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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봉목사/전도의 사명(使命) (막 1:32-33/눅 4:40-41)

by 【고동엽】 2022.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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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봉목사/전도의 사명(使命) (막 1:32-33/눅 4:40-41)

 

요즘 불신자들이나, 심지어 교인들까지도 교회가 너무 많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심지어 ‘교회가 무엇 하는 곳이냐?’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등 교회 존재의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전혀 교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를 나오다가 무슨 연고인지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일수록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비판은 어제/오늘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항상 있었던 일들이었습니다.
예수 님도 바로 그것을 지적하여 마태복음 5: 13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 믿는 성도들을 소금에 비유했습니다. 즉 교회를 소금에다 비유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맛을 잃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발에 밟힐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맛을 이어가려면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회 봉사라고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윤리적인 면에서만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말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렇게 보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있습니다. 앞으로 몇 주간에 걸쳐 이점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첫째,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구령(救靈) 사역(使役)에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하여야 할 존재의 의의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영혼이 구원 얻게 함에 있습니다. 구령(救靈)이란 구할 구(求) 자에 영혼 영(靈)자입니다. <영혼구원>이 그것이 최우선의 본질적 사명이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주님도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원 얻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세게 교회 협의회에서 한때 그러면 구원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굶주린 사람에게 구원은 빵이고, 갇힌 자에게 구원은 석방이고, 억압받고 눌린 자에게 구원은 자유와 해방이라고 하면서 한때 해방신학이 유행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은 그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항상 그 강조하는 면이 변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궁극적으로 한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따르는 것이 모든 인간의 삶 전역에서 구원의 의미를 그때그때 다르게 강조 할뿐이고, 더욱이 <병 고침>과 <이적>과 <기사>와 <구제>와 <봉사> 활동은 모두 영혼 구원을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병 고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병은 병원에서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구제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구제는 사회사업 기관이나 국가가 해야할 일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본질적으로 구령 사역에 있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의 인권이 부당하게 유린되거나, 짓밟히고, 핍박받고, 갇히고, 착취당할 때 가만있을 수 없어 말하게 되고 행동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 말하고 행동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은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이 하는 것을 보면, 목적이 전도되어 수단이 마치 본질적인 것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나?  가난한 사람 구제하고, 병든 사람 치료하고,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 보호하여 주는 것이 주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으레 그런 사회사업 면에서 남의 손닿지 않는 음지에서 도와주고 돌보는 것으로 사명을 다하는 줄 그렇게 알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담당하는 것이 교회가 걸머질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존재의 의의는 한 사람의 영혼을 크게 보고 불쌍히 여겨 그 영혼을 예수 믿게 하여 구원 얻도록 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도(傳道)라고 합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전도함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교회의 <전도 사명>의 원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가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온 동리가 문 앞에 모였더라”고 하였습니다.(막1:33)
이 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온 동리가 예수 님 앞에 다 모였다고 하였는가?  두말할 것 없이 예수 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퍼지려면 누군가의 입에서 전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입으로 예수 님에 관하여 말해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 같이 매스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요즘 같았으면 한번 TV 에 비치던가, 아니면 신문이나, 방송에 나간 다면 더 쉽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 당시만 해도, 통신 수단이 요즘처럼 그렇게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동네가 다 모여 왔다는 것은 대단한 특이한 일입니다. 분명히 입에서 입으로 전파된 결과라고 봅니다.
아무튼 예수 님께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처음 예수 님의 이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이 누군가가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중병에 앓던 사람이 어떤 약을 먹고 났았다고 하면 그 약이 좋았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그 약을 찾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만있었으면 그 약이 좋은지 나쁜지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도(傳道)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전도란 소문을 퍼트리는 일입니다. 예수 님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전도입니다. 예수 님에 대한 소문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에 대한 소문이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하여 좋은 소문을 자꾸 퍼트리는 일, 그것이 전도입니다.
교회에 한번 나와 보라! 우리 교회를 한번 와 보라!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쉬운 것이 전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틀림없이 예수 님께 병을 고친 사람들이 또 다른 이웃에게 그것을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냥 가만있는데 예수의 소문이 퍼질 리는 만무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들이 본 그대로,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보고도 말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님 앞으로 모였겠습니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도 화목하고 잘되는 가정을 보면 나가서 자기 집 자랑을 합니다. 자기 며느리 자랑을 잘 합니다. 며느리는 자기 시어머니 자랑을 잘합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형제간에 불화 하는 가정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교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부흥되는 교회들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자기 교회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부흥되지 못하는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 자랑을 안 합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를 비교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마치 아버지 어머니를 원망하는 자식들같이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쩌고저쩌고, 다른 교회는 이렇게 한다는데...., 하면서 자기 교회보다 남에 교회를 더 선전합니다. 그런 제직이 있는 교회, 그런 권사나 집사가 있는 교회 치고 부흥되는 교회는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아마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무슨 자랑할 것이 있어야 자랑하지? 모두 못하는 것뿐인데......”  고부간에 불화 하는 가정을 들여다보면, 며느리에게서 잘하는 것이 있어야 자랑하지....그렇게 말합니다. 또 시어머 흉보며 다니는 며느리는 뭐 시어머니가 잘하는 것이 있어야 내가 존경하지...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칭찬 들을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말에 며느리가 미우면 발 뒤꿈치까지 계란처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모두 장점들이 있습니다.
그 장점들을 보고, 그것을 칭찬해야 합니다. 예수 님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 님의 무엇을 잘못하는 일이 없는가 하는 것만 탐지하려 다녔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범한 자라고 책잡으려고 했고, 진퇴양난의 디렘마에 빠트려 올가미를 씌우려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경우들이 왕왕 있을 수 있습니다.
교역자들이나 목사들도 다 사람인데, 언제나 실수하는 일, 미쳐 잘 몰라서 못하는 일, 그런 것만 찾아 지적하면서 잘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교회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모두 장점들이 있습니다. 그 장점을 단점보다 더 자랑하면 자연히 고부간에도, 화목해 질 것이고, 교회는 교회대로 부흥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란 힘든 일이 아니고 가장 쉬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한번 와 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 마저도 못한다면 그 사람을 어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제직 들이라면 어찌 그 교회가 부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이것을 우리들이 살펴보고 고쳐야 하겠습니다. 내가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좋은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터트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제각기 ‘병자’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자기 혼자만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집 아무개가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자기 집 아무개도 낫을 줄 그렇게 믿고 데리고 나왔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 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 구경이나 하자고 나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가 보자고 의심하면서 나온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다 각기 병자들을 데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껏 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닌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최후로 예수 님께 데리고 나왔다고 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이 깊이 반성해 보아야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아직도 전도하지 못했어! 라고 탄식하기 전에, 자기 집안에 각색 병자들이 있건만,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혼자만 나오는 사람들이라면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제직들이 이점에 더욱 심각하게 느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장로>와 <권사> <집사>들이 일년에 한 사람도 데리고 나오지 못했다면 그 교회가 어떻게 부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리고도 주님 앞에 떳떳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깊이 깊이 회개해야 할 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제일 비 성서적인 관행으로 굳어진 것이 있다면 장로들이 전도 안 하는 일입니다. 전도는 집사 때나, 일반 신도들이나 하지 장로가 되면 전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관행입니다. 장로가 되면 목사와 대등하게 교회를 감독하는 것으로 직무가 다 되는 줄 그렇게 아는 일입니다.
모든 교인들 앞에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장로님들입니다.
목사는 장로들과 협력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고 장로는 목사를 도와 교인들이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가, 이단으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는가를 살펴 당회에 보고하는 일이 전무입니다. 그런데 마치 목사의 하는 일을 감독하고 견제하고 다수결에 의하여 당회의 결의가 우선 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그야말로 잘못된 일입니다. 장로는 모든 일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헌금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기도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못하면 그 직을 사양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이 무슨 계급인 양 그렇게 교인들에게 비쳐지면 않 됩니다.
오늘 어느 교회든지 교회가 부흥되지 못하는 교회를 들여다보면 바로 이점에 걸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두 병인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왔는데, 한 명도 데리고 나오는 사람이 없이 혼자만 일년 내내 나왔다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끝으로, 전체적 사랑보다 개별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의 행동에서 좀 이상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병자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 준 일입니다. 사람을 집단으로 대하지 아니했다는 점입니다.  병자들 한 사람, 한사람에게 일일이 안수하여 고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말씀으로 귀머거리와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능력의 주님이 집단적으로 말하지 않고 일일이 한사람씩 손을 친히 얹어 만져 주면서 고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교훈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류를 위한 사랑이지만, 구원은 한사람, 한사람의 구원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동시에 나 하나를 특별히 개별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 집단과 개체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집단적이 아니라 개별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집단적인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개별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교회가 구제 금을 적게 책정하였다고, 그리고 장학금을 적게 하였다고,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적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 스스로가 개별적으로 도와주는 일을 얼마나 하느냐? 물으면 한 사람도 도와주는 일이 없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이중적이란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 같은 존재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철이나, 육교에서, 그리고 자기 집에 얻으러 온 사람에게는 그렇게 인색하면서도, 교회에서는 제일 남을 돕자는 말은 잘한다면 그것이 회칠한 무덤 같은 존재란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을 찌라도 노력은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자신의 무능을 알고, 겸손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겸손해 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복음 증거 하는 일이라면 이 후반기에는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겨 각색 병든 자들을 데리고 주님 앞으로 나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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