 지바고와 라라의 눈 덮인 설운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엮어주는 영화인데, 인간관계도 복잡하고 삼각관계, 전쟁 통해서 죽고 사는 이야기로 재미있고 관심 있게 만든 영화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린 소녀가 하나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버지가 그 아이를 길렀는데 전쟁의 위급한 상황이 되니까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버지가 손을 놔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가버린 것입니다.
  사실 자기 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아주 험난한 인생 여정을 살게 되는데 마지막 장면이 이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아이에게 사진을 하나 보여주면서 '사진을 보는 이 사람이 너의 진짜 아버지이다. 만약 코마로프스키가 너의 진짜 아버지였다면 전쟁 중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어도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네 손을 위급한 상황에서 더 굳게 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네 손을 놓고 간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 '어떠한 상황이 와도 제자가 된 자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너의 손을 잡고 갈 것이다.' 그 약속하나를 주셨습니다.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7: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1: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할/
  세상에 모든 것은 떠납니다. 행복한 환경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부귀영화도 영원한 조건이 못됩니다. 그러니까 재물도, 권력도, 인기도, 명예도, 사랑도, 직위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순간적인 것이요, 찰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한나의 고백처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믿/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셔서 전도하는 자에게 '건강, 재물, 조건, 환경'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를 통하여 이루십니다. 시37: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전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오직 전도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