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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여 복될 나라(창 2:7-17 )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순종하여 복될 나라> 창2:7-17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을 지으시고 그를 위하여 창설하신 에덴동산이 어떠했으며 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기록의 일부입니다. 먼저 에덴동산이 어떤 동산이었는지를 봅니다. 에덴동산은 "생명과 풍요와 행복의 동산"이었습니다. 본문 9-14절은 그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여기 9절에서 그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에덴동산이 생명의 동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14절에서 강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는 강들을 이루었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풍요로운 곳일 뿐 아니라 온 땅의 풍요로움의 근원이었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51:3에서 우리는 에덴동산에 관한 다음과 같은 묘사를 발견합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셨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이로 미루어 볼 때 에덴동산은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노래소리가 있는 동산, 곧 행복의 동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또 "자유의 동산"이었습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 하셨습니다. 본문 바로 뒤인 창2:19-2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아담이 원하는 대로 그 이름들을 주게 하신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온갖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명령이 지켜져야 그 모든 풍요와 행복과 자유와 생명이 지켜질 수 있는 동산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모든 자유를 주셨지만 단 한 가지 자유를 제한하셨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보는 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것이 그 유일한 자유의 제한이었습니다. 사람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 그 동산의 모든 풍요와 자유와 행복은 사람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근동지방의 문헌들 속에서의 "낙원" 또는 "신의 정원" 이야기들과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 사이의 차이를 보게됩니다. 즉 타종교들과 성경적 신앙 사이의 차이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에덴동산의 이야기와 흡사한 이야기들을 고대근동지방의 문헌 속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 9절에서 언급된 "생명나무"는 고대근동지방의 문헌 속에서도 발견되는 친숙한 주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은 고대근동의 종교와 문학 속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이집트문화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그 웅장한 피라미드들은 바로 죽음과 영생에 대한 관심이 고대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면모였음을 오늘날까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근동지방의 문헌들 속에서의 "낙원" 또는 "신의 정원" 이야기들과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 사이의 외형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을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그 차이점이란 고대근동지방의 문헌들은 생명과 풍요의 어떤 마술적 능력을 그 정원이나 거기에 있는 생명나무 자체에다 두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고대근동지방의 어떤 문헌에서는 정원에 있는 나무들에 보석들이 열리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그러한 사고를 잘 대변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의 나무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 자체가 어떤 마술적인 힘을 갖고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창3:5에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하여 사탄은 뱀을 통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정말 사탄의 말처럼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한다면 그 과일은 대단한 과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말을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먹음으로써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긴 뭐가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까? 그것을 먹고 눈이 밝아지긴 했으나 눈이 밝아져서 그들이 얻은 것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이었고(3:7),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기에 바빴던 것입니다(3:8-10). 그들은 그들의 죄를 감출 수도 없었으며, 하나님의 추궁 앞에서 남에게 책임전가나 하는 비겁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뿐이었습니다(3:11-13).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고달프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책망하시며 벌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한 마디 대꾸도 못하는 존재임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게 되었으며 평생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3:16-24). 창3:22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정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좋은 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에 불과합니다.

 

 

 

방금 우리는 고대근동지방의 문헌들은 생명과 풍요의 어떤 마술적 능력을 신의 정원이나 거기에 있는 생명나무 그 자체에다 두고 있는데 반해서,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동산이나 그 어떤 나무 그 자체에 신비적인 힘을 부여하고있지 않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차이점에 덧붙여 강조할 차이점은 고대근동지방의 문헌들 속에는 "생명나무"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언급은 성경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두 나무 사이에서 강조점을 "생명나무"에 두지 않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근동의 종교에서는 그 중요성이 두드러지는 "생명나무"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동산이야기 초반에 그런 나무가 있었다고만 언급되고 있고(2:9), 끝에 가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그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셨다고 언급되는 외에는 달리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련된 일들에 대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타종교들과 성경적 신앙 사이의 한 근본적인 차이점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생명나무"의 역할을 극소화함으로써 고대근동지방의 종교들과 성경적 신앙을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신비적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실제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자유의지 사이의 긴장입니다. 의미있는 삶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타종교들에 있어서 유일한 관심사가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장수와 생명의 영원한 연장 그 자체에 있다면, 성경적 신앙의 주관심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의미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타종교들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힘을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데에서 찾으려 합니다. 이에 반해 성경적 신앙은 영생을 하나님의 뜻과 그에 대한 순종 속에서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오늘 본문의 에덴동산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본래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영생하며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고 완전한 복락을 누리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생명과 풍요로움과 행복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이 세상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과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자유의 완전한 보장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뜻과 그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인간의 자유가 모든 불행과 재앙의 원인이며, 따라서 오직 순종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거하며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자유를 주시며 유일하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유일한 제한이 아니라 그 모든 자유에 대한 유일한 보장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보장을 경시하고 거부함으로써 인간은 모든 아름답고 복된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영원히 복되게 살 수 있는 나라로부터 쫓겨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며 기뻐하셨던 나라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행복을 누리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시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 위에서 순종의 본을 보이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나라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시는 그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가 순종함으로써 복될 수 있는 나라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 계시하시며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생명과 부와 자유와 행복을 하나님께 대한 순종 외에 다른 어디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이 인간의 가장 크고 근원적인 불행이며 원죄적 비극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홀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그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차버리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임을 깨우쳐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기를 원하셨고 또 기뻐하시는 나라는 순종함으로써 복되게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힘쓰며 그 뜻대로 살려고 애쓰지는 않고 그저 장수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기만을 원하는 천박한 신앙을 내던지고, 순종하는 믿음을 추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의 간계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으로 맞섬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의 본래자리를 지킬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시편 86편의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 노래합니다. 이 간구의 노래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순종합시다. 순종하면 모든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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