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께 받은 사명
요한일서 4:7~21
우리는 그 동안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사랑의 소극적인 면과 사랑의 적극적인 면을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놀라운 재능과 은혜, 기술과 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평생을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바쳤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삶은 아무런 보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가치와 성공을 결정지어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모를 수는 있습니다. 사도신경이나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외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닿는 거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없어지면 우리는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처량하고, 처참하고, 절망적인 동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명예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사실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실 쓸모 없는 사람이고,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실패작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불안해하고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의 삶은 풍성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다른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있다고 해도 그 인생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요한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어쩌면 사도 요한의 편지가 그처럼 논리적이고 설득력을 가지고 있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만 가지고 쓴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글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 반면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지마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의 주도권(initiative)은 하나님께 있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께 와서 말씀했습니다. "선한 선생님, 이 세상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때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이 서기관은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그러면 크고 둘째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이론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까닭은 이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계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계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소극적인 면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신명기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질투'라는 말을 쓰면 치사한 감정으로 여기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질투란 사랑의 다른 면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지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할 일이 없습니다. 저 옆집 아저씨가 바람을 핀다고 이쪽 집 아줌마가 밤잠 못 자고 질투한다면 말이 됩니까?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사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의 것은 변합니다. 지나갑니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집니다. 외국에 살다가 2∼3년만에 다니러 오신 분들의 말을 들으면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고 합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강산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얼마나 변합니까? 10년, 20년만에 만나는 사람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 것을 보고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니까?
두고 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농부가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의 농사가 아주 잘되어 예년에 볼 수 없었던 풍작이었습니다. 농부는 생각했습니다. '농사가 잘되어 이미 있던 창고 가지고는 다 저장을 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연구하다가 창고를 더 증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창고마다 곡식을 가득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이 농부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창고마다 곡식을 가득 가득 저장하였으니 너는 배부르게 먹고 마음껏 즐겨라."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내가 부르리니, 그러면 그 가득 가득 쌓아놓은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말씀에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농사의 풍작이 잘못이 아닙니다. 창고를 증축한 것이 죄가 아닙니다. 가득 가득 창고마다 쌓아놓은 곡식을 마음껏 먹고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 그것이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이 사람은 행선지가 분명했습니다: "아무 도시에 가서." 체류 기간도 확실히 정해 있었습니다: "일년을 유하며." 사업 목표가 뚜렷했습니다: "장사를 하여." 사업의 결과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리라." 그런데 한 가지를 몰랐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생명이 끝나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아랍 속담에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의에 주머니가 있으면 아마 다 집어넣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소유 본능이 있습니다. 가지려 합니다. 얻으려 합니다. 차지하려 합니다. 뺏으려 합니다. 누리려 합니다. 그런데 가져도, 얻어도, 차지해도, 뺏어도, 누려도 만족은 없고, 그것마저도 놓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세상 사랑하지 맙시다. 두고 가는 세상 사랑하지 맙시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적극적인 면으로 말씀 드리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 사랑의 표준을 "내 몸과 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기 몸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피곤하면 쉬려고 합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 찾습니다. 목마르면 마실 것을 구합니다.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고,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습니다. 아프면 병원 찾습니다. 오해 받으면 해명하느라고 도시락 싸 가지고 찾아다닙니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다 이웃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한 가족입니다. 우리에게는 촌수가 있습니다. 촌수를 보면 얼마나 가깝고 먼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촌보다는 오촌이 멉니다. 한 부모님 사이에서 출생한 형제 자매도 따지면 촌수가 있습니다. 형제 자매는 2촌입니다. 물론 형더러, 또는 동생이나 누나, 오빠더러 '2촌'하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도 따지면 촌수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촌수를 부르지는 않습니다마는, 촌수를 말하면 1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더러, 아들이 어머니더러 '일촌'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촌수 없이 가까운 이웃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부부입니다. 부부는 몇촌입니까? 무촌입니다. 촌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몸이 되었습니까? 사랑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좀 들으시기에 거북하실지 몰라도, 사랑 없이 한 몸이 되면 간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부는 사랑해야만 합니다.
성경에 "자녀를 사랑하라" 한 곳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사랑하라고 하지 않아도 자녀는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는 노엽게 하지 말라 했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라"고 한 성경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모는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사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은 피로 맺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부부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정은 세상에서 그 이상의 행복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의 그림자라고 해도 과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가정은 세상에서 그 이상의 불행이 없습니다. 지옥의 그림자입니다.
사랑하는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는 행복하고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사랑이 없이 싸움만 하는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는 불행하고, 사회에서나 학교에서나 문제아가 된다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의 배경을 조사해보면, 대개의 경우 그 부모가 언제나 불화한 가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마음 가운데 부모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고, 그러지는 못하지만 심지어 다투는 부모를 때려주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나는데, 학교에서 눈에 거슬리거나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마음에 뭉쳐 있던 것이 폭발해서 유리를 깨고, 책상을 부수고, 친구를 구타하는 행위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부부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행복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어떻게 표현됩니까?
사랑하면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상대방에게 허물이나 약점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면서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자세히 보세요.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상대방의 허물이나 죄가 자꾸만 눈에 보입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상대방의 허물이나 죄가 보이지 않습니까?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요사이 우리 한국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이혼 문제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 한국에서는 결혼한 가정의 3분의 1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혼은 서구사회의 문제였는데 이제는 우리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서양 속담에 "사랑은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고, 미움은 현미경으로 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깨끗해 보입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몇천 배, 몇만 배 확대해 보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보입니다. 제가 예배 드리러 나오기 전에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고 나왔습니다. 보세요. 깨끗하지요? 그런데 멀리서 보면 깨끗한 이 손을 현미경으로 보면 어떨까요? 육안으로 보지 못하던 것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으로 보십시다.
그리고, 사랑하면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수고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도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라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가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우리가 이런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 계명을 지키려면 힘들고, 짜증나고, 수고스럽고, 부담스럽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감격을 가지게 될 때,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짐이 되지 않습니다. 왜요? 내가 이렇게 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니까.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어떤 수고스러운 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그 수고가 짐이 되어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니까 자녀를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아름답게 운영되어 나아가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리고 성도들의 성실한 섬김 때문입니다. 각 분야에서 정성껏 섬기시는 모습을 보면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사로서 감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 봉사를 억지로 합니까? 땀을 흘리며 수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시니까 그것이 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 하반절에 보면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왜요? 사랑은 잘못을 회개하면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로 멀리 옮겨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잊으십니다.
이 사랑 닮은 사랑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못했어도,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빌면, 자녀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용서했으면 다 잊어버립니다. 혹시 또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빌면 "다시는 그러지 마!" 하고 용서합니다. 자녀가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구할 때 몇 년 전부터 잘못한 것까지 하나 하나 지적하면서 따지는 부모 없습니다. 용서했으면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잘못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일일이 따진다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 다 용서해주셨고 기억도 안 하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이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누구입니까? 교회의 직분을 맡은 분입니까? 얼마나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년수도 제자의 자격 요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자격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순절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편지를 쓴 사도 요한도 성격적으로 신경질적인 사람이었고,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불이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도 오순절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니까 이전의 성품이 완전히 변해서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주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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