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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강의 2-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의 배타적 주장과 그 함의)

by 【고동엽】 2021. 11. 27.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의 배타적 주장과 그 함의)


제가 60-70분 정도 강의를 하고 20-30분은 질의응답시간을 갖겠는데요. 강의 도중에 질문하셔도 되겠습니다. 저한테 질문해주면 갑자기 그분과 제가 친척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모종의 적개심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질문해주면 우리가 일촌이 되었다는 걸 느끼거든요. 지난주에 두 분이 제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아주 좋은 질문을 하셨는데, 제가 강의 중간 중간에 그분들의 질문에 응답을 섞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은 너무 오해를 많이 받는 본문입니다. 오늘 제가 우리 한국 사람들이 오해하는 오해의 정체를 파악해보고 어떻게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때 예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를 기독교를 말미암지 않고 라고 해석한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만유의 창조자, 로고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4절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엔 아르케 호 로고스, 호 로고스 프로스텐 돈,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이런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태초 이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이 그리스도, 하나님 말씀이, 호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왔습니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나사렛 예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은 이사야 55장 10-11절, 집에 가서 읽어보십시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문장들입니다. 예언자들은 그들 생애에 일부분 동안 하나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아모스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기간인 1-2년 사이입니다. 1-2년 사이에 아모스가 특정한 순간에 쏟아낸 말씀만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BC 738-701년 까지 37년 동안 말씀을 분출했는데 항상 말씀만 한 게 아니라 가끔은 하나님 말씀 아닌 말도 많이 했습니다. 이사야는 밥 먹고 가자, 마할살렐 하스바스야 치즈 먹으러 가자, 이런 건 하나님 말씀 아닙니다. 자기 아들이 마할살렐 하스바스였거든요. 그 뜻은 노략이 속히 임함, 약탈이 민첩하게 일어남, 이름이 너무 엽기적이죠? 약탈이 속히 일어남과 노략이 속힘 임함아 밥 먹으러 가자, 이런 건 하나님 말씀 아닙니다. 스얄야숩, 남은 자만 돌아가리라, 스얄야숩아 우리 멱 감으러 가자, 예루살렘에 산양 노루 잡으러 가자, 이런 것은 전부 다 하나님 말씀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했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말씀이 아니라 그의 생애 특정한 순간, 아하스 왕을 만날 때, 수로 출장소 앞에서 아하스 왕을 만나 한 30분 동안 분출된 말씀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분열적이고 파편적인 대언자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다는 이 대언을 전부 다 합하면, 모든 예언자들의 대언행위를 다 합하면 굉장히 큰 순종의 집단 인격이 나오겠죠?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 아모스를 다 합한다면, 하나의 합성 인격이 가능하다면 매우 순종적인 말씀의 종이 나오겠죠? 안 그렇겠습니까? 이사야 엘리야를 적분하세요. 무한대 시그마로 다 적분해요. 합해서 다 적분하면,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세례요한까지, 이 예언자들의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순종을 무한대로 합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즉 행동거지 말 모든 것 전부 다 예수는 하나님 말씀이에요. 그런 뜻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전한 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에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온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이 나사렛 예수의 육신이 되기 전에 뭐하고 계셨어요? 영원 전부터 태초에 계신, 영원 전부터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1장 2절, 그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예수가 되기 전까지는 만물을 창조한 창조자기 때문에 만물 안에, 제가 써 놓는 건 적어주십시오. 로마서 1장 19-22절, 사도행전 17장 22-24절, 27절, 특히 27절에 이런 게 나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안에 그 신성이 나타나 있다는 거거든요. 만물 안에 하나님 지으신 신성, 만물 안에 그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7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만물 가운데 계시는데 그 만물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물 안에 있는 하나님 신성의 흔적을 발견하여 찾아가도록, 우리 하나님은 일종의 숨바꼭질 하셨다는 겁니다. 이사야 45장 15절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숨어 계십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자유를 무한대로 늘려주시기 위해서 창조주가 만물 가운데 자기를 은닉하시고 숨어계시는 겁니다. 만물 저편에 숨어 계세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피조물의 자유를 위해서,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가 육신이 되어 오기 전에 만물을 창조하시는 창조활동에 이바지했고, 이바지한 그만큼 보이지 않는 신성의 능력이 만물 안에 감춰져 있고 인간의 만물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가 만물 안에 희미하게 또는 명료하게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무엇인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무엇인지 아로새겨 놓았습니다. 그걸 더듬어 찾아가기 때문에 귀납적이고 파편적인 경험을 누적해가면 인류가 드디어 놀라운 결단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인류가 더듬어 찾아서 이룬 결론은 하나님은 마음씨가 엄청 좋다는 것, 우리 세계에 나오는 모든 고등종교가 하나님을 인자와 사랑이 많은 하나님으로 파악했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결단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각성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쓰레기 같은 경험이 많고, 부조리한 경험이 많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혼돈과 무질서가 많은 세상 경험을 하고도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 자비로운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피조물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기도가 가능한 하나님,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땅에 있는 인간이 막 소통하면 그걸 들어주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인간이 더듬어서 발견했습니다. 이런 건 할렐루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라는 게 아니라 온 인류가, 기독교인들이 인류가 발견한 하나님 지식이 보편적으로 우리가 증거하려는 하나님과 거의 같다는 사실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왜 놀랍냐면 하나님을 더듬어서 찾아가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감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인들이 하나님이란 말을 쓰진 않지만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가 자비라고 하는 것, 이것을 굉장히 감사해야 합니다.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가 폭력이라고 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우주의 궁극적 진리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란 사실에 근접하게 또는 유사하게 접근한 것은 하나님께 늘 감사해야 할 사실, 우리가 늘 세계의 고등종교를 보고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결국은 전 세계 만민 가운데 하나님을 더듬어 발견케 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호감은 비슷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일단은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큰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의 배타적 주장을 보면, 가장 배타적 주장이 요한복음 4장 14-16절, 두 번째 배타적 주장이 사도행전 4장 12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두 구절, 정말로 확실하게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이건 우리 인간의 배타적 권력욕과 매우 제휴하기 쉬운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아주 권력적인 배타적인 욕심과 매우 잘 제휴할 수 있는 본문인데, 요한복음 4장 14-16절,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다. 신명기 6장 4-5절, 출애굽기 20장 3-6절입니다. 출애굽기 20장 3-6절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신명기 6장 4절부터 유일신 신앙고백, 이 모든 것들은 굉장히 배타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배타적 주장이 누구에게 유익을 끼치는가 봐야 합니다. 배타적 주장이 용납될 수 있는 딱 한 가지 찬스는 그 배타적 주장으로 만민에게 유익을 끼쳐야 합니다. 만민에게 유익을 끼치는 배타적 주장은 만민이 용납할 수 있는 배타적 주장이죠?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요나가 배를 타고 갔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니느웨성이 망한다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어디로 갔습니까? 다시스로 갔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다가 배가 뒤집어졌습니다. 그 뒤집어진 배를 탔을 때 여러 신을 다 불렀습니다. 모든 선원들이 자기 신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요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재난은 그런 신들에게서 온 게 아닙니다, 이 재난은 나를 부르신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 하나님이 보내신 겁니다, 배타적 주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쓸데없는 일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나를, 불순종한 예언자인 나를 묶어다가 인당수에다 집어 던져야 합니다, 그렇게 세게 배타적 주장을 하니까 처음에는 긴가 민가 하던 사람들이 이 요나의 배타적 주장, 야훼 하나님만이 참신입니다, 이 광풍의 원인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이 원인 제공자입니다, 여러분 내말 들어야 합니다, 기분 나쁠지 몰라도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이 광풍을 보내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면서 계속 배타적 주장을 하고 딴 신들은 전혀 비즈니스가 없었습니다. 긴가 민가 할 때 요나가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니까 선원들이 할 수 없이 요나를 묶어다 집어던졌습니다. 그랬더니 풍랑이 잠잠케 됐습니다. 이런 경우에 배타적 주장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가 언제 배타적 주장을 해야 하느냐면 요나 같은 입장에서 배타적 주장, 즉 기독교가 배타적 주장을 해서 세상의 광풍을 잠잠케 할 때만 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이런 배타적 주장을 해서 내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할 때 주장하면 오해를 받습니다. 아닙니다, 이 금은 우리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금은 기독교인들이 다 가져가겠습니다, 이 유전은 우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이익과 비슷한 욕망과 관련된 배타적 주장을 하면, 즉 자기 종교권력을 신격화하기 위해서 배타적 주장을 하거나 특정 종교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배타적 주장을 하면 오해받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월등하게 위대하게 만드는 주장이 절대 아니라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배타적으로 복종해야 할 의무를 주는 말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다른 종교보다 내가 낫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으면 예수님 말에 죽은 개처럼 납짝 엎드리는 배타적 충성심과 배타적 순종의 근거가 됩니다. 이 말뜻이 무엇인가를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기 전에도 만유의 창조자입니다. 만유의 창조자이니까 만유의 창조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명료하게 알려졌지만 비이스라엘 민족, 하나님의 선민역사, 하나님의 예언자 역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으로 그리스도를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놀라야 할 것은 왜 세계 고등종교가 지향하는 바가 비슷할까? 왜 세계 고등종교가 사랑과 자비와 기독교가 원하는 가치를 똑같이 주장할까? 그걸 보면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많이 달라야 한다고 주장을 하지 말고, 그 유사성을 주목해야 해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이 이방인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신성의 파편과 흔적을 비슷하게 계시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일단 그걸 전제하고 나서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서 선보일 것은, 내가 진리를 다 가졌다는 선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참 진리를 가졌기 때문에 이 참 진리에 대한 복종의 배타성을 보십시오, 나는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대책 없이 한 점의 타협 없이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배타적 주장을 보십시오, 저의 배타적 주장은 사실상 저를 다른 종교가 따라 오지 못할 만큼 배타적인 선량함과 배타적일 정도의 충성심과 배타적일 정도의 지극히 거룩함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여러분을 멸시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제 이 주장의 참 진면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배타적으로 순결한 순종을 드리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 이 배타적 주장은 종교분쟁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모든 이방종교에 폭풍과 같은 감동을 일으키는 말이 돼 버립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분이 오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계신 말씀이었습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특정지역의 문화 역사를 신격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지 않고, 특정지역과 종교의 옷을 입었지만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진 진리입니다. 그래서 피터 엔즈라는 사람이 쓴 책 중에서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돼 있습니다. 혹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십시오.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영감설> 얇은 책입니다만, 여러분 대부분에게 도움이 될 책입니다. 피터 엔즈, 웨스터민스터 신학 교수였고 이 책 쓰고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잘렸습니다. 그 책이 지금 우리한테는 너무 합당한 말이고 장신대나 숭실대에서는 합당하게 쓰일 수 있지만, 웨스터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저 책 나오고 나서 바로 잘렸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김구원입니다. 저의 ESF 제자였던 김구원 박사가 번역을 했는데, 얇은 책인데, 여러분이 가졌던 질문이 다 대답되어 있습니다. 이런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자 아들이었는데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께서 팔레스타인 농부의 얼굴을 갖고 올 수밖에 없듯이 성경은 고대메소포타미아에 떠돌던 창조설화 등 여러 가지 모든 이미 기 존재하던 문서들을 적당하게 이용하여 성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합니다. 그래서 고대 근동의 창조설화였던 아트라하시스나 길가메시나 이런 걸 이용했다 해서 성경의 영감설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올 때 인간이 되려면 특정종교의 피부색을 가져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농부의 얼굴을 가지고 왔단 말입니다. 팔레스타인 농민의 얼굴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얼굴이 아닙니다. 피렌체에서 보던 그런 귀공자 스타일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농민이에요. 키가 1미터 58센티미터 정도 되는 얼굴이 주글주글한 남자로 오셨단 말이에요. 이런 예수님이 특수성의 옷을 입고 오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절대적인 하나님 말씀이 상대적으로 특정문화를 입고 왔다는 것, 특정 종교색을 띄고 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절대적인 하나님은 절대로 상대적인 옷을 입으면 안 되는데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세밀하고도 완벽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상대적인 옷을 입는 그 모험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개미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해요. 제가 파주시 심학산 제18번 군막사 옆에 있는 개미연방공화국 다섯 개를 알고 있는데 개미연방공화국에 6천 마리의 개미가 살고 있는데 거기에 복음을 전하러 가야 합니다. 제가 군화를 신고 등산화를 신고 이렇게 큰 몸으로, 개미야 너희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 북한이 쳐 내려온다, 도망가자, 이런 메시지를 전할 때 제가 개미들에게 큰 사람이 되어 소리치면 개미는 한 마리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수 천 마리 있는 개미에게 말을 하려면 개미가 돼야 합니다. 개미가 되어 페르몬을 터트리면서 개미끼리 말을 하면서 보고도 해야 하고, 개미 연방시스템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개미를 아무리 보지만 개미와 저 사이에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도 못 알아듣고 무존재로 여기고 갑니다. 지금 고양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도 마찬가지고 고양이와 개 사이에 우리가 들어가려면 성육신을 해야 합니다. 고양이와 개에 대한 진실은 성육신 해야지, 어른이 되어 소리치면 안 됩니다. 이 고양이가 우리 집에 한 마리 있는데, 이놈도 절대로 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저에게 올라오고자 할 때 제가 안 돼 해도 한 번도 알아듣지 못하고 올라와서 기어코 방해를 하고 갑니다. 그러면 제가 목덜미를 잡고 유배를 시켜야만 가지, 말은 못해요. 그러면 제가 고양이에 대해서 고양이 시선으로 말하기 전까지는, 우리 하나님이 절대자로 남아서 절대적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상대성을 포기하려면 저 하늘 위에서 히브리말로도 해서는 안 되고, 영원히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해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의 절대성은 유지하지만 인간에게 세밀한 묘사는 안 되니까 하나님은 상대성이라는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서쪽 비옥한 반달형 끝인 이스라엘에 와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적인 옷을 입고 특별한 인종이 된 그 하나님이 말한 말이 보편적인 메시지가 되고 절대적인 진리가 됐다고 설득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진리를 전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절대적으로 겸손하게 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자기를 유익하지 않게 해야만 그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그래도 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은 기독교를 영원히 비절대적 종교, 권력 포기적 종교, 지극히 자기를 비우는 종교가 되도록 만드는 말입니다. 절대로 타 종교에 대해서 안일하게 오만한 확신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 말뜻은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의하면 누구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때 나는 누구입니까? 팔레스타인 나사렛 예수, 158센티미터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가진 팔레스타인 농민의 얼굴을 가진 예수, 이때의 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파견된 하나님의 엄청난 무한자비로우신 마음입니다. 무한자비로우신 하나님 마음이 아니고는, 이 말입니다. 무한자비로우신 하나님 마음이 아니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재호형제와 창기형제 나와 주십시오. 제가 말하는 걸 쉽게 표현해보려고 합니다. 재호형제는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입니다. 창기형제가 아버지 품속에 있던 아들입니다. 독생자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성자가 재호형제 죄인을 구하러 갑니다. 독생성자가 아버지의 완벽한 자비를 인카네이션해서 갑니다. 이 독생성자는 아버지 마음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이 독생성자를 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은 아버지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초청 아니고는 아버지께 아무도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그런 말입니다. 영국에서 유학생 초청하지 않으면 버킹엄 가면 18일간 고립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초청하지 않으면 궁에 가면 안 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1년에 2번 초청합니다. 초청한 사람, 엘리자베스 여왕의 호위가 담겨 있는 invitation letter를 말미암지 않고는 버킹엄으로 들어가면 바로 18일간 구류를 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뜻은 정확하게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차별적인 구원초청이 아니고는 아버지께 스스로 들어가서 구원상태를 얻거나 누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종교의 권력기관을 해체하는 말입니다. 불교도 해체하고 기독교도 해체하고, 교황이나 주교나 신부나 목사나 누구도 구원을 못하고 아버지의 일방적인 초청을 받은 사람만이 아버지 집에 간다는 동어반복적인 말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적인 구원의지와 초청없이는 누구도 스스로 제발로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없다, 이런 말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영접한 사람들은 내가 초청 받은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아버지 집에 오라고 초청해서 내가 그걸 영접하면 아버지집에 가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면 내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1-12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성자임을 믿는 자마다,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런 말이거든요. 요한복음 14장 6절을 아무리 읽어도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의 기득권, 구원독과점 프랜차이즈 권리를 다 무효화시키는, 하나님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초청하는, 일방적으로 초청받은 사람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지엽적인 기독교라는 이 기관 없이도 속히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왜 기독교회를 안 다녔는데 구원했습니까? 라고 말할 권리가 없는 겁니다. 왜? 교회 다닌 사람만이, 세례 받은 사람만이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순간 유아들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해요. 일단 유아들은 자기 자발적으로 교회 다닌 게 아니라 엄마 포대기에 싸여서 간 거예요. 그래서 침례교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침례교는 자기 입으로 주라 고백한 사람만 구원받는 거예요. 정박아들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정신지체아들 구원 받지 못합니다. 아무도 못합니다. 어떻게 구원받아요? 이렇게 되면 큰일납니다. 어린 아이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구원초청 없이는 아무도 올 자가 없다는 말은 아버지가 초청해주지 않는 한 올 수 없다, 그런 뜻 정도밖에 안 돼요. 이건 절대로 절대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낫다는 단순한 명제를 표현한 게 아닙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늘도성>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성 어거스틴부터 C.S. 루이스까지, 대부분 정통 신학자들은 타종교의 구원이 전혀 없다거나 이방 사이에는 전혀 구원을 받은 사람이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한국의 일부 목사들만 무조건 교회 안 나오면 전부 지옥간다고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지, 그건 진짜 너무 과도한 확신입니다. 교회 안 나오면 구원 못 받는다는 건 과도한 확신입니다. 성 어거스틴 부터 C.S. 루이스까지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당신의 구원받을 백성을 설령 예비해놓았다고 해도, 교회가 왜 교회 안 나온 사람이 천국 와 있습니까? 항의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거스틴은 누구 예를 들었느냐면 욥기를 봐라, 욥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에돔 사람이었다, 성전에 예물도 안 드렸다, 욥은 구원 못 받았느냐? 욥 봐라,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고넬료를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기서 종교다원주의로 가면 안 됩니다. 종교다원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모든 종교의 기득권을 똑같이 등가로 인정하니까 나쁜 겁니다. 왜? 종교는 아무도 구원을 못 합니다. 불교도 구원 못하고 심지어 기독교도 구원 못하고, 요즘 기독교에 지나치게 밀착되면 정신 상태가 매우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오해 받습니다. 왜? 교회가 이미 윤리적인 빛과 소금의 지표를 상실했기 때문에 교회 충실한다는 말은 그런 부조리하고 타협했다는 뜻이니까 정신이 말짱말짱한 사람은 교회로부터 배척받거나 교회로부터 거리를 두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지나치게 가까운 사람들은 그런 교회 안에 있는 부조리를 용납한다고 오해를 받기 때문에 양심이 약간 오염된 사람이라 오해를 받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종교다원주의는 종교들끼리 서로 담합하여서 일종의 카르텔 비슷하게 얘도 맞고 나도 맞고, 시장을 분점하고자 하는 음모입니다. 어떤 종교도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등산로 비유도 틀렸습니다. 등산 가는 길은 다 달라, 저는 그것도 틀렸다고 봅니다. 왜? 불교 회교가 일단 등산로가 아닙니다. 기독교만 오래 믿은 사람들은 정신이 매우 보수적이거나 매우 무기력하거나 매우 현실적으로 바뀝니다. 교회 오래다니는 사람 특징은, 교회 오래 다니면 정신이 맑아지는 게 아니라 정신이 흐려져서 타락합니다. 이런 한국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말은 이런 한국교회에 반발도 한 번 못하고 교회로부터 축출도 안 당해보고 배회를 안 했다? 그럼 상상력이 없거나 인문학적 사유가 전혀 희미하게 발달이 안 된 사람이에요.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참는 것은 특성이 상당히, 정신이 썩은 겁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많은 경우가 너무 과도한 오만한 확신에 빠져 있는데, 기독교가 절대적으로 구원을 준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교회가 그 구원의 방주라는 확신을 심어주는데, 이건 좀 지나치다고 봅니다. 저는 목사지만 목사가 구원을 준다? 이건 완전히 지나친 비약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을 통하면 약간 스텝, 말단 스텝정도 됩니다. 아무리 목사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려고 해도 절대로 안 됩니다. 저 여러번 해봤습니다. 제가 구원하려고 애를 쓴 사람은 교회 바깥으로 나가버립니다. 그런데 제가 관심을 안 가진 사람이 나중에 큰 동역자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올때 교인들이 제가 친근한 원소관계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가게 됩니다. 제가 무관심한 사람일 수록 그 사람이 신실하게 매이고, 어떻게 이런 원리가 생겨났는가? 저는 그걸 12년 간 실험을 해봤습니다. 12년내 똑같았는데 저 사람이 드디어 왔다, 하면 3개월에서 1년 사이에 가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처음 올때 악수도 안 하고 그냥 시큰둥하게 만났던 사람들은 계속 있어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일단 목회자가 점찍어 둔 사람들은 표를 내면 안 되겠다, 생각하게됐습니다. 저는 12년 동안 캠퍼스 미니스터리를 하면서 너무나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내가 호의를 베푼 사람일수록 전혀 그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마무리 짓겠습니다. 너무 오래 하면 힘들것 같습니다. 제가 마무리 짓기 전에 다시 한 번, 여러분 편견을 갖지 말고 성경을 읽어보셔야 합니다. 자꾸 성경을 읽어보셔야 선한 분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성전의 전매특허권을 싹 무시했습니다. 구원 전매특허권, 지금 우리 담배인삼공사가 전매특허권을 가지고 있죠? KT&G가 뭘 가지고 있어요? 내가 담배 함부로 만들면 안 되죠? 내가 몰래 양조장에 가서 밀주 만들어 팔면 안 되죠? 양조권을 전매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신탄진 담배를 재배해서 말아가지고 양목사님하고 핀다, 이러면 안 되죠. 담배인삼공사에서 전매를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일종의 구원전매 업체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다 무시한 거에요. 성전에 가지 않고 바로 앉은 자리, 침상에서 죄사함을 받아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한 행동은 너무나 거룩한 도발이었고 종교 파괴였어요. 예수님은 모든 종교에 대해서 급진적 종교비판을 하기 때문에 종교가 교회가 하나님의 항구적인 적입니다. 칼 바르트가 쓴 <복음주의 신학입문>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신학의 가장 큰 적은 하나님이다, 신학의 가장 큰 위협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 종교권력과 제휴한 신학을 무차별 공격하기 위해서, 그런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사람을 전혀 못 돕게 만들어서 신학 패러다임이 폐기되게 하신다, 그런 말을 했거든요. 오늘 날 하나님 나라에 가장 항구적인 적은 누구일까요? 회교가 아닙니다. 불교가 아닙니다. 성직자 집단입니다. 거대한 권력자 집단으로 조직이 돼버리고 고체덩어리가 돼버린 종교권력체 그 자체가 하나님의 가장 큰 적입니다. 오늘 날 성직자가 구원전매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성경해석은 틀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평신도가 해석해야 합니다. 적어도 평신도들은 자기 영업이익을 위해서 해석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칼빈이 누구입니까? 칼빈은 누구한테도 안수받지 않았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안수를 안 받았습니다. 아마 마틴로이드 존스도 안수 안 받고 몰래 칼빈을 향해서, 그 사람은 정규신학을 한 사람이 아니에요. 한국 60% 이상 영향을 받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칼빈 같은 경우는 자기가 처음 집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스트레스 받습니다. 우리 세계 5억되는 장로교인이 집사도 아닌 사람이 쓴 책을 가지고 수없이 교황 비슷한 사람도 나오고, 한국 교회를 구원할 사람은 칼빈 같이 집사도 아닌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왜? 성직자는 종교로 생활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비즈니스로 종교가 생활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공평타당한 선포를 못하게 됩니다. 구조적으로, 그래서 앞으로 제가 볼때는 한국교회는 직업을 가진 목사들이 월급 받지 않고 생활비만 받는 그런 교회가 많이 생길 거라고 보고요. 직업적인 성직자 그룹에게 만일에 신학과 신앙의 구원의 독과점업을 많이 떼어주는 순간 왜곡은 면할 길이 없다고 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는 타종교기 때문에 길게 말할 것도 없고, 불교도 지금 엄청나게 부패했습니다. 이슬람도 그래요.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거대한 성직자이기 때문에, 이슬람은 하나의 교단인데, 이슬람은 월급받는 성직자가 거의 없습니다. 이슬람은 지금 선교사가 142만 명입니다. 142만 선교사가 월급을 받지 않고 전부 다 자비량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슬람은 회당에 가서 아무라도 설교합니다. 이방인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무슨 약점이 있느냐? 이런 구조에서, 여러분 한번 보세요. 천국 데려다 줄 줄 알죠? 교회다니고 목사님 말 고분고분 들으면 적어도 우주선 탈 줄알죠? 혹성으로 갈 줄 알죠? 그거 말고는 뭐하러 헌금합니까? 헌금 낸 만큼 소비력이 약해지는데, 우리 한국교인들은 전부 다 구원을 받을 줄 알고 어쨌든 목사님이 아무리 타락해도 내 구원을 관장하는 분이라 하면 참아야 한다는 숙명론이 있습니다. 저 목사님이 아무리 도둑질을 하고 간음을 해도 일단 내 구원문제에 관한 우주선 티켓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내가 참아야겠다는 것이 우리 한국교인들의 구원의식입니다. 제가 볼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죽어서 어떻게 될지는 경험해봐야 합니다. 성경의 1%도 안 됩니다. 죽어서 어떻게 될지에 대한 건 1%도 안 됩니다. 죽어서 어떻게 될지는 1%도 안 돼요. 성경 아무리 찾아봐도요. 성경 대부분은 이 지상에서 어떻게 살아야만이 하나님과 함께 새 창조의 동산에 동참할 것인가에 대한 약속만 있지, 천국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너무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어서의 관심이 아니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죽자마자 예수 믿자 마자 바로 우주선 타고 천당으로 갑니까? 아니면 긴 세월을 삽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에서 긴 세월동안 살아가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죽어서 가는 천당에 관한 이야기는 암시적이고 비유적으로 돼 있습니다. 저는 한 가지 확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은 제게 있어서 적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값없는 거저주시는 절대적인 은총의 초청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절대적 초청 없이는 아버지 집으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고, 이건 목사의 구원전매특허권이나 교회의 전매특허권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나로 하여금 예수님께 더 가까이 붙어 있길 원하고 예수님 말을 진지하게 들으라고 했고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 독생자로 영접하도록 했구나, 그러고 보니까 결국 나에게 십자가를 지고 진리를 따르도록 압박하는 말이구나, 즉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비신화화고 비절대화하는 나사렛 예수 같은 사람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나를 인도하는 참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괄호하고 나,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십자가를 진 목사 외에는, 십자가를 진 교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이끌 사람이 없고 초청할 사람이 없다, 결론 맺습니다. 십자기를 진 성직자만이, 십자가를 진 기독교만이, 즉 끊임없이 자기 이익을 배제하고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배타적인 사랑의 사람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낼 수 있다, 아버지께로 가는 그 고속도로 생명길을 누가 내느냐? 아버지 때문에 자기를 비우고 육신을 입은 그 엄청난 자기 감화를 일삼는 그리스도인이 내는가? 2차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이 자리에 들어올 수 있게 하려고, 2차적으로,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도로스 데이라는 사람이 <고백>이라는 책을 썼는데, 오래된 외로움, 이런 뜻입니다. 이 책이 복있는 사람에서 나온 걸 보셨나요? 한 번 꼭 읽어보세요. 제가 거기에 원고지 100매 되는 긴 해설을 붙였습니다. 그걸 여러분에게 꼭 소개하고 싶어서, 이건 하바드나 프린스턴이나 예일이나 모든 신학교에서 신대원 1학년 때 읽는 책입니다. 두껍지 않아요. 이분이 히피 출신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 가톨릭에 귀의를 합니다. 가톨릭에 귀의하는 그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가 됐는데, 가장 먼저 뉴올리언즈에서 1년 동안 인턴 신문사 파트타임 신문기자를 할때, 미국 올리언즈에 와 있는 이민자들을 돌보는 가톨릭 교회의 교인들의 활동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너무 착한 마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번째 자기 옛날 10대 때 자기 친구 어머니가 가톨릭 교인인데 자녀를 놓고 그렇게 기도하면서 자기를 친절하게 해준 친절한 마음에 감화를 받았고, 마지막 피터 모린 이라고 하는 가톨릭 프랑스 농민철학자, 농부철학자, 스스로 공부해서 하루 종일 일 하고 신부님 집에서 하루 종일 머슴 살아주고, 임금은 신부님 서재에 가서 책을 마음대로 읽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머슴살이 해주고 신부님 서재에 마음대로 출입하는 권리가 삯입니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는 농민 피터 모린 아저씨의 그 착한 마음씨에 감화 받아서, 착한 그리스도인들에 감화 받은 그 마음이 가톨릭으로 이끌어가는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성 어거스틴은 어떻게 예수를 믿었느냐? 성 어거스틴이 9년 동안 마니교에 있었죠? 그리고 10대 후반에 아기오다테스라는 사생아를 낳습니다. 14년 동안 살았던 여인과 가정생활을 했는데, 14년 살았지만 결혼생활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먼저 죽습니다. 이 사생아를 낳았고 마니교에 빠졌고 방탕하게 살던 어거스틴이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가? 그 예수 믿는 과정을 <고백록>에서 자세히 썼는데, 세 가지가 원인이었습니다. 첫째로 성 어거스틴이 거듭나기 직전에 읽었던 아타나시우스가 쓴 성 안토니오 수도사의 전기가 있습니다. 두번째로 밀라노에서 수사교수역할을 했는데, 밀라노교회에 출입했던 암브로시우스라는 담임 신부님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을 때, 밀라노에 있는 그리스도인 수도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기도를 많이 한 게 아닙니다. 어머니가 매우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인데 마지막에 가서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자주 말하는 것은 안토니우스 수사의 삶과 밀라노에서 보았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충격적인 깨달음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는가가 전도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이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책보다 주장의 배타성을 자기 실천, 자기 다그침, 자기 개근의 배타성으로 신화하여 자기를 비신화화시키고 자기를 자꾸 쳐서 복종시키는 그런 의미로 배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엄청나게 끌어갑니다. 주장을 배타적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일으키고, 보통 이성과 양심에 반하는 반발심을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끌어가지 못합니다만, 그래서 예수님을 길과 진리요 생명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끌어갑니다. 대천덕 신부가 그런 사람 아닙니까? 대천덕 신부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치고 자기를 겸손하게 만드는 그 핵심구절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걸 타종교와 비교하지 않고 자기와 예수님을 비교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1959년 태백산에 예수원을 세웠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1년에 만명이 찾아가는 예수원의 창시자,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 그 말을 절대로 우리 자신의 실천, 우리 자신의 배타적 충성심, 배타적 순종들을 다그치는 말로 해석하지 않고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어설픈 우월감을 주장할 때 쓰면 곤란하다, 아닙니다. 모든 교회사에 한 가지 공통된 정의는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서 예수님의 길과 진리와 생명 앞에 납작 엎드린 사람 앞에 영적 파급력이 엄청 높고,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는 곳에 영적 자아가 형성된다, 그래서 끌어당기는 마그네틱 파워가 형성되고, 예수님께 바싹 엎드린 사람 옆에 영적인 마그네틱 파워가 발생해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끌어가는 힘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을 많이 할수록 많이 끄는 자력이 발생합니다. 이건 물리적인 법칙과 같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납짝 엎드리고 순종하면 내 주변에 예수님께 사람들을 끌어가는 힘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병 고쳐서 돈 벌었습니까? 예수님이 설교해서 집 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봉사로 일생 동안 자기 몸이 가루가 될때까지 계속 계속 사랑했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 예수님 몸에는 뭐가 납니까? 영혼을 끄는 힘이 거대한 사랑의 자석이 형성됐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강력한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귀소본능을 일으키며, 잘못 살아버린 우리 인생을 순식간에 급전 회개하게 만드는 힘이 있고, 예수님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삶, 예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겸손과 사랑,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만하고도 그릇된 삶의 방식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내가 걸어가 야 할 바른 길을 순식간에 전광석화처럼 알려주는 일종의 계시조명의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드린 것처럼 타종교에 대한 우월감은 실천과 순종의 배타성으로만 증명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핵심입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60분 다 됐습니다. 질문 받고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지난 시간 질문과 오늘 질문 다 해도 됩니다. 친척이 돼 주십시오. 안 해도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질문이 들 것 아닙니까? 코멘트 하실 것 있으시면 해도 되고요. 아니면 제가 충분히 말해주지 않은 걸 말해달라고 해도 되고요. 제가 구원론 강의하면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반발합니다. 제가 옛날에 목회했던 교회에서는 어떤 자매님이, 그러면 우리가 절에 다니는 것보다 좋은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교회다니는 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까? 예, 교회를 다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답했습니다.


Q 시시해도 괜찮죠?
김회권 저한테 모든 질문은 시시한 질문은 없습니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Q 교회 오래 다닌 사람에 대한 설명이 참 맞는 말 같은데, 매우 보수적이고 두 가지가 더 있었는데?
김회권 정신이 너무 타협적이고 오염돼 있고 교회 오래 다닐수록 오염돼 있고 사바사바해서 혁신적인 마음이 없고 패기가 없다, 전형적으로 잘못 다니면 그렇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게 아니라 잘못 다니면 그렇다, 이런 뜻입니다.
Q 맞는 말 같습니다.
김회권 OOO 집사님,
OOO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선민으로 선택해서 그다음에 율법을 주시지 않습니까? 거기서부터 시작이 됐는데, 그때 내용을 보니까 유대민족이 십계명 받고 난 후에,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믿음으로 의를 받음으로 해서 진리를 받게 되고 바울사도께서 그걸 가지고 우리가 예수님하고 연결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런 논리가 나오는데, 성경은 뒤로 가서 보니까 유대민족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순종하면 구원을 해 줄 것이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내릴 것이다, 라는 것을 구약성경에 걸쳐서 말씀을 해주시거든요. 그런데 신약에서 바울사도가 그런 논리를 가지고 기록한 초석을 그렇게 주신 걸로 알고 있는데, 거기서 의문이 생기고요.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방식이 혁명을 하시고 난 후에 율법, 말씀을 주신 것처럼 같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을 복음화 하셔서 복음을 주실 때는 분명히 만유의 구세주시니까 지구상에 있는 유대민족을 제외한 전 인류 또는 유대민족을 포함한 전 인류, 그런 의미에서 이미 혁명하셨기 때문에 당신이 피를 흘리면서 대속을 만인을 위해서 해 주신 것이고 복음을 주신 게 아닌가? 그다음에 믿으면 의로 칭함을 받는 것이고, 순종하면 하는 것이라는 건 당신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 하셨으니까 좀 전에 목사님께서 우리에게 설교하신 대로 행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회권 네. 대부분이 코멘트고 제가 하나만 정리를 해서, 최인석 집사님 말씀하신 게 네 번째 강의에 이신칭의가 무엇인지, 이런 로마서의 구원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것도 정리해보고 싶은데,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요청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나 제가 다니는 교회가 달라서 의사소통을 충분히 해야만 바로 제가 전한 강의 내용이 전달 될 것 같아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우리 최이석 집사님 앞에 했던 가장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나서,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주겠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안 주겠다가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구원을 영구적으로 누리도록 도와주십니다. 율법은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구원을 영구적으로 향유하도록 주는 선물입니다. 이게 신명기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율법을 줍니다. 이스라엘이 파라오의 채찍 아래 있을 때나 이집트의 채찍 아래 있을 때는 십계명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채찍에서 풀려나고 나서 시내산에서 자유인의 멍에를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늘 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거룩한 압박을 받는 건 율법의 멍에를 받는 거거든요. 그건 구원 받은 백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제 설교를 듣고 내가 이렇게 살도록 여러분께 요청을 할 때 거룩한 압박과 멍에를 뒤집어쓴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면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데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거룩한 멍에를 덧씌워주면 그걸 감당을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이미 받은 구원을 영속적으로 향유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걸 강조하면 되고, 바울의 이신칭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그 말은 이제 율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는 면제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능력을 덧입게 됐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입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그 믿음은 우리 믿음 아닙니다. 우리 믿음 아니에요.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제가 네번째 정도에 할 것 같은데요. 이신칭의, 여기의 신은 우리 믿음이 아닙니다. 이건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이걸 설명을 잘 해놓은 책이 앨리스터 맥그라스가 쓴 <종교개혁 영성> 입니다. 혹시 들어봤습니까? 그 사람은 요즘 한국에 많이 소개됐습니다. 물론 대부분 신학자들은 전부 다 신은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합니다만, 한국 목사들만이 우리 믿음이라고 주장합니다. 신학을 전혀 공부 안 한 한국 목회자들만이 이걸 우리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내가 의를 덧입게 됐다는 뜻입니다. 앨리스터 맥그라스가 쓴 책입니다. 이 책을 읽어보십시오. 이 책을 보면 우리 개신교가 뭔지 잘 설명해놨습니다. 이강희 자매님, 좋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주셔서 제가 했던 말을 명료하게 해주시고 혹시 제가 잘못 한 것은 교정이 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OOO 구약과 신약을 충분히 습득할 만큼 성경을 읽지 않아서, 신약을 읽으면 너무 자애로운 하나님인데, 구약을 읽으면 너무 무서우시고 가끔 다중인격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레위기 24장을 보면,
김회권 다중인격입니다. 맞습니다.
OOO 여호와를 믿지 않은 사람을 돌로 쳐 죽이고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하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너무 일치 못 시키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지, 저를 비롯해서 사실 그걸 여쭤보고 싶어요.
김회권 너무 너무 핵심인데, 저는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려고 구약을 전공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일단 구약 강의하는 사람들이 자비롭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워낙 많기 때문에,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캐릭커처의 모습은 분명히 다중인격적인 면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것 때문에 실족한 사람이 칼 구스타프 융입니다. 융이 구약을 읽다가 실족했습니다. 구약 안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몸서리칠 정도의 경직된 분노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화산 같은 폭발이 있습니다. 구약의 대부분은 consistent 한 하나님의 집요하고도 초지일관적인 친절과 의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가끔은 열리시는데, 내가 보기에 하나님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이성을 잃었던 일도 보이는데, 제가 대표적으로 이성을 잃었다고 느끼는 건 모세가 잘 달랬는데,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아픔을 주니까 하나님이 모세더러, 싹 쓸어버리고 싶다, 쓸어버리려고 하니까, 잠깐만요 하나님, 하나님 정신 차리십시오, 하면서 하나님이 쓸어버리면 안 되는 이유를 세 가지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 명성에 큰 흠집이 간다, 둘째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다는 오해를 받는다, 셋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셨던 약속이 원천 포기된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달램을 받습니다. 성경의 언어가 이걸 영어로 divine accommodation theory,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지게 하나님의 행동이 묘사가 되기 때문에, 그걸 영어로 신적적응설 divine accommodation theory라고 말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중인격처럼 보여요. 하나님이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 읽을 때 지도받지 않고 함부로 읽으면 힘들어집니다. 마르시온이라는 로마의 유명한 집사님께서 140년경에 나타나셔서 구약성경 다 폐기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바울의 서신 7개만 성경으로 인정하고 다 버렸습니다. 그런 입장을 마르시오니즘 이라고 말합니다. 김용옥도 그런 입장에서 구약을 엄청 비난하고 있는데, 저는 강희 자매님의 그 질문이 예리하기 때문에 쉽게 강희 자매님 마음을 흡족하게 못해줍니다.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저의 경우에는 그것이 완전히 오해가 풀린 건 아니고 저도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 그럴 때가 있는데, 대부분은 구약의 하나님이 consistent한 집요한 초지일관적인 사랑이 가득 찬 분인 걸 알게 됐는데 그러나 특정본문은 그런 힘듦을 줍니다. 특정본문이 우리에게 힘듦을 준다는 말은 구약도 우리한테 완전무결한 인간에게 주어진 말이 아닙니다. historically culturally,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한계 안에 있는, 인지 도덕 수준의 발달과 인지도덕의 발달에서 전부다 체화된 한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진술은 최선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표적으로 마가복음 10장 2절입니다. 구약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수준에 맞춰진 divine accommodated the Logos, 신적으로 적응된 말씀인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써달라고 했습니다. 이혼증서를 써주기만 하면 이혼해도 된다고 나는 배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어떤 남자도 이혼하면 안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한 이상 버리면 안 되고, 남자가 여자를 마음대로 못 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이 마음이 완악한 그 수준의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런 말이거든요. 현재 구약율법은 우리 첨단국제윤리나 첨단윤리학에서 볼 때는 매우 고대적 수준에 맞춰진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하나님 마음에는 노예제도를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노예제도를 없애려고 하지 않고 노예제도를 그대로 둔 채 율법을 주십니다. 아까 말한 귀에는 귀 눈에는 눈, 있죠? 출애굽기 21장 23절인데, 그 본문은 약간 오해가 있습니다. 그 본문은 동해보복의 원칙인데 잔인한 법의 표상이 아니라 인도적인 법의 표상인데, 누가 내 눈을 찔렀습니다. 먼저 찔린 사람은 눈을 한 번 찔러도 초과 보복할 마음이 생겨서 두 번 찌를 마음이 생겨요. 그런데 초과 보복을 억제하는 원칙이 동해보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한번 찔렸을 때는 한 번 찔러야 합니다. 이 말은 초과보복을 억제하는 인도주의적인 법으로써 최소보복의 법이 바로 탈리오 법입니다. 다른 나라에도 탈리오의 법이 나오는데 고대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이 이 탈리오 법이 나옵니다. 그건 초과보복 하지 말라는 인도주의적인 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는 약간 야만적으로 보이지만 고대사회가 볼때는 굉장히 인도주의적이고, 첨단 법이었습니다. 지키기 힘듭니다. 내가 눈을 한쪽 맞았다, 그러면 어린 아이 싸움 보면 알잖아요. 한방 맞으면 한방만 때리지 않습니다. 두 방 때리고 나서 평행이 밸런스가 됩니다. 정의감이, 그것과 똑같습니다.
OOO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었고 예수님께서 로마 시대 때 시도하셨던 것이 자치적인 자발적인 공동체 출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고 하셨다, 제가 이해할 때 다윗은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왕권을 통해서 지방호족들 부패한 집단들을 억누르면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했는데, 그 방법은 예수님의 방법과는 다르지 않나? 그 전의 사사시대 때의 방법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 가깝지 않나?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회권 너무 좋은 질문이고, 이청조 자매님? 하고 나서 희윤 자매님. 세분이 질문하고 묶어서 할 수 있는가 보려고 합니다.
OOO 저도 오전예배 때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말씀에서, 죄를 헤롯과 로마와 안나스와 가야바의 총체적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해서 죄를 정치세력 안에 있는,
김회권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포기했을 때, 율법의 멍에를 지지 않았을 때 당하는 모든 외부적인 압제, 그걸 죄라고 했고, 그 당시의 압제세력이 로마였다는 뜻입니다.
OOO 두 번째는 예수님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올 자가 있을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냥 자비로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는 내가 초청한 것이 아니고는, 이렇게 하셨는데 어떤 근거로 하신 건지?
김회권 아까 번에 근거 좋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아버지 하나님 품속에 있던 하나님 자비의 상징이죠?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의 성육신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의 성육신이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와 사랑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이 되는 거죠. 이런 뜻이고, 우리 청조자매님 앞의 질문,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에서 죄라는 말은 하나님의 율법의 멍에를 거절했을 때 오는 모든 압제, 질병이 죄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제국의 압제를 유도한 면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만큼 이스라엘 백성이 철두철미하게 사회가 양극화되고 국력이 부서져서 하나님의 통치 대신에 이방인의 압제를 받게 됐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멍에를 집단적으로 거부한 결과 이민족의 압제가 이뤄졌다는 말을 제가 썼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OO 자매님?
OOO 보통 저희가 죽음이 임박한 사람을 만났을 때 영접기도를 시켜주려고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이신칭의에 대한 설명이나 성경이 내세보다는 현세나 순종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김회권 저는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기도밖에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말은 못 할 것 같습니다. 당신 눈 감으면 천국에서 눈 뜰 것이다, 그런 말은 못하지만 그야말로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기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그 기도가 인간이 지상에서 숨 거둘 때 듣는 가장 마지막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고요. 덕영 형제님 질문은 좋은 질문인데, 다윗은 공과 의로 정치를 했고, 군사적인 힘도 썼고 무력도 쓰고 정치공학적인 방법도 다 쓴 사람인데, 다윗의 후손이라 말할 때, 이때 다윗을 시적인 성화가 일어난 사람, 그야말로 현실 다윗의 이미지만 가지고 일반명사의 다윗이란 말을 제가 썼거든요. ‘다윗의 자손’할 때 다윗은 이미 역사적으로 BC 1000년에 나타난 그 다윗이라고 보면 안 되고, 다윗이 표방한 가치, 공평과 정의의 통치자로써의 이미지, 그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할 후손으로서의 다윗의 후손이지, 다윗은 예수님과 달리 정치적으로 공학적인 manipulation을 했습니다. 조작도 했고요. 그는 사람도 죽였고요. 예수님은 일단 사람 안 죽였잖아요. 그러면 다윗의 어떤 부분의 표상을 계승했냐? 다윗이 공평과 정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다윗은 군사적으로 사령관이었지만 전제정치로 일탈하지 않았고, 그런 뜻입니다. 그런 선한 목자 역할을 했던 것,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그대로 구현했던 것, 그런 통치의 전범, ideal의 표상으로서 다윗의 후손이란 말이 된 겁니다. 다윗은 두 가지 다 망했습니다. 두 가지 다 좌절됐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는 것도 좌절됐고 다윗은 징병검사를 하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하는 것도 좌절됐습니다. 다윗은 전제왕권을 구축하려는 그 왕위에서 예언자들의 책망을 받고 그만뒀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를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둔 사람인데, 그러면 세상에서 다윗 같이 위대한 군사적 업적을 가진 사람이 전제왕권을 확립하지 못하고 죽었다, 굉장히 예외적입니다. 대부분이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예언자 갓으로부터 예언자 나단으로부터 각각 책망을 받았습니다. 인구 조사하는 것, 이스라엘을 인구가 지키나? 130만 명의 칼 든 용사가 지키나? 하나님이 지킨다는 그 원칙에 의해서 무너졌고, 또 나단이라는 예언자가 하나님은 이런 벽돌로 지은 집, 백향목 집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의 집은 그런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는 나단의 책망을 듣고 물러섰습니다. 이 두 가지 장면은 다윗이 굉장히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너무 겸손한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힘든 겁니다. 이런 겁니다. 한 10명에서 만 명의 교인들을 만든 목사님이 있는데, 그 목사님에게 어떤 장로님이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화려한 성전에 하나님 계시지 않습니다, 겸손과 소통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런 성전 건축역사 다 철회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했을 때 그 모든 성전 공사를 하려고 했던 걸 일부 철회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것, 그렇게 겸손한 다윗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대 예언자들에 의해서 너무 훌륭한 왕으로 격상이 됐습니다. 한 사람만 더 질문, OO형제.
OOO 비슷한 질문인데 여러 가지를 질문 드리겠습니다. 첫째로는 예수의 유일성 관련해서 저희가 기존에 배우기로는 예수의 죄사함의 복음, 예를 들어서 다른 종교에는 있지 않은 그것을 의지함으로서의 죄사함이라는 측면이 기독교 역사 안에 많이 부각됐던 측면이 있던 것 같은데,
김회권 그래서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가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죄사함의 복음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합니까? 교회가 합니까? 그게 차이죠.
OOO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실존적인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예수의 보혈을 통한 죄사함,
김회권 정확하게 그런 말입니다. 요한복음 14정 6절이 정확하게 그런 말입니다. 그걸 기독교로 대치시키면 너무 안 맞다, 여러분 한기총이 그런 이미지가 납니까? 실제로 교회 권력 집단들의 총 연맹인 한기총에서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아니죠. 한기총은 보통 사람들의 양심보다 더 형편없지 않습니까? 아 한기총이 뭔지 모르는구나. 한기총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약자로써 매우 훌륭한 사람과 매우 나쁜 사람이 섞여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애매모호한 집단으로써 손봉호 장로님의 맹렬한 지탄을 받고, 그러나 절대로 뭉쳐 있습니다. 의의 세력들은 느슨한 연대를 하고 악과 이익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너무 철두철미하게 모이기 때문에, 의와 선의 싸움에서 항상 의는 망합니다. 의로움과 정의는 추상적인 가치입니다. 그런데 악당들의 연맹과 결속체는 구체적인 돈과 권력을 꼭 쥐었기 때문에 한기총 회의에는 엄청나게 사람이 많이 모입니다. 그러나 웬만한 의로운 사람들의 시민연대는 이런 일에 거의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서 당장 얻을 이익이 없기 때문에 안 옵니다. 그런데 한기총은 얼마나 많이 모여요. 이번에 제가 깜짝 놀란 것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가 옛날에 7천명까지 됐거든요. 지금 385명만 남았습니다. 돈 내는 사람이, 기윤실이 385명만 남았고, 거기서 심지어 교회는 서른 군데밖에 지원 안 합니다. 기윤실이 처음에 7천명이 돈 냈거든요. 기독교가 운동권한테 공격당할 때, 그런데 기독교가 운동권이 사라지고 나니까 완전히 교회가 부패타락하게 된 겁니다. 기윤실이 385명밖에 회원이 없다는 말은 한국교회가 정말로 너무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한기총 같은 사람들 강제로 해체 운동을 하면 안 될텐데 하는 게 제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해체운동을 하면 더 단결해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해체하는 연대선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해체연대선언한다고 더 똘똘 뭉칩니다. 제가 볼 때는 왜 의의 연대는 이렇게 느슨하고 맥이 없을까? 왜 악의 연대와 이익과 탐욕의 연대는 이렇게 견고할까? 그 생각이 저는 들었습니다. 저도 혼자 있을 때 많이 낙심합니다. 강의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낙심함을 이기고 가는데 혼자 있을 때는 굉장히 낙심합니다. 내 생애에 통일도 이루어지지 않고 정말로 내가 외롭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부패한 사람들이 단결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이동원 목사나 오정현 목사 이런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이 볼 때는 다 보수적인 것처럼 보여도 이 사람들은 완전히 한기총보다는 엄청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다 만나면 한기총 해체를 다 반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구원에 왕성하게 참여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삶을 총천연색으로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가 그들을 감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기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꾸 의로운 대의명분을 이야기 하니까 대의명분을 많이 말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 간증이 안 나옵니다. 이런 간증이 안 나옵니다. 보통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증, 집을 사는 간정, 재테크를 해서 묘하게 잘 된 간증, 이게 전혀 우리는 안 나오고, 우리는 전부 대의를 위해 의로운 일에만 기도하니까 응답이 됐는지 안 됐는지 확인도 안 되는 기도를 하는데 그러나 일반교회에 가보면 전부 다 기도해서 잘 된 이야기부터 많은데 우리는 전부 다 통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보통 100년 걸리는 기도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기심에 호소할만한 어떠한 아기자기한 기도응답이 없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크게 낙심이 됩니다. 우리가 너무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좀 보여줘야 할 텐데, 그래서 복음주의 학생들 보고 운동하라고 하고 등산하라고 하는 이유가 기분을 우선 명랑하도록 유지해야 하고, 뭔가 즐거운 것이 많아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집니다. 복상 100명 기윤실도 한 50명 모았습니다. 모든 의로운 끼가 있는 집단들은 100명 안 모입니다. 낙심되는데 우리 가향공동체는 제가 볼 때는, 가향공동체 나아가야 할 길은 사랑의 교회나 소망교회보다 더 즐거움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재테크 기도 간증이 없지만 어쨌든 기도 간증이 있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이 놀랄 만큼 기도 간증도 많아야겠고 어쨌든 저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믿는 그 모든 분야에서 열매를 거둔다면, 하나님이 주신다면 보수적인 교회에 선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사실 여러분에게 기도 많이 하도록 부탁하는 이유는 기도 간증도 많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소통하면서 하나님 뜻을 발견하고 글을 쓰는, 흔히 보수교회가 자기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열심히 해서 열매를 맺어야만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의롭기는 하지만 이념 지향적으로 치우쳐서 어딘지 모르게 궁핍하지 않겠나 하는 오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도 엄청나게 1시간씩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명랑쾌활하게 기쁨으로 살도록 하나님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할 수밖에 없죠. 여러분 혹시 교회와 예수님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이걸 철두철미하게 구분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사를 볼 때, 불교사만큼이나 얼룩이 져서 도저히 제가 볼 때는 교회사 가지고는 젊은 지성인에게 이것이 교회입니다, 라고 설명하기 힘든 경지가 돼버렸어요. 그럼 교회사를 보지 말고 어디를 봐야 합니까? 가끔 산발적인 교회사 인물을 봐야겠지만 대부분은 성경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새로운 교회사에 주류를 형성하는 수밖에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어쨌든 힘냅시다.
Q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렇게 합니다. 유대인이 그렇게 기도하고, 우리는 이순신의 하나님 안중근의 하나님 유관순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가..
김회권 유관순은 일단 하나님 믿었죠? 이순신도 하나님 믿었습니다. 이순신 난중일기가 큐티집이거든요. 난중일기는 정확하게 큐티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동원에 나가서 천신께 제사 드리고 조용히 묵상했다, 천신께 제사 드렸단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옵니다. 이순신 장군을 저는 완전히 하나님 쓰셨다고 봅니다. 그렇게 안 하면 23전 1무승부 22승을 거둘 수 없습니다. 이순신은 23전 22승 1무를 거뒀습니다. 마지막에 돌아가셨죠. 이순신은 하나님께서 쓰셨죠. 하나님이 주신 큰 지혜를 갖고 전쟁을 했고요. 이순신이 구원 받았는가? 이런 것까지 제가 대답을 못하는 건 신앙의 하나의 겸손입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아버지 하나님 품속에 있는 걸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순신장군께서 천국에 오셨으면 좋겠다, 정기적으로 방문하셨으면 좋겠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벌써 종교다원주의로 오해 받습니다. 저는 어쨌거나 이순신 장군이 지옥에 갔을 거라 믿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 갔단 말입니까? 모릅니다. 지옥은 이순신 장군께서 가실 곳이 아니다, 그렇게 봅니다. 그럼 이순신 장군이 구원 받았다고 말해라, 확신이 안 섭니다.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고, 제가 청소년 때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은 난중일기입니다. 난중일기를 그렇게 많이 읽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난중일기를 읽었습니다. 그걸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읽게 만들어서 우리를 엄청 고생시키는 바람에 난중일기를 그렇게 많이 읽었습니다. 저한테 가장 최초로 애국심을 심어주신 분은, 제 고향이 또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곳입니다. 늘 충렬사를 방문해서 사당에 들어가죠.
OOO 아까 1부 때 관련된 이야기인데, 첫 번째로 북한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저 같은 경우는 전공이 정치학이다 보니까 24시간 정치에 대해서 생각하기 마련인데, 북한에 대한 관점이 국가주도적인 자본주의화를 시도했던 북한이라는 존재를 설교 안에서 과연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졌는가?
김회권 국가주도의 자본주의화를 북한이 시도했습니까? 언제요? 요새?
OOO 아니오. 그걸 학술적인 용어로 국가독점 자본주의라고 하는데
김회권 북한을?
OOO 몰락한 동구권이나 오픈되면서 그 지역에서 이뤄졌던 일들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면서 그 지역들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게 됐는데? 북한에 대한 관점에서 조금...
김회권 북한을 국가독점 자본주의라고 봅니까?
OOO 제가 판단하기로는 그것보다 좀 더 심한 상황
김회권 국가주의이기는 한데 자본주의는 아니라고 보고요. 다시 말해서 모든 좌익 정부의 특징은 권력을 가지고 마음대로 하는 거잖아요. 저는 국가독점 권력주의라는 것까지는 보는데 자본주의라는 건 잘 모르겠어요. 북한이 지향하는 인민민주주의 이념은 자유의 기회보다는 평등에 훨씬 더 사회적 평형상태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국가 자본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국가가 자본을 통하여 강제로 평등케 하는 사회라 보거든요. 이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거 아닙니까?
OOO 사회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당위로 내세우는 건 그건데, 실제로 보면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사파시즘 같은 성격을 갖고 있는,
김회권 맞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주도하는 강한 사회적 형평성 평형성을 유지하다 보니까 인권탄압이 분명히 따라왔고 빈민들이 따라왔고 그러죠.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순수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집행한 정책과정이 다 옳았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남한과 비교하여 볼 때 사회적 형평관계에다 엄청난 방점을 찍는 건 분명하고요. 저는 북한을 자본주의라고 보지 않습니다. 국가가 주도했던 사회는 맞지만 다만 그들이 지향하는 것 자체가 강한 평등사회라는 거죠. 우리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는 북한이 악마적인 건 사실인데, 그 나름대로 진실이 있는 것은 평등사회를 지상과제로 하는 북한에서 보면 우리가 또 문제가 된다는 거죠. 북한을 우리가 흡수통일하기 위해 왕창 북한을 자본주의 체제로 하기 보다는 북한이 주도했던 것을 충분히 살려가면서 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자본주의라고 보지 않지만 좌익사회의 특징은 중앙권력으로 뭐든지 하려고 하는 사회 아닙니까? 나는 그건 나쁜 거라고 보고, 의사와 어부와 광부와 교수들의 월급을 비슷하게 하는 것 자체가 북한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떻습니까? 북한이 강한 평등성을 남한에 비해 지향하는 건 사실이죠?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지 몰라도, 지금은 이념귀족이 워낙 설치기 때문에 그 이상에서 많이 타락했지만 북한이 적어도 겉으로 내세우는 건 그것 아닙니까? 그렇죠? 너무 타락했지만,
OOO 북한에 대한 이야기가 첫 번째였고, 두 번째 아까 열심당의 그것과 예수님의 그것을 비교하시면서 예수님의 방식은 내면을 바꾸는 방식이었지, 중심부를 타격하는 방식이 아니었다고 말씀해주셨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 동의를 하면서 다만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과 그 이후에 열심당처럼 중앙을 타격하지는 않더라도 제도와 구조자체를 변혁시켜야 할 지점이 분명히 있는데
김회권 그렇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자꾸 바꾸다 보면 일단 회당에 안 나가게 되겠죠? 일단 성전에 안 나가잖아요. 성전에 안 나가면 구조를 바꾸는 거죠.
OOO 종교구조를 바꾼다기보다,
김회권 사회구조.
OOO 예. 내면이 바뀌면 모든 구조적인 것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관점이면.
김회권 그렇지 않습니다. 내면이 바뀌면 사회구조가 자동적으로 없어지지 않고 바뀐 내면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쁜 사회구조가 좋은 사회구조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되겠죠? 그런데 내면이 바뀌지 않고 위에서부터 틀부터 하고 내면을 강압적으로 바꾸는 것보다는 반대로 예수님 쪽으로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걸 이야기하는 거고요. 또 하나는 이런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 전부 다 기독교인이 되면 국가가 필요 없다? 그건 전혀 아닙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아무리 착한 시민이 된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사람이 착한 그리스도인의 심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도 바뀌어야 하고 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오늘 여러분 질문 해주셔서 잠도 많이 깨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젊은 그리스도인의 각성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교회사에 어느 순간도 얼룩은 져 있지만 한국교회사 한국사회 숙명론 이기고 비관주의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청년들이 일어나서 이 사회를 이 한국교회를 선하게 이끄는 힘을 보태게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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