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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소통에서 삶의 교통에로(행 2:1-13)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언어의 소통에서 삶의 교통에로

행2:1-13

 

 

 

사도행전 1장의 기록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4-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8). 예수님의 이 분부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며(14)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드디어 그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약속이 이루어진 놀라운 광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가까이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에 약속된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의 임하심을 그곳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지와 더불어 갑자기 오셨습니다. 본문 2절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히브리어에서나 신약성경 헬라어에서나 한 단어가 바람과 성령의 두 가지 의미를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했지만 강한 바람이 급하게 불 때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 예를 들면 창문이 열린다든지 상이 흔들린다든지 하는 일들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고, 또 본문 자체도 정확히 읽어보면 바람소리라고 하지 않고 "바람 같은 소리"라고 했음을 볼 때 이것은 바람이 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귀에 들리도록 임하셨음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은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며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 한 예언(마3:11, 눅3:16)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불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곤 합니다. 모세가 목격한 불타는 떨기나무며 엘리야의 제물을 사르는 불이며 그를 하늘로 들어올린 불수레 같은 것들이 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가리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있던 그 자리에는 실제 불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는 것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상징적으로 눈에 보이도록 임하셨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던 것이나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한 것도 예삿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정말 새롭고 놀라운 것은 본문 4절이 전하는 현상입니다. 즉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6절에 따르면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고, 7-8절에 의하면 "말하는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인데 듣는 사람들은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잡다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각지로부터 온 사람들 사이에 모든 언어소통의 장벽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놀라운 사건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던 가운데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고유한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했다는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운 사건 때문에 흔히 간과하기 쉽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한 말, 즉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말로 들은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말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14절 이하에서 보듯이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하며 소리 높여 증거한 그 내용일 것이며,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본문 11절이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전하는 가운데서 보듯이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임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이가 누구시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신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확신을 얻은 제자들은 그 가슴벅찬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다 거리로 뛰쳐나와 그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유대인이건 예루살렘에 와있던 외지사람이건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닥치는 대로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성령의 두 번째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전하는 그 구원의 복음을 누구든지 자기의 고유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이 또한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약속입니다. 본문 5-6절에 보면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여와 있다가 제자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의 출신지역을 열거하는 9-11절 사이에서 언급된 지역들인 바대, 메대, 엘람, 메소보다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리비야,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 등은 가히 당시의 천하 사방 각지를 다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또 성령께서 임하신 것은 인간회복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상실을 가리키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언어의 불통입니다. 즉 의사소통의 단절입니다. 왜냐하면 말이 있다는 것은 인간을 타 피조물들과 구별되게 하는 중요한 차이점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 더 삶을 답답하고 짜증나게 하며 세상을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있어도 서로서로 사이에 말이 안 통하면 사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국말을 쓰는 우리 같은 국민들 사이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말이 안 통하고 여자와 남자 사이에 말이 안 통합니다. 이북사람과 이남사람 사이에 말이 안 통하며 영남 사람과 호남 사람 사이에 말이 안 통합니다. 국민과 정치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이 안 통하고, 여당과 야당 사이에도 말이 안 통합니다. 기업가와 근로자 사이에 말이 안 통하며 선생과 학생 사이에 말이 안 통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인간상실의 세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말을 쓰면서도 말이 안 통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세 가지 경우로 봅니다. 첫째, 자기중심적 사고와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봅니다. 같은 말을 쓰지만 속으로는 각각 서로 다른 계산들을 하고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문서답들을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둘째, 한 쪽이 진실하지 않거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봅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먼저 "나는 출마 안 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으로부터 선거운동을 시작하는 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에는 절대 출마하지 않겠다고 대국민선언을 밥먹듯이 하고서 대통령 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들이 그러니 범인들 세계에서야 더 말할 것 없지 않겠습니까? 속에 있는 생각과 반대되는 말을 해야 손해보지 않는다는 법칙을 몰랐다가 뒷통수 맞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세상이 왜 그렇게 꼬였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안 가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주질 않습니다. 오히려 "저거 틀림없이 갈거다. 가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 받겠다" 했으면 안 받겠다는 말로 들어야지 왜 "달라"는 말로 해석합니까? 바둑 두듯이 이 말 하기 위해서 포석을 몇 차례 깔고 맘에도 없는 저 말을 해야 하며, 자기가 그러니 남의 말도 그대로 안 믿고 몇 수를 뒤집어서 속생각을 읽으려고 머리들 짜며 삽니다. 그러니 온갖 억측과 엉뚱한 오해와 근거없는 소문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이 안 통하는 피곤한 세상입니다.

 

셋째, 서로가 말이 다를 때에는 누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면 되는데 통역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말이 안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하고 진실한 중재자는 없고 양쪽을 이간시켜서 오히려 자기 이득을 챙기려하거나 이간질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은 정말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런 불신사회가 아닌가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참으로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말을 쓰면서도 말이 안 통하는 소통장애의 시대, 인간상실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온갖 언어의 장벽을 해소시키시는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인간회복의 복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 사고와 욕심을 버리고 남을 배려할 줄 알게 해주며, 우리를 진실하게 해줌으로써 서로 믿을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말이 쉽게 통하는 편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게 해줄 유일한 중재자, 완전한 통역자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인간 스스로는 진정 말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말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 모두의 주인이 되시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 모두의 사고가 조율되지 않고서는 우리를 2중 3중으로 갈라놓는 언어의 장벽은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 사이의 언어의 장벽을 제거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우리는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성령께서 기도하며 기다리던 제자들에게 약속대로 임하셔서 온 민족 사이의 언어의 소통을 이루신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셔서 이 소통장애, 인간상실의 사회를 치유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를 창11:1-9이 전하는 바벨탑 이야기에 연관지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지구상에 민족도 하나고 언어도 하나뿐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그리고 또한 어떻게 그 많은 다른 언어들이 생겨나고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세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탑을 쌓기 시작했었습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것은 성탑이 하늘에 닿을 만큼 강대한 성읍을 건설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며, 하나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는 교만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행사를 옳지 않게 보신 하나님께서 취하신 조치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언어가 혼잡하여져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자 그들의 도시건설은 중단되었고 민족은 흩어졌다고 이 이야기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고 꾀하는 인간의 삶과 모든 행사는 그 가장 기초적인 언어소통에서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어소통에서부터 시작해서 함께 사는 공동체의 건설 또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가르쳐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 통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소통을 넘어서서 함께 삶을 나누는 데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단지 사람들 사이에 말이 통하게 했을 뿐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함께 모든 것을 나누는 삶을 이루는 데에로 나아갔음을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사도행전 2장의 끝 부분인 44-47절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가 주일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서 "성령을 믿사오며"에 이어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러한 삶의 나눔이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그렇습니다. 나이, 성, 출신지역, 학력, 직업, 경력, 취미, 가족상황, 소유정도가 다른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주님, 한 믿음, 한 소망을 소유한 가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서는 말이 통해야 합니다. 말이 통할 뿐 아니라 삶의 교통, 즉 나눔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인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이것을 성령께서 오셔서 이루어주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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