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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주인(마 12:1-13)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안식일의 주인> 마12:1-13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 두 가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논쟁이라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걸어온 시비를 일축하시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던 그들의 시도를 무산시키신 일입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은 일을 두고 벌어졌으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신 일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논쟁의 초점은 성전이나 제사나 안식일에 관한 법의 참 정신이 무엇이냐 하는 데에 모아지며, 그 논쟁을 통해 주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와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은 일을 두고 벌어진 시비를 살펴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바르게 지내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이라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는 어느 안식일에 목격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따르면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입니다. "잘라 먹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잘랐다"는 것은 이삭들을 "손으로 잡아 훑어서 뜯어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추수하는 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눅6:1에 따르면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삭을 껍데기 채로 그냥 먹을 수 없으니 껍질을 벗기기 위해서 이삭들을 두 손으로 비볐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도리깨질에 해당하는 행위로 여긴 것입니다. 이삭을 손으로 비빈 다음에는 알곡과 겨가 뒤섞인 채로 그냥 입에 넣었겠습니까? "후" 불어서 겨를 날려버리고 밀알만 먹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키질 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모든 행위를 바리새인들은 음식준비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먹을 음식준비는 그 전날 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 보는 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3-5절에서 보는 대로 두 가지 사례를 들어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반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3절과 5절에 보면 이 두 가지 사례를 드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러이러한 일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반복하여 반문하셨습니다. 즉 귀에서 귀로 말로만 전해져온 규정들을 근거로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실제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로 반박하신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이란 무슨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삼상21:1-6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사사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버리셨음을 알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다윗을 찾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은 바 있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쳐죽임으로써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어 있었으며, 온 백성들로부터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만이라"는 칭송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울로부터 시기와 핍박을 받게 되고 그의 살해위협을 피해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에게 쫓겨다니느라 굶주린 가운데 다윗 일행은 놉이라는 곳에서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을 맞게 된 제사장 아히멜렉은 비록 하나님께 바쳐졌던 거룩한 떡이고 제사장밖에는 먹을 수 없는 떡이긴 하지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국민적 영웅에게 양식을 제공하기를 거절할 수가 없어 다윗에게 진설병을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위에 대한 비난은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실 속에서 우리는 제사에 관한 규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규례를 정하신 하나님께서 택하여 그의 백성의 왕으로 세우시고자 기름 부으신 다윗과 그를 좇는 굶주린 무리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더 귀한 일이며,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돕는 일은 더 크고 중요하다는 사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6-7절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 사고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적용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성전과 제사에 관한 규례를 어기고도 정죄되지 않았다면 하물며 온 세상을 구원하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신과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관한 사람들의 규정에 거스르는 행위 때문에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예수님께서 밝히셨음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한 두 번째 사례는 무엇입니까?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일을 맡아 하는 제사장들의 예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 해야 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법이라면 하나님께 제사는 누가 드리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준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안식일보다 더 크고 존귀하신 분이시므로 안식일에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해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 자체가 무조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두 사례를 통한 대답 속에서 우리는 "다윗과 그의 무리들이나 제사장들도 그렇게 했다면 하물며 그들보다 더 큰 나와 나의 제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는 예수님의 반문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6절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하신 말씀은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한 것을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느니라"로 옮겨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많지만 궁극적 의미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 의미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하시는 일은 성전에서의 제사법을 정하시면서 하신 일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그 무리들의 허기를 채우시는 일이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는 일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일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준수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관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는 날이라는 데에,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날이라는 데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줌으로써 사람을 진정 안식하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복잡한 규정을 지키느라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으로 굶주림을 해결함으로써 안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느라고 쫄쫄 굶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프거나 몸이 불편해 고통받는 사람이 하루 한 시라도 빨리 낫고 평안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지, 안식일 때문에 사람의 고통이 한 순간이라도 연장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피해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여기서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을 구별되게 하는 것은 외형적 규정들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라기보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의 준수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단지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통한 하나님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복잡한 규정들을 만들어낸 후 그 규정들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안식일준수인 줄 알았던 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 뜻인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막2:27에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덧붙여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당신에게 안식일에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을 행할지를 정하고 명하고 행동할 자유와 권리가 없겠느냐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관한 그의 자유와 권리를 선언한 것이 본문 8절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주인이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지를 그의 뜻대로 정할 자유와 권리가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정하신 안식일준수의 최고의 법은 사랑과 자비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신 예수님께서 그 자유와 권리를 다시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신 사건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일입니다. 눅6:6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의 그 손이 오른손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그를 불편하게 하고 남 보기에 민망스럽게도 할뿐 아니라 생계를 어렵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 자기의 마른 손을 고쳐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대뜸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손 마른 사람도 가만히 있고 예수님도 아직 가만히 계시는데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에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것은 거의 그들이 예수님의 등을 떠밀어 병 고치게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고침을 받기를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증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눅6:7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오른 손 마른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또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공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는 무조건 아무 것도 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미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랑의 실천이라면 안식일에도 할 수 있고 또 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비난하고 예수님 자신을 정죄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했고 율법준수에 관한 형식적 규정들에만 매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인 사랑과 자비를 알지도 못했고 그것을 베풀 의지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분명하게 성전과 제사와 안식일에 관한 참된 가르침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1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을 품지 않으면 사람들을 정죄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밖에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대강절 가운데 있습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이는 알지 못하고 성전을 우상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며, 자비는 베풀 줄 모르고 제사에만 열중하는 죄를 범해서도 안되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알지 못하고 안식일만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안 계신 성탄절을 준비하고 기다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뿜어나지 않고 이 세상을 향해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탄절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모시고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길은 사랑이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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