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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장들의 믿음은(히 11:13-22)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족장들의 믿음은

히브리서 11:13~22

 

이미 봉독한 말씀 가운데서 히브리서 11장 13∼16절을 다시 받들어 읽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였느니라."

 

이것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의 믿음을 한마디씩 언급했습니다. 비록 짧은 말의 표현이지만 깊은 내용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오늘 주신 말씀 17∼19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믿음을 가졌던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생애 속에서 힘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바치라" 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혹독한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병이 나서 앓다가 죽어도 앞이 캄캄한 일인데, 살아있는 건강한 아들을 바치라 하는 것은 인정으로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엄청난 시련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내 아들을 다시 살리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이런 시련을 허용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을 괴롭히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 나무를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그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사랑하는 아들을 내려치려 할 때, 바로 그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다급하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내가 네 심정을 알았다. 너는 이미 네 아들 이삭을 내게 바친 것이나 다름없어. 이젠 됐어" 하시면서 이삭 대신에 수풀에 걸려 있던 양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험, 테스트였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 이하를 보면 오늘 주신 말씀의 역사적인 맥락을 형성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평생 사는 동안 많은 시험을 당했습니다. 더러는 실패를 했고 더러는 통과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시험은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서 마지막, 그리고 가장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하신 후에 이제는 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에게 이 큰 마지막 시험을 내리셨습니다.

 

시험은 힘이 든 것입니다. 쉽다면 시험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시험이 아닙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에게 초등학교 3학년의 문제를 시험으로 낸다면 그것이 시험일 것이 없습니다. 아니면 대학교 3학년 문제를 낸다 해도 시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에게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치를 수준의 시험을 내립니다. 그래서 시험을 통해서 실력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볼 때 정말 힘들어 보이는 시험이 내게 임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 정도의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셨구나' 하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인생이 크게 성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험을 통과할 때 승리의 원동력이 된 것이 바로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이 부활신앙은 '내가 죽은 후에 예수님이 오시면 내가 다시 살아난다'는 미래 적인 소망을 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용기 있는 결단과 능력을 갖게 하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의 선을 넘어선 사람은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었습니까?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온실 안의 꽃처럼 자라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들판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핀 야생화처럼 힘이 있고 건강한 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폭풍우와 같은 시련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언제나 유치원생으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위험과 죽음이 있는 전선에서 눈에 불을 켜고 포복을 하는 용감한 병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포탄이 날아가는 하늘 밑을 기어다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목적으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시험의 바다와 광야에서 이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던 부활의 능력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그 능력이 지금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은 죽음의 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망이 왕 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죽음이 인간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죽음보다 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이긴 부활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힘으로 산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쓰러졌던 사람이 다시 일어섭니다.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섭니다.

 

그렇게 겁이 많던 베드로가 어떻게 그처럼 담대해졌습니까? 엠마오로 맥없이 가고 있던 두 제자가 어떻게 그처럼 용기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부활의 신앙은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모든 시련을 다 극복하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시련이 아브라함이 당한 것보다 더 어렵습니까? 부활의 신앙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최선의 것을 드리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독자 이삭을 바쳤다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바쳤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최선의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최선의 것을 드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오늘 주신 말씀 20절은 이삭의 믿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한다" 하신 것은 전혀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믿고 이삭은 야곱을 축복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단순히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야곱을 먼저 축복하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에서가 장남이기 때문에 에서에게 축복하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곱을 축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삭이 사람의 생각대로 그렇게 관철하기를 원했지만, 그의 뜻은 산산조각이 나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 엄숙한 순간에 인간의 뜻이 무모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잠언 16장 9절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습니까? 아무도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삭은 육신의 뜻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커다란 교훈을 비로소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8장에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그의 임종을 앞두고 한 번 더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번에는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서 정식으로 축복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삭이 한 번은 실패했으나 그는 배웠습니다. 인간의 뜻이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모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위대한 것을 알았습니다.

 

이삭은 그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그의 자녀에게 축복했습니다. 그 자녀들이 받을 축복의 내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고, 그의 생전에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가망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었기 때문에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축복한 것입니다. 아마 이삭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죽을 때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꿈이 실현되기 전에 아마 내가 죽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며 모래알처럼 많아져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고, 내 후손 중에서 이 세상의 구주가 나실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가 약속하신 것을 어기시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이삭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이삭은 절망하지 않고 소망 중에 죽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죽음을 넘어섰습니다. 이삭의 믿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인생의 석양에서도 이 믿음 때문에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그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이삭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신 일을 이루어 가실 줄로 믿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이성이나 철학에 근거하여 믿음을 소화하려 한 적은 없습니까? 우리의 주장이 깨어지는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 깨어짐이 없이는 아무도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깨어져야 이삭처럼 변화가 찾아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의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오늘 주신 말씀 21절에서는 야곱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야곱은 믿음 안에서 죽었고, 믿음으로 축복했고, 믿음으로 경배했습니다. 야곱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신앙이 간증되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생애에 많은 난관을 뚫고 실패와 약점을 넘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았고,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그의 삶의 성숙은 옛 성품과 새 성품의 갈등을 이기고 그의 인격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들면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다가 믿음 안에서 죽어간 야곱의 삶은 확실히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도 힘들지만, 믿음으로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절대로 갈라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산 사람만이 믿음으로 죽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장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저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평안한 잠을 가져다주듯이, 잘 보낸 일생이 평안한 안식의 죽음을 선물한다"고 말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살아가는 동안에 넘어졌습니다.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만이 믿음으로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을 가졌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이 죽을 때에 각 아들에게 축복했다"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48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며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요셉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정정하려 했지만, 야곱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안다. 내가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에 찬 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사람의 생각을 부인했습니다. 신앙의 성패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과 그 뜻에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여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47장 27절 이하에 보면 야곱이 자기가 죽거든 애굽이 아닌 가나안땅에 장사지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는 사실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애굽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가나안 땅에 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땅을 약속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애굽 땅에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 묻히기 원한 것은 향수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약속의 땅은 그가 가야 할 땅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마지막 장면을 보세요. 지팡이 머리에 몸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경배하며 최후를 마쳤습니다. 여러분, 어차피 한 번은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어떻게 이 세상을 마쳤으면 좋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갔으면 좋겠습니다. 야곱의 마지막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는 예배드리다가 갔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야곱의 생애를 뒤돌아보면 그의 젊은 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목표를 한 번 세우면 안하고는 못 견디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렇게 세상과 자기밖에 모르던 야곱이었지만 인생의 석양이 가까워올수록 하나님의 역사하심 안에서 아름다운 인격으로 다듬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3장 14절에 보면 야곱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이 자기 자식들을 바로가 있는 애굽으로 돌려보내면서, 그것도 사랑하는 막내 베냐민이 볼모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한 말입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

 

지금까지의 야곱은 무슨 일이든지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인 포기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라고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믿으면 하나님께 맡기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야곱은 이전의 인간적이고 비신앙적인 방법을 버렸습니다. 야곱은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야곱의 믿음을 배워야겠습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11장 22절에 요셉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한마디로 드라마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극적인 요셉의 생애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요셉은 역경에서나 순경에서나 한결같이 하나님께 성실했습니다. 그는 고향에서나 타국에서나 성실했습니다. 젊어서도 늙어서도 한결같이 주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히브리서를 쓴 이는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신앙의 본질을 말할 때, 지금까지의 요셉의 생애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단지 요셉의 죽음의 장면에서 그의 신앙의 특성과 우리에게 가르쳐줄 신앙의 교훈을 찾았습니다.

 

사람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합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 청년시절, 장년기를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임종시에 그의 믿음은 더욱 아름답게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했습니다. 이때 요셉은 애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 후손들에게 애굽에 머물지 말고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날 것을 말했습니다. 왜 애굽을 떠나라고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알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굽을 떠나라는 요셉의 유언은 그의 직계 자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전체에 대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관심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민족이란 공동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요셉뿐만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다 그랬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범주를 넓혀야겠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나 자신만 아니라 내 가정, 내 교회만 아니라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한 관심이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믿음으로 자기의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애굽에 장사지내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시온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애굽에 묻히지 않고 가나안을 향해 가는 요셉의 장례행렬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살다가 그가 누렸던 모든 영광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그 말씀을 믿고 떠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는다면 가정과 직장, 그리고 이웃에게 내가 믿는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는 나의 구주십니다. 그는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예수는 당신의 구주십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증거해야 불신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요셉은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고, 마지막 죽음을 통해서도 그가 믿는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믿음의 선진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 가졌던 믿음을 다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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