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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시편 41편)

by 【고동엽】 2021. 11. 27.

시편 1권이 끝났습니다. 이제 시편 2편은 고라 자손과 아삽 자손의 노래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전 성가대 직분을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빈약한 자를 친구 삼는 사람이 복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빈약하다는 말은 진토에 그 얼굴을 파묻고 사는 사람, 진토 흙에 자기 얼굴을 파묻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빈약한 자를 권고하려면 빈약한 사람과 친근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빈약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을 피해가게 만듭니다. 왜냐면 빈약한 사람들은 한없이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에 빈약한 사람과 친구가 되면 인생이 불편해집니다. 그러므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사람은 세상에 참 드물기 때문에 복이 있도다 빈약한 사람과 친구 되는 사람 이런 뜻입니다. 복이 있도다 빈약한 사람과 친구 되는 사람, 복이 있도다 진토에 그 얼굴을 파묻고 그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친구 되는 사람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세계 만민이 기뻐하는 축제가 되려면 가난한 사람과 빈약한 사람을 위해서 거룩하게 낭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원을 낭비할 때 사랑을 낭비할 때 시간과 물질을 낭비할 때 빈약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것은 하나님께 쏟아지는 낭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빈약한 자를 권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서초동 대치동 논현동 역삼동 이 쪽은 결혼 삼각지대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점점 결혼도 신분상승을 유도하는 쪽으로 결혼하게 되고 빈약한 사람은 점점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게 됩니다. 이 빈약한 사람은 보통 빈약한 사람이 아니라 내 재산의 반을 축낼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러니까 추석은 이런 가치를 숭상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3900만이 이동하는 추석은 보편적인 가치를 숭상하는 절기가 아니라 혈과 육에 대한 맹목적인 애향심, 맹목적인 충성심 예수님이 벌써 버리라고 했던 것, 아브라함이 지금부터 2500년 전에 버렸던 그것을 지금 우리나라가 아직도 구석기 시대의 윤리 맹목적인 고향과 학교 그 다음 성씨, 문중 이런 것에 대해서 집착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주도하는 것이 뭐냐면 죽은 조상이라는 혼령입니다. 죽음 조상에게 절하는 것, 여러분 누구에게 절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죽은 조상의 가치에게 숭상하겠다고 절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겁니다. 그래서 죽은 조상에 대한 숭배에 대한 심판이 신사참배입니다. 제가 볼 때는 신사참배가 유교 2000년 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유교에 제사 문화에 대해서 마지막 치명타를 날린 것이 신사참배입니다. 신사참배는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파시스트 국가 전체주의 세력과 결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천황에 대해서 절하는 것을 유교인들은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왜?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만 알았습니다. 심지어 중국 청나라에 복음을 전했던 마태오 리치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조상 전래가 우상숭배라고 가톨릭이 하다가 우상숭배라고 그러면 순교를 해야 될 것 같으니까 교황이 그 다음 칙서를 다시 날렸습니다. 조상에게 절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미풍양속이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무솔리니하고 교황하고 일본에서 어떤 밀약이 있었냐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다 라는 칙령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순교자를 거의 내지 않았습니다. 지금 최근에 가톨릭이 정의구현사제단 해서 막 이렇게 독재정권에 맞서는 것처럼 폼 잡고 별로 하지도 않고 건물 좀 빌려주고 모든 젊은 청년들은 가톨릭이 정의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가톨릭은 정의의 사도가 아닙니다. 많은 순간에 결정적인 순간에 타협해 버립니다. 죽은 조상에 대해 절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벌써 빠져나오라고 했던 그 가치에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웬만하면 절을 하면 안 됩니다. 나는 절 할 수 없고 서서 기도하겠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창조적 긴장을 여러분들이 유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죽은 조상에게 절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런 분노가 일어날 만큼 꼬장꼬장하게 여러분께서 맞이하셔야 그래야 복음 전도의 길이 열립니다. 여러분이 만일에 예수 믿는 사람의 빛과 소금된 내가 절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내가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유교에 빠져 있고 조상에게 절하는 사람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거기서 어설프게 절해준다고 여러분이 더 아 동정심이 많구나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 저 친구의 기독 신앙은 별거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꼿꼿하게 서서 저희 아버지는 저에게 이렇게 협박했습니다.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호적 파가라 직접 제 아버지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냐면 아버지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버지를 훨씬 더 사랑하게 합니다. 제가 만일에 유교를 믿었다면 아버지의 모든 아버지답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나는 분노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를 완전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훨씬 우리 집안 살리는 겁니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그랬는데 저희 아버지가 방학 때 올라오셨습니다. 회권아 아무리 봐도 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점도 치지 않을 것이다 제사는 예수 안 믿는 놈들만 제사 지낸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랑방에 가서 기도한다 제사 음식도 이제 먹지마라 이렇게 배려하면서 점점 해가 갈수록 저희 아버지는 바뀌었습니다. 제일 마지막에는 교회에 찾아오셨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제 자취방에 오셔서 대학촌 교회라고 하는 신림동 교회에 찾아오셨는데 저희 아버지가 참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문을 딱 열고 보니까 목사님이 옆에 있었습니다. 문 열고 뒤에 오는 건물이었으면 뒤에 앉았다가 예배드리고 가셨을 텐데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 아버지께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씁니다. 그런데 참 신앙고백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 되고 아들의 하나님이 아버지의 하나님이 되었다 몇 차례 선포하셨습니다.

 

저의 위에 있는 형이 또 제가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불쾌하여서 그런 식의 편지를 썼는데 제가 19장 편지를 썼습니다. 형이 예수를 믿고 우리 집안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썼습니다. 지금 부산과학고등학교의 영어선생님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형은 어떻게 예수를 믿었냐면 제가 편지를 길게 썼습니다. 조상의 망령된 행실 쓰고 우리 경주 집안의 희망은 예수 밖에 없다 이렇게 했더니 저희 형이 저의 긴 편지를 아마 지금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뭐라고 답하냐면 네 편지를 읽고 내가 너에 대해서 네가 종교적으로 변질된 것에 대해서 심한 불쾌감을 가진 것에 대해 먼저 잘못했다고 회개를 했고 그날 교회를 찾아갔는데 그날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를 찾아갔는데 목사님이 안수를 했는데 안수를 받다가 쓰러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래서 엄청난 용사가 되어서 지금은 장로님인데 안수 받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대 용사가 되어서 자기가 다녔던 학교의 복음 전도의 기수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또 우리 식구 중에서 이렇게 전도된 사람이 많습니다. 저희 장인 장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장인 장모님도 제 아내가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저희 장인 장모님이 제 아내가 늘 밤마다 성경 공부하는 내용을 집에서 얘기 했습니다. 계속 말해주는데 저희 장인 장모님 될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내 딸이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는지 보기 위해서 제가 성경공부 할 때 찾아왔습니다. 대학생들 밖에 없는 모임에 어른 두 명이 있는 겁니다. 내리 2년 연속으로 하고 3년째 제가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이런 어른이라면 내가 장인 장모님으로 모셔도 되겠다 하면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집안 전체가 기독교적인 복음 안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의 어디에 놀라냐면 투명하고 진실한 확신 있는 신앙고백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겁니다. 어설픈 타협에는 은혜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적 가치만이 끊임없이 빈약한 자에 대한 권고함을 가집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일시적이고 변덕스러운 자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으며 재앙의 날에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그를 건지십니다. 빈약한 사람이 병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그의 병 중 자리를 다 뒤엎어 버립니다. 왜? 더 이상 누워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빈약한 자를 권고했던 그를 붙드시고 그의 병 중 침상, 병상 전체를 뒤엎어 버립니다. 더 이상 누워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서 그가 주인공이 됩니다. 일인칭으로 바뀝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이게 재앙의 날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빈약한 자를 많이 권고하면 신적 동정심을 많이 드러내면 여러분이 재앙의 날에도 건짐받는 겁니다. 이거 이유 있습니다. 이건 미신도 아니고 기복신앙도 아니고 원칙입니다.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아이들이 좋은 아이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버지 어머니기 성자처럼 살면 그 아이는 반드시 복 받게 됩니다. 왜 받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원칙으로 세대와 세대 사이에 믿음을 계승하시길 원했습니다. 만일에 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하게 사는데 문제는 아버지가 훌륭 안 해도 좋은 아들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신령한 돌연변이로. 제가 설교했죠? 프랜시스 찰스 아담스처럼 아버지 삼촌 전부 알콜 중독자 이랬는데 신령한 돌연변이가 나타나서 그 죄악된 망령된 현실의 족보를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버지 어머니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신실함을 보이면 그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기 때문에 그 자자손손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 자녀를 가장 사랑하냐면 돈을 펑펑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 해주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바로 신앙생활 사는 이것이 가장 좋은 자녀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이 선물은 그 자녀가 평생 동안 가지고 언제든지 쓰는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현금은 얼마 안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빈약한 자를 돌보고 평소에 신적 자비심을 표현하는 것을 많이 보면 그 자녀는 그 부모가 쌓은 신앙의 덕 때문에 재앙의 날에도 건짐 받고 본인 자신도 건짐 받습니다. 그가 설령 죄를 짓고 영혼이 망가졌을 때에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모모씨는 재기하지 못한다 그는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망가졌다 하나님에 의해서 망가졌다 그가 일어날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주님은 일으키십니다. 이 사람이 맞이하는 재앙의 날은 이겁니다. 여러분 재앙 중에 제일 나쁜 재앙이 이겁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가까운 원수도 내 원수처럼 가까운 친구도 내 원수처럼 똑같이 말합니다 저 사람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이게 바로 재앙입니다. 이 재앙의 날에 회복시키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빈약한 사람을 권고하는 사람은.

 

그래서 추석에 여러분 목사님께는 선물하지 마십시오. 목사님께 하지 말고 가난한 이웃에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일에 가난한 이웃을 찾지 못하면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내가 한 사람, 한 사람 돕고 싶으니까 알려달라고 하시길 바랍니다. 동사무소에 가서 누가 제일 내 선물을 받을만한 사람이 있는지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 집에 몰래 선물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놓으시길 바랍니다.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건 상관없이 저는 우리 추석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왜 얼 빠진 이 대한민국의 세속적인 세력이 주도하는 이런 축제문화에 휘둘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본토 친척과 혈과 육을 뒤엎는 보편적인 사랑의 축제, 쌀자루를 푸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쌀자루를 푸는 요셉의 축제가 바로 추석이 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 당장 동사무소 찾아가서 한 집씩 과일 바구니 갖다 놓읍시다. 빈약한 자를 돌보는 사랑 이것이 기독교적 사랑의 축제입니다. 우리에게 되갚지 못할 빈약한 자 진토에 얼굴을 파묻고 사는 그 사람 그 사람을 이 추석에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교회가 하는 구제헌금 거기에 모든 것을 걸지 마십시오. 그것은 최소한이고 모든 우리 교우들이 구제헌금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추석에 쓰고 싶은 것 좀 덜 아껴 썼다가 하는 겁니다. 내가 2만원 쓰고 싶은데 한 5천원 정도는 구제헌금으로 하자 그래서 교회를 경유하지 않고 해도 됩니다. 구제를 하시길 바랍니다. 이 추석에는 보편적인 어느 나라에도 어느 시대에도 감동을 주는 빈약한 자를 돌아보는 추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죽은 자에게 우상숭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은 조상의 혼령에 절하지 말라는 것은 그 조상들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가치에 머리 숙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보편적인 사랑의 가치에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의 가장 신뢰하는 사람마저도 등 돌리는 이런 재앙의 날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굳건히 붙드시고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반석 위에 두십니다. 어떻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평소에 빈약한 자를 평소에 많이 권고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건지시고 살게 하시고 41장 2절요.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러분 세상에서 복을 받으면 어떤 사람이 됩니까? 세상의 복을 받으면 빈약한 자를 권고할 수 있습니다. 반대가 아닙니다. 복 받기 위해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받으려면 아 이제 보니까 김회권 목사가 하는 식으로 해야 겠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짜 복 받은 사람은 빈약한 자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 복을 받은 사람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되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빈약한 사람이 덕을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우리가 출세하여야 할 정당한 명분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출세하는 것이 이웃에게 복을 많이 나눌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승진해야 되고 내가 사업에 성공해야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실패하는 것보다 성공하는 것이 훨씬 더 내 주변에 있는 빈약한 자를 권고하기가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내가 번성하길 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것을 바로 복이 있는 삶, 세상에서 복 받는 사람은 빈약한 자를 돌보는 사람이다 이겁니다. 우리 모두가 이번 추석에는 예수님의 가치 좀 높입시다. 예수님의 보편적인 사랑의 가치를 깃발 들고 높입시다. 앞으로 우리 한국 기독교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축제 쌀자루를 푸는 축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현재 기독교가 주도하는 축제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전부다 기독교인들만의 잔치이고 부활절도 그렇습니다. 한 번도 세계 만민을 위해서 불특정 다수를 위해서 쌀자루를 푸는 보편적인 사랑의 가치를 과시하는 축제가 없습니다. 이게 잘못된 것 아닙니까? 아직까지 우리 한국기독교를 외래 종교라고 믿는 이유는 뭡니까? 우리가 이렇게 쌀자루를 풀고 우리 심장에 핏빛 사랑의 진실을 드러내는 이웃 사랑을 행할 마음이 없기 때문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9월 28일에 이 동네 청소할 때 우리 여전도회에서 떡을 좀 해서 이 동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길 바랍니다. 빈약한 자, 도시 빈민, 불량 청소년들 그 전부다 어른이 만든 불구자들입니다. 지금 청소년들은 어른들 문화가 만든 불구자입니다. 그게 바로 빈약한 자입니다. 진토에 얼굴을 파묻고 죽어버리고 싶은 청소년들을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 이런 좋은 추석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한 번도 생각 안 했다가 갑자기 막 혹시 추석이 너무 우중충해진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옛날부터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이 대오각성해서 보편적인 쌀자루를 푸는 세계 만민에게 쌀자루를 풀고 기근의 땅에 사랑의 양식을 공급하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3900만이 이동하여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추석, 그리스도의 가치가 아니라 맹목적인 혈과 육의 가치에 온 민족이 정신을 팔고 있는 이때에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은 진토에 얼굴을 파묻고 사는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복된 사람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기독교가 우리가 속한 마을을 돕고 우리가 속한 도시를 도와야겠는데 하나님 우리 교회가 그렇게 해야 되는데 지혜를 알려 주시고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도와야 할 이웃이 분명히 있는데 주님 돕게 하여주시옵시고 빈약한 자를 돌보고 그들과 신적 동정심을 나누고 그들과 마음의 친구가 되는 기독교회가 나오게 하시옵시고 기독교 신자가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3900만 명이나 이동하면서 기독교적 가치가 아닌 혈과 육에 대한 가치로 맹종하는 맹목적인 추종을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서 죽은 조상에 절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소망을 설명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주님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게 하시옵시고 악한 시험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이 제사 문제로 시험 드는 신자들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하나님 창조적이고 신령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신앙고백을 하는 기회로 삼게 도와주시옵소서. 3900만이 이동합니다. 너무나 많은 차량들이 이동합니다. 양보하게 하시고 어린 아이를 가진 자들을 배려하게 도와주시고 병든 사람 노인들을 배려하는 성숙한 운전문화 형성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비가 오는 거리에 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교통사고 없게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 들떠있고 우리 민족 맹목적인 죽은 조상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버지 이 추석으로부터 이 망령된 행실로부터 성화시켜 주시옵시고 기독교적인 예수님만 섬기는 임마누엘 축제 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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