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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명목사/예수님의 전도명령 (요 4:27-38)

by 【고동엽】 2022.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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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명목사/예수님의 전도명령 (요 4:27-38)

 

요한복음 4장은 우리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정죄하며 외면하는 사마리아성의 방문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4장3,4절에서는 유대를 떠나 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목적지는 갈릴리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로 가신 것입니다. 이는 거리를 단축함도 아니셨습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는 그냥 지나가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야만 하는 주님의 목적과 의도가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주님의 의도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가신 주님은 제밀 먼저 제자들에게 음식을 구해오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물가에 홀로 남으셨습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기다리시며 만남 바 되어 주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있으신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수가성에 사는 여인입니다. 망가진 삶을 사는 여인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얼마나 많이 채우려 했는지 그동안의 남편이 다섯이나 바꾸었습니다. 지금도 여섯 번째 남편하고 동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를 보건데 얼마나 생활이 난잡한 여인입니까 동네사람들은 이 여인을 상종하기도 싫어했고 여인도 사람만나기를 두려워해 망가질 때로 망가진 더 이상의 희망도 기대도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아주 뜨거운 정오 즈음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온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여인을 만나시려 일부러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래 오셨던 주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셨던 주님이 그렇게 이 이 여인을 만나주시려 사마리아에 걸음을 옮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마저 음식을 구하러 동네에 일부러 보내시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 여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자신에게마저 버림받은 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지니라" 진정한 예배자의 길도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그로라 하시며 말입니다. 이 여인에게 그렇게 주님은 메시야로 만나주셨습니다.

 


우리의 눈과는 달리 주님의 눈에는 긍휼함이 있다.

그저 살아보려고 행복해 보려고 몸부림쳤던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만나주어야 할 구원이 필요한 여인이었습니다. 생수에 대해 갈급해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상징도 난잡한 여인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긍휼과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늘 주님이 만나 준 사람마다 그러하듯 이 여인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음속에 감격이 살아났습니다. 이제는 용서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내 버려두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녀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살아야 할 이유와 달려가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이유가 있고 일어나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이유가 생명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믿으십시오. 지금 주님이 날 만나주면 여인이 경험한 변화가 내게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삶에 지치신 분이 있으십니까? 무거운 죄 짐에 눌린 분이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습니까? 갈 바를 몰라 방황하고 있으십니까? 몸과 마음이 병들어 망가진 분이 있으십니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곧 나를 믿으라는 것이요 내가 너의 보장이 되어 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향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향하는 방향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올 때에는 물동이를 이고 왔으나 던져버릴 만큼 영적인 계기가 있습니다. 이 계기는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올 때와 갈 때가 다른 것 그것은 예배가 가져다주는 축복입니다. 죽으려 했는데 포기하려 했는데 예배 중에 주님을 만나면 사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우리는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음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온 것을 시작으로 본문의 깊은 의미가 있다.

돌아온 제자들은 그 모습이 너무도 진지해서 무엇을 구하시는지 어찌하여 저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있는지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 예수께서 만나주시고 있는 여인은 물동이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와 보라(Come and See)”외치며 전도자가 되어진 것입니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말이 없습니다. 주님의 감격은 구님이 만나주신 한 죄많은 여인이 또 다른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준비해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자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는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이해 할 수 없는 양식이 예수님에게는 있는데 그것은 34절에서“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 것이니라”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참된 양식은 무엇인가?

지금 한 죄인 만나주셨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고 또 다른 영혼을 위해 보내시는 일이다. 즉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는 말에서 이것은 바로 ‘영혼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의 모습에서 세상에서 버림받은 영혼이 저렇게 소망을 가지고 기뻐 뛰는 것을 보니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부를 만큼 주님에게는 지금 만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과 감격은 이런 것입니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우리 예수님은 참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기쁨과 만족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는 한 여인에게서 얻은 감격과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탄식하심이 대비된다.

35절에서는“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길가의 곡식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음식을 구하는 데에만 굳이 12명의 제자들 전부를 보내셨을까요? 음식만이면 두세 명 정도면 충분합니다.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10리길을 다녀오면서도 음식만 구해왔지 애초에 제자들을 부르셨던 목적과 의도를 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오고 가는 길에서나 들어 선 마을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지쳐있고 생명에 대해 갈급해 하는 사람들을 보고 추수할 마음이나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한 여인은 어쩌면 개인이 아닙니다. 곧 마을전부를 상징하는 것이요 잃어버린 영혼들 전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음식만 구해오고 구경만 하다 온 제자들은 사마리아까지 오신 주님이 무엇을 원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었던 것입니다.


  본문에는 애절한 주님의 전도명령이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셨듯이 저와 여러분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곳곳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주님이 우리를 파송하셨다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곳에 우리는 우리들의 목적에만 매달립니다.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것에만 직장에서는 월급에만 우리의 목적이 있습니다. 음식에만 관심이 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36절에서 주님은 거두는 자는 영생의 열매를 모으는 것이라 하셨고 39절에서는 여인의 증거 앞에 많은 사람이 돌아왔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각과 마음으로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내가 파송받은 곳이 어디이든 간에 우리 자신을 뛰어넘어 형편에 매지지 말고 생명을 갈급해 하는 영혼들에게 “와보라” 하며 41절에서 증거하듯 주님을 세상의 구주시라고 우리는 증거 해야 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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