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전쟁! (행 13:6-12)
최근에 한 신실한 남자 성도가 기도 요청을 하셨는데, 기도 제목이 있으신가 묻자 한동안 대답을 못하시다가 괴로운 고백을 하셨습니다. 계속 음란한 생각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그런 문제로 고민할 것 같이 보이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깊은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성도에게 앞으로 음란한 생각이 일어나면 사단아 내 마음에서 물러가라! 하고 대적하라고 권해드렸습니다. 그 후 그 성도는 음란한 생각으로 시달리는 것에서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 성도에게 “음란한 생각이 떠오를 때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라고 조언을 한 것은 저도 역시 음란한 생각으로 너무나 시달렸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러한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또 누가 알까 봐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평생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닌가 두려웠습니다. 곁으로는 경건한 목사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인가? 마치 위선자처럼 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것이 정말 두려웠었습니다. 그러나 음란한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민수기 22-25장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주술가였던 발람은 모압 평야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려달라는 모압 왕 발락의 끈질긴 요청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시므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발락 왕이 크게 화를 내자 발람은 발락에게 사악한 계교를 일러줍니다.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발락에게 모압과 미디안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여 바알의 제사에 참여하게 하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모압 백성들의 음행은 단순한 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음행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종교 행위였습니다. 신전에서 제사 드릴 때 여사제들은 거의 창녀같은 일을 했습니다. 남자들과 성관계를 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 제사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압 여인들과 미디안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른 것은 단순히 음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의 죄까지 범하게 하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략을 통해 드디어 발람의 음모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과 우상 숭배의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2만4천 명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기록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음란함 뒤에 악한 영의 역사가 있구나!’ 그제서야 음란한 생각과 유혹이 단순히 부끄러운 일 사람들이 알까봐 두려운 일이 아니라, 음란함 뒤에 성도를 무너뜨리고 나라와 민족을 파멸하는 악한 영의 역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서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음란과 관련된 악한 영의 역사를 보는 눈이 뜨인다면 음란의 유혹이 더 이상 유혹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끔찍해서 가까이 오기 싫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보는 눈이 열려져있지 않습니다. 음란과 그 뒤에 역사하는 악한 영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음란의 유혹에 맥없이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그 눈을 뜨게 하고 난 다음에 음란의 문제는 저에게 그저 부끄럽고 사람들이 알까봐 무서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절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는 말씀이 음란의 문제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음란의 유혹이 올 때는 이것이 악한 영이 공격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적인 승리를 그 분에게 그대로 누리실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음란의 문제 뿐 아니라 수없는 영적 전쟁 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시험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한 영의 역사를 실제로 눈으로 본다면 우리는 아마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싸우는 것은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으시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은 반드시 영적인 싸움 한복판에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여러분을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만의 명수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이 마귀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악한 영들은 목적이 하나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밤에 주무실 때 우리가 집의 문 단속은 얼마나 철저히 합니까? 창문도 걸고 대문도 걸어 잠그고 그런 다음에야 편안하게 주무실 것입니다. 대문을 잠그지 않고 편안하게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 단속을 할 것이 악한 영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집 문 단속을 할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의 재산도 지키고 또 여러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문 단속을 합니다. 그러나 지켜야 될 것 중에 정말 지켜야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집의 문은 단속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은 단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정말 바보입니다. 집 문 단속을 하지 못하면 악한 자가 집에 들어와서 여러분의 재물을 도적질해 가고 여러분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재산을 잃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문을 단속하지 않으면 영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귀는 여러분이 영적으로 문 단속을 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수시로 들락날락 거리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놀라운 복과 은혜를 다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마음을 지켜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보면 마귀가 우리 마음에 심어넣어주는 악한 것들이 무엇인지 죽 목록이 나와있습니다. 이 목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지 못하는 자들의 삶이라고 그랬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마귀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고 영생을 얻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으로 우리에게 눈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이것이 악한 영의 역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사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문화 속에 빠져서 그들은 복음을 전혀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마귀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세상 문화에 깊이 침투하였습니다,
세상 문화를 주의 깊게 보면 그 배후에 사단의 무서운 전략이 숨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상 문화가 요즘에는 방송과 손을 잡았습니다. 역술인들을 인간 문화재로 만들고 책을 내고 영화화하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보는 만화나 놀이를 보면 귀신 이야기, 마법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결론은 예수 못 믿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도 미혹하여 넘어뜨리려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막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여러분이 만약에 신앙의 결심을 했는데도 너무 쉽게 그 결심이 무너져버리고, 어떤 거룩한 열정이 일어났는데 너무 쉽게 식어져버리고, 예수를 믿은 연한은 오래 되었는데도 믿음은 자라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태를 보고 여러분 영적인 상황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마귀가 영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통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시험을 겪고 사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악한 영의 역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혈기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분노로 어떤 사람은 염려때문에 어떤 사람은 세상 욕심으로 돈에 대한 탐심 때문에 갖가지 형태로 악한 영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주인 노릇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악한 영은 역사하는가? 우리 주변 가까이서 역사하는가 알고 싶다면 복음을 전해보면 됩니다. 귀신이 정말 있는지 사람들을 미혹하고 훼방하고 있는지 여러분이 정말 알고 싶다면 전도를 해보십시오.
악한 영의 역사는 우리가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거나,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전도를 시작하게 되면 귀신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기 전에 먼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 바나바와 사울이 찾아간 첫 번째 선교지가 구브로 섬이었습니다. 그 땅의 총독 서기오 바울은 영적인 갈급함이 있어 바나바와 바울을 초대해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바예수라는 박수가 복음 증거를 방해하고 나섰습니다. 전도하면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마귀가 왕 노릇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구브로에서 총독이 가장 높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총독을 조종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무당입니다. 이것은 당시가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거 철이 되면 국회의원들이 점을 보러 다닙니다. 정치인들이 무속인을 찾아다닙니다. 세계 수많은 나라의 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배후에는 무당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구브로 섬 전체를 실제로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악한 영의 권세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전도를 해보면 금방 드러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지요? 우리가 믿음이 바로 서지 못하도록, 우리 믿음이 자라지 못하도록 악한 영이 우리를 계속해서 공격할 때, 우리 가정을 은혜가 충만하고 천국같은 가정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계속 우리 가정을 무너뜨리려고 악한 영이 역사할 때,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또 내가 사회 생활할 때 내가 담대하게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지 못하도록 알게 모르게 악한 영이 우리를 공격할 때, 영혼을 구원해야 되고 전도를 해야 되는데 그것을 가로막는 영적인 공격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 싸워서 이길 것입니까?
9절-11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아,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이렇게 싸우는 것이구나.‘ 하는 교훈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주목했다는 말은 노려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싸우려면 제일 먼저는 악한 영의 역사를 분별하고, 아 이것이 악한 영의 역사였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분별했다면 노려보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여러분도 악한 영의 역사에 대해서 노려보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싸움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한 영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9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사울은 성령 충만하여 박수를 주목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이처럼 악령과 싸울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는 원수 마귀를 알아야 하지만, 원수를 지나치게 높이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악한 영을 제압할 권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 16:18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할 때 나는 왜 습관적인 죄 문제를 이렇게 계속해서 극복하지 못할까? 여러분 스스로도 부끄럽고 계속 죄책감에 눌리고 그러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습관적인 죄 문제가 여러분에게 있다면 아, 이것이 영적인 공격과 관련이 되는 문제구나.
또 왜 우리 가정은 다 예수를 믿는데도 그렇게 싸움이 많고 기쁨이 없고 항상 분위기가 어두운가? 이것이 영적인 전쟁과 관련된 문제가 있구나. 왜 믿는 성도들끼리 성령 안에 연합되지 못하고 자꾸 의견이 갈리고 분열이 되는가? 이것이 영적인 공격과 관련된 문제가 있구나.
여러분, 나라와 또 우리 사회 여러 현상들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볼 때 아, 이것이 영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구나. 여러분이 분별하였다면 그 다음에는 노려보시기를 축복합니다. 피하지 마시고 그냥 힘들어만 하지 말고 “사단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가 너를 이제 분별했다! 내게서 떠나가라!”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악한 영의 역사라고 분별되면 눈을 딱 부릅뜨고 그것들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엘루마를 꾸짖었습니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박수 엘루마는 총독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구브로 섬의 실질적인 실권자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울의 처지는 구브로 섬의 손님일 뿐입니다. 나그네입니다. 두려워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인 담대함으로 박수 엘루마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자신과 함께 계시고 영적인 전쟁은 주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마귀를 대적하여 내좇는 권세가 있음을 그가 정말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악한 영을 향해 꾸짖어야 합니다.
“이 더러운 영들아 우리 집에 가만히 들어와 부부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자녀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이 악한 영들아! 지금 결박을 받고 떠나갈지어다!”
성경 지식이 있다고 악한 영이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게 산다고 악한 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악한 영을 대적할 때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사울이 아주 강하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그랬더니 그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서 인도할 사람을 찾게 되었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그래서 서기오 바울 총독 뿐만 아리고 구브로 섬 안에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지금도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도 더욱 믿음 안에 서고, 그리고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담대하게 사도 바울처럼 영적인 권세를 사용하여 악한 영을 대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을 꾸짖어도 변화가 없다고 탄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말씀처럼 예수님 이름으로 저도 한번 대적해 보았습니다. 음란의 영아 떠나가라! 혈기야 내게서 떠나가라! 우리 가정에 있는 모든 불화가 예수의 이름으로 다 떠나갈지어다! 질병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게서 좇김을 당할지어다! 그런데 실제로 내게는 그런 역사가 안 일어나니 답답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박수 엘루마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여 그가 소경이 되는 역사가 나타나고 그래서 하나님 영광도 나타나는데, 나는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떠나가라! 좇김을 당할지어다! 해도 아무 역사도 안 일어난다는 분들이 있으십니다. 여러분, 이유가 간단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을 겉으로 흉내만 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전쟁은 소리 지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 소리 지른다고 영적 전쟁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사도 바울을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닙니다. 그 박수 속에 역사하는 악한 영에게 그저 소리만 지른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꾸짖고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선언한 것이 권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성경은 사도 바울이 성령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사단아 물러가라!” 고 소리만 질렀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온전한 예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자기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복음을 분명히 믿었고 그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과 선언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세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마귀를 제압하는 권세를 주셨는데 여러분이 분명한 십자가의 사람일 때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바울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나옵니다.
엡 3:14-19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우리들이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 주로 중보하는가? 대부분 가족들의 건강, 자녀의 성적 그리고 교회 부흥 등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엡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사도 바울은 속 사람이 강건하길 가장 우선적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영적 전쟁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속 사람이 강건한 것입니까?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엡 3:17)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것, 이것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열쇠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이 쫓겨난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귀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귀신은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역사를 이기려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 전에 이기심, 시기심을 십자가에 처리해야 합니다.
우상 문화의 핵심은 욕심과 이기적인 욕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박수 엘루마가 복음을 반대한 이유는 자기 이익을 잃어버릴 위기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도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우리 교회만 부흥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거나, 교회 예산을 주로 자기 교회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대외적인 봉사나 선교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 교회에도 할 일이 많고, 돈 쓸 일이 많은데.”라고 말하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기의 이권을 챙기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봉사를 해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만 하려 하고, 자기 부서가 더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 부서의 사업 예산을 서로 많이 확보하려고 다투는 일들이 다 이런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마귀가 실제로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온갖 더럽고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을 하라고 말한다면 따라 하겠습니까? 금방 긴장하고 대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시기심은 마귀의 역사인 줄 모르고 넘어갑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복음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심으로 나보다 더 열심히 더 헌신적으로 사역하는 사람을 막는다면 박수 엘루마가 복음을 방해한 모습과 같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전도사 시절 시골 교회에서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귀신을 내쫓는 것을 시도한 적이 있었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앞에 놓고 죽 둘러앉아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는데, 그래도 악한 영이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는데 시원찮게 믿고 있는 한 사람의 차례가 되니까 조용히 앉아있던 귀신 들린 사람이 갑자기 눈을 치켜뜨더니 너는 안 믿잖아!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그만 믿음 없던 이 분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분이 오 주여,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소리 지르며 엎드려 통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들린 한 사람 때문에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귀신 들린 자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대적할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귀신이 좇겨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오늘 말씀을 그냥 읽기만 하지, 이것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야. 그렇게 넘기지 ‘그래 맞아! 나도 만약에 악한 영의 역사가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지.’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분들은 이유가 하나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를 분명히 붙잡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영적인 대적 앞에서 자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귀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마귀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 마귀 밥이니까.
여러분, 박수 엘루마가 복음 전해지는 것을 가로막은 이유는 순전히 이기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 동안에 구브로 섬의 실질적인 지배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에게 얻어지는 유익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참 생명의 복음이 증거 되게 되면 자기 수입이 다 끊어집니다. 자기 권세가 다 사라집니다. 박수 엘루마의 유일한 관심은 자기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어떤 사람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가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욕심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약에 여러분 자신을 위해 사는 이기적이고 욕심의 사람이라면 마귀가 여러분으로부터 떠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영적인 권세가 있는 사람으로 인해서 귀신이 좇겨나간다 하더라도 그 귀신은 일곱 귀신과 함께 다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 먹이가 있으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 믿을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살아줍니까? 그러나 예수 믿고 나면 달라집니다. 예수 믿고 나면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말은 비참하게 살고 속도 없이 남에게 다 퍼주고 살고 자기는 가난하게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시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정말 믿어진다면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나를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사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데 하나님이 왜 나를 위하세요? 이제 우리가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배풀어주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건드리려고 해도 건드릴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데 어떻게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영적으로 계속 시달리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자아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죽지 아니하는 자아를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그렇게 피곤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예수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 생명이고 주님 되시니 마귀가 더 이상 나를 대적할 수 없고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권세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무서운 자아 추구, 이기주의,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승리하려면 이기적인 마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사는 삶이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마귀에게 당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내가 나를 위하여 산다면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능력이 사라지고 상처를 주고 또 받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은 망하라, 손해만 보라, 바보처럼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 더 이상 우리가 스스로를 위하여 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한 십자가 믿음에 설 때,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도 주님을 위하는 것이기 보다는 자가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교를 위해서 우리 것을 내놓으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위해서 우리 것을 내놓으라 할 때 순종하는 교회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다 퍼주고 다 나누어주고 나면 우리 교인은 어떻게 하라고!” 교회를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철저히 이기적입니다. 박수 엘루마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위원회와 부서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되어지는 것을 보면 무슨 예산 하나를 따낼 때도 자기 부서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부서만 잘 되면 하여튼 다 잘 된 거야.” 그것도 철저히 이기적인 것입니다. 교회 일이 잘 되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내가 그 일을 하느냐?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느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어야지. 나보다도 저 사람이 하면 이 일이 더 잘 될 것 같아.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면 나는 다른 일을 하면 되지 뭐. 그러면 교회가 더 잘되지 않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교회 안에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보다 내가 더 중요하면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적이고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이 가지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영적인 권세가 없습니다. 악한 영이 좇겨나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 중심이 마귀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성도 여러분, 악한 영이 역사하는 세상이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무섭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담대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상 문화, 악한 귀신 문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길을 주셨습니다.
흥분되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면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게 됩니다.
이제부터 예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여 악한 영들을 꺾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기도하실텐데, 여러분도 알지 못하게 시달리고 살았던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내 마음은 이럴까? 우리 가정은 왜 이럴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 주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귀에게 조롱 당하고 해코지 당하고 눌려지냈던 것이 있습니까? 주님, 제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마귀로부터 온 것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분별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이 시간에 놓임을 받게 해주시옵소서. 우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좌절이 없다! (행 13:42-52) (0) | 2022.01.06 |
---|---|
복음의 감격에 빠져라! (행 13:13-41) (0) | 2022.01.06 |
성령께서 인도하는 삶이 가장 복되다! (행 13:1-5) (0) | 2022.01.06 |
옥 밖에서는 잠 못 자고, 옥안에서는 잠자고! (행 12:1-12) (0) | 2022.01.06 |
[요한계시록 4강] (0) | 2022.01.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