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예언자적 시사읽기(기독경영연구원 칼럼)

by 【고동엽】 2021. 11. 27.

예언자적 시사읽기


오늘날 우리나라 목사들의 설교 강단에서 시사문제들이 신학적 반성과 숙고 없이 성경말씀을 지
지하거나 성경말씀을 정당화할 때 쉽게 동원되고 있다. 시사문제가 설교의 소재가 될 수 있으나 신
학적 원칙이나 성경적 전거가 없이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시사문제를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성도들을 불안하게 하고 하나님께 폐가 되는 허물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의 빛 하에서 해석했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청중들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위로를 선포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고대 근동의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천재지변과 역사적 격변들을 통하여 바로 왕들과 지주들과 제후들 지배계급들에게 압박한다고 봤다. 하나님 뜻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제후들을 경고하고 왕과 지배층들을 압박한다고 봤기 때문에 예언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동시대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동선을 포착하는 것이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반면에 고대근동의 다른 종교들에서는 동시대의 역사적 격변과 천재지변 등을 통해서 왕실과 지배층, 또는 그 당시의 종교적 권력층을 향해서 경고나 심판이나 위협으로 해석하는 예언자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예가 전혀 없지는 않으나 이스라엘 예언자들만큼 기획적으로 연속적으로 지속적으로 역사속에 출현해 지상권력자들과 지배층의 죄악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발하고 단죄한 예는 없다. 제임스 프리차드가 편집한 ANET(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라는 책은 구약성경과 관련된 고대근동의 여러 종교문서들을 편집한 책인데 이 책에 보면 이집트 예언자들이 기근과 천재지변을 겪어서 왕실과 왕에게 조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조언이었다. 그런데 천재지변, 예를 들어 3년 동안 일어난 가뭄을 가지고 왕의 죄를 직접 단죄하고 탄핵하는 것은 구약성경에만 나온다. 15세기 또는 14세기에 북시리아 일대에 있었던 마리라는 작은 왕국에도 예언자적 중개자들이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마리문서가 발견됐다. 여기에는 제사장 또는 예언자적 중보자들의 신탁중개하는 상황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마리문서의 신탁중개 문서에 보면 마리 영적 중개자들 중 누구도 그 시대의 천재지변, 그 시대의 정치적 격변들, 민중들의 아우성들 등의 복합적 사태를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 또는 지배층과 왕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이해하는 중보자가 거의 없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자들이 아주 독특한 유형의 영적 중개자들인 셈이다.
하나님께 영적으로 감화감동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미가서 3장 8절에 나와 있듯이, 지상권력자들과 지배층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규탄할 수 있는 영적 패기와 용맹무쌍함이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은 ‘나는 야곱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야곱의 허물, 지배층의 허물을 대담하게 고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코아마르 아도나이, 너움 아도나이가 그들의 신탁언어의 정형구문이었다.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영감받았다는 말은 모든 지식분야에서 백과사전적인 사실의 정확무오성을 보증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실제로 현실권력을 가진 왕과 지배층의 죄를 탄핵할 수 있는 도덕적 담력을 구비할 때 ‘영감받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영감받았다는 말은 모든 지식과 모든 영역에서의 백과사전적 무오성이니 통계나 연대기 정보의 무오성을 담보하는 말이 아니라 지상권력자들의 죄를 탄핵할 수 있는 도덕적 담력, 신학적 패기를 가리킨다.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끊임없이 특별히 지배층과 왕의 자기중심성을 끊임없이 규탄할 수 있는 비무장 예언자들의 영적인 패기를 말할 때 ‘영감받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한 자연인이 정말 제정신으로 하기 힘들만큼 대담한 지배층 규탄언어 끝에는 하나님의 인봉날인이 붙어 있다. 너움 아도나이(“이것은 하나님의 언설이다!”). 이 말은 한글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일련의 구두선포 뒤에 마지막에 낙관처럼 찍힌 확증결어다. 하나님 말씀의 도입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코 아마르 아도나이)이며 종결문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너 움 아도나이)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도입부와 너움 아도나이라는 결론부가 사이에 있는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신탁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에 너움 아도나이가 붙어 있으면, 그 말은 영감받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자기 삶의 모든 터전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선전포고라는 뜻이다.
엘리야가 비무장 혈혈단신 예언자가 아합 왕을 찾아가서 ‘지난 3년간의 기근이 당신과 당신 마누라 때문이오, 당신 왕실이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께서 비를 거두신 것입니다, 당신 죄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코 아마르 아도나이로 시작했다가 너움 아도나이로 끝나는 이 독특한 어법이 영감의 증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특징은 그 당시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일어났던 시사적 사건을 가지고 지배층과 왕실과 종교권력자들을 무섭게 다그칠 때 영감에 호소했다는 데 있다(미 3:8).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시사해설은 영감에 가득 차 지배층을 두렵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왕과 지주들, 관료들과 악한 종교권력자들이 들을 때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압박해오는 거룩한 현존에 호소했다. 영감받은 예언자들의 시사해설을 시도했던 것이다. 오늘날 언론이나 방송의 시사해설은 시장의 원리나 정부의 공영정책에 좌우되고 있기에 사실상 예언자적인 공공성을 거의 담보하지 못한다. 기업이나 국가기관의 연구비 수주에 목을 매는 대학지식인들은 돈의 힘에 좌우되기 쉽다. 하나님의 영에 추동되어 진실을 말할 가능성이 영구적으로 차단되고 있다. 안토니오 그람씨가 말하는 유기적 지식인, 즉 자신에게 연구비를 대주는 기업이나 국가기관과 한 몸으로 접속되어 지식의 객관적 위력을 증언할 자격을 반납한 자들로 변해간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지지한 모든 학자들은 돈과 권력이 지식의 엄정성을 훼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돈과 권력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최후의 신성구역은 어디일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인 교회다. 교회와 성직자들만이-적어도 이론적으로는-돈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공변된 진리를 대변하며 공공 쟁점을 놓고 예언자적인 시사해석을 시도할 수 있고 지배층과 권력층의 비리를 질책할 수 있다다. 하나님과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돈으로 살 수 없고 시장영역이 침투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 공공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공공쟁점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관철시키는 나라다.
오늘날 탈근대적인 세계 속에서 어떤 사람들의 행동거지 속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는지 어떤 사태에 하나님의 진노가 쏠려있는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영감받은 예언자들은 영적 대담성과 패기를 구비해 사태의 정곡을 찌르는 신탁을 쏟아낸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 말하는 하나님의 파토스에 전존재적으로 공명할 때 예언자적인 시사해석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파토스를 분출시키는 공적 영역이다. 지배층의 죄악과 약한 자의 아우성이 뒤섞인 공간이다. 슈퍼갑과 슈퍼을의 비대칭적인 관계가 만연한 세상에는 하나님의 언어적 관여와 행동적 개입을 불가피하게 초래한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특수한 시공간의 맥락 속에 서는 회중에게 전파하는 설교자에게 시사해석은 불가피하다. 왜? 만일 하나님이 오늘 우리 시대의 현실 정치, 사회, 경제 등 공공영역에 대해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받아 시사적 언어로 재해석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모든 부조리한 사태에 대해 침묵하는 셈이 될 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 속에 있는 성경구절만 읽고 그것을 당대의 공공영역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건 설교가 아니다. 성경말씀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다. 설교는 오늘날 역사의 격변 속에 누가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지를 꼭 집어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신령한 신적 추동을 계속 받는 사람이 원래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