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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구원론 강의 1-(마태복음 1장 18-23절) /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

by 【고동엽】 2021. 11. 27.
(마태복음 1장 18-23절) /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예수님의 족보가 두 군데 나와 있는데 하나는 마태복음 하나는 누가복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흔히 알고 있는데,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그 명제가 복잡한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되려면 혈통적으로 다윗의 후손에게서 나야 합니다. 요셉은 다윗의 생물학적 후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의 생물학적 후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1장은 예수님의 아버지 족보이고, 누가복음 3장 23-38절은 예수님의 어머니 족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족보 아버지 족보가 아니라 그냥 요셉의 족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윗의 생물학적 자손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다윗의 생물학적 자손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 말이 왜 필요했느냐? 구약성경에 나오는 주요한 메시아 강림에 나오는 구절들이 전부 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무엘하 7장 12-16절, 이사야 9장 5절, 아모스 9장 13절 이하, 미가서 5장 2절 이하, 예레미야 31장 등등 많은 구절이 앞으로 올 미래의 이상왕은 다윗의 후손이 되고 다윗의 위를 차지할 다윗의 후손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후손이 되려면 적어도 다윗가문에 태어나야 합니다. 스룹바벨이라고 하는 포로기 귀환공동체 지도자가 바로 정확하게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개와 스가랴, 특별히 스가랴 예언자는 이 스룹바벨이야말로 다윗의 후손으로써 다윗 왕국의 부흥을 이룰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높이 띄웠습니다. 그런데 스룹바벨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페르시아의 견제 때문에 사라졌다고 봅니다. 왜? 귀환포로공동체가 성전을 짓고 나서 스룹바벨을 띄우면서 스룹바벨이 다윗왕조의 복위운동을 주도해줄 걸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이 사라지고 나서는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써 자기를 띄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BC 167-164년 사이에 유다 마카베우스 가문에 항쟁파들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후임자였던 시리야 왕국과 3년 반 동안 전쟁을 벌여 왕조를 직접 만들어 냈습니다. 그 왕조의 최초의 항쟁 시발자가 맛다디아스라는 사람이고, 그 맛다디아스의 아들 다섯 명 중에서 셋째 아들이 유다 마카베오 입니다. 마카베오 독립전쟁이라고 말합니다. BC 167년, 양진일 목사한테 성경 52주 동안 배운 사람들은 들었겠죠? 신구약 성경사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유다 마카베우스 독립전쟁 때 그들이 자기를 유다 왕조의 복위운동을 하는 것처럼 꾸몄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시므온입니다. 맛다디아스의 사실상 첫째 아들, 사실상 첫째 아들이면서 유다 마카베오의 형인데, 이 사람 시므온의 행동을 기록한 마카베오 상하 기록을 보면 완벽하게 다윗의 행동과 똑같습니다. 거의 다윗과 똑같은, 다윗왕의 재림으로 볼만큼 많은 묘사가 인위적으로 있습니다. 그 시므온의 아들이 하 시므온, 히브리말로 하라는 말은 정관사거든요. 하 시므온, 보통 책에는 하스몬 왕조라고 말합니다. 하스몬 왕조라는 말은 하 시므온 자들, 뜻은 시므온주의자들, 더 시모나이즈, 하스몬왕조가 다윗왕조의 부흥운동으로 자기를 띄웠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떴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세속왕조일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과 권력을 분점하는 악한 왕조임이 드러났습니다. 그 악한 왕조의 마지막 국무총리급 수도경비사령관급 서울시장급 하는 사람이 헤롯 아버지 안티파트 입니다. 그 헤롯안티파트의 아들이 헤롯대왕입니다. 그 헤롯대왕의 네 아들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을 네 군데로 나눠서 분점 했습니다. 이들은 국민으로부터 왕조가 나온 게 아니라 완전히 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일종의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정치용역업자인 겁니다. 통치할 테니까 서포트해라, 국민으로부터 아무런 지지가 없는, 전혀 지지가 없고 로마제국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는 겁니다. 이 사람이 에돔사람입니다. 4분의 1지역왕이라는 뜻이 분봉왕입니다. 테트라아르크, 성경에 분봉왕이라는 말이 나오죠? 그 분봉왕이라는 말은 벌꿀을 치는 사람이 아니라 4분의 1지역왕, 테트라 아르크라고 돼 있습니다. 테트라 아르크 위에 로마제국총독이 있고 그 위에 로마제국이 있는 겁니다. 사실 이때는 로마제국이 출발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로마제국은 BC 40-37년 사이에 출발했거든요. 제가 말씀드렸죠? 박혁거세와 동기동창이라고요. 고구려를 세우던 때와 신라를 세우던 때가 로마제국이 시작한 때가 거의 동시대 사건입니다. 로마의 제2대 왕이 티베리우스 왕이거든요. 신라로 말하면 석탈해 정도 해당됩니다. 석탈해가 다스리던 때,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던 그때, 그 사람이 다스리던 15년 되던 때에 예수님이 서른 살이었어요. 예수님은 다윗 족보랑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다윗 후손이 아니면 메시아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머리를 썼습니다. 보니까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은 아니지만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 33절을 보면 굉장히 성경에서 애매모호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건 도무지 성경 표현이라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이것 보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쓰면 안 되잖아요. 서른 살이면 서른 살이지, 한 삼십 세쯤 되셨더라, 그러면 안 되죠. 이것도 애매모호한 표현인데, 그다음 더 애매모호한 표현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초대교회가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어요. 초대교회가 예수님이 사생아라는 스트레스에 엄청 시달린 거예요.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아들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거예요. 영어로 말하면 supposedly, 추정컨대 이런 뜻이에요. 추정컨대 요셉의 아들이에요. 이런 모든 비밀을 알고 털어 놓은 사람은 마리아밖에 없어요. 그래서 마리아가 초대교회에서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로마가톨릭에서 마리아를 띄울 때, 네스토리우스를 쫓아낼 때, 교리 논쟁을 할 때 마리아를 크리스토퍼 마테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머니라 높여야 한다고 성모 마리아를 엄청 높였거든요. 그 회의가 에베소 회의입니다. 그 회의에서 마리아가 너무 높아졌는데 그 이유가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확신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았다면 요셉의 아들이 맞는데? 사람들이 알기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사실은 성령으로 잉태됐기 때문에 요셉의 아들이 아니다, 이러면 딜레마에 빠집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니면 다윗의 자손이 안 됩니다. 그다음에 요셉의 아들이며 마리아가 겪었던, 가브리엘 천사를 봤던 모든 계시가 무효화 됩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말도 사실이고,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도 사실이면 요셉이 예수님을 입양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입양한 사람도 족보에 넣습니까? 네, 성경에서 누구누구의 지파 족보로 가는 것은 지역적 연고를 가진 사람은 전부 다 혈연적 족보로 편입됐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갈렙입니다. 갈렙은 겐 족속, 그런데 유다지파입니다. 대표적인 게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 엘가나의 아들이죠? 그 사무엘이 나중에 레위인 지파로 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브라임 지파였지만 레위인 지파로 가는 게 가능한 겁니다. 그런 폭넓은 융통성과 신축성 있는 지파개념에서 예수님이 다윗의 지파가 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고,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진실로 볼 때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 아들로써 인정받는 과정에 결정적인 순종을 드린 사람이 요셉이기 때문에, 요셉이 남자 여자의 성적관계를 통해서 예수를 낳은 그런 아버지 개념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결단을 통해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돼 주셨습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잉태해서 배가 불러온 아내를 영접함으로, 아내의 말을 영접함으로, 아내에게 그 말을 전한 가브리엘을 영접함으로, 가브리엘을 통해 마리아에게 성령잉태를 지시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영접함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모든 기이한 구원역사의 과정들을 의심을 극복하면서 영접해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접해줌으로, 하나님에 대한 계약적 신실함을 다 성취하는 조건으로 예수를 영접했기 때문에 예수의 아버지가 된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겁니다. 완전한 구약적 개념으로 볼 때 충분히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믿음으로 아버지가 되어줌으로써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됐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출생에 얽힌 신비를 쭉 말하는데, 초대교회에 이 모든 진실을 토해낸 사람은 마리아밖에 없습니다. 마리아가 초대교회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가? 교황청 문서와 우리 개신교 문서가 다릅니다. 그러나 1517년까지는 개신교 개념이 없었습니다. 모든 가톨릭 문서가 기독교입니다. 1517년 이전에는 가톨릭이 기독교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라고 말해야합니다. 기독교 초기문서에 보면, 전설에 의하면 마리아와 예수님 나이가 15세 정도 차이 났다고 봐야 합니다. 엄마와 맏아들의 나이가 15세 정도 차이니까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마리아가 엄청난 역할을 했는데, 그 결정적인 증거가 주일에 야고보가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직을 맡은 걸 볼 때, 야고보와 유다가 엄청 뜬 걸 볼 때, 예수님 어머니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거거든요. 예수님 어머니가 이 모든 진실을 토해내지 않았다면 마태와 누가와 같은 복잡한 출생설화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이 복잡한 출생설화는 마리아에게는 굉장히 털어놓기 힘든 말입니다. 이건 남들에게 설득시키기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녀 마리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걸 믿는 겁니다. 그런데 가톨릭은 심합니다. 개신교는 예수님을 잉태할 때 동정녀라고 믿는 반면에 가톨릭은 그 이후에 계속 동정녀라고 믿고, 예수님의 모든 형제들을 사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성경문서를 상당히 도발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이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이 많은 사람에게 실족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가능하면 믿는 사람에게는 처녀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늦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특별히 처음 예수 믿으려는 사람에게 주일학교 때 이거부터 이야기하면 판이 깨져버립니다. 이건 제일 뒤에 감추시고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가를 한참 가르친 후에 감동이 무르익고 나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 이걸 가르쳐야지, 이걸 바로 맨 정신에 가르치면 엄청난 지구대행성 충돌이 옵니다. 세계관 충돌이 와요. 저는 이걸 사도신경 강의안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만, 이걸 체코슬로바키아 신학자 밀리치 로흐만이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 사람이 사도신경에서 자세히, 참 설득력이 있게 다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가 구약 내에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와 방불한 사라의 태를 여서서 아이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녀의 태를 여서서 아이를 주시는 것, 죽은 자와 방불한 할머니를 통해서 아이를 주시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둘로 성적으로 결합하기 전에 배가 불러왔을 때,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혼인관계를 유지하고자 충실히 하는 사람, 친절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배가 불러 왔을 때 두 가지 길을 가져야 합니다. 일단 잉태한 여인을 공개적으로 들추어내서 돌로 쳐 죽이는 방법이 있고, 가장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자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지 않고 몰래 보내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혼증서를 써주면 공개적으로 처단해야 합니다. 이혼증서를 써주지 않으면 몰래 친정으로 돌려보내는데, 요셉은 이혼증서를 써주는 대신에 몰래 돌려보내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생각한다는 말은 많은 시선이 머물러 있다, 오랫동안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취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고, 이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할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의 남은 장래를 파탄이나 죽음으로 몰아가지 말아야겠다는 도덕적 딜레마도 있고, 또한 분노와 섭섭함 모든 게 다 있을 때 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여기에 설명해주는 장면이 안 나옵니다. 마리아가 요셉에게 이렇게 이렇게 됐습니다, 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너무나 충격적인 성스러운 영적인 광채에 두려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걸 차마 성령으로 잉태됐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성결성과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요셉이 마리아에게 베푸는 최고의 친절은 여인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해서 살려주는 겁니다. 여기에 애절한 사랑이 녹아 있다고 봐야 합니다. 누구나 쉽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고대 셈족사회에서 여인의 남편을 통하지 않은 잉태와 배가 불러오는 이 현상을 참아내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회교권 사회에서는 불륜을 하면 다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여올>이라는 터키영화에 보면, 여올이라는 말은 터키말로 한낮이라는 뜻입니다. 불륜에 빠진 아내를 죽여가는 처절한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명예살인이라고 말하죠. 여동생이 잉태를 합니다. 오빠가 죽여야 합니다. 레바논 베이루드 이런 데서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 전통이 고대 셈족사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은 번뇌의 밤을 보냈을 때, 애절한 끊김, 아내의 잉태를 의심하는 거죠. 이 사이에 마리아가 말을 안 했겠죠? 성령의 잉태라고 말 안 하겠죠. 그러니까 요셉이 할 수 있는 것은 배신감과 슬픔이 착종된 가운데 이걸 끊고 돌려보내는 길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너무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은 사랑하는 여인을 몰래 돌려 보내는 겁니다. 그래야만 이 여인의 생명이 살기 때문에, 그런데 끊고 싶어서 끊어내려고 할때, 그렇게 보내려고 할때, 그렇게 번뇌가 깊어갈 때,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현몽이라는 것은 꿈에 나타난 거죠? 꿈에 나타났습니다. 꿈에 나타났으니까 무시해도 되죠? 하나님의 완곡한 방법이 꿈에 나타난 겁니다. 하나님의 직접적 방법은 꿈이 아니라 멀쩡할 때 나타납니다. 꿈에 나타난 것은 유보, 즉 이 사람의 결단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유보할 때 꿈에 나타나십니다. 꿈에 나타났다는 말은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선택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가압이 약한 겁니다. 꿈에 나타나지 않고 나타날때 많죠. 바로 나타나서 지시할 때 많잖아요. 멀쩡할 때 나타납니다. 꿈에 나타날 때와 멀쩡할 때 나타난 건 다릅니다. 멀쩡할 때 나타난 것은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꿈에 나타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권적인 유보를 허락하신 겁니다.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이때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걸 전제하는 말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천년이상동안 오래 지속되는 구속사의 정점으로 달리는, 구원사의 정점으로 치닫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전달한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전율을 일으키는 말입니다 .이 당시 다윗의 자손은 마카베오 항쟁 전쟁으로 생겼던 하스몬 왕조, 그 하스몬 왕조의 뒤를 이었던 헤롯 왕조, 이런 왕조가 다윗의 마음과 너무나 다른, 그럼 다윗은 실제로 어떤 통치를 했기 때문에 그럴까요? 사무엘하 8장 15절을 보시면, 공과 의로, 사무엘하 23장 4절, 공평과 정의로, 다윗의 통치의 가장 핵심은 지방호족세력들을 억제하여 이스라엘 민중과 왕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정치였습니다. 다윗의 선정은 지방호족세력들을 억제하고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소통시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5장에 무슨 장면 나옵니까? 다윗이 하루 종일 지방민들의 재판, 민원을 들어주는 장면이 나오죠? 다윗이 지방민들의 이스라엘 각양각지에서 올라오는 모든 억울한 문제를 다 풀어서 억울한 사람이 없게 만들고, 지방호족세력들을 적절하게 억제해서 지방수령들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한 거거든요. 그래서 왕은 지방토호세력들을 억제하여 지방민들이 통치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거든요. 그것이 바로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란 말이거든요. 다윗은 지방호족세력들이 이스라엘 각양각지에 있는 농민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고 견제하고 부릅뜨게 한 겁니다. 다윗은 밑바닥 백성들, 기층민중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준 임금이다, 그런데 실제 다윗보다는 예언자의 시와 예언속에서 다윗이 영적으로 진화합니다. 점점 좋아집니다. 나중에는 이상적인 왕도의 전범이 돼버립니다. 이것은 점점 다윗이 진화가 돼서 그런 겁니다. 원래 다윗보다 더 좋은 다윗, 이런 이상적인 왕권도 실제 이상적인 왕에서 출발해야 하니까, 다윗이 이상적인 왕의 출발점이었거든요. 6백년 동안 다윗왕조가 끊어진 상황에서 다윗의 후손이 오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쓸때, 다윗의 후손이라는 코테이션 마크를 쓰는 순간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임박하게 일어날 것을 예감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준비된 사람이 바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건 많이 생략이 된 겁니다. 여러분, 나중에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보십시오. 마리아의 찬가를 보고 지금 이 요셉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 나라를 간절하게 열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지상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요셉과 마리아이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 요셉아' 라는 말은 다윗의 후손이 곧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 같다는 심리적인 기대감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 상황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로마황제 총독 분봉왕 예루살렘 제사장, 그다음 지방의 세리들, 이렇게 첩첩히 민생을 괴롭히고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는 가장 어두운 밤에 하나님의 천사 입에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는 말이 나온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보내줄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건 정말로 힘든 말입니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다윗의 후손에 대한 앙망이 엄청나게 고조된 그 순간에 준 말입니다. 여러분 어떤 기대를 충족시키느냐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로마의 압제로 부터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때 죄라는 말은,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편의 말씀입니다. 로마제국의 압제는 어디서 왔습니까? 로마제국의 압제와 분봉왕의 압제는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율법멍에를 거부하기 때문에 압제가 왔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율법멍에를 매면 모든 이스라엘이 고도의 자치적인 삶이 가능해집니다. 전부 다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관료적 중앙집중체가 나타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다 자기 멍에를 매기 때문에, 고도로 자율적이고 이웃 사랑으로 단련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압제적인 권력이 들어설 필요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1-33절에 보면, 다시는 네 형제를 보고 너 율법 지켜야 해, 관료적으로 명령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여호와의 신으로 가득 차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율법의 멍에를 지는 순간 압제적인 왕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가향공동체에서 압제적인 왕이 필요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부 다 자율적으로 율법의 멍에를 스스로 지고 있기 때문에 압제가 필요 없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라는 말은 구약의 논리로 말할 때, 압제적 이방군주의 통치, 사탄의 통치, 하나님의 율법의 멍에를 거절하면 압제적 통치 사단의 통치에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율법멍에를 거부하여 이방인의 압제적 지배 아래 있는 그 상태로부터 구원해낼 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을 군사적으로 몰아내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멍에를 지고 고도의 민중자치적인 자율적인 사랑의 공동체, 형제우애와 돌봄공동체를 구축하면 로마제국의 압제는 저절로 필요 없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길이 기독교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 로마권력 중심부를 타격해서 로마제국보다 더 강력한 제국을 만들면 된다고 믿었던 것, 그게 바로 열심당원들입니다. 지금 삼성 현대 다국적 기업 모든 거대한 권력집중적 관료기업 대기업 이런 모든 것이 왜 생겼느냐? 사법부 검찰의 턱이 높이 올라가고, 대법원이 높이 올라간다는 말은 시민사회가 도덕적으로 너무나 열패하고 너무나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인간의 도덕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그렇게 압제적인 경찰 곤봉이 커지고 경찰의 곤봉을 뛰어 넘어 배후조정하는 검찰이 국가기소권을 가진 사람이 계속 탑에 올라가죠. 시민사회 부패 때문에. 그러면 검찰청이 점점 낮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중앙권력집중체는 사라지게 됩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 뜻은 압제적인 로마통치, 압제적인 헤롯지배, 압제적인 성전지배체제로부터 구원할 자, 이게 바로 그 시대의 언어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그 시대 언어는 다윗의 자손이 나타나서 자기백성을 구원해준다, 시대의 모든 심리적인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는 화두가 죄에서 구원받는다는 거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이사야 7장 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사야 7장 14절을 누가 인용했습니까? 마태복음 기자가 인용했습니까? 천사가 인용했습니까? 천사가 인용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아는 사람한테 천사가 나타나겠죠? 이사야 7장 14절을 모르는 사람한테 천사가 나타나면 안 되겠죠? 요셉이 이사야 7장 14절을 알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 아닙니까? 여러분 그러니까 꿈도 뭘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지 천사는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천사의 집중 출몰지역은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 미완 구원과업에 골똘히 고민이 깊은 사람에게 그다음 구원과업에 주인공이 될 찬스를 주십니다. 이건 구원사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민족분단과 민족의 통일문제를 많이 생각해야만 그 일에 앞장설 수 있는 역할이 주어집니다. 통일문제는 제 인생의 하나의 시험입니다. 저는 통일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민족의 분단문제를 크게 기도해왔는데, 그래서 제가 점점 그 일에 쓰임받고 있습니다. 참 제 짧은 인생을 가만히 보면 내가 고민하던 그 문제가 내가 거기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영역이 됩니다. 여러분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 말을 보고 파르르 떠는 사람에게 그 다음말이 나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몇가지 중심과제가 젊은 20대 청년을 사로잡아야만 하나님이 그 청년을 사로잡고 있는 중심과제에 맞는 말씀이 떨어지거든요. 이 원리를 여러분이 터득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은 이사야에게 준 거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 그 확신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오는 아들의 탄생이거든요. 이걸 오늘 날 우리 시대에 비교해볼까요? 이걸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해보면, 우리가 집단적 마리아 모성을 가져야 해요. 공동체적인 마리아 모성을 가져야 하고, 마리아적인 모성애를 가지고 이 백성의 죄를 해결할 해방동이 구원동이,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동이 해방둥이 인데, 그 당시 제일 흔했던 남자 아이 이름이 예수입니다. 여호수아 예수 똑같은 말입니다. 야훼 saves. 야훼가 구원하신다, 예수님 당시에 제일 흔한 이름이 해방동이 구원동이인데, 예수입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한다는 포괄적인 명제, 포괄적인 과업을 보자마자 금방 눈이 열리는 사람에게 성경은 뜻이 통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초청이 가능한 거거든요. 여러분 정말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중심과업이 무엇이며 우리 시대의 중심죄악은 무엇입니까? 우리 시대의 중심죄악은 탐욕입니다. 가진자의 탐욕, 유능하고 이긴 자가 다 혼자 차지하는 겁니다. 자원의 탐욕, 식량의 탐욕, 휴가와 향락의 탐욕, 지배욕, 그러면 이건 우리시대에만 일어났습니까? 모든 인류의 시대가 이렇게 악했습니다. 우리시대도 우리 이전 시대와 똑같습니다. 가진 자가 탐욕을 무장해제하는 것, 북한과 우리가 대치하는건, 북한 사회는 육체노동자들 중심사회입니다. 북한 사회는 언론출판 결사의 자유까지 다 포기하면서까지 광부와 어부와 의사하고 대학교수의 월급이 다 똑같은 사회가 이상사회라고 믿습니다. 북한은 우리가 볼때 악마적인 사회이지만 악마가 아닙니다. 어부와 광부가 교사가 월급이 같은 사회, 죄악된 우리 인간성에 안 맞는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북한은 의식의 지평에서 부글부글 끓는 사람을 전부 다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우리는 북한에 가서 못 삽니다. 북한을 동정할 수는 있지만, 북한은 육체노동자 광부 어부 의사 교수 월급이 거의 같기 때문에 이런 사회는 죄악된 인간성과 안 맞는 사회입니다. 죄악된 인간사회는 이건희 같은 사람, 영리하지만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무한히 부자가 되고 돈이 없는 사람은 쫄쫄 굶어도 되는 것, 이걸 자연의 순리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북한은, 북한인민민주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육체노동자가 존대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 북한을 우리가 악마적이라고 할때, 레토릭, 악마적이라고 할때 코테이션 마크가 필요합니다. 북한은 악마적인 사회가 맞습니다. 누가 볼때? 공부 잘 하는 사람, 이긴 사람들이 다 차지해도 된다는 자유주의 사상에서 볼때 완전히 북한은 악마적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볼때 우리가 악마가 되는 거죠. 인민이 태어났는데 모든 인민은 행복추구권을 갖는데, 어제 제가 헌법을 하루 종일 연구했습니다. 130조입니다. 부칙 6조, 1987년 10월 29일 개정, 1989년 2월 29일 발효, 왜 제가 어제 헌법을 하루종일 묵상했느나면 헌법에 행복추구권이 있습니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근로의 의무를 지금 우리는 갖지 못합니다. 의무인데, 근로의 의무를 가지려면 직장을 다 줘야합니다. 남한과 북한 사회는 큰 가치관의 싸움입니다. 김정일 김정은은 그런 인민민주주의 이념을 잘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볼때 악마지만, 북한 사회가 볼때는 그놈들이 세습을 하건 뭘하건, 기쁨조를 늘리건 상관없이 그런 가치의 옹호자입니다. 그래서 김정은이가 삼대세습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북한이 이상사회로 보는 그 사회가 잘못됐죠? 그러나 그 잘못된 정도는 우리가 잘못된 정도만큼이나 잘못된 거지, 더 악마적인 건 아닙니다. 더 악마적이지는 않습니다. 북한이 하나님 나라의 이상에서 멀어진 만큼이나 남한도 하나님 나라의 이상에서 멀어졌는데, 북한 사회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갈등은 이런 겁니다. 어부와 광부가 교수와 월급이 같아야 한다고 믿으면 북한에서는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약간은 어려움이 있겠죠. 그러나 대부분 가능합니다. 제 아내는 사모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북한 가도 전혀 문제가 없겠더라, 제가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의사는 광부보다 28배 더 많은 월급을 받아야 하며 의사와 광부는 영원히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살아야 해, 이렇게 믿으면 여기서 사는 게 낫습니다. 이런 남북한의 가장 큰 갈등은 탐욕을 무한히 확장할 것인가, 강제적인 평등을 추구보할 것인가, 이 갈등입니다. 그런데 이 중간사회가 가능하지 않을 것인가? 정신적 중간영토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 토지모임이라든지, 가향공동체 같은 단체입니다. 매우 소수파이긴 하지만 그 중간이 가능하다, 정신적 비무장지대가 가능하다, 자유도 존중하면서 사회적 형평성을 공동체적으로 꽃피우도록 설득을 일일히 해가는 겁니다. 북한에서 강력한 권력으로 아오지탄광으로 보내는 형벌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사니까 광부와 어부와 의사가 한 데 삶으로 스스로, 소비에트적 중앙집중권력이 하지 못했던 것을 아래로부터 설득해서 살살 꼬아가면서 하는 것,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비무장지대이면서 제3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대한민국의 국기를 달지 않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고 국기를 안다는 이유는 제가 대한민국 남한사회에 소속감을 거의 갖지 못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사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런 표징을 갖는 해방둥이, 구원동이를 잉태하는 공동체적인 모성애, 공동체적인 마리아가 되어서 우리시대를 해방둥이와 구원동이의 활약의 무대로 만들어주는 것이 오늘 우리 본문의 함의입니다. 옛날에 일어난 일을 회고하는 것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공동체적인 어머니 마리아의 영성이 필요하고, 잉태의 모성이 필요하고, 수치와 굴욕을 무릅쓰고 오해받을 지도 모르는 오래된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기필코 성취시키고야 말리라고 하는 구원동이와 해방둥이를 산파하는 영성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자들의, 예수님은 박제된 기억이 아니라 지금 우리 기억속에 활동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공동체적인 모성애를 발휘하여 구원동이와 해방둥이를 잉태하고 산파하는 역할을 하도록 영감을 주시는 분이고, 이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영감을 주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무장지대에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토대를 주십니다. 왜? 예수님은 유능하고 권력을 독점하고 쾌락을 독점하고 인생의 모든 기회를 독점해버릴 것 같은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어부와 광부와 그냥 내버려두면 사회 밑바닥에서 인간의 존엄성 밑바닥에서 살 것 같은 사람들과 형제자매의 연대를 구축적으로 가족적 연대 안에 묶어두는 성령의 매는 줄로 인하여,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중앙집권적 권력을 통하여 강제로 하려고 했고, 모택동이 강제로 하려고 했던 그것을 성령 안에서 자발적으로 하게 만들어줌으로 우리 마음에 참 왕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 공동체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가치의 족보이지 혈연적 족보 생물학적 족보가 아닙니다. 다윗의 족보라는 말은 생물학적으로 다윗의 족보 안에 태어나야만 한다는 게 아니라 공평과 정의의 통치를 완전히 구현하고 이런 왕도를 결성할 후손이 다윗의 후손이었고, 그런 왕도의 구현자가 바로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가 다윗의 후손이 된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혈통으로는 다윗에게서 나셨다는 말은 정확하게 이런 말입니다. DNA가 다윗에게서 왔다는 말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다윗의 가치를, 다윗 왕도를 계승할 계열의 왕이었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의 바디메오,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 맹인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죠? 그 다윗의 자손입니다. 결론 맺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예수님 당시에 전율을 일으키고 영적 감흥을 일으키는 말로써 이사야 9장 2절 이하에 나오는 다윗의 후손 약속, 사무엘하 7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다윗의 후손 약속을 오랫 동안 믿어왔던 심리적 신앙적 기대에 부응하는 약속이었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던 이유는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 와서 그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할 자임을 알고 있던 그 요셉의 구원사적 지식에 호소하는 호소였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우리 시대에 영적과업과 구원사적 미완의 과제에 눈을 뜨고 그걸 밤새도록 고민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그 후속적 말씀이 떨어지지도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도 못한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약속에 대한 예민한 지각을 가지고 우리가 어떤 역사를 우리 시대에 일굴 것인가를 고민이 깊은 그밤에 천사를 통하여 구원사의 과업들을 섬광처럼 알려주신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거에요. 지난주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천년 구원사 전통에 모든 열망들을 실현시킬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적 정복자가 되시고, 예수님은 영적인 판관이 되시고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가 되시고, 모든 지방호족세력들의 왕권을 제어하시고, 지방호족세력들이 전횡하던 권력들을 빼앗으셔서 하나님이 독점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 나라가 왔다, 예수님이 했던 말은 무엇이죠? 하나님 나라가 왔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중간에서 활용하고 찬탈하고 남용했던 모든 왕 이하의 지방권력들은 전부다 왕권을 빼앗아버리겠다, 즉 하나님의 직접통치가 왔다, 이 말은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 마음을 감동시킨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말은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직접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다, 예레미야 31장 31-34절, 여러분 이거 어렵죠? 왜 어렵냐면 설교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5월 2일 창립하기 직전 구원론 강의라고 생각하십시오. 어렵지만 굉장히 압축적입니다. 4,50분 안에 하려니까 나도 마음이 타는데 모자라는 건 오늘 오후에 질의응답시간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 해 놓고 계속 어렵지 않았는가, 이게 어려워서 어떻게 하지? 저는 이게 보통 상식입니다만, 저는 하루 종일 이것만 생각하니까 쉽다고 하는데 제 아내가 이걸 알아듣겠나, 몇 명이 알아듣겠나, 늘 그런 말을 합니다. 이게 어려운 건 맞는데 하루 종일 365일 이것만 생각하는 제가 성경구절 5개 6개씩 인용하면 힘들텐데, 어쨌든 시작했으니 이 진도를 나가긴 해야 합니다. 저도 여러분과 이 수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다만 오후시간에 질의응답시간을 30분 드림으로써 미진한 걸 보완하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두분에게 소감이 왔는데 보니까 질의응답시간이 꼭 필요하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요약합니다. 도중에 질문해도 됩니다. 5월 2일부터 창립예배 때는 지진에 관해서도 설교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진 얘기 못 합니다. 진도를 나가야 하니까요. 제가 아직까지 이런 건 책에 쓰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깨달은 걸 제 노트에만 빡빡히 적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건 책에 쓰지도 않았고 쓰려고 하면 끝이 없습니다. 책만 쓰다가 죽습니다. 끝이 없는데 팔과 어깨가 다 내려앉습니다. 하루 10시간씩 앉아서 이걸 치면 팔과 어깨가, 금요일날 하루종일 성경만 공부했습니다. 하루 종일 노트에 썼습니다. 그런데 이걸 너무 하다 보니까 명료한 깨달음이 저한테 옵니다. 그런데 이 명료한 깨달음을 쉽게 전달하는 방법을 제가 알아야 하는데 여러분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좀 참으십시오. 아마 1년 지나면 이해가 될 겁니다. 옛날에 제가 교회 개척할 때 보통 아줌마 교인들은 한 6개월을 졸았습니다. 도대체 똑같은 목사 말인데 이렇게 어렵나, 아줌마 교인들은 다 잠이 들고 형제교인들은 다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성경강의 듣는다면서, 아줌마 교인들은 연속극만 많이 보고, 연속극은 메시지가 너무나 쉽습니다. 똑같은 말을 천천히 비춰주기 때문에 저는 드라마가 왜 인기 있느냐면 너무나 쉽습니다. 제가 지금 강의하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진도가 빨리 나가고 압축돼 있는데 나름대로 합니다만, 여러분 졸지 마시고 꼭 들으셔야 합니다. 구원 문제에 졸아버리면 큰일납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를 납득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원이 뜨겁습니다. 늘 뜨겁습니다. 늘 감격속에 삽니다. 이걸 납득하고 나면 항상 뜨겁고 영원이 뜨겁고 계속 성장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요약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한 중심화두였는데, 바벨론 포로 이후로 600년 간 이웃나라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들에게, 그 다윗의 자손입니다. the son of david입니다. 그 다윗의 자손이 와서 이방 압제자 손에서 건져내기로 약속했는데 그 압제적 통치가 끝날 때가 바로 왔는데 그게 바로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왔다, 그 다윗의 자손이 요셉이었다, 그 요셉에게서 다윗의 자손을 낳는 방법은 기가 막힌데 성령으로 잉태한 아내의 아이를 입양하여 그의 아버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여기에 의로운 자의 순종이 필요하죠. 여기 마리아의 굴욕을 감수하는 순종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늘 날 해방둥이 구원동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예수를 잉태해야 하고 그를 산출해야 하고 산파해내야 하는데, 마리아와 요셉 같은 공동체적 모성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대의 중심과제, 그 시대에 일어날 구원의 과제에 매우 민감하고 예민하게 고민하고 깨어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해제를 허락하시고 키 포인트, 키 컨셉트를 납득하게 하신다, 참여하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죄에서 어떻게 구원했습니까? 여기 아주 중요합니다. 몇주째 계속 할게요. 질문하십시오. 예수님이 로마제국으로부터 백성들을 끌어내는 방법이 무엇이었나?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투쟁을 한 게 아니라 로마제국의 멍에가 필요 없을만큼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으로 갱생돼서 형제자매의 오손도손 공동체가 생겨버리면 로마의 압제적 지배는 무효화되고 로마제국은 물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백성을 죄에서 끌어내게 돼요. 그 끌어내는 방법은 고도의 민중적인 협동사회가 와야 하니까 고도의 민중적 협동사회는 성령이 와야만 되거든요. 예레미야 31장 31절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직접통치를 유발하니까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이 되죠. 논리적으로 말이 됩니까? 나는 아주 클리어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도취상태에 빠졌습니다만, 여러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요약,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 이 선언은 로마제국에 대한 우회적이고 완곡한 선전포고지만 사실상 물리적 충돌을 1차적으로 유발하지 않고 성령에 의한 직접 지배를 초래하는 말이다, 성령으로 직접 감동을 받으면 유무상통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사도행전 2장과 4장 공동체가 만들어짐으로 말미암아 압제적인 착취와 압제적인 가렴주구의 착취가 발붙이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사람을 지배하는 시기가 오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왔다, 예수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줌으로 말미암아, 그런데 성령은 어떻게 오느냐? 예수가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완전히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순종을 완벽하게 하고 돌아가셔야만, 완벽한 순종을 마치고 돌아가신 그 하나님 우편 보좌에 가신 그분만이 보내실 수 있는 게 성령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온전한 성령충만만이 성령시대를 도래하게 만들기 때문에, 예수가 성령을 보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대신적 죽음이야말로 성령충만을 유발시켰으니까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늘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들어주고, 자발적 순종공동체 자발적 성령충만 공동체가 생기면 중앙집중권력들은 필요 없게 되고 하나님의 친정통치시대가 시작되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가 됩니다. 이걸 제일 잘 설명한 책이 제프리 애쉬가 쓴 <간디평전>입니다. 이걸 읽어보시면 간디가 영국 제국주의자를 이기는 방법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감동적입니다. 간디가 영국제국주의자, 엘리자베스 여왕과 회담을 할때 어떤 말을 하느냐면, 우리는 생물학적 영국 사람을 쫓아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국을 쫓아내는 게 아니라 영국 사람의 가치를 쫓아내기를 원합니다, 영국 사람이 인도에 우리랑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사티 그라하 스와라시, 직접 생산하고 착취하지 말고 같이 살자고요, 흙집에서 같이 검소하게 살면 영국 사람 다 환영합니다, 우리는 영국 사람 쫓아내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인도 사람 정신을 다 갱생시켜서 인도 사람들이 모두 다 자율착취적 삶을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도의 독립입니다, 우리는 영국을 몰아내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영국총독이 충격 받아서 졌다, 영국의 저열한 정신은 간디를 다스릴 수 없다, 영국의 부르주아적이고 탐욕적인 도덕성도 없는 영국정신이 간디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나? 저런 간디가 있는 인도는 영국이 손 못 댄다, 가야 한다, 1947년입니다. 갑니다. 그래서 독립한 거예요. 세계에서 독립운동 전쟁 벌이지 않고 독립을 한 유일한 경우, 가장 기독교적 신학을 주제로 승리한 나라는 인도밖에 없습니다. 제프리 애쉬가 쓴 <간디평전> 읽어보십시오. 꼭 읽어보십시오. 여러분 안 읽으려면 제가 줄 친 것 빌려드릴게요. 제 줄 친 것 빌려드릴게요. 무료로 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세계에서 산상수훈을 이렇게 완벽하게 정치에 적용했구나, 간디의 사티그라하, 그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민중자치자율사입니다. 이게 칸트가 말한 자율목적의 왕국사 입니다. 다 같습니다. 왜 같느냐면 중앙집중적 권력이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친정통치인데 간디는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 라마 티벳 불교적인, 힌두교 적인 것에 의존합니다. 간디는 성령충만을 받지 못했습니다. 간디는 우리가 다 따라야 할 모범은 아닙니다. 간디는 여자관계가 아주 복잡했고 간디에게는 힌두교 특유의 음란이 있습니다. 참 특이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디가 힌두교 특유의 성적인 애매모호함이 있지만 간디가 공적으로 했던 그의 신학적 해설은 너무나 대단합니다. 그분이 신약성경을 수십 번 읽었습니다. 너무 좋아요. 제프리 애쉬의 <간디평전>, 제가 줄 친 것 보여드릴게요. 결론 맺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합니까? 로마제국 제10군단을 몰아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했습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독수리는 로마군단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체가 됐기 때문에 시체를 뜯어먹으러 왔다는 겁니다. 죽었던, 시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은 일어나서 형제자매 사랑을 일삼고 우애를 일삼고 고도의 윤리와 도덕을 회복하는 순간 독수리 떼는 갈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로마를 쫓아낸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 지금 어떻게 합니까? 북한 동포, 여러분 이 역사를 보고 그냥 잠이 옵니까? 잠이 와요? 안 오죠. 깊이 생각하세요. 우리가 생각할 때 다윗의 자손, 이사야 7장 14절, 여러분 일생에 여러분 과업을 결정지을 성경구절이 밤에 떠오를 줄 믿습니다. 일단 성경을 알아야겠죠? 천사가 뭘 인용하려면, 여러분 모두 영적으로 요셉과 마리아 같은 구원동이 해방둥이를 잉태하고 산파하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이 시대의 중심과업, 하나님 미완의 구원 과업을 이루는 데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그림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매우 흉측한 예술품이 될 수 없는 그림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당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그것은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숨지시니라’ 여기까지입니다. 운명하여 숨지는 장면, 세 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다가 심장이 파열돼서 온몸에 피를 보내달라고 소리치는 백체를 보고, 심장이 펌프질을 계속 하다가 피는 나오지 않고, 온 몸 마디마디는 피를 보내달라고 소리치고 심장이 원래 하던 대로 펌프질을 계속 하는데, 피는 옆구리를 통해서 줄줄 새고 있습니다. 피는 예수님의 몸 마디마디까지 전달이 안 되고 드디어 심장은 펌프질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파열됩니다. 세 시간 동안 그런 일을 했는데 오전 12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소리치고 죽었습니다. 37절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여기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원격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을 보면, 마가복음에서는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큰 폭풍 구름을 몰고 다닐 만큼 아주 놀라운 사역을 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특징은 무차별 무제한 개방사역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예루살렘 성직자들에 의해서 한정되었던 천국을 예수님은 침노하는 자들은 무조건 천국 들어갈 수 있도록 천국 들어가기를 원하기만 하면 세리와 창녀와 로마군병도 들어갈 수 있도록 천국의 길을 활짝 열어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침노하는 자, 거친 자들, 폭력배들, 삶을 잘못 살아버린 자들까지도 천국에 들어갈 결단만 하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쪽으로 사람이 쏠렸습니다. 천국은 경건하게 의롭게 율법의 규정대로 사는 사람들이 가는 거라는 구원론에 기초를 둔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이 볼 때는 예수가 너무 위험합니다. 폭풍구름을 몰고 다니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폭풍구름을 저지하는 사건,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갈릴리 민중의 압도적 지지와 열기를 업고 예루살렘까지 갔지만 예루살렘 문턱에서 좌절당했습니다. 이런 좌절이야기, 의로운 혁명지도자가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갑자기 꺾이는 장면, 이건 세계사에서 많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전봉준에게도 일어났고 나폴레옹에게도 일어났고 스파르타쿠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에는 혁명의 불꽃으로 민중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드디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기 직전에 좌절당한 사람이 굉장히 많죠? 그런 점에서 전봉준과 예수 스파르타쿠스와 예수 최제우와 예수, 비슷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전봉준과 스파르타쿠스와 나폴레옹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꺾였습니다. 민중의 폭풍 같은 쇄도가 꺾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폭풍 구름과 같은 자유와 해방과 무차별적인 구원의 가치를 복제인간 예수, 베드로 예수, 요한예수, 바울예수, 숱한 복제예수를 남기고 그 폭풍 구름을 일으키는 능력을 많이 확산시켜 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한 그 장면이 꺾인 그 상황이 오히려 예수운동의 무제한 확산과 확장과 모방을 하는 일이 됐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렇게 끝났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비참하게 패배한 예수가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는 기독교가 됐으며 바울이 됐으며 베드로가 됐을까? 이 장면에서 좀 더 연극적인 대사를 집어넣자면, 글로바는 엠마오 쪽으로 베드로는 허겁지겁 기드론 시내로 향했음, 여리고쪽으로 줄달음쳤다, 화면은 꺼지고 예수는 백부장에게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파 놓은 무덤에 갇히다, 큰 돌이 쿵 닫히고 화면 무대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무 일도 없는 겁니다. 정적에 쌓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여인들의 울음은 그쳤습니다. 갈릴리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햇빛 찬란한 아열대지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50일 정도 지났을 때, 베드로가 분명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허겁지겁 도망가는 비통한 사나이, 비겁한 사나이였는데, 다시 화면이 돌아와 보니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삼천 명의 구름관중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어두운 화면과 capturing했던 그 베드로가 아니라 완전히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과 같은 강력한 베드로가 돼서 만화적인 극적전환입니다. 만화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일반영화에서도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애니메이션 만화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베드로가 완전히 영적 장군이 돼서 삼천 명의 무리를 바람이 풀을 누이듯이 누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합니다.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인 줄 알았더니 너무 똑똑한데? 그렇게 막 혀를 끌끌 차면서 찬탄을 마지않고 있는데,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사람들은 풀처럼 전율했습니다. 사시나무처럼 쏟아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살렸습니다, 그렇게 선언할 때 다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삼천 명의 탄식이 올라옵니다. 너희가 이방인의 손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이 예수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니까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모든 말은 다 된다, 예수에 대한 모든 감미로운 회고 괜찮다, 예수의 선행, 갈릴리에서 했던 모든 예수의 이적이야기 얼마든지 다 해라, 한 가지만 빼라, 살아났다는 말만 제발 하지 마라, 예수가 살아났다는 말만 하지 말아다오, 예수가 살아났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시체는 도난당했을 뿐이다, 그때 삼천 명의 집회에 찌라시가 막 나왔습니다. 예수, 시체 도난당했다, 제1찌라시 시체도난설, 제2찌라시 댄 브라운의 기절설과 소생설, 예수는 프랑스 남부 오를랑 지방으로 가서 피난하고 있다, 거기에 막달라 마리아가 따라갔다, 조만간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낳을 것이다, 2천년 있으면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나올 것이다, 이런 찌라시가 나옵니다. 이런 기절 소생설 피난설 시체도난설이 나올 때 베드로가, 예수는 살아났습니다, 라고 소리치니까 사람들이 그 말에,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막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니까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이 예수는 요한복음 14장 26절, 요한복음 15장 26절, 요한복음 16장 7절에 약속한 것처럼 그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여 매장당하여 썩어 음부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았음을 확신시키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더라도 내가 처형당해서 저주어린 죽음을 죽더라도 내가 매장되지 않고, 3일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보좌에 돌아가 앉거든 첫 할 일은 이것이다, 오순절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어 내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서 세상을 통치하기 시작했음을 믿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십시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예수가 하나님 보좌에 착석 하셨음을 세상을 통치하셨음을 증명한 사건입니다, 라고 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말을 선포하는 순간에 동시적으로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장면을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본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났다는 말은 하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주가 되셨음을 증명해볼까요? 예수님이 만일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 주가 되셨다면 지금 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에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주 예수의 이름이 만일에 힘을 발휘한다면 예수는 주가 되셨음이 분명한 것 아닌가? 라는 말을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을 때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음을 증명하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비겁한 베드로 아닙니까? 내가 성전에서 잡일하는 여종에게 고발당하여 저주하면서 맹세하던 연약한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이렇게 완전히 돌변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증언을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진 그 사건과 베드로의 변모사건, 베드로의 급진적 변화 사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려면 가까이 가보아야 합니다. 멀리서 볼 때는 예수 죽음의 1차적 당사자는 대제사장과 예루살렘 성직자들입니다. 종교적 기득권 세력의 카르텔입니다. 장로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헤롯당들, 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갈릴리에서 몰고 오는 엄청난 폭풍 같은 구름, 엄청난 민중의 쇄도, 이걸 막기 위하여 이들이 로마제국의 통치 질서, 지배질서를 위협하니까 죽인 겁니다. 가이사랴라는 지중해 해변에 있는 도시가 로마총독 관저입니다. 가이사랴 총독관저에서 4+1체제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렸습니다. 4개지역의 분봉왕과 예루살렘 종교 바티칸 특별구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종교 바티칸 특별구는 지금 바티칸과 같이 종교대제사장들의 관할구역입니다. 갈릴리 팔레스타인 이두레 드라고닛 지방은 분봉왕 4명에 의해서 분할됐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갈릴리 지방에서 몰고 온 엄청난 인파는 이런 분봉왕 체제 + 종교체제 성전시스템 모두를 다 쓸데없게 만듭니다. 왜? 더 이상 예루살렘에 가지 않습니다. 절기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죄 사함 받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 받아버립니다. 여러분, 성전이 종교가 가장 큰 일은 죄를 사해주는 문제죠.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을 회복하는 일 아닙니까? 이게 종교가 하는 일 맞죠? 그런데 예루살렘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회당 등 전통적인 종교시스템들은 더 이상 죄를 사해주지 못합니다. 인간의 불행,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을 열어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가복음 2장 1-12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처음입니다. 예수님이 명시적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한 게 처음입니다. 암시적으로 죄를 사해준 사건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의 죄 사함 사건입니다. 예수가 죄를 사한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 종교의 용도폐기를 의미합니다. 쓸 데 없어진 겁니다. 한 번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체제는 율법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내고 손 씻고 밥을 먹고 이방인과 접촉을 피하고, 이런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다 지켜야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그 모든 걸 하지 않고도 바로 구원을 선포해버리면 예루살렘 종교 필요 없죠? 예루살렘 종교의 특징은 공로주의 구원관입니다. 공로주의 구원관의 특징은 이 세상에 A학점 받는 사람은 10%밖에 안 된다고 하는 일조의 상대평가 시스템입니다. A학점은 10%만 받아야 한다, 이게 우리 숭실대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수업을 할 때 무제한적 A학점 가능성을 열어놓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48명의 수강생 모두가 다 자존심 누릴 만큼의 좋은 학점을 받게 하시고, 가문의 영광이 될 만큼 좋은 학점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열망을 고조시키면서 시험을 봅니다. 그러면 이 기도 때문에 영감을 받아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난형난제입니다. 그런데 성적을 입력합니다. 보니까 45-50%가 A를 받을 만큼 너무 잘했습니다. 성적을 입력하는데 교무처에서 이 프로그램을 조작해놨습니다. 더 이상 입력하지 마십시오, 제가 전화합니다. 교무처장님 도대체 제가 한 학기 내내 이런 축복기도로 이룬 성과를 어떻게 막습니까? 무제한적 A학점을 주도록 격려해서 마침내 아이들이 이렇게 공부를 하는데 교무처장님 답안지 한 번 보시겠습니까? 16절지 다섯 페이지를 완전히 가득 채워 버렸습니다. 내가 학부 때 꿈도 꾸지 못했던 완벽한 답안지가 이렇게 나왔는데 어떻게 A학점을 안 줍니까?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동국대 중앙대 밀립니다. 동국대 중앙대보다 A학점 많다고 소문나면 큰일 납니다. 지금 우리학교가 제일 질투하는 대학교가 동국대 중앙대 홍익대입니다. 원래 우리가 홍익대보다 나은 줄 알았는데 통계 보니까 안 낫습니다. 어쨌든 이 세 학교를 따라잡기 위해서, A학점 많이 주는 대학이 190개 종합대학 중에서 119등입니다. 119등이란 말은 A학점을 38%입니다. 전남 조선대학이 제일 A학점을 안 줍니다. 연세대학교는 90등입니다. A학점을 많이 준다는 뜻이죠. 교수들 마다 늘 문제가 됩니다. 무제한적 A학점으로 자존심을 누리면서 모두 다 승리자가 되는 학급을 구성하려는 교수와 취업의 학점 인플레라는 말 때문에, 그래서 대한민국 교육은 결국 니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책을 많이 읽는지는 상관없다, 나는 등수 매기기 위해서 태어났다, 이게 MB이고 서남표입니다. 서남표식으로 말하면 자기 등록금 내고 다니는 모든 대학생은 벌을 받고 있는 겁니다. 왜? 2.2 이하는 750만원을 내야 하거든요. 카이스트에서는, 등록금을 750만원을 내는 학생은 계속 벌을 받는 상태입니다. 자기가 벌을 받는지 모르는데, 모두 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예수님의 세계관이고, 아니 행복은 10%만 돼, 나머지 90%는 쓰디쓴 패배감으로 행복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뛰어야 해, 이것이 한나라당의 교육정책, 미국공화당의 교육정책, 다시 말해서 서열을 매기는 것만이 교육의 다라고 보는 것이 바리새인의 교육관, 대제사장의 교육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믿기만 하면 천국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원하면 다 천국가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서기관에게도 매일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서기관님 오세요, 집회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집회 때마다 서기관이 앞에 앉았는데 마가복음 2장에 보니까 용신할 틈이 없어서 아무도 못 가는데 예수님 턱 밑에 앉아서 필기는 안 하고 자꾸 고민합니다. 에이스 데오스, 신명기 6장 4절을 인용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후토스, 이 자가, 죄를 사하다니, 블레스피니, 막 중얼중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아시고 즉각 추궁을 하십니다. 이 서기관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우호적인, 친 예수 서기관들이기 때문에 초청한 겁니다. 예수님은 서기관 바리새인도 구원하기 원하고, 예수님은 무제한적 잔치, 무차별적인 은혜의 선포입니다. 이 무차별적인 은혜의 선포가 예루살렘으로 가니까 예루살렘은 아닙니다, 공로주의 구원관, 두 번 금식하는 사람들의 천국, 손을 깨끗이 씻고 밥 먹는 사람들이 가는 천국 등을 선포하는 자들이 예수를 깔아뭉갭니다. 여기서 십자가 사건은 시기와 질투의 사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예수의 무제한적 하나님 나라의 사상과 공로주의 사상의 충돌로 예수가 힘이 부쳐서, 그냥 약해서 죽은 사건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가장 평면성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예수님이 상당히 도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먼저 공격을 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예루살렘의 공로주의 구원관, 율법주의 구원관, 제도적 종교의 폐해를 아시고, 예수님은 예루살렘 종교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내팽개쳐버린 자들을 도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치는 군상들을 찾아갔습니다. 38년 된 병자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버림 받은 거 맞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입니다. 삭개오입니다. 저주받아 내가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군상들과 예수가 접촉하면서 버림받은 자의 운명, 버림받은 자가 썼던 저주를 예수님이 조금씩 가져갑니다. 12년 동안 혈루병 걸려 피를 줄줄 흘리는 여인의 현기증을 예수님이 송두리째 가지시고 그 여인은 병을 낫게 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 30절입니다. 예수가 복된 공격을 한 겁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의 공격을 유발한 겁니다. 예수님의 생명력 안에는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은 빠져나갔습니다. 감가상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접촉한 사람들의 악담과 저주와 버림받았다는 쓰디쓴 패배의식이 예수님의 몸에 가득 찼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은 사건은 생명과 죽음의 맞교환의 마지막에 있는 처절한 교환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궁지를 모면해주기 위해서 그 여인을 용서하다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머리로 향할 돌을 자기 몸에 가져온 겁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삭개오와 한 통속이 된 사람의 몸짓 때문에 삭개오가 받아야 할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의 저주를 받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중풍병자 등 저주 받아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가장 신념에서 소리치는 저주받았다는 의식을 예수는 몸에 간직하고 생명력을 다 나눠줬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좀 더 가까운 근접관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히기 전에 이미 생명을 저주받은 자에게 나눠줬습니다. 문둥병자에 손을 댔습니다. 죽어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 관에 손을 댔습니다. 접촉, 주는 겁니다. 문둥병자의 불결함을 자기가 가져가고 자기 안에 있는 거룩함을 문둥병자에게 나눠줌으로써 교환이 일어난 겁니다. 로마서 8장 3절,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십자가에 못이 박힌 그 몸은 죄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폐연료봉 덩어리입니다. 모든 저주 받아야 할 운명의 쓰레기 처리장입니다. 왜? 너무 많은 접촉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삭개오의 악담도 가져갔죠. 삭개오가 받아야 할 오명도 가져갔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분노, 마땅한 저주도 가져갔죠. 38년된 병자의 무능력도 가져갔죠. 베드로 장모의 열병도 가져갔죠. 예수는 로마서 8장 3절, 예수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십자가에 달린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달린 몸뚱이는 이미 죄밖에 없고 저주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저주와 죄로 가득 찬 그 몸에 심판했다는 말은 삭개오 죄가 너무 나쁘다는 겁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죄가 너무 나쁘다는 겁니다. 인간의 무기력,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치명적인 병이 저주입니다. 그 저주를 저주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살려주고 용서해줬던 모든 죄인들의 삶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의 결과임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저주 받아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이게 중요합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요한복음 8장에서 용서를 받고 나서 깨달았을 가장 큰 마음은 뭘까요? 마음씨가 너무 좋아, 율법을 독특하게 해석하는 분이다, 이랬겠죠. 원래 간음하다 붙잡히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쳐 죽이지 못했잖아요. 왜 못했습니까? 율법을 어긴 게 아니죠. 간음을 한 번도 안 한 사람부터 먼저 돌로 던지라고 했으니까 아무도 돌을 못 던졌어요. 그래서 결국은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살아난 건데, 어쨌든 그 여인이 볼 때는 예수님의 독특한 율법해석 때문에 살아난 거죠. 그다음 죄인이라고 수군거림을 당하고 비난 받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자기 마음이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가 나 때문에 내가 받아야 할 악명과 오명과 비난을 대신 받았구나, 생각했겠죠. 내 저주를 대신 받았다고 생각 안 했겠냐고요.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명성과 나의 악명의 교환이 일어나고, 예수님의 생명과 내 죽음의 기운이 맞교환이 일어났겠죠. 그런 맞교환이 일어났음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예수가 저주받아 죽은 자의 운명에 완전히 선 겁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의 공생애 때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혔던 사건에 더 깊숙이 가면 기가막힌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이게 어려운 말, 그다음 더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 사건은 더 어려운 겁니다. 두 가지 난해한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가 십자가 죽으심을 가장 가까이 봤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첫째 예수님이 펼치시던 갈릴리 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좌절된 사건입니다. 좌절이 일어났습니다. 전봉준 같은 좌절이 일어났습니다. 나폴레옹 같은 좌절이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저주 받은 자들의 군상들과 동정과 연대와 우정을 나누다가, 저주받은 자를 돌보다가 저주 받은 자들을 배척하는 사회에 의해서 저주 받은 자의 운명으로 되돌아간 사건입니다. 즉 저주 받은 자와 하나가 되더니 저주 받은 자의 운명을 완성해 간 사건입니다. 거기까지는 흠모할 만한 인류에게 구원을 줄 만한 게 아니라 그냥 비극적인 의인의 죽음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꿈을 이루지 못한 전봉준의 죽음과 같습니다. 두 번째 죽음은 마음씨가 한 없이 착하지만 인생에 넘치는 슬픔을 왕창 느끼게 만들어주는 사건입니다. 불쌍한 사람 도와주다가 불쌍하게 죽는 구나, 그런 사건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완전히 다른 사건입니다. 예수의 죽음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가 총연출하시고 기획하신 사건이란 겁니다. 성소휘장,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는데 성전에 400미터 300미터,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세계에서 존재하던 가장 큰 성전입니다.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단일성전 규모로는 제일 큽니다. 400장방입니다. 그 안에 성전이 있는데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 바깥 코트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 안으로 들어가면, 이스라엘 여자들의 칸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들어가는 칸이 있어요. 거기까지 가서 하나님 만납니다. 그다음 이스라엘 남자들의 칸이 있고, 그다음에 가면 제사장들이 들어가는 칸이 있는데, 마지막 하나님의 속제소의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라는 가장 깊숙한 곳에 가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 막아 놓는 휘장이 있습니다. 긴 폭의 휘장이 있는데 그 휘장은 1년에 한 번만 열립니다. 7월 10일에 한 번 열립니다. 그걸 대속죄일이라고 합니다.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방울을 달고 갑니다. 휘장에다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실 준비를 하고 일곱 번 뿌리고 휘장의 문이 열리는 그 순간이 매우 위험한데, 일종의 방사능 피폭경험과 같은 겁니다. 플루토늄과 라듐이 나와서 죽는데, 하도 많이 죽기 때문에 제사장이 줄을 매고 들어갑니다. 거기 들어가면 바로 죽습니다. 이건 성전과 성소에 오랫동안 근무했던 제사자들의 사회일지에 기록돼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죽었던 사람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시내산 수련회 때 참석했던 대표적인 지도자입니다. 이 두 분이 술 한잔 먹고 좀 취한 상태에서 이상한 불, 라이터 불을 가지고 들어가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방사능 피폭을 경험하고 죽었습니다. 이때부터 지성소에 들어가서 살아나지 못하는 사고가 나오는데, 이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방울을 달고 갔습니다. 방울 소리가 딸랑딸랑 나야만 제사가 열납됐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지성소와 성소는 담력없이는 못 들어가는데, 1년에 한 번 무서운 담력으로 무장하고 그 문을 열어젖힙니다. 담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문을 여는 순간 강한 플루토늄과 세슘과 카드뮴이 나와서 죽으면 그 시체를 수습하려고 들어가면 또 죽습니다. 몸을 줄로 잡아당겨야 합니다. 그래서 줄을 매고 들어가야 합니다. 제사장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3D 업종이라고 할 수 없지만 거의 원자로에서 근무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원자력 보다 훨씬 강력한 폭우입니다. 하나님 영광은 비치자마자 바로 죽습니다. 그게 담력입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아래로부터 위로 찢어진 게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기 때문에 사람이 장난으로 찢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갈가리 찢어진 그 자리에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 말은 1년에 한 번만 대속죄일이 있는 게 아니라 예수의 육체가 찢어진 사건은 하나님의 무제한적 죄 사함이 선포되는 시기란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육체가 찢어진 사건은 하나님 편에서 지성소의 휘장을 찢어서 무제한적인 죄 사함을 선포한 사건이란 말이에요. 이게 바로 베드로가 오순절날 3천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3천명에게 성령이 임하고 3천 명이 죄사함을 받는 사건이에요. 히브리서 10장에서 이걸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을 지나, 복음성가 있죠? 그 내용입니다. 육체가 찢어질 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동시에 관찰 가능했나요? 다시 말해서 이게 중계방송이 돼야 하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는 그 장면과 동시에 성전에서 휘장이 찢기는 그 사건을 봐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건 예루살렘 성전 출신 대제사장 또는 제사장만이 알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사람의 증언이라고 봐야 합니다. 베드로가 여기 들어갔을 수 없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대제사장 또는 제사장이 본 사건이 이 사건입니다. 성소휘장이 찢어져서 예수가 피를 일곱 번 튀겼습니다. 예수 육체가 피를 쏟는 그 사건, 요한복음 19장 34절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여기가 중요합니다. 물과 피가 쏟아지는 그 장면은 일곱 번 피 뿌림이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일곱 번 피가 뿌려졌어요. 피가 솟구치는 그 장면,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어린 양의 피로 휘장에 뿌리는 겁니다. 뿌리는 그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옆에 있던 백부장이 그 피를 받았습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때 ‘그렇게’는 육체가 찢기는 고통 가운데서도 의롭게 버림 받은 자의 운명을 몸서리치게 경험하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소리치는 그 예수의 죽으심을 보고, 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 중에서 이렇게 거룩하고 이렇게 의롭고 이렇게 겸손하게 죽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십자가에서는 저주와 악담을 퍼붓고 죽는데, 1년에 몇 백명씩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큰아버지 백부가 아니라, 백명의 남자군사를 지휘하는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건 처음 믿은 사람은 잘 모르니까 예수 처음 믿은 사람에게는 가르쳐줘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단어중에서 굉장히 어려운 단어가 많아요. 유월절, 유월절은 현충일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성경 먼저 읽은 사람들은 처음 읽은 사람이 모든 와일드한 상상력을 발휘하기 전에 일러주셔야 합니다. 백부장은 큰아버지라는 뜻이 아니라 백 명의 로마군병 장군, 고급지휘관입니다. 이 고급지휘관은 십자가에 못 박는 게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처럼 죽는,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하나님 아들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이 한참 붙어서 죽었거든요. 요한복음 19장 보세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그 조롱을 일삼았던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란 말이에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오라고 쿡쿡 찌르고 조롱했던 군병의 지도자가 백부장입니다. 이 백부장의 양심에 피가 일곱 번 뿌러졌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백부장의 양심에 피가 일곱 번 뿌려진 사건, 이건 로마의 양심에 잔악한 영적 종교적 감수성이 파괴된 인간의 양심에 피가 뿌려진 겁니다. 이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생명의 감수성이 파괴된 자에게 일곱 번 피 뿌려서 악한 양심을 착한 양심으로 만들어주는 일을 하는 곳이거든요. 이 일을 우리가 너무 못하죠. 교회는 악한 양심을 피를 뿌려서 착한 양심으로 만들어줘야 하거든요. 이건 예수님이 피를 뿌리는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니까 여기가 오늘 우리가 탐구해야 할 본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이냐? 예수가 저주 받은 자리에서 죽은 그 죽음은, 예수의 그 피는, 195장 우리가 불렀죠? 예수의 피는 백부장의 양심에 일곱 번 뿌려져서 백부장의 양심을 회복시키는 구원사건이 됐습니다. 이 피를 예수님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 요한복음 19장 34절에서 말한, 그 물과 피를 우리는 요한일서 5장 5-8절, 고린도전서 12장 13절 등에서 성령을 피라고 말해요. 중요합니다. 예수 옆구리에서 나온 피를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죄를 저주받아 죽는 죽음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를 먹는 순간 내 죄악의 속박력이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너무 신비한 동시사건입니다. 1979년 10월에 제게 있었던 사건입니다. 로마백부장 같이 악한 양심으로 살아가던 저에게 일곱 번 피가 뿌려지던 그 순간에 제가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정녕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걸 그 날 확신했습니다. 79년 10월 17일은 성령이 저를 일곱 번 세차게 감동시킨 사건입니다. 피를 마신다, 이 말은 똑같은 말입니다. 성령을 마신다는 말과 같고 또 다른 말로 성령을 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2절 보니까, 로마백부장이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듯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일곱 번 피뿌림을 일으켜 우리 죄, 우리 인간위에 있는 저주가 해소되고 소거되는 날이다, 그게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죠. 십자가에서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은 우리 피가 일곱 번 뿌려지는 사건과 같기 때문에, 이 말은 속죄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느끼는 사람에게 라는 뜻입니다. 속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피 뿌림의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속죄의 피 뿌림이 일곱 번 일어났을 때 절정의 사건, 절정의 계시의 섬광을 받아 죄 사함을 받으려면 내가 하나님께 속죄의 피 뿌림을 간절하게 요청하는 사건은 필요조건입니다. 충분조건 아닙니다. 내가 깨끗해지고 싶다, 내가 정결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피 뿌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로마백부장 양심의 갈망의 깊은 곳을 터치한 사건이 피 뿌림의 사건이고, 성령의 사건이거든요.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오느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니까, 예수가 살아났다, 이 말은 예수가 십자가를 못 박은 사람에게는 무슨 사건입니까? 몬테크리스토퍼 백작 알죠? 세 사람의 친구가 한 친구를 깊은 굴로 집어 던지죠? 그리고 그 아내를 유혹하죠. 그런데 이 사람이 이름을 몬테크리스토퍼백작으로 이름을 바꿔서 나타나죠. 너무 통쾌하죠. 몬테크리스토퍼 백작을 읽으면서 저는 어렸을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습니다. 교회는 안 다녔지만, 제가 어렸을 때 선악의 질서가 무너진 사건, 이 스토리를 읽으면서 비관주의자가 됐습니다. 착한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보물이 있었는데, 마귀할멈이 와서 뺏어갔습니다. 아주 심술궂은 할머니가요. 그 착한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있던 개와 고양이가 마귀할멈 집에 가서 되찾아오는데 개와 고양이가 동역을 잘 하는데, 개가 헤엄을 치고 고양이가 그 위에 타서 입에 보물을 물고 있는데, 개가 강을 건너다 보물 잘 있나 묻습니다. 대답을 안 하고 있으니까 계속 흔들다가, 가져왔다, 하는 순간 보물이 물에 풍덩 빠지는 순간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때 저는 그걸 읽으면서 너무 큰 충격이 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세상에 대한 비관이 생겼고, 그런데 더 비관은 이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고양이는 안방에 살고 개는 바깥에 사는 비참한 운명의 갈림길이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문학을 하면서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가졌는데, 몬테크리스토퍼 백작을 어렸을 때 읽으면서, 부활, 그때 부활이라는 말은 몰랐습니다. 몬테크리스토퍼 백작의 통쾌한 카타르시스 대반전, 그건 너무나 나에게 살만한 가치가 있구나, 나는 어렸을 때 그걸 읽고 기독교적 반전을 경험했습니다. 어렸을 때 그런 것 말고는 큰 사건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죽인 자가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하죠? <햄릿>에 보면 자기 어머니를 차지한 숙부가 왕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혼백이 햄릿에게 자꾸 나타나요. 전설 따라 삼천리와 똑같습니다. 원수 갚아라, 그 혼백을 보고 삼촌이 죽지 않습니까? 살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렸는데 그 웬수가 다시 살아났단 말이에요. 무슨 길만 있는 거예요? 다시 죽이거나, 다시는 살아나지 않게 죽여버리는 방법이 있고, 아니면 예수 앞에 나가서, 어찌할꼬, 양심에 찔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소리쳤단 말이에요. 그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다시 말해서 찔린 자, 예수님의 십자가 저주 받은 죽음에 내 죄의 일부가 예수에게 전가되어 예수의 육체가 십자가의 저주 받은 죽음을 받았던 내 죄가, 삭개오 같은 내 죄가, 나의 배제와 탐욕과 이웃배제의 삶이, 나의 간음자의 삶이, 나의 흉측하고도 흉악한 죄가 예수에게 악담과 오명을 뒤집어씌웠고, 그래서 예수가 못이 박혔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장면은 내 죄 때문이라고 찔리는 사람에게 성령이 선물로 오는 거거든요. 십자가에는 예수의 육체가 산산조각 나고 찔리는 사건이 일어났고, 또 예수 믿는 자의 양심에 피가 뿌려짐과 동시에 예수 믿는 자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with the christ입니다. 도대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내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이게 로마서 6장 3-4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십자가에서 일어난 마지막 일이 뭐죠?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일어났어요. 우리는 예수 십자가 안에서,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왜 예수를 스데반처럼 돌로 쳐 죽이지 않고 꼭 나무 십자가에 달아서 죽였을까? 로마제국의 사형틀인 십자가대에서 예수를 못박아 죽였을까? 왜 그랬을까? 여러분 알고 계시죠. 제가 한 번 한 건 아니지만 이건 여러 번 들어야 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때문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르호탈린 느들라토 알 엣츠 키 클랄라트 탈리 엘로힘, 이렇게 돼 있습니다. 르호탈린 나무에 달아놓지 마라, 느들라토 그의 시체, 키, 왜냐하면, 나무에 달린 채 새 하루를 맞이하면, 새로운 창조의 새날이 시작될 때 시체가 새날을 맞이하면 안 된다, 그건 하나님의 새날 주시는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모욕이 된다, 이런 거예요. 예수를 나무에 매달아 죽인 목적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의 죽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면 예수와 갈릴리 민중사이의 유착관계는 산산조각나겠죠? 프랑스 작은 해변도시에 아주 마음씨가 착한 유리세공업자가 살았습니다. 이 유리세공업자는 전설적인 기술로 벨기에서 유리를 수입해 검은 유리구슬 제작의 달인입니다. 몰락하던 도시를 검은 유리세공업으로 일으켜서 번영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그 사람이 너무 착해서 사람들이 시장으로 뽑았습니다. 이름을 몽페르라는 시장으로 뽑앗더니, 그 가운데 독사와 마귀 사마귀 같은 눈을 한 사람이 19년 전을 회상하면서 자기가 유치장에 쳐 넣었던 죄수, 장발장 생각이 났습니다. 장발장 같은데 이름이 다르네, 19년 전에 감옥갔던 장발장과 이 사람이 동일인 임을 알기 위해서 쟈베르 형사가 계속 캐내고, 마침내 그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했던, 이름을 바꿔서 새 출발하려고 했던 이 사람의 인생을 다 파괴해버립니다. 다시 감옥갑니다. 장발장의 모든 것을 비신화화해버립니다. 그 도둑놈이네, 결국 우리에게 크게 도둑질 하려고 착한 척 했구만, 하면서 모든 시민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과 같이 예수가 했던 모든 선행은 무엇이 됩니까? 악마의 힘을 빌어서 했다네, 손 안 씻고 밥 먹을 때 알아 봤어, 능력은 받았지만 성질은 더럽다더만, 그리고 그렇게 욕설을 잘 한다면서, 마태복음 23장 보래, 독사새끼는 예사로 말한다면서 손도 안 씻고 심지어 창녀랑 같이 밥 먹었대, 이러면서 온갖 예수의 나쁜 버전의 악플을 적으면서 예수가 저주 받아 저렇게 죽었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방법인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민중들은 돌아갔고, 갈릴리의 봄은 찾아왔고,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됐는데, 성공했습니다. 저주 받은 자의 죽음을 죽은 예수는 더 이상 반응 없이 죽었습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둘째날이 지났습니다. 셋째날이 됐습니다. 셋째날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이 모자라 남은 향을 더 집어넣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 자매님이 향을 준비해서 무덤 근처에서 오열하고 있는데, 숙직 아저씨한테 과자 좀 사주면서, 아저씨 숙직하러 들어갈 때 이것 좀 넣어주세요,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돌이 떡 치워져 있고 안에 들어가보니 옷은 벗어져 있고 아무도 없는 겁니다. 뒤에서 보니 예수님이 성형수술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음성은 똑같고 외모는 상당히 동산지기처럼 보이는데, 윤곽이 안 잡힐때 갑자기, 마리아여 하는 소리를 들을 때 목소리는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니 예수님이 광채 가운데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났다, 이걸 보여줬는데, 이 말,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인류운명을 바꿀 중요한 진실이 산헤드린 법에 의하면 법정 증언능력이 없는 여자에게 전달됐다는 겁니다. 너무 쓰라린 겁니다. 여자가 이 말을 해야 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걸 알겠죠? 누가복음 2장에, 목자가 들판에서, 노엘 노엘, 저 들판에 있는 목자, 그 목자는 동성연애자 짐승과 교합하는 자 문명 바깥에 쓰러진 자, 여자와 목자는 법정에 설 수 없습니다. 여자와 목자는 아무리 증언해도 효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목자 입에, 여자 입에 인류 운명을 결정할 가장 중대한 증언을 진실을 맡겼다는 말은 하나님은 이 시스템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려고 작정하셨다는 말이죠. 여자의 말에 부활사실이 최초로 위탁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몸을 만진다고 예수님과 저녁식사 한다고 부활신앙이 생깁니까? 아니에요. 예수님이 여러분 꿈에 여러 번 나타났다고 부활신앙이 생기는 것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언제 부활했다고 믿었어요? 1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을 들었을 때, 2 웃통 벗고 10미터쯤 헤엄쳐가는 갈릴리 그 새벽에, 3 생선장수 집에서 옥신각신 할 때, 4 오순절 성령을 받고 마음에 존엄을 받고 요엘서 28장 32절이 생각났을 때, 몇 번입니까? 4번입니다. 이렇게 암시를 줬는데도 2번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우 비극적인 사람입니다. 답은 4번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악한 공교육 선생님들은 대개 4번이 답인데도 1, 2번에 유사한 답으로 바람을 잡아 많은 어린 아이들을 실족시킵니다. 1,2번 오답으로 틀리는 것은 어린 시절 재난입니다. 저도 많이 틀려봤기 때문에 압니다. 저는 선생 되고 나서 1.2번에 많은 답을 줬습니다. 얼마나 1,2번에서 많이 틀려 넘어졌어요. 답은 4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보아서 되지 않고, 오순절에 성령의 확신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요한복음 15장 26절, 요한복음 16장 7절 세 구절에 의하면,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서 이 세계를 통치하는 만왕의 왕 만왕의 주로써 공식 업무를 시작할 때 하는 일이 바로 성령을 보내주는 일이다, 성령을 받아야만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통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믿습니까?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 승천하는 일이 일어났고, 우리에게 무제한적 죄 사함의 선포가 일어났고, 한 번 열린 성소 휘장은 닫히지 않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차별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겁니다. 79년 10월17일에 제가 일곱 번 피 뿌림을 받고, 박득훈 목사님이 설교이 할 때였습니다. 김만석 목사님 박득훈 목사님 김대식 목사님, 세 분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참 젊을 때입니다. 박득훈 목사님이 53년생이니까 79년에 몇 살입니까? 박득훈 목사가 스물일곱에 요한일서 설교를 하는데 제가 그 자리에 대학교 1학년 때 있었습니다. 김만석 목사님 설교 박득훈 목사님 설교 김대식 선교사, 20대 중반 신학도 안한 분들이 전한 메시지를 제가 전한 겁니다. 그분들 아무도 그때 신학 안 했습니다. 그 요한일서 2장 15-17절 설교, 그 성경을 읽어주는 그 순간에 저는 피 뿌림이 임했고 성소휘장이 찢어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정확하게 그 깨달음이 저에게 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져서 무릎 꿇고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완전히 새사람 됐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지금 같은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제게 백부장 같은 제 마음에 일곱 번 피를 뿌리는 사건이 일어나게 했기 때문에, 성령 충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우편 보좌에 앉으심과 세계통치에 확신이 안 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지 않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를 많이 모으게 됩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비극적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자기가 죄 사함을 당하고 자기 양심이 세척을 당해본 사람들은 세계 만민의 죄를 용서하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기대가 생겨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제가 이걸 경험하고 나니까 제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기숙사에 같이 살았는데, 제가 놀랐는데 이 친구도 같이 놀란 겁니다. 어제까지는 같이 신림6동 소줏집에 같이 가고 무악소주 먹으면서 인생을 논하던 문학친구입니다. 어제까지는 똑같았습니다. 정호태 라는 친구와 함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17일 이후로 바뀌니까 이 친구도 덜덜 떨고 저도 떨었습니다. 김회권이 왜 저렇게 바뀌었나? 하면서 김회권 구출위원회를 구성하여 저를 구출하러 파견된 사람이 그 친구인데, 그 친구는 구출 특별사명 받고 2년 만에 부천서울신학교 수련회 때 그 여름에 바뀌었습니다. 전부 다 바뀌었습니다. 또 한 친구는, 회권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해, 이런 편지를 길게 썼습니다. 물론 다 바뀐 게 아니라 아직도 완악하게 안 바뀐 사람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 십자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표면 너머에 깊은 심층에 하나님의 휘장을 찢어주시는 사건, 무제한적 영접사건, 무제한적 죄 사함 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말해서 그 사건의 고민, 그 사건의 효력을 보면 우주 천지에 가득 차 있고, 대한민국 신촌 대현동 7-3 주부마켓에서 일어났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동일하게 성전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의 재현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향에서 백부장 같은 사람이 예수의 그렇게 죽으심을 보고 그 심령이 세척되고 갱신되어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바지하는 많은 일꾼들이 생기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십자가상에 일어난 이 기막힌 구원의 역사가, 가향지체들과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악한 양심에 피 뿌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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