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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시편 40편)

by 【고동엽】 2021. 11. 27.

신앙공동체 안에서 17절과 같은 신앙 간증이 한 신앙 공동체 영적 건강도를 측량한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유력자와 부자들과 권세자들이 만일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한다면 그 진술은 반의 진실입니다. 만일에 힘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재산이 많이 가진 유력자들이 이렇게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신론을 자아내는 말입니다. 부당하게 돈을 번 부자들이 늘 이런 고백을 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저런 부자들의 하나님을 믿기 싫어. 예를 들어서 부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유력한 사람들이 주여 나의 도움이 되소서 주는 항상 내 우편에 계십니다 이렇게 신앙고백하면 그 말 자체는 경건한 고백일지라도 누가 그 고백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신앙고백은 오히려 무신론을 조장하는 고백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 살고 거짓되게 살고 부당한 방식으로 살면서 하나님 이름을 많이 갖다 댈수록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염세주의를 조장하고 무신론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킵니다. 저런 김회권 같이 부당한 악당이 하나님 말하니까 나는 하나님 말하기도 싫다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시대에 한 사회에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사회의 복지정책의 혜택도 입지 못하고 이 사회의 정치의 혜택도 입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지배계급들에게 변두리로 밀려나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이렇게 말할 때 주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주님은 나를 참 많이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이 신앙고백은 상당히 비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산두레교회가 좋은 교회가 될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매우 확실해 집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은 뭡니까? 비단 돈이 없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기가 없는 수렁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무수한 재앙의 공격을 받으면서 자기 죄가 머리털보다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영적으로 궁핍해져 가고 삶이 어려워지는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고백할 때는 그 고백은 상당한 무게를 갖습니다. 주님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주님은 나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주님 나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하신 기적이 너무나 많고 주님이 우리를 향하신 생각도 너무 많고 주님이 이미 내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사건들 너무나 많아 내가 셀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 그 사회가 참 하나님의 돌보심이 구석구석까지 미치는구나 이렇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과 궁핍의 이름으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도다. 여러분 가난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이 궁핍한 사람만이 집중력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들어주셔야 할 만한 억울한 일이 있는 사람만이 그 사람만이 부르짖을 수 있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이유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건강한 사람이 중심에 서 있으면 건강한 사람에서 훨씬 밀려난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여기 자기 힘으로 자기 수완과 재능으로 큰 부를 이루고 권세를 이루는 사람이 중심에 있다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은 언저리에 밀려난 사람들입니다. 이 언저리에 밀려난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이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한 사람에게 아무리 많이 호소해도 안 들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어디로 바로 호소하냐면 하나님께 바로 호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가장 먼저 깨닫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임이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번역하면 복되도다 심령 가난한 사람이여 하나님의 통치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 하나님의 다스림의 일차적 수혜자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서 먼저 내 억울함을 호소했더니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했냐면 바로 하나님께 직접 직소했습니다. 직소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주지육림의 연회에 빠져서 전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때 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너무 많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이 부르짖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누가 먼저 경험하냐면 과부들이 먼저 경험하고 창녀들과 세리들이 먼저 경험합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설정한 성전 중심의 종교에서는 구원의 여망이 끊어져버린 자들이 먼저 하나님께 은혜받아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먼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건강한 사람이 못 된 것 내가 원하는 만큼 출세하지 못한 것 이게 바로 가난한 겁니다. 이 가난, 궁핍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서 계속 부르짖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여러분 가난이 힘이라는 것을 여러분께서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 적당하게 출세하는 것, 적당하게 많이 가지면 영혼을 빌 수 있는 힘,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힘이 빠져 버립니다. 참 이것은 거의 대부분 진리입니다. 약간 성공하고 약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 자기 수완으로 인생을 헤쳐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럼 가난한 사람은 뭡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이 사람들입니다. 남들은 전부다 단단한 반석 위를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기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뭘 경험합니까?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이 결혼이 어떤 사람은 남편이 기가 막힌 수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가 기가 막힌 수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터가 사업터가 새로 시작한 일이 깊이를 알 수 없이 빠지는 수렁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자체가 웅덩이고 수렁입니다. 잘못 들어간 교회는 웅덩이와 수렁입니다. 왜 그러면 우리가 단단한 반석과 같은 그런 인생 여정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왜 갑자기 하나님이 나는 저기가 반석인줄 알고 발을 디뎠는데 수렁이 될까요? 기가 막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숨이 막힌다 숨길이 막히는 것 질식하는 겁니다. 왜 질식시킬 것 같은 웅덩이가 생길까요? 왜 우리가 중간중간에 이런 것을 만나죠? 왜 우리가 가장 믿었던 반석 같은 남편이 적으로 바뀝니까?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남편이 적입니다. 그래서 연예인 중에서 강남길이라는 사람이 최근에 책을 썼습니다. 착하게 생긴 아저씨입니다. 이 사람의 아내가 그렇게 살림 잘하는 그냥 아주 요조숙녀 같은 그런 전업주부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아내가 바람을 오랫동안 피운 겁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알고 충격을 받아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기가 막힌 웅덩이입니다. 기가 막힌 웅덩이는 이렇게 우리에게 순식간에 덮쳐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가 막힌 웅덩이에 빠진 사람은 뭘 뼈저리게 경험하냐면 기가 막힌 웅덩이는 몸무게만큼 점점 빠집니다. 자기가 가진 만큼 노력하는 만큼 더 빠지는 것이 기가 막힌 웅덩이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가 막힌 웅덩이를 주시는가? 뭘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위함입니다. 들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시도다.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며 나는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살고 있음을 확신시키는 일종의 방법입니다. 번지점프와 같은 겁니다. 우리 하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정없이 추락하게 만드셨다가 갑자기 끌어 올리십니다. 번지점프 아래에는 뭐가 있습니까? 번지점프는 다리를 묶어서 22층 건물 높이에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데 엄청난 속도로 자유 낙하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밑으로 쳐지던 고무줄이 복원력이 생겨서 15m정도 솟구쳐 올라갑니다. 추락하지만 추락 속에 있는 복원력 끌어 올리는 복원력 하나님은 이런 현기증 나는 추락 속에서 번지점프처럼 추락하는 그 속에서 끌어 올리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네가 반석과 단단한 땅을 딛고 가는 것이 아니다 네 인생을 네가 경영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는 깊은 수렁도 얼마든지 있다 이게 바로 죽음을 가리킵니다.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경험하는 깊은 수렁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아니지만 수렁이 뭡니까? 암입니다. 이번에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우리 프린스턴 신학교수가 세 명이 돌아가셨습니다. 한 사람은 저를 가르쳤던 61세의 신학교수인데 61세인데 아주 명랑하고 건강해보였던 분인데 또 한 분은 제 아내를 가르쳤던 교수님인데 62세입니다. 둘 다 석학인데 돌아가셨습니다. 전부다 60대 초반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분들은 병 알자마자 암이 다 퍼져 있었습니다. 진찰받아보니까 암이 다 퍼진 겁니다.


여러분 이 기가 막힌 수렁은 반석되심을 경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일종의 번지점프와 같은 것인데 이 기가 막힌 수렁 이것을 이 지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무엇을 대비시키기 위함입니까? 이건 죽음의 문턱에서 내가 부활할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미리 죽음과 부활의 연습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영원한 반석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어떤 글을 읽었는데 우리 어머니들이 아기를 받아내기 위해서 아기 낳는 연습을 한 달에 한 번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이것이 여인들이 하는 월 1회의 생리현상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지금은 거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아기를 받아내는 연습이다 아기 낳는 것과 똑같은 연습이 온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온 몸이 갑자기 부조화 상태로 빠집니다. 그 말은 아기를 낳을 때 잉태할 때 이렇게 되기 때문에 10개월 동안 이 상태가 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아기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수고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현기증 나는 그런 것을 준다고 글에서 읽었습니다. 참 설득력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이겁니다. 우리가 현기증 나는 추락을 하는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죽음이라는 그 무서운 수렁과 웅덩이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는 것은 큰 번지점프입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작은 웅덩이의 경험은 죽음의 때를 대비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수렁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479장 찬송 내가 주여 깊은 곳에서 부르짖습니다. 여러분 479장 기억나죠? 주여 내가 깊은 곳에서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깊은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부를 노래가 새 노래인데 원래 하나님 나라에 가면 어린 양의 새 노래를 부르죠? 그런데 어린 양의 새 노래를 어디서 부르냐면 이 지상에서 미리 부르기 시작합니다. 3절에 내가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죽음의 추락 넘어서 다시 경험하는 것은 반석입니다. 우리 생에 마지막에 이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경험할 것인데 작은 모의고사 같은 작은 경험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새 노래 이 말은 내가 몰랐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는 뜻입니다. 새 노래라는 말은 내가 그동안에 수렁에 빠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깊이 생각하는지 몰랐는데 수렁에 빠지니 알았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는지 알았다. 여러분 참 성경은 우리를 우울하게 인생 살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수렁에 빠졌을 때 만일에 이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정신병에 걸립니다.


5절에 여호와여 내가 수렁에 빠졌을 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았고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았고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나는 수렁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수렁에 빠지는 것은 특정한 죄 때문에 빠진다기보다는 내 영혼에 끼어 있는 중금속들을 한 번 세척해내는 일종의 공기 청정기 안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 특정한 죄 때문에 빠지지는 않고 통째로 저를 갱신시키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서 가끔 번지점프처럼 수렁 속에 빠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무슨 생각을 하냐면 나를 향한 주님의 생각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 내 인생에 이제 보니까 하나님의 생각으로 내 인생이 가득 찼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베푼 인자함을 세 보니까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런 뜻입니다. 이게 바로 수렁 속에서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 없이 평탄한 일을 무미건조하게 가겠습니까? 그 동안에 이 사람이 드렸던 제사는 번제 아무 의미 없이 짐승 도살해서 바치는 제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시인이 수렁 속에 빠졌을 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6절에 나는 네가 보통 드렸던 제단에서 뿌렸던 동물 피 뿌리는 제사 내가 본질적으로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네 마음을 찢는 상한 심령의 제사 내가 그것을 기뻐한다 네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부르짖는 것을 내가 원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제사였다 이것을 깨달음입니다. 주께서 수렁 속에 빠졌을 때 나에게 속삭여주시기를 이 말은 이렇게 속삭이듯이 깨닫는 것은 수렁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뭘 깨달았습니까? 7절에 이제 보니까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이제 보니까 성경에 있던 모든 것들이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다. 이제 나는 성경 말씀에 기록된 말씀을 준행 순종하고 성경 말씀을 내 인생에 적용시키는 것이 남은 내 인생의 과제다 이런 결단하고 수렁에서 올라옵니다. 이것을 반석 위에 세운다는 뜻입니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신다. 여러분 알겠습니까? 히브리서에서 이 말씀이 인용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마음으로 살았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7절요.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이렇게 깨닫길 바랍니다. 성경 말씀이 여러분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깨닫길 바라고 두루마리 책에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에 여러분 일생을 바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견고한 반석 위에 세우신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도 이번 금요일 추석 앞두고 마지막 주말 여러분께서 명절에 집에 가시는 분도 많이 있을 것이고 또 명절에 제사 모시는 집에 가면 또 그리스도인들은 시험 당할 때가 많습니다. 또 이 땅의 모든 며느리에게 괴로운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유교의 이데올로기가 아직까지 이런 방식의 조상 예배 말고도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기독교적인 조상 추모를 빨리 도입해야 제사가 극복이 됩니다. 지금 이 제사가 유교를 살리는 유일한 우리나라의 일곱 개 정도의 절 하라고 하는 절기가 유교를 살려놓습니다. 유교가 기독교 안에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 조상에게 절하는 것을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거의 유사종교 의례입니다. 이런 명절 때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양심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추석에 3900만이 이동합니다. 3900만이 이동하는 이 추석에 대전에서 서울까지 5시간 반 걸립니다. 이런 시간에 이동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경계심을 풀지 말고 믿지 않는 친척과 가족 앞에 깊은 사랑의 확신을 남기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그래서 추석에 기도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추석에 만나서 인상 한 번 구기고 가면 일 년 내내 갑니다. 저 사람은 예수 믿었더니 얼굴이 더 안 좋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우리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핍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석에 한 번 만나서 인상만 보여주고 오기 때문에 충만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오해받고 그냥 따돌림 당하고 수군거림과 구설수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친척일지라도 예수 믿지 않으면 기독교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그런 점을 잘 아시고 추석에 특별히 기도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조상도 아마 우리를 더 기뻐할 것입니다. 번제를 더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은 우리가 바른 삶을 사는 것을 훨씬 더 기뻐하고 이 세상에 복된 복의 근원으로 사는 것을 훨씬 더 기뻐할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기가 막힌 수렁에 빠졌을 때 오히려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귀한 인자하심을 세어보게 된다는 이 역설이 참 깨달아 집니다. 우리가 단단한 반석 위를 걸어갈 때는 한 번도 내가 이렇게 잘 풀리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깊은 생각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수렁 속에 떨어졌을 대 현기증 나는 추락 속에서 오히려 나를 지탱하는 것이 주님의 인자하심과 보호하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그래서 우리가 가난하고 궁핍할 때 주님의 다스림 안에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출세하고 부자가 되었을 때 주님의 다스림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박탈당했을 때 굴러 떨어졌을 때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이 역설을 우리가 영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승진했을 때라도 주님 망각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 우리가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도 우울하지 않게 하시고 비관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 사랑하는 교우들이 출근하는 그 운전대를 잡고 그들이 타는 전철도 보호하여주시고 추석을 맞이해서 이 땅의 많은 며느리들과 여인들이 뼈가 쑤시는 고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고 가다가 탈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진정한 축제 문화 세상을 돌보는 축제문화 혈과 육으로 이어진 축제문화 말고 혈과 육을 뛰어넘는 공동체적 축제문화 진정한 기독교적인 추석문화 성씨를 넘어서고 문중을 넘어서는 추석문화 기독교가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땅의 소시민들을 돌보고 이 땅의 고향 없이 뿌리 뽑혀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그런 기독교적인 추석 명절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수렁 속에 빠져서 부르짖을 때 주님 우리를 내팽겨 쳤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시는지를 깨닫고 궁핍한 나를 생각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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