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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눅 2:25-38)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눅2:25-38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우리는 지금 대강절 셋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성탄절을 준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는 기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랜 세월 약속된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아기 예수에게서 그 메시아를 발견하고 그를 맞이한 두 사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여선지자 안나입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에서만 언급되며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중에 30년 후에나 사람들이 알아볼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를 미리 만나고 알아보고 품에 안기까지 하는 예외적인 특권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본문을 바로 앞서는 22절에 보면 예수님의 부모님들이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자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12장에는 아이를 낳은 여인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그 규례에 따르면 여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면 그 여인은 모두 사십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해지고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찬 것으로 여겨집니다(2-4). 또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아이를 낳은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야 하며, 만일 어린 양을 바칠만한 힘이 없을 때에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는 것이 그 규례입니다(6-8). 이 규례에 따라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난지 40일이 지난 아기 예수를 안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 40일 된 아기 예수를 시므온과 안나가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시므온은 본문 25절에 따르면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이사야가 사40:1, 51:12, 61:2에서 사용한 이후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문 25절은 또 성령이 시므온 위에 계셨다고 했습니다. 26절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아기 예수를 성전으로 데리고 올 때에 마침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감으로써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27).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단번에 그 아기가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28). 그는 그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확신했으며 이제는 그가 평안히 죽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29). 그는 그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임을 보았습니다(30). 그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32)일 뿐 아니라 만민을 위해 예비되신 분이요(31) "이방을 비추는 빛"(32)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모들에게 아기 예수의 장래와 그가 하실 일에 관해 놀라운 예언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33-35).






여선지자 안나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만 남편과 함께 살았고(36) 홀로 된 후에는 팔십사 세가 되기까지의 긴 세월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37). 그 끝에 그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할 수 있었습니다(38). 여기서 "예루살렘의 속량"이란 곧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안나는 그가 만난 아기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아기 예수를 만난 것은 단지 그들의 개인적 기쁨과 영광과 만족으로 그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태어난지 40일밖에 지나지 않은 아기 예수가 누구이신지, 또 무엇을 하실 분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온 백성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세상에 알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 한 시므온의 찬송이나 여선지자 안나가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한 모든 것은 억압과 토탄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모들에게 아기 예수의 신적 존재와 메시아로서의 사명에 관한 이해를 더욱 분명히 하게 함으로써 부모들의 교육과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자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했을 만큼 시므온의 말은 요셉과 마리아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백성과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언급되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두 사람,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각별한 은혜와 특권과 영광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로마제국의 압제와 수탈과 가난 속에 있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해방자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메시아를 대망하는 가운데 개혁운동을 벌이는 집단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메시아대망사상을 폭력과 무장투쟁으로 실현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때와 메시아를 보내시리라는 약속의 실현을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조용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조용하게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의롭고 경건한 삶 속에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귀한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대강절 때뿐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항상 그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의 바른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나라의 형편은 결코 밝은 것이 못됩니다. 온통 부정부패 투성이고 거짓과 속임수만 난무하는 듯한 상황입니다. 한쪽에서는 IMF 시절보다 더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IMF 시절 전보다 사치와 낭비가 더 심하다고 합니다.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가 하면 이에 따른 국민들 사이의 이질감과 반목과 불신은 더 깊어만 갑니다. 치정자들에 대해 갖는 실망과 배신감은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를 갈망하게 하며 진실한 지도자와 능력있는 치유자의 등장을 기다리게 만듭니다. 개혁을 부르짖는 인사나 단체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회에서나 교계에서나 개혁을 부르짖고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들 자신이 오히려 개혁의 대상일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무슨 사회·문화 개혁운동에 동참하고 재정적 지원까지 하라는 집요한 요청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팩스로 보내온 취지문에서 이 사회와 그 문화현상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얼마나 거칠고 섬뜩한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와 상관없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입니다. 그는 자기가 추진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을 자유와 권리가 그 누구에게나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 같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은 사고와 언행이 바로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또 사회나 교계의 개혁운동이 정말 순수하게 나라와 국민 전체를 위한 개혁운동이 아니라 일부 정파나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한 운동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위장된 개혁운동들 때문에 진정 "개혁"을 이루려는 운동들이 힘을 얻지 못하게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정말 개혁은 입을 벌리고 떠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입을 닫고 조용히 행동과 실천 가운데 변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통해 더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과 경건함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자신은 조금 의롭게 했다고 조금 경건하다고 여기며 남을 온통 비판하고 정죄하고 자기 생각대로 세상을 뒤집어엎겠다고 나서기가 오히려 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의롭고 경건하면서도 자기를 죽이고 오래 참으며 침묵하기가 훨씬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또한 자기 자신의 의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사람이나 세상의 논리와 경험과 꾀를 따르지 않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 세상을 변화시키시고 구원하시는 그의 일을 이루심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주님께서 오시고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해방과 자유와 치유와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 모두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참 기다림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의롭고 경건하며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오래 참고 조용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대강절에 이러한 삶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 모두 참되게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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