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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새벽기도.설교 (시편 42편)

by 【고동엽】 2021. 11. 27.

주현절이 2월 29일 주일까지 계속 됩니다. 지금은 주현절, 교회력으로 말하면 주님이 새 출발을 허락하신 은총에 감사하는 절기가 2월 29일 주일까지 갑니다. 2월 29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2월 29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는데 4월 4일이 종려주일입니다. 4월 4일 종려주일부터 1주일간은 수난주간이라고 말하죠. 4월 11일이 부활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일산두레교회는 오늘부터 2월 29일 주간까지 시편에는 5편이 있거든요. 시편도 모세 오경처럼 5편으로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1편부터 41편까지 42편부터 72편까지 73편부터 89편까지 이런 식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42편부터 72편까지를 사순절 기간 직전까지 하려고 합니다.

 

시편 42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독합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누가 지었는가 보시길 바랍니다. 고라 자손이죠? 고라 자손은 성전 예배를 지도하던 지도자입니다. 성전 예배를 지도하던 지도자들이 고라 자손인데 지금 어디에 가 있냐면 북쪽 국경에 추방당해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릅니다. 그는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유배지에 살고 있습니다. 근데 그는 옛날에 예배를 지도하던 지도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예배를 지도하던 그 영적 지도자가 영적인 헌신된 일꾼이 저렇게 몰락해서 성전으로 나오지 못하고 저 헬몬산, 이스라엘 국경의 끝에 가서 유배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손가락질 합니다. 어떻게요?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그래서 이 말이 어떻게 했냐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 대적은 내 바깥에 있는 대적일 수도 있고 내 마음에 있는 대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추방당한 유배당한 영혼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의 말을 듣지 못하고 추방당한 사람처럼 살 때 즉 환경이 나를 하나님께 징벌 받아서 유배당한 사람처럼 대우할 때 이때 우리는 대적의 비방하는 말이 우리를 찌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먼저 숫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여러분 숫사슴은 원래 요엘서 1장 20절에 보면 숫사슴이 원래는 산에서 물을 다 해결하죠? 여러분 산에 왜 골짜기가 있는지 아시죠? 시편 104편을 보면 산에 골짜기가 있는 이유는 동물들을 하나님이 물 먹이기 위해서 그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등산을 많이 다니면 야생동물이 엄청나게 위험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야생동물이 위협을 당합니다. 숫사슴이 너무나 갈급하기 때문에 인간의 거리로 뛰쳐나올 때가 있습니다. 숫사슴이 죽을 각오를 하고 뛰어나올 때 그게 바로 숫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헐떡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를 찾는다는 말은 뭡니까? 성전 예배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전 공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고 내가 언제 생존하신 하나님, 생존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 공예배에 나타나신 그 하나님을 언제 다시 뵈올꼬. 지금 이 분은 이 시편의 고라 자손은 하나님의 이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지 못해서 은혜를 오랫동안 받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시냇물 같은 생수의 말씀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사랑의 확신 속에 거해보지 못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마음은 추방당한 영혼입니다. 그래서 언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올꼬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후렴구가 끼어듭니다.

 

3절부터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여러분 이 말뜻을 잘 아시길 바랍니다. 음식을 먹으면 어떤 효과가 나요? 힘이 나죠? 눈물을 흘리고 나면 힘이 난다는 말이죠? 슬픔의 힘으로 이 모든 대적의 말을 견뎠다. 여러분 너무 슬프기 때문에 슬픔의 힘으로 대적의 비방하는 말을 견뎠다. 내가 울고 날 때마다 힘이 났습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슬퍼서 눈물을 쏟고 다니면서 힘이 났습니다. 눈물이 제 버티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음식으로 버티지 못할 때 슬픔의 힘으로 버티게 하기 위해서 눈물을 주셨습니다.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고 내 에너지, 나를 지탱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시편 57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제가 흘린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아주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눈물로 내 음식을 삼으면서 슬픔의 힘으로 견뎠습니다. 주님 제 슬픔을 보십시오. 제가 옛날에는 무리를 동행하여 큰 소리로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성가대 지도자였으며 또한 예배 인도자였기 때문에 큰 기쁨의 찬송 소리를 발하여 하나님 집으로 제가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생각하니까 더 내 마음이 아픕니다. 사람들은 내가 공예배 지도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헬몬과 요단땅 이 근처를 배회하면서 하나님 집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5절입니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이때 내 마음과 영혼은 같은 겁니다. 내 영혼아 내 속사람아 이런 말입니다. 내 속사람아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아. 내 영혼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내 본질적인 숨어있는 자아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내 가장 깊은 은밀한 자아를 가리킵니다. 내 속사람아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는 가면 너머에 있는 내 본질적인 사람아 내 핵심적인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이 말은 어찌하여 고개를 숙이며 얼굴빛을 검게 하는고. 이게 노래였기 때문에 이게 인간 속에 이런 슬픔의 음식으로 자기가 노래하고 나서 또 한 번 자기를 격려하기 위해서 또 이렇게 후렴구를 집어넣고 또 슬픔을 이야기 합니다. 일종의 무슨 현실입니까? 음악에서? 음악에서 이런 현실 있죠? 현실적인 슬픔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짧은 삽입 구문을 넣어서 자기를 격려하다가 또 가고 이런 식으로 계속 가는 겁니다. 우리도 찬송가 가사에 보면 461장 찬송에 이렇게 갔다가 제일 마지막에 가면 오 맑은 바다라 이렇게 끝납니다. 또 한 번 모진 바람 이렇게 나가고 또 그 다음에 맑은 바다라 이렇게 나갑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의 곡조 다음에 자기를 격려하는 축복하는 멜로디를 집어넣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이 말은 뭡니까? 너무 마음이 슬플 때 즉시 어떤 신령한 후렴구가 떠올라야 된다는 말입니까? 후렴구라는 말은 뭐에요? 모든 노래의 끝에 항상 반복하는 것이 후렴구죠? 여러분이 암송하고 있는 요절은 뭡니까? 후렴구와 같은 겁니다. 슬픔과 비탄의 장조 다음에 또 후렴구가 나와서 여러분 영혼을 격려하는 겁니다. 이게 후렴구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그 얼굴의 도우심을 바라라는 말은 어디에서 얼굴의 도우심, 구약성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얼굴빛을 내게 비추사 내게 평안주시기를 원하노라 어디에 나와요? 누가 하는 말입니까? 민수기 6장 22절 펴 보세요. 이게 바로 고라 자손같은 제사장들이 일반 평신도들에게 축도할 때 하는 말입니다. 축도 본문입니다. 민수기 6장 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여기 평강 괄호하고 번영을 주시기를 이런 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아침에 여러분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얼굴을 드시사 여러분에게 평강과 번영과 건강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얼굴을 숙이고 고개를 숙여서 기죽어 의기소침 가운데 빠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얼굴을 들어주시고 네 얼굴을 숙이고 있느냐 왜 네 은밀한 속사람아 너는 왜 그렇게 의기소침한 가운데 있느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의 도우심 얼굴빛을 내게로 향하시사 얼굴빛으로 내게 번영을 주시기를 바라고 치료를 주시기를 바라고 희망을 주시기를 바란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이 일을 지도했던 그 찬양대 지도자에게 네가 바로 이렇게 축도를 하지 않았느냐 그 축도 본문을 네게 적용시키기를 바란다 그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라고 자기에게 다그칩니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 낙망을 이기는 이 자기 격려 구문이 후렴구처럼 오늘 하루 종일 여러분의 입가와 영혼에 맴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너무 좋은 겁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 것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기도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실 불안해하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이 기도가 응하는 겁니다. 불안의 정체를 모르고 나는 불안하지 않다 자기를 막 암시하면서 나는 불안하지 않다 이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이 시편이 별로 도움이 안 되고 불안 자체를 알고 찌르는 대적의 말을 비방하는 말을 실제로 현실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게 슬픔의 눈물은 힘이 되고 그 찬송의 후렴구는 그 영혼을 북돋는 자기 격려 구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또 슬픔이 나옵니다. 6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 번 자기 격려 구문으로 자기를 북돋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죠? 실컷 내 얼굴을 찬송하리로다 그래놓고 또 다시 뭐가 나오냐면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 전부 다 북쪽에 있는 산입니다. 국경의 마지막, 하나님 산자의 땅 마지막에서 제가 배회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헬몬산의 만년설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이렇게 추방당한 사람처럼 그런데 주님 저의 환경을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폭포소리, 주님의 폭포소리가 저를 책망하는 것처럼 보이고 주님의 파도와 물결은 나를 음모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것은 요나의 경험입니다. 주님의 파도와 물결이 나의 영혼을 침수시켰습니다. 즉 누가 보더라도 나의 한계는 주님의 진노 아래 주님의 불쾌하심을 내가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주님의 폭포소리와 파도 소리가 나를 침수시켜 버렸습니다. 누가 보던지 나는 하나님께 지금 은총을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한 마리 새와 같습니다. 그래서 8절에 또 자기 격려 구문이 나갑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여러분 보십시오. 밤과 낮이라는 말은 물리적인 밤과 낮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잘 경험할 때는 낮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음의 물결과 파도 소리에 놀라는 영혼의 밤에는 뭘 불러야 합니까? 어떻게 영혼을 지탱시키죠? 그 찬송으로 그 영혼의 밤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여러분 그러므로 거룩한 후렴구를 가지고 일상생활의 낙망을 스스로 치료하는 것이 찬송의 권능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오늘도 여러분 찬송의 권능을 드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또 다시 자기 격려가 옵니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여기 반석이라는 말은 흔들리는 자기 자신에 비해서 절대로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이 시편 시인의 마음은 이렇게 바뀝니다. 주님의 파도와 물결 소리 옆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그런 슬픈 마음으로 한 번 울었다가 또 주님의 파도소리, 영혼의 밤을 맞이해서 차가운 밤바람 앞에 하나님의 은총이 다 했는가 하나님의 자비는 나에게 끝났는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슬퍼하다가 흔들리는 가운데 있다가 내 반석이신 하나님 결코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슬프게 다닙니까 이게 바로 영혼의 밤입니다. 원수의 압제로 슬프게 다님, 비방하는 대적의 말에 찔려 다님, 내 삶의 현실을 볼 때 하나님의 은총 안에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사람은 도저히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없는 사람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느껴지는 그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여러분 이것은 누구의 경험입니까? 십자가 상에 달린 예수님이 들었던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실제로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게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미살산과 헬몬산과 요단땅을 누가 방황하고 다녔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시돈 땅까지 미살산, 헬몬산 끝까지 우리 주님은 도망가십니다. 우리 주님이 왜 시돈 땅 갔습니까? 주님이 시돈 땅에 가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피난 간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이 요단땅 미살산, 헬몬산 이런 북쪽까지 쫓겨다니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영혼에 낙망을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중 많은 사람이 영혼의 낙망을 경험한다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압도적인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안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 주의 파도와 물결 소리 안에 놓여있는 그 폭포수처럼 내 영혼을 책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환경 안에 내가 맨발로 머리 풀면서 다니는 이런 슬픔의 나날을 보내는 것을 아시고 이 시편 42편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마음이 상한 형제자매 여러분 거룩한 격려 구문으로 이 낙망을 이겨가시길 바라고 찬송의 권능으로 영혼의 밤을 견디시길 바랍니다. 이 낙망 끝에 하나님의 위로가 봇물처럼 터져나오리라 믿습니다. 인자한 얼굴 햇살로 여러분 영혼을 높이 드시는 그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출근하시면서 낙망의 밤을 이겨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개 숙인 형제자매 여러분 고개를 드셔서 그 얼굴을 드사 그 얼굴빛으로 여러분을 향하여 평강 주시기를 원하는 그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슬픔의 힘으로 견뎌야 될 때를 허락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폭포소리와 파도소리 때문에 하나님 은총에서 끊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고독한 밤을 보내는 하나님 백성들을 이 시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쇠약해지는 육체 앞에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시효가 끝났을까 성경 말씀을 읽어도 깨달아지지도 않고 예배의 감격도 사라져버리고 삶의 모든 환경들은 어그러지고 사면초가처럼 들려오는 패배와 낙망의 소식 앞에 하나님의 은총이 나를 지나갔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 주님의 폭포소리와 파도 같은 환경이 나에게 울부짖을 때 하나님 슬픔의 눈물로 이 환난을 견디게 하여주시옵소서. 찬송의 권능으로 그 영혼의 밤을 견뎌가며 하나님 얼굴 그 빛에서 나오는 치료의 힘을 평강의 힘을 의지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영혼의 낙심 이것을 찌르는 칼 같이 다가오는 대적의 말,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후렴 구문을 우리 일상생활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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