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큰 믿음을 주세요(마 15:21-28)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큰 믿음을 주세요
마태복음 15:21~28


한번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지 모릅니다. 잠시 쉬실 만한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타나서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습니다." 이 여인은 간절한 요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딸이 귀신에게 시달리는 것이 너무 보기에 안타까워서 예수님을 찾아와 소리 지르면서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아도 같은 기사가 있는데 이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그저 인종적인 명칭으로 가나안 여인이라고만 했습니다. 유대인 이외의 족속들을 그저 막연하게 부른 것입니다. 수로보니게는 이 여인이 살고 있는 지방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 말은 수리아 지방의 뵈니게 출생이란 뜻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뵈니게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해서 아주 좋지 않는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소위 클레멘트서한에 의하게 되면 이 여인의 이름이 밝혀져 있는데 쥬스타라고 하는 여인이었고, 이 여인의 딸의 이름은 비어니스라고 했습니다. 역사가 죠세프소는 이 여인의 딸이 뵈니게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여인의 딸이 귀신이 들려서 아주 어려운 형편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능력 많으신 예수님은 무엇이던지 사실 수 있는 분, 못 고치는 병이 없으신 분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구한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습니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에 대한 호칭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 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습니다. 같은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데리고 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서 말하기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란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여인이 벌써 이방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했던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인 것을 모를 터인데 이 여인은 벌써 알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메시야에 대한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전파되어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쫓아오며 안타깝게 자기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알고 있던 그런 분과는 너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보시면 당장 고쳐 주시는 분이였습니다. 저녁이 되어도, 끼니에 대한 대책이 없는 무리를 보실 때 목자 없는 양처럼 민망히 보시고 기적을 행해서 배불리 먹게 하고 열두 광주리나 남게 하셨습니다. 맹인들이 소리칠 때 그들을 불러서 고쳐 주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동정심이 많으신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이 그렇게 소리치며 따라와도 못 들으신 것은 아니실 것인데 이상할 정도로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반응도 없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가나안 여인의 부르짖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가령 와이스같은 분은 '유대인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도 고쳐 주어야 하느냐 하는 것 때문에 주저하셔서 한 말씀도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카르라는 분은 '이 여인의 믿음을 더 깊게 하기 위하여 시간을 끈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했습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의 추측이 다 맞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님의 침묵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 크게 하는데 결정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이 보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의 믿음을 향상시킬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저 유명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기억합니다. 그 아들 어거스틴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를 신봉하고, 세상에서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볼 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로서는 아들 어거스틴이 그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며 눈물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10년이 넘게 하나님께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 어거스틴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낙심했습니다. 한 번은 너무 속이 상하고 안타까워서 자지 교구의 암브로스 감독을 찾아가서 아들의 심령을 위해 호소하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신부님, 제 아들 어거스틴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리신 것 같아요, 제가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제 아들의 심령을 위해 기도 드렸지만 하나님은 제 기도에 아무런 응답이 없으십니다. 제 아들이 돌아오기를 10년이 넘게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오히려 더해 가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면서 신부 앞에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습니다.


이 때 눈물을 흘리며 애타는 심정으로 호소하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암브로스 감독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자매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낙심하지 마세요.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아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암브로스 감독의 격려의 말에 힘을 얻은 모니카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 결과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고 우리 기독교 역사상 빛나는 인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타게 간절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물론 내 욕심을 위해 잘못 구하는 것이 있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잠히 침묵을 지키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가나안 여인처럼 우리는 계속 간구해야 합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신데 이 여인은 계속 부르짖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예수님을 수행하던 제자들이 시끄럽고 귀찮게 여겨져서 예수님께 "선생님, 저 여자가 아까부터 와서 저렇게 계속 소리 지르는 데 이거 도무지 시끄러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뭐라고 한마디 말씀하셔서 돌려보내면 좋겠습니다."고 제의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중한 태도에 비해서 제자들은 대조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귀찮게 생각해서 빨리 돌려 보내자고만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의 의미는 첫째 단순하고도 무관심한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유대인에게 국한되고 이방인을 완전히 도외시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0장 16절에 보면 다른 면도 없지 아니합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이스라엘을 대하는 예수님의 열렬한 사랑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는 먼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마는 이스라엘이 종래 배척하므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에 말씀한 대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은 이방인"의 공도가 확립된 것입니다.


이 경위를 변증하는데 오늘 주신 말씀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을 들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낙심하고 물러 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나는 유대인이 아니니까 저분하고는 상관없지. 내가 공연히 시간만 낭비했지." 하면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멀리서 소리 지르다가, 이제는 더 가까이 와서 절하면서 애원했습니다. 제자들의 냉대에도 이 여인을 물러서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무관심해 보이는 태도도 이 여인의 열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에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전에 '한나'라는 여인은 어린애가 없어서 하나님의 성막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통곡을 하며 하나님께 소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가 얼마나 간절하게 열심히 기도했던지 성막을 책임지고 있는 엘리 선지가 와 보니 꼭 술취한 여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더러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한나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인입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고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입니다.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아서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이런 냉대를 받으면서도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 간청했습니다. "주여, 저를 도와 주세요. 저를 도와 주세요." 미친 듯이 애원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처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관념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주일에 예배하러 나오신 분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아마 흥분하고 격분하실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삿대질을 하며 달려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실망해서 돌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 목사가 미친 것 아닌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보세요. 예수님께로부터 이처럼 천대와 무시를 당하면서도 조금도 불쾌한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드리며 "주님, 옳습니다. 저는 사실 개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 개도 주인의 상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그 부스러기를 좀 주세요." 이 여인은 겸손과 기지 그리고 인내의 미덕이 조화된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오해할 수도 있고, 시비할 수도 있고, 반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오히려 개로서 족했고, 당연한 권리에서가 아니라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는 겸손과 간절한 그리고 부스러기만 가지고도 넉넉하겠다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낙심하거나 후회할 줄 모르는 인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건전한 신앙에는 이런 미덕이 갖추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트렌취의 말처럼 "야곱이 밤을 새우면서 씨름하여 얻음 힘을 이 여인도 얻은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밤새 씨름을 했습니다. 날이 밝아 올 때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이제는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나를 축복해 주지 아니하시면 내가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의 경우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애는 오히려 이 여인의 믿음이 깊어지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 여인의 첫 번째 청원은 예수님께서 침묵으로 대하셨습니다. 두 번째 청원은 냉정하게 개처럼 취급받았습니다. 세 번째 청원은 격찬으로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절하면서도, 열렬하면서도, 겸손하면서도 끈질긴 믿음에 대하여 크게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여인에게 하신 칭찬 같은 것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칭찬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소원대로 되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이 여인의 딸은 무서운 귀신이 들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렇습니다. 믿음과 축복은 정비례합니다. 크게 믿으면 큰 축복 받습니다. 작게 믿으면 작은 축복을 받습니다. 아무것도 안 믿으면 아무 축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말하자면 상수도 파이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수원지에는 축복의 생수가 무진장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파이프를 연결하느냐 하는데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의 생수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가령 주사 바늘만큼 가느다란 파이프를 하나님의 축복의 수원지에 연결했으면 그 파이프를 통해 그저 졸졸 내리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쁨도 감사도 만족도 찬송도 승리도 없이 살아갑니다. 오히려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한숨 속에서 불행하게 삽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름드리 수도 파이프를 연결했기 때문에 축복의 생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러므로 큰 믿음 가지고 사는 사람은 감사와 감격, 기쁨과 찬송, 전진과 승리의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큰 믿음 가지고 큰 축복 받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말씀했습니다. 큰 믿음 가지고 입을 넓게 여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넓게 열린 입에 채워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두 친구가 낚시를 갔습니다. 고기가 잘 물렸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월척 되는 큰 고기가 잡히면 물 속에 다시 놓아주고 손바닥만한 것이 잡히면 준비해 온 구럭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을 본 다른 친구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낚시 할 때는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예의여서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궁금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까 내가 보니까 자네는 큰 고기가 잡히면 물에 놓아주고 작은 것만 잡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 그 친구 하는 말이 "글쎄, 우리 집에는 프라이팬이 작은 것 밖에 없어서"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데 우리의 믿음의 그릇이 작아서 이 큰 축복을 포기하는 적은 없습니까? 믿음의 큰 그릇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변화하신 모습을 보여 주신 후 산에서 내려오시는데 큰 무리가 둘러서 있고 제자들과 어떤 사람이 시비가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냐?' 고 물었더니 어떤 사람이 나오면서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데려 왔습니다. 이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몸은 날로 파리해 갑니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고 했더니 해 보자고 말은 했어도 애를 고생만 시키고 아무런 진전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혹시 하실 수 있거든 좀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정색을 하시고 아이 아버지 에게 "할 수 있거든 이란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아이 아버지가 소리지르며 말했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내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예수님은 그의 신앙을 확인 하신 후에 그 아이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큰 믿음 가져서 주님께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듣기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