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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대각성/인생의 갈증(요 4:3-19)

by 【고동엽】 2021. 11. 27.
오늘 제가 여러분하고 나누고 싶은 소재는 인생의 갈증, 그리고 그 갈증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왔을 때 주님이 그 여인과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가 샘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느끼셨죠? 물을 좀 달라 접근하신 이유는 목이 말라서라기보다는 여인과 대화의 문을 열기 위해서 여인에게 가장 관심사가 되어 있는 우물물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우물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그랬습니다. 여인이 살던 그때로부터 1800년 전에 야곱이라는 조상이 그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는 유대 나라는 물이 귀한 지역이어서 우물 하나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재산입니다. 개인이 우물을 소유하는 일은 대단히 드뭅니다. 그래서 한 동네에 우물 하나 정도 있기 마련인데 1800년이나 되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우물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여인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관심이 없는 이야기는 듣기 싫어합니다. 그렇죠? 자기와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오겠어요. 아까 두 분이 간증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두 분이 간증한 내용의 관심이 조금씩 다르더군요.
먼저 분은 평안, ‘어떻게 하면 평안을 얻을까?’ 하는 것이 항상 관심사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평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 오셨고, 그 다음 두 번째 자매는 주제가 뭐였죠? 복이었죠. ‘어떻게 하면 복을 좀 받을까?’ 불교를 믿어도 신통치 않고 예수 믿으면 좋은 복이 떨어지지 않을까? 이렇게 복에 대한 관심사가 아주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자매를 찾을 때는 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서서히 찾아들어 오셨어요. 그래서 대화가 통하도록 문을 여셨다 그 말입니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처음에 ‘병고치겠다, 하나님이 내 병 좀 고쳐 주셨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교회에 찾아오는 것이 나쁜 거 절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관심사를 가지고 시작해야 대화가 통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지혜로우신 분인지 몰라요.
만약에 사마리아 여자보고 “여자여, 네가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갈 줄을 아느뇨?” 하고 처음부터 우물가에서 대화를 시작했더라면 ‘이 남자가 미쳤나? 왜 처음부터 재수없이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 하고는 아마 횡하니 돌아가 버렸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너무나 잘 아세요. 여러분, 오늘 처음 인도함 받아 교회에 나오셨는데 여러분을 인도해 오신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세요?
아마 각자 사정에 따라 적당히 적절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현수 엄마, 마음이 너무 괴롭죠? 아빠하고도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이 있고 그러니 교회 한번 가봅시다” 이게 접근이에요. 또 한몫 벌어보려고 했다가 시세가 안 좋아 몽땅 털리고 앉아있는 부인보고 찾아가서 무슨 말을 합니까? “돈이라는 거 별거 아니에요. 돈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예수님에게 한번 와보세요.” 이렇게 접근을 한다고요. 그러면 “돈보다도 더 중요한 거 있어. 그게 뭔가?” 하고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수문제를 가지고 여인하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생수에는 굉장히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하나님의 선물, 이게 뭘까요? 잘 모르시겠죠? 끝에까지 보세요.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군인지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 이 생수는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선물인 이 생수는 누가 주는 것입니까? 여자 바로 앞에 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여기에 대하여 전혀 모릅니다. 우리가 이 대화를 가만히 보면 여러분 생각에 어떠세요? 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해를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생수를 주마” 하니까 “주여, 물이 이렇게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구할 수 있습니까?” 우물물은 언제나 이렇게 고여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제 막 떠가도 생생하게 솟는 물은 상상할 수 없지요. 고여 있던 물을 떠가니까? 그런데 생수 하니까 여자는 영어로 ‘spring'을 생각했단 말이에요. 막 땅에서 퐁퐁 솟는 우물을 말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 어디 가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시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이 물을 아무리 깊이 내려가서 물을 떠 마신다고 해도 목이 다시 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어디서 오겠습니까? 마시는 자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도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다시 또 지긋지긋하게 대낮에 물 길러 오지 않게 해주옵소서.”
여러분, 이 여자가 지금 예수님 말씀을 이해를 합니까? 못합니까?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꾸짖나요? 꾸짖지 않고 계세요. 가만히 가만히 인도를 하고 계세요. 참 예수님 기가 막히신 분이에요.
과거에 제가 젊었을 때는 전도를 이렇게 했습니다. “여보세요. 당신이 지금 몸이 아파서 예수를 믿으려고 그러시죠? 좋아요.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말고 영원히 사는 것을 생각하세요.” 영원히 사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눈을 부라리고 어떻게 영적으로 그렇게 어두우냐고 이러면서 대들었다구요. 요즘 가만히 생각하면 참 미련한 전도방법이었구나. 마음의 문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깨닫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아직 마음이 열리지 않은 이를 아무리 깨달으라고 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자꾸 물 떠 마실 생각이나 했지 그 물의 일차적인 영적 의미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당장 내 몸이 낫느냐 낫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영원히 사는 것은 뒤에 문제입니다. 내가 죽느냐 사는가 급선무입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것을 잘 인내하면서 끌어주어야 하는데 우리 인간은 그것을 잘 못합니다. 옥목사도 과거에 그랬어요. 많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조금은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이 얼마나 귀하신 분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생수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생수에 대하여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새생명 아니면 구원, 또 하나는 성령. 이 두 가지를 항상 생수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생수는 구원입니다. 새생명,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새생명. 아까 간증한 두 자매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생명, 다른 신학적으로 말하면 거듭나는 것, 중생 받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 또 그것을 더 궁극적으로 말하면 영원히 사는 것, 이것을 일컬어 생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주십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실 때 누구의 협조로 우리가 얻게 만듭니까? 성령의 도움으로 얻게 만듭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정확합니다. 누가 준다고요? 하나님이 주세요.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누구의 협조로? 성령의 협조로. 비로소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동원을 하세요. 나 하나 구원하기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전부 다 소위 협력해 가지고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그러니 나 하나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이 세상 어떤 사건보다도 놀라운 사건이요 기적입니다.
세상에서는 한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온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신문기사에도 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신문이 있다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돌아왔다면 잔치하고 야단법석이 나겠지요. 다음에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가보면 알겠지요. 얼마나 귀한 일인가? 하나님만이 아시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새로 태어나는 새생명 구원을 샘물과 비유했기 때문에 여기에는 무엇인가 의미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새생명으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인간 내면에 고질병처럼 도사리고 있는 갈증이 해소됩니다. 이해합니까? 인생은 누구나 다 갈증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죄인이라고도 보시지만 다른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볼 때 목마른 사람으로 봅니다. 성경 한번 볼까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1-2)
너희 목마른 자들아, 이것은 누굽니까? 돈 없는 사람이냐? 아니요. 부잡니까? 부자만도 아니요. 전부요! 모든 인간이 다 목이 마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우리를 잘 알고 계세요. 너희가 다 와서 갈증을 해소하라. 너희가 왜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하는 엉뚱한 것, 아무 가치도 없는 것에다가 너희 정력을 다 소비하느뇨. 너희가 가지고 있는 한번밖에 없는 젊음을 왜 전부다 소비해 버리느뇨. 인생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나에게 오라.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오지 않고 엉뚱한 곳에 가서 찾습니다. 돈만 있으면 갈증이 해소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에 미칩니다. 쾌락만 추구하면 그 쾌락이 자기 내면의 갈증을 해소해 줄줄 압니다. 그래서 쾌락에 미칩니다. 많은 사람은 명예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놓고 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조건 욕심을 끊어라. 물욕에서 떠나라. 자기를 잊어 버려라. 이렇게 욕심이 자꾸 생기는 자기 목을 자르라고 자꾸 말합니다.
목을 자르면 내면에서 다시는 갈증이 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을 하고 고행을 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됩니까? 과거에 기독교도 한때 어두운 때가 있었는데 많은 수도원, 수도생들이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자기들끼리 경건한 생활을 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와 묵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욕구, 욕망은 예수로 인하여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수도승이 되고 아무리 삭발을 해도 해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나님에게 와야 합니다. 파스칼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상가는 말하기를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잘 기억하세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이 있다. 공백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다 마음 속에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받아들여집니까? 인간 속에는 누가 만든 공간이 있어요? 하나님이 만드신 공간이 있어요. 하나님이 만든 텅빈 공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사람이 아무리 세상의 것으로 쏟아 붓고 채우려고 해도 이것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누구만이 채워줄 수 있느냐? 하나님만이 예수님을 통해서 채워줄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여러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만 구약의 예가 가장 좋은 예가 됩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여러분, 남자고 여자고 미(美)라는 것을 찾습니다.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젊은이는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그래서 자기 눈을 만족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서 정신없이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그 눈이 만족을 못해요. 집안에만 갇혀 있는 주부들은 ‘내가 어떻게 하면 세계여행을 한번 가볼까? 저 스위스의 알프스, 그랜드 캐년, 알라스카의 빙산. 좀 가서 환하게 보았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죠. 그런데 여러분 팔자가 늘어져서 여행을 많이 다닌 친구들에게 가서 “어때? 좋았지.”하고 물어 보세요. 몇번 갔다 와서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렇고 그래.”
나도 그래요. 이 서울의 복잡하고 냄새나고 막 못 견디는 상황 속에서 정신없이 정신노동에 시달리다 보면 도망하고 싶은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목사도 할 수 없나봐요. 인간이니까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제일 그리워지는 것이 자연이에요. 참 아름다운 자연 속으로 가보고 싶습니다. 아무리 가보고 싶어도 남산도 못 가는 팔자니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만 그러니 자연히 미국에 있는 친구들 생각을 합니다.
야! 그 친구들 복터졌다. 얼마나 기분 좋을까? 그런데 그들의 편지를 받아보면 ‘이번에는 어느 공원을 간다. 다음에는 그랜드 캐년을 간다.’ 이렇게 편지가 옵니다.
야! 팔자 좋다. 기분 좋겠다. 그리고 내가 본 그랜드 캐년이나 좋은 공원의 정경이 눈 앞에 환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하고 편지하고 교신을 해보면 나보다도 불만은 더 많거든요. 그렇게 좋은 것을 많이 봤으면,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았으면 눈이 커진다든지 눈동자가 좀 맑아진다든지 나보다도 훨씬 좋은 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야기하는 거 들으면 저나 나나 똑같고 어떤 친구는 한국에 사는 것보다 골치가 더 아프고 살맛이 없다고 투덜거리고 있어요. 그걸 보면 눈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는구나.
여기에 부인들이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멋있고 핸섬한 남편을 좀 얻을까? 처녀 적에는 핸섬 핸섬하고 찾아다녔죠? 그래서 핸섬한 남자 얻어놓고 보니까 어때요? 한달 정도 쳐다보니까 너도 코흘리고 눈물 흘리고 별것도 아니구나. 잘 때 보면 입을 헤 벌리고 자는 것을 보면 너도 그게 그거구나. 뭐 신통한 거 뭐 있어요. 눈이라는 것은 영원히 차지를 않아요.
귀도 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족함이 없다고 했어요. “여보 사랑해요. 사랑해요” 처음에 그 말들을 때는 어쩔 줄 모르고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남편이 “사랑해요. 사랑해요” 해도 미쳤나 싶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 희안합니다. 이상한 동물입니다. 그렇죠?
좋은 집 가지고 있는 분들, 80평짜리 주택. 120평짜리 주택. 한번씩 가보면 굉장히 좋아할 것 같은데 사실은 얼굴은 더 어두워 있고 어떤 때는 처음 들어가서 얼마동안 만족하는 것 같은 기쁨도 얼마 못 가서 다 잊어버리고 사라져 버립니다.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일이나 맨션에서 사는 사람들이 겪는 일이나 똑같이 아침 저녁 시달리는 것을 볼 때 눈이나 귀나 만족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인생이다. 남는 것은 피곤뿐이다. 이게 인생입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바람 한번 잡아 봤어요? 바람 한번 잡아 봤나요? 옛날에 연애할 때 바람 한번 잡아 봤어요? 엊그제 우리 나라 체육인 대표들은 바람 한번 잡은 거 같던데. 바람잡는 거 아시죠? 도대체 손에 남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더 재미있는 거예요. 밑에 2장에 가서요. 솔로몬이라고 하는 사람 잘 알지요?
인류 역사상 그와 같이 호강하고 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그에게는 샘플로 그렇게 주셨어요. 인생을 네 맘껏 한번 즐겨봐라. 그것도 돼지처럼 즐긴 것이 아니라 인생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로, 하나님이 지혜를 가장 많이 주신 자로 한번 즐겨봐라. 사는 것이 무엇이냐? 갖고 싶은 거 다 가져봐라. 다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전 2:1)
이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한 말입니다. “너는 시험적으로 낙을 누리라. 그러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했습니다. 왜 헛되요? 이 사람이 얼마나 얼마나 기가 막히게 살았는지 3절 이하에 나오는데요. 죽죽 읽어 볼께요. 참 재미있어요.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전 2:3)
솔로몬은 자기를 즐겁게 하여 쾌락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한 것이 4절입니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道)의 보배를 쌓고 도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전 2:4-8)
솔로몬의 처가 몇 명이요? 300명, 첩이 몇 명이요? 700명, 합해서 천 명입니다. 사람 욕심도 한이 없어요. 세상에 천명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요. 솔로몬은 눈에 드는 여자란 여자는 다 끌어다 놓은 거예요. 다 끌어다 놓고 왕비와 첩을 만들어서 일생 동안 살았어요. 천명을 데리고 살았어요. 세상에 이런 예가 없어요. 자 그런데 참 행복할 것 같은데 10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0-11)
한 마디로 솔로몬의 마음의 욕망을 채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갈증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갈증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좋은 갈증입니다. 우리 인간은 돼지처럼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외형의 모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인간이 닮았습니다.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았듯이 하나님이 내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영별(永別)하고는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욕망이 있습니다. 어린 자녀를 고아원에서 키우면 그 어린 자녀는 조금씩 철이 들면서 아빠 엄마를 찾는 버릇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를 낳은 엄마 아빠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엄마가 나가면서 이웃집 아주머니를 불러놓고 자기 세살 먹은 아이를 남겨놓고 갑니다.
엄마가 한 시간 안에 오신다는데 안 들어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옵니다. 이 아주머니가 애를 달리기 위해 장난감, 먹을 것을 다 갖다 줍니다. 전부 다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어요. 임시변통, 진통제 역할은 합니다.
애가 좋은 것 받으면 울음을 그치고 조금은 헤 - 하다가 그 다음에 눈을 두리번거리면 문간을 쳐다보고 자꾸 무엇을 찾습니다. 뭔가 기다립니다. 그렇죠? 뭐예요? 엄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 그 아이의 공백은 도무지 채워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장난감, 맛있는 과자를 갖다주면 짧은 시간 효과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애를 달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엄마가 초인종을 누르고 엄마 얼굴이 보일 때 그 애 얼굴 한번 보세요. 장난감이 어디 눈에 보여요. 맛있는 과자가 애에게 뭐가 중요합니까? 정신없이 달려가잖아요. 왜? 엄마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가 발견하여 모시기 전에는 아무리 세상 것을 다 갖다 놔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는 불만과 갈증이 있어요.
이상해요. 그래서 교포세계에서 미국에 들어와 20-30년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의 허구증을 가누지를 못해서 그분이 어디를 가느냐 하면 종교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돈 투자해가면서 불당을 짓고 별아 별 짓을 다하면서 그 내면의 공백을 채워볼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도 여기에 대하여는 대답을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대답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독교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가지 않는 이상 내 마음의 갈증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만이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라는 유명한 교구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오 -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 없나이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돌아가기 전에는 절대 평안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여기 이 자리에 나오신 형제들, 자매들 마음 속에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갈증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찾자. 이것이 인생의 전부냐? 내 한번밖에 없는 젊음이 스쳐 지나가는 판국인데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의 생의 전부냐? 내가 이것을 위해 살았느냐?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부엌에 들어가 밥을 하면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이것을 위해서 태어났던고? 도대체 사는 의미가 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좋은 집을 가져도 만족이 없고, 출세를 한 것 같아도 만족이 없고, 좋은 자가용을 가지고 타고 다녀도 만족이 없습니다. 왜 그래요?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공백은 메꾸어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메꾸어야 할 공백은 사람이 메꾸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주가 하나님이 만든 존재입니다. 이 우주를 인간이 메꿀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공간은 이 우주보다 큽니다. 하나님만이 메꿀 수 있습니다. 인간은 들어가야 먼지와 같은 존재, 아무도 메꾸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또 하나 왜 우리에게 갈증이 오느냐? 이것은 더러운 갈증입니다. 죄 때문에 오는 갈증입니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지옥의 무저갱과 같습니다. 아무 집어넣어도 인간의 욕심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됩니다. 왜? 죄 때문에 인간이 부패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마음과 욕심에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쓸어 넣어도 끝이 없어요.
이 가운데 아파트 가지고 돈좀 버신 분이 계시나요? 처음에 한 10평짜리 가지고 100만원 올려 파니까 얼마나 재미가 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얼마를 살다가 돈을 조금 더 넣고 넣고 해 가지고 30평짜리를 샀어요. 사가지고 슬쩍 파니까 프리미엄이 500만원, 야 - 이거 해볼만 하다. 그래서 내 생각 같아서는 한 2000만원 벌면 만족할 것 같은데 막상 얻어 가지고 보면 눈이 벌개 가지고 1억을 쳐보다고 앉아 있습니다.
야 - 이걸 쳐다보면 한이 없겠구나. 그래서 우리 나라 이모 재벌 같은 사람 욕심 내는 것 당연하겠다. 끝이 없어요. 자기는 당뇨가 걸려 가지고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욕심은 끝이 없어요. 쌓고 쌓고 쌓아도 끝이 없어요. 이것이 어디서 옵니까? 죄성(罪性)입니다. 부패한 죄성입니다.
여러분이 서초동 일대 이 뒷쪽 골목 저녁에 한번 들어가 보셨어요? 저는 어제도 한번 돌아다녔는데 참 인생들 불쌍해요. 어떻게 하면 즐기느냐? 어떻게 하면 이 한밤을 즐기느냐? 이것이 이슈입니다. 빠에 앉아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 집에 돌아갈 줄 모르며 술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미녀들과 희롱을 하는 그런 모습들, 여러분 한번 보세요. 뭐예요?
그 사람 욕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마음 속에 더러운 악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악이 끌어당기는 욕망은 끝이 없으니 그렇게 안하고는 못 견디는 것입니다.
제가 만났던 미국 청년 하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여자에게 미쳤습니다. 그래서 미국애들 다 아는 것 아니예요. 고등학교 때부터 여학생들 따라 다니면서 못된 짓 다 했습니다. 아버지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여자 몇 명과 어울려 놀면 만족할 것 같지 않습니까? 나중에는 싫증이 났습니다.
여자, 그것도 별것 아니구나. 그 다음에는 마약에 빠졌습니다. 한 모금 빨면 눈 앞에 아찔아찔해지는 소위 후래쉬라고 하는 현상을 자꾸 맛보기 시작하니까 이제는 공부고 뭐고 다 손에서 놓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쫓겨나 버렸습니다. 폐인이 되어 버린 거예요. 제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폐인이 된지 5년이나 지난 뒤였고 그때 밀러라는 목사님을 만나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알고 난 뒤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고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제가 만났을 때는 자기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미국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들어 붙는 자리가 자동차 정비공장 아니면 주유소입니다.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하루 8시간, 10시간씩 손에 기름을 묻히면서 일을 하느라 손톱 밑이 새까맣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커먼 손을 가지고 성경을 꼭 쥐고 있습니다.
제가 그를 어느 교수집에서 만났을 때 그 친구가 손에 이렇게 성경을 쥐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도 제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그 청년의 말이 있습니다. 스물 다섯 살쯤 되었을까요.
“옥목사님, 내가 이렇게는 고백할 수 있어요. 내가 고등학교 때는 아름다운 여학생만 얻으면 참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아름다운 학생을 찾느라고 따라 다녔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도 내 마음의 공백을 메꾸지를 못했어요. 마약을 복용하면서 황홀경에 빠지면 그것으로 내가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도 시간이 가니까 몸만 병들게 할 뿐 마음의 공백은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는다 생각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밀러 목사님을 만났어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들었어요.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셔서 전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을 통해 들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여 믿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부터 저는 성경을 읽고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지금 삼년째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님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여자도 채워주지 못하던 내 마음의 공백, 마약도 채워주지 못하던 마음의 공백. 예수님이 들어오시니 금방 채워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나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신분이 어떤 신분인가를, 자기 집이 얼마나 잘 사는가를 나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자기 차에 저를 태우고 자기 아버지가 사는 맨션으로 갔습니다. 그는 아직도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먼 발치에서 맨션을 가리키며 저것이 내가 자라던 집이고, 아빠 엄마 형제들이 있는 집이예요. 하는데 집속에 지붕만 보이는데 멀리서 봐도 대단히 멋있는 맨션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 그래요.
“내가 이렇게 새사람이 되었지만 아빠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제 나는 내 힘으로 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치료해 주셨으니 이제는 살 수 있어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그러니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수를 주겠다. 그 생수는 속에서 마르지 않고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 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짜 물을 마시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이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오는 갈증은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감으로 채워지고 또 하나 죄 때문에 오는 갈증은 우리의 속사람을 바꿔 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근원적인 치료를 해줍니다.
이렇게 옛날처럼 달라 달라 하던 것이 없어져 버려요. 여러분 열병이 났죠. 열병이 났을 때 물 물 하고 찾습니다. 자꾸 물을 갖다줘봐요. 나중에는 그 사람 죽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열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 쾌락, 명예, 갖가지 욕망이 가슴 속에 가득한데 그것을 달라한다고 다 줘보세요. 아무리 줘도 끝이 없고 안주면 안주는 대로 욕망이고,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을 다 들어주셔서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느냐 아닙니다. 과거에 갈증을 느끼던 근본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셔야 합니다. 어떻게 치료합니까? 우리의 속사람을 새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이 바뀌어 버리면 옛날에 좋아하던 것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죠? 저는 지금 세상을 떠났지만 참 잊을 수 없는 자매 하나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카드를 뒤지는데 이 자매의 글이 나왔네요. 그래서 들고 나왔습니다.
이 자매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정부 아줌마입니다. 우리 교회를 시작하고 얼마 후부터 자기 가정부로 일하는 집이 교회 옆에 있었기 때문에 저 위에 유스 호스텔 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교회를 나왔습니다.
결혼도 실패한 여자입니다. 몸에는 아주 큰 병이 있습니다. 자녀도 없습니다. 형제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면 외모라도 좀 매력이 있으면 좋겠는데 저보다도 더 못생겼어요. 그래서 아무도 지나가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나이는 아직도 삼십대였는데 그 아줌마 한번은 감사헌금을 내면서 이렇게 적었어요. 「보옵소서. 내가 큰 고통을 주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죄악은 등뒤로 던지셨나이다」이사야 38:17 말씀을 적어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지 네돐째 되는 거듭난 저의 생일입니다.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감사와 그 동안 자상하신 사랑으로 지켜주신 우리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고는 헌금을 냈거든요.
그는 자기 몸에 있는 병 때문에 항상 고민하고 하나님께서 제발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다고 늘 기도했던 분입니다. 그렇게 남의 집에 가난하게 살아도 남을 위해 구제할 줄 알았고 강남시립 병원에 그야말로 무의탁으로 와서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그래도 정기적으로 자기 손으로 만든 떡도 갖다주고 기도도 해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보람된 삶을 살려고 무척 애를 쓴 아름다운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의 병세가 좋지 않아 어딘지 불안했을 때 하나님이 그 자매를 목사집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던 모양이지요. 느닷없이 찾아와서 좀 누워있다가 가겠다고 했어요. 누어있다가 간다는 것이 그에게는 마지막이 되었어요. 목사 품에서 하나님에게 갔습니다. 가만히 그 자매를 보면 참 숨이 끊어지는 그 자매의 모습을 내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세상에 대한 욕심 다 끊어지고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남을 도와주려고 하고 조그만 일에 감사하고 부엌에서 구정물 속에 손 담그고 남에게 눈치보며 시달리는 생활이지만 그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고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그 속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태어난 새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치료해 주세요. 여러분, 예수 믿으세요. 우리 더러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삼일만에 살아나셔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기만 하면 썩어 냄새나는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 놓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우리 예수님 믿으세요.
그분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여러분의 왕좌를 차지하시고 여러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지배하는 모든 것이 되면 과거에 내 의지로 내 수양으로 내 학력으로 치우지 못한 내 내면의 더러운 것들이 한 순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없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면 과거의 갈증이 없어지고 이제 남은 갈증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볼까? 어떻게 하면 더 사랑으로 형제를 섬겨볼까? 그런 갈증만 있지 과거에 있던 갈증이 없어요.
물론 완전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을 데리고 온 자매를 봐도 완전하다고는 생각지 않으시죠? 여러분이 옥목사를 봐도 완전하다고는 생각지 않으시죠? 완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완전하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점점 더 깊어지면서 내 속의 자아가 자꾸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면 갈수록 갈수록 우리에게는 완숙한 크리스챤의 인격이 나타나게 됩니다. 생활이 나타나게 됩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 섰을 때는 내가 누구와 꼭 닮은 사람이 됩니까?
예수님과 꼭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서게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진정한 평안을 갖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그 욕심 덩어리를 청소하고 싶습니까? 남편이 벌어오는 박봉 하나만을 가지고도 참 감사하면서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면서 자녀들을 사랑으로 권면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수님의 따님이 되고 싶습니까?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새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사람 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요한복음 1장 찾을까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 말씀 더 쉽게 말씀드립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마음으로 고백한다는 말이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이것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 하고는 같은 말입니다. 똑같은 동격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자녀가 됩니까? 태어나지요. 하나님이 낳아야지요. 예수 믿기만 하세요. 믿으면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이 자기 자녀로 낳습니다. 나도 모르게 속 사람이 변해 버립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자녀로 거듭나는 것은 혈통 가지고 안된다고 했어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사람의 뜻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누가 나아야 됩니까? 하나님이 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혈통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요?
아버지가 목사라고 해서 내가 자연적으로 예수 잘 믿는 사람인가요? 아니죠? 내 엄마가 집사 권사라서 내가 자연적으로 신앙생활 잘하나요? 아니죠? 육정으로도 안됩니다. 오직 믿을 때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고 자녀삼아 주십니다.
망설이지 마세요. 그냥 받아들이세요. 여러분의 마음문을 주님이 열어주셔서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아름다운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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