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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을 원하십니까(빌 4:1-9 )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평강을 원하십니까
빌립보서 4:1~9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보면 '하나님의 평강' 또는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편지 서두에 성도들에게 꼭 평강을 빌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이 시간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기원합니다.

중세기 어느 수도원에 신부복을 입은 어느 낯선 구도자 한 사람이 찾아와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나와서 구도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낯선 구도자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바로 이 구도자가 저 유명한 {신곡}을 쓴 단테였습니다.


"평화를 찾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60억이 넘는 사람이 한결같이 찾고 있는 것은 평화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지식을 얻으면 평화로울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밤잠을 안자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평안할 것을 믿기 때문에 이윤의 추구를 위해서 전력을 기울입니다. 권력을 잡으면 평안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권모술수도 사양치 아니하고, 권력쟁취를 위해 눈에 불을 켭니다.


평안, 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 평안 아닙니까? 그런데 이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평안을 원하는데 평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평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주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환경과 조건이 주는 평안입니다. 돈이 많으면 평안하리라는 기대, 권력을 잡으면 평안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 "평안하시냐?"고 물어보세요.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불안합니다. 권력이 있으면 평안할까요? 가령 우리 나라의 경우 대통령은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평안할까요? 권력은 높은 자리일수록 불안합니다. 가령 대통령이 어디 가실 때 혼자 가시는 것 보셨어요? 정복, 사복 경호원 수백 명이 호위하고 다닙니다. 보기 좋으라고 그런 것으로 생각하세요. 불안해서 그럽니다. 여러분 중에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 자리에 나오신 분 계시면 한 번 손들어 보세요. 여러분은 다 평안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권력의 자리가 결코 평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피상적이며 일시적입니다. 그것은 환경이나 조건에서 오는 것이고, 또다시 환경이 빼앗아가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중심적이고 항구적인 평안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 주님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아무런 환난이나 재앙이 없다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라 미신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16장 마지막 절에 보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하시면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육신생활을 살펴보면 아무리 보아도 그가 결코 평안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마구간에 나시고, 어려서 애굽에 피난 갔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소년시절부터 수고롭게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전도하시는 동안에도 많은 수고와 핍박을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일생을 생각해보면 육신적인 면으로는 결코 평안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평안', 주님의 평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마음의 평안, 심령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이 평안이 어디에서 옵니까? 이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 오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며 주님과 함께 생활한 사람들은 이 평안을 소유했습니다. 이 평안이 참 평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해야 무슨 일을 해도 바로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해야 몸도 건강하고 좋아집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해야 부인들이 음식을 만들어도 맛이 있습니다.


엄마의 마음이 평안해야 아기가 젖을 먹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엄마의 젖을 먹으면 아기가 병이 납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해야 장사가 잘 됩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해야 공부가 잘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8절에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잠언 23장 7절에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되어 간다"고 말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사람의 일생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하루 종일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참된 것을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거짓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짓된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은 착한 일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밖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경건한 생각을 하게 되면 자연히 경건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늘 깨끗한 생각을 하면 깨끗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각을 하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평안하려면,






첫째로, 우리의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과 두려움, 염려로 가득찬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무슨 일에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생동력 있고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어보세요. 예외 없이 그들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거나 용기를 꺾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생각하는 데 따라서 달라집니다.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비관적으로,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얼마나 적극적인 생각입니까? 이 얼마나 힘이 솟는 말씀입니까?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엣 것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땅엣 것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평강이 없습니다. 사회과학인 심리학에서도 '자기암시'라는 말을 쓰는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기암시를 가질 때 평강이 임한다고 합니다. 만사는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평안을 누리려면,






둘째로, 우리의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의 감정을 잘 다스린 사람들입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인격이 파괴됩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친구와의 우의가 상합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가정이 깨집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교회가 갈라집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사업체가 무너지는 경우를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래 성격이 다혈질적이고 직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까 그의 성품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솔로몬은 잠언 16장 3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받을 때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다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잠언 26장 4절에 보면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비판을 받을 때 변명을 하거나 대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가르칩니다. 비판은 조용히 듣는 것이 현명하며 감정에 휘말리지 않도록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비판이 공평하면 고치도록 힘써야 되고, 비판이 불공평하면 듣지 않은 것으로 흘려버리면 그만입니다.


목사는 종종 교인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목사가 검은 양복에 검은 타이만 묶고 다니면 우리 목사는 장례식 집례만 하는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예 산뜻한 양복을 스포티하게 입으면 우리 목사는 영화배우를 흉내낸다고 눈이 둥그래집니다. 자녀가 하나뿐이면 우리 목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 말씀과는 상관없이 산다고 비난하고, 자녀가 다섯이나 여섯이 되면 '우리 목사는 주책스러워 애들만 낳아 고아원 원장 되려는가보다'고 걱정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심방하면 쇼맨십을 발휘한다고 하고, 부잣집을 방문하면 정치를 한다고 말합니다. 외부에 집회 인도 차 교회를 비우면 "자기 교회 양무리는 어떻게 하고 저렇게 밖에 나가 바쁘다"고 불평합니다. 그런 말 안 들으려고 여기 저기서 초청이 와도 모두 거절하고 일년 내내 본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웬 일이지? 우리 목사님을 초청하는 데는 아무도 없나봐'라고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목사는 말할 것 없지만, 목사의 아내는 억울하게 여자 교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목사의 아내가 화장을 좀 하면 "우리 목사님 사모님은 도깨비같이 화장을 한다"고 말합니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사모님은 촌 여자처럼 화장할 줄도 모른다"고 합니다. 옷을 좀 깨끗이 입으면 "우리 사모님은 사치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런 말 듣지 않으려 수수하게 입으면 뭐라는지 아세요? "우리 사모님은 우리 교인들 수준도 모르고 너절하게 입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목사나 그의 아내도 사람이기 때문에 감정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일입니다.


비판이나 비난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코끼리 한 마리가 거리에 내려옵니다. 모퉁이를 돌아오는데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렇다고 코끼리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개미를 위협하겠습니까?


미국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백악관에 있는 동안 말 많은 사람들이 소문 내기를, 링컨이 흑인 여자와 몰래 살고 있어서 그처럼 흑인 편을 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링컨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물론 그 말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링컨이 비열한 사람들과 싸우면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긴다고 해도 더러운 냄새를 풍기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안을 누리려면,






셋째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데 너무 열심이어서 고린도 교인 가운데는 바울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쳐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안하게,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전도서 9장 10절에 보면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을 품고 할 때 거기에 성취가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열심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나태하고, 부정적인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열심은 우리의 삶을 높이 추켜줍니다.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도 열심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의 3배 내지 4배의 일을 합니다. 열정 없이 이루어진 위대한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어떤 방면에서든지 성공한 사람은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사업을 위해 뛰어다닙니다. 예술에 성공한 사람은 그 예술에 심취합니다. 시간이 가는 것을 모르고 연습합니다. 어떤 방면에서든지 성공하려면 거기에 미쳐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 열정이 있을 때 두려움과 걱정을 몰아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평안하게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앉으나 서나, 걸으나 누우나, 자나 깨나 머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말하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교회를 향한 그 마음의 열심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내가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7~28)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걱정했습니까? 두려워했습니까? 초조해했습니까? 아닙니다. 거룩한 열정이 그를 삼켜버렸기 때문에 걱정과 번민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평안을 누리려면,






넷째로,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입니다. 내일은 약속 어음이기 때문에 오늘 사용할 수 없는 미래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라는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시편 118편 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올 때 걱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맙시다. 반대로 미래를 점치며 살지도 맙시다.


바울은 "뒤엣 것은 잊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살았습니다. 뒤엣 것은 분토같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빌립보서 3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현재의 기회와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 좇아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번에 한 순간을 사용할 수 있는 양(量)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매일 먹어야 할 양식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분의 식량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먹을 양식을 주셨고, 더 많이 거둔 것은 썩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자원은 오늘을 위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 주님의 경우를 보세요. 그분은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핍박과 죽음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예수님 가시는 길에 드리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슬픔이나 고통 때문에 오늘을 위한 평강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과 영광스러운 나타남을 기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라도 나타나시면 지금 하는 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는 현재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을 풍성하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을 붙드셔야 합니다. 리처드 박스터라는 개혁파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후회가 되는 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 남이 보는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데 절대로 시간을 소비하지 마십시오." 귀담아 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을 살아갑시다. 이 날은 주님이 주신 날입니다. 어제는 모두 도로 가져가셨습니다. 내일은 아직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고, 열심히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다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불안한 세상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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