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표징> 창17:1-16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동안 그에게 반복해오신 언약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신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나타나 말씀하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때로부터 24년 전, 즉 그가 75세였을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하란이란 곳에 머물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하시며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받아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되며 많은 사람을 위한 복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창12:1-2).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큰 민족을 이룰 씨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도 자손을 땅의 티끌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창13:16), 아브라함의 몸에서 상속자가 날 것이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뭇별 같이 많아지리라는 약속(창15:4-5)은 반복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징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기다리다 못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에게 있던 한 애굽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아이를 갖게 했습니다(창16:1-3). 그 애굽 여종은 그 다음 해에 아브라함의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창16:15-16). 아브라함이 86세 때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13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 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앞서 하셨던 약속들을 반복하셨습니다. 본문 16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아내에게서 아들 보기를 포기하고 있었고, 애굽 여종이었던 첩에게서 난 아들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아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17-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미 나이 구십이 된 아내가 어떻게 아이를 가진다는 말인가?" 생각하며 속으로 픽 웃고는 하나님께 대답하기를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전하고는 많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보다 구체적으로 주실 뿐 아니라 그 실현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말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19절에 보면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다짐하십니다. 태어날 아이의 이름까지 미리 지어주시며 약속을 재확인하신 것입니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번에는 예전과 다른 것은 그 언약이 보다 구체적이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구두약속을 넘어서서 이제는 실행단계로 접어든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첫 번째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새 이름을 주신 일입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확고하며 이제부터 그 실현이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옛 이름 아브람에서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에게만 아니라 그의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15-16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도 새 이름을 주신 것은 그들 부부 사이에서 날 아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더욱 분명하게 표명해주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함을 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히 누구를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의 존재와 인격과 삶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 이름을 준 사람의 소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 가지셨던 바램과 계획과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에 있는 대로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 주신 이름 아브라함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 아닙니까? 따라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새 이름을 받은 것은 이제 그의 존재가 바뀌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가족이나 한 부족의 중심인물에서 큰 민족,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복 받은 한 개인에서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하는 존재로 변모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새 이름을 주셨다는 사실은 그 동안은 말씀으로만 확인하고 반복하셨던 약속을 이제 이루기 시작하신다는 표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름에는 그 이름을 주는 사람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새 이름을 얻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이제 그에게서 이전의 삶과는 다르고 언약의 밖에 있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의 자세와 방식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영적 변화의 요구를 가시적으로 표명하도록 명하신 의식이 할례였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오늘 본문에서는 예전과 달리 구두약속을 넘어서서 실행단계로 접어든 것을 확인시켜주는 두 번째 사건이 바로 이 할례의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은 10절부터 14절에 걸쳐 비교적 길게 할례에 관한 명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아야 하며, 이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및 그의 후손들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고, 이 언약의 표징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그 당시 근동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관행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할례가 위생적인 고려에서 나온 의료행위이고 남자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음을 표하는 의식에 불과했으나, 아브라함의 자손에게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의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시고 그 신앙적 의미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할례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서 갖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할례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인치는 외적 표지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년으로 넘어가는 소년들에게 행하는 근동지역의 관행과 달리 태어난지 8일 되는 아기에게 행하는 이스라엘의 법은 할례가 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치는 의식으로서의 신앙적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할례는 이 세상 및 이 세상의 삶의 방식과의 단절을 결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훗날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며 보낸 세월 동안 할례를 다 잊어버렸다가 여리고 성 전투를 앞두고 여호수아에 의해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례를 받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할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백성들의 수치와 단절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할례는 하나님을 위한 삶의 헌신을 실천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할례는 얼마간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실제적인 헌신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하고 불변하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표징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언약을 세우신 후 그 언약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브라함이 새 이름을 받고 할례를 행한 그 이듬해 그의 나이 100세에 놀랍게도 91세 된 그의 아내 사라로부터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을 때입니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실행하시는 일을 25년이나 뒤에 시작하셨는가 하는 물음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정확한 답을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확실한 것입니다.
첫째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오랜 세월 속에서도 변함이 없으시듯이 그의 언약의 대상인 하나님의 백성 또한 하나님과 그의 언약과 그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변함없기를 원하셔서 오랜 세월을 두고 그들의 믿음을 지켜보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둘째는 아무리 인간적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실현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다음 해에 당장 후사를 주시지 않고 25년을 기다렸다가 주신 것은 더 확실하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의 놀라우신 능력 드러내시기를 기다리신 것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실현하신다는 절대적 신뢰를 갖게 해주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우리를 향해서 갖는 신앙적 의미를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신 사람에게는 그 언약의 표징으로서 세상으로부터의 성별된 삶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절대적 신뢰와 순종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이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몸에 행한 할례가 아닌 마음에 행한 할례가 그 표징으로서 우리에게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언약의 표징을 잘 간직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언약을 반드시 다 이루어주실 것임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혹 금년 한 해 동안 기도하며 서원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던 것들이 아직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주시며, 우리의 바램과 기대보다도 더 놀랍게 이루어주실 것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2002년이 3일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를 향해 하신 언약을 이루시는 때와 모양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확실하게 언약의 표징을 지니고 살았는지를 냉철히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 및 이 세상의 삶의 방식과 구별되는 삶을 살았는가? 우리에게서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의 냄새와 맛이 났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헌신된 삶을 살았는가? 우리는 그러기 위하여 이에 수반되는 고통을 얼마나 기쁨으로 감내하며 살았는가? 우리 몸에 얼마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는가? 이렇게 냉철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언약의 표징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새문안교회를 부르시고 복 주셔서 온 한국교회의 어머니가 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이름은 바꾸지 않더라도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기 위하여 그 언약의 표징을 분명히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년에는 한국의 어머니교회로서 이 땅의 모든 교회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복이 되는 교회로서의 발걸음을 보다 더 확실히 내딛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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