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부에 내려가신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나사렛 예수--지옥까지 널리퍼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는 로마제국의 권력통치를 대표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는 죽어 매장되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는데 그 죽음과 부활 중간에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셨다고 고백한다(한국교회의 사도신경 고백은 이 “음부에 내려가사” 부분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 세계의 다른 나라 교회들에서는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고백한다(엡 1:20-23).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중 가장 신비하고도 모험적인 고백이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보좌 등극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여 죽었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역사적 사실이다.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목격하고 경험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주장부터는 흔히 말하는 실증주의적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기에도 난점이 있고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기에도 너무 신비로운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 상식과 종교적 상상력을 초월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늘에 오르심은 부활보다도 더 믿을 수 없는 사도들의 증언이자 신앙고백이다. 사도행전 1:9-11에 따르면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은 제자들뿐이다. 그들도 구름에 가리워져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정확하게 관찰하지는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생애를 보내시고(이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집중 강론하심) 예수님은 다시 오실 기약을 남기고 하늘에 오르셨다. 그가 오르신 하늘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를 말한다.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그가 죽은 자의 공동체인 스올(sheol, 陰部)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의 승천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로드맵(roadmap)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등극하신 것을,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세상 통치를 위임받아 세계를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을 도대체 어떻게 믿으며 확신할 수 있을까? 요한복음 14-16장(14:26; 15:26; 16:7)과 사도행전 2:31-36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예수님은 지상의 마지막 단계의 사역에서 자신이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보혜사 성령이 지상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강림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으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방해와 모략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일이 지상에서 계속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기보다는 신자들에 의하여 고백되었다.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탄생된 사건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고백이 증명되었다.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공동체(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탄생)가 존재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하나님의 副王)가 되셨음을 증명한 것이지 무엇이겠는가?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만물을 말씀(명령)으로 붙들고 계신다. 첫째, 만물의 유지와 그것에 대한 섭리와 통치다(히 1:1-4). 둘째, 지상의 권력자들과 영적 권력자들의 권력기반을 해체하고 무장해제시키는 일을 하신다. 모든 반(反)하나님적인 가치관과 질서와 체제와 관습을 허물어뜨리는 일을 하신다. 역사적 격변과 변혁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진실로 지배하고 통치하시는 왕임을 증명한다. 셋째, 예수님은 만물의 목적에 맞게 만물의 존재의미를 충만케하고 완성시키는 일을 하신다. 교회가 이 만물을 통치하시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을 매개하는 결정적인 도구다. 그리스도의 뜻에 저항하는 모든 인간 결사체와 제국과 세력들을 분쇄하시고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할 때까지 역사하신다.
I.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의 첫 사역: 성령 파송(행 2:22-36)
이 단락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2부격인데 예수님의 공생애,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강림이라는 구원사의 각 단계에 대한 가장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행 2:1-21)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인류역사에 가져온 의미를 표현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즉 하나님의 친정(親政)체제를 여는 부왕의 사역 시작)의 결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이처럼 교회는 오순절에 태어난 성령의 피조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하는 기관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사역을 계승하는 지체다.
결국 성령은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요청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파송하신 하나님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의 또 다른 자아(the other self)다. 그래서 성령의 다른 이름은 예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린다. 성령(聖靈), 즉 거룩한 영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하게 만드는 영이다. 교회는 곧 오순절 성령의 사역이 지상 역사에 남겨놓은 유산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의 효력이 바로 성령의 강림이다. 교회는 모든 방언들과 민족 경계로 갈라서게 하였던 바벨탑의 저주를 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의 생생한 증거다. 오순절 성령은 언어가 불통된 민족들과 나라들, 계층과 계급, 지역감정과 역사적 구원(舊怨=오래 묵은 원한 관계)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복속시키는 하나님의 의지의 도구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령강림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가 이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았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예수님은 음부에 내려가 썩지 않고 오히려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메시야(=그리스도), 부왕(副王= 버금왕)으로 등극하신 것이다. 만왕의 주와 그리스도로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최초의 통치행위는 성령 파송 사건이다(33절). 그래서 성령강림은 명실 공히 주와 그리스도로 존귀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출현”(再臨)이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목격되고 경험되는 영광과 권능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사건이다.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 사람들, 심지어 그를 찌른 사람들의 눈에도 환히 보이는 방식으로 재림할 것이다.
기승전결의 짜임새로 구성된 이 단락은 예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는가를 보여주며, 성령 파송이 있기까지의 예수님의 사역을 논리적이며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1.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공생애(22절)
2.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23절)
3. 음부에 내려가신 예수님(벧전 3:19)
4.부활하신 예수님(24, 25-28, 29-31절)-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증하여 부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25-32절)
5. 승천하셔서 성령을 파송하신 예수님(행 2:33, 34-36)-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 승 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34-36절)
첫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바 권능에 찬 공생애 사역이다. 나사렛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귀신을 추방하고 온갖 불치병을 고치는 권능과 기적을 과시했다(너희 가운데, 너희 앞에서, 너희도 아는 바에). 당시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다스림)의 실체를 경험했다. 둘째, 예루살렘 권력당국자들과 로마제국 권력이 예수님이 일으키는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생명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장되었고 죽음의 권세가 그를 얼마간 지배하였다. 부패가 시작될 뻔하였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만인이 보고 경험하여 아는 사실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신 부활사건이다(다윗의 예언 인증).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목격되고 관찰되었다. 넷째, 하나님이 부활하신 예수를 오른손으로 높이 들어 마침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왕으로 등극시킨 사건이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신비로운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작별하고 돌아왔지만 예수님에게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선뜻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만 시편 110편을 통하여 예수님의 우편 보좌 등극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기까지는 예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보좌 복귀에 대하여 담대한 확신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강림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다시 공공연히 관찰되고 목격되는 사건이다. 다락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던 제자들은 오순절 첫 날에 요엘서 2:28-32(겔 36:25-27, 렘 31:31-34 등)에서 약속된 성령의 불세례(충만)를 받게 된다. 이 성령 세례 사건 이후에야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보좌등극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구약성경(시 16편; 110편; 욜 2:28-32)의 그리스도의 부활 및 성령강림 약속 말씀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결코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순절에 경험한 신비로운 방언 분출, 기쁨 충만, 용감무쌍한 예수 부활 증언,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의 강고한 결속감과 연대감 형성, 그리고 당국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돌파력은,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확신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공생애,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 등 모든 것은 이제 과거사역이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의 현재사역은 오로지 성령을 파송하셔서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성령의 새 가죽부대로 결속시키고, 잘 결속된 제자공동체, 성령 충만한 증인들을 온 세상에 파송하시는 사역이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등극하셨다는 진실은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의 새 포도주를 담는 교회공동체와 성령의 권능으로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의 계급적, 계층적, 인종적, 민족적, 사회경제적, 문화적인 "자아"(기득권)를 부인한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 증명해 내야 할 진실로 남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려는 제자들은 그들 자신이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 갱생 및 갱신, 소생을 경험한 부활의 체험자들이어야 한다. 자아를 변혁시키고 갱신시키는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를 경험한 신자들만이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1.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공생애(22절)
베드로의 오순절 회개촉구 설교는 청중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강력한 공생애를 펼친 것은 예수님의 적들도 인정했다는 점을 착안한 것이다(행 10:37-39).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라는 말은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들도 그가 사람들을 경악시키는 기적(奇蹟)과 이적(異蹟)을 행했음을 인정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만일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산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파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활동이 음유 시인처럼 알쏭달쏭한 풍자시를 읊거나 약간 비주류적인 정치 시사평론을 제기하는 데 그쳤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갈릴리발(發) 태풍처럼 사람들을 움직여서, 이스라엘의 낡은 종교를 파열(破裂)시키자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다.
2.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23절)
23절은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하는 베드로의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자신들 가운데서 베푸사 자신들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지만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다고 고소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예수를 돌로 쳐 죽이지 않고 나무에 달아 죽이려고 했던가? 그 당시 로마 총독부 당국은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공동체가 한 개인을 돌로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죄형법정주의라는 이름으로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예수를 로마제국의 법정 절차에 따른 재판(裁判) 없이 죽일 수 있었고, 산헤드린의 결의로 유대인 공동체가 한 두 사람을 돌로 쳐 죽여도 로마 총독부 당국이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신명기 21:22-23은 하나님께 중대한 죄를 범한 죄인을 공동체가 나무에 매달아 죽이되 그 시신을 하루 이상 매달아 두면 그 땅을 더럽힌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종교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이유는 민중들에게 나사렛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의 죽음임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3. 음부에 내려가신 예수님(벧전 3:19)
사도신경의 고백에 따르면 예수는 “죽으시고” “묻히셨다.” 죽고 묻혔다는 점은 나사렛 예수가 얼마나 철저하게 죄인의 운명에 연대했는가를 보여준다. 하나님 아들의 인류와의 연대성은 인간의 최종적인 한계로서의 죽음과 매장에서도 보여진다.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말은 사도신경의 특수성-나사렛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신학적 성격을 부각-을 나타낸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진이 시작하는 것을 본다. 한편 칼빈과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예수의 지옥행"을 신화론적으로 이해했다. 로흐만이 인정했듯이 루터와 칼빈은 실제로는 사도신경의 이 어두운 진술을 같은 관점을 가지고 해석했다고 보여준다. 예수의 지옥행은 죄인으로서 인간의 유한한 삶 전체에 관련된 예수의 해방의 역사의 넓이와 깊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최악의 상황, 신의 부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는 것이다. 지옥 혹은 음부는 다시는 소생의 희망이 없는 곳, 하나님의 최후 심판만이 기대되는 곳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최후심판마저도 최후 심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하늘과 땅 모두, 심지어 우리가 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도 그리스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부활하신 예수님(24, 25-28, 29-31절)-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증하여 부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25-32절)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과 그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시편 16편을 인증한다. 시편 16편에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자신의 앞에, 그리고 자신의 오른 편에 항상 계신 주(主) 야웨를 보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우편에 계신 야웨 때문에 자신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마음과 육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뻐한다고 노래한다. 시편 16:10에서 다윗은 자신을 무덤에 내던지시지 않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피력한다. 또한 시편 16:10에서 다윗은 “당신의 거룩한 자로 하여금 부패를 보지 않게 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드러낸다. 베드로는 여기서 다윗의 고백이 십자가상에서 드린 그리스도의 고백적 기도를 미리 대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다윗이 주(主)라고 부른 이가 바로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임을 논증한다(29-31절). 따라서 베드로는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졌던, 죽음과 부패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가 가졌던 확신과 부활을 통해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던 이상왕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넘어 부활을 확신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죽어서 부패되지 않고 부활할 것을 확신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죽음의 구렁텅이에 던져졌던(사울에게 박해받던 시절, 밧세바 사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세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무덤 속에서 썩지 않고 그 때마다 영적으로 소생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소생되고 갱신되었듯이, 예수님도 죽어 매장될 수는 있지만 썩지 않고 부활하실 것을 확신하고 마침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시편 16편의 시나리오대로 그리스도가 죽으실 수는 있어도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예수님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이나 부활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집중적인 공부 시간에 시편 16편을 갖고 당신 자신의 부활을 설명하셨을 수도 있다.
29-31절에서 베드로는 이 시편 16편의 시적 자아인 다윗은 궁극적으로 다윗 자신이 아니라 다윗의 위에 앉을 그의 후손의 죽음과 부활 드라마를 미리 말한 예언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은 죽었고 그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29절). 다윗은 자신의 후손 중에서 하나님 나라를 견고히 세우실 것이라는 사무엘하 7:12-16의 약속에 의하여 시적 영감을 고취받아 음부에 내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시 부활하실 그의 이상적인 후손 왕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미리 말했다는 것이다(30-31절).
32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의 약속에 따른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성취 행동임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이 예수를 살리신지라.”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임을 공포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펼치시고 큰 권능을 펼치신 사건은 모든 사람이 다 목격한 사건이기에, 베드로가 “너희 모두가 아는 바라”고 했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제자들만 목격했기 때문에 “우리들만이 아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강력한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기적과 이적을 베푼 사건은,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이 다 목격한 사건이다. 이것은 CNN 뉴스 기자와 연합통신 기자도 다 동영상으로 찍을 수 있는 실선적(實線的)인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한 사건은 실선적(實線的)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願)하실 때만 그리고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목격되고 경험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점선적(點線的)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은 모든 신문기자들의 카메라에 촬영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원하실 때 나타났다가 원하실 때 사라지셨기 때문에, 이것은 엄격한 의미의 역사적 사건이라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 사건은 역사적 사건은 사건이로되 초역사적(超歷史的) 사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영원의 포물선과 시간의 직선이 만나는 접점에서 일어난 사건인 셈이다. 따라서 이 일을 보고 경험한 증인들이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로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의 증인은 제자들 공동체 “우리”인 것이다.
이 점을 로흐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십자가는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역사적인 현실성을 넘어서는 부활은 파악될 수 없는 비밀에 속한다. 부활 자체는 역사적인 검증의 성격을 넘어선 문제이므로 역사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성과 관계를 갖고 있는 증언의 차원은 남아 있다.”
사도신경이 강조하는 “삼일만의 부활”이란 고백 또한 재대로 음미되어야 한다. 강력한 서스펜스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삼일의 시간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공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십자가의 비통함과 참혹함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를 시사한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이 삼일이라는 시간이 삽입된 것은 교의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삼일”은 부활 사건의 현실성을 상징적-변증법적으로 비현실화시키고 그 현실성을 제거하려는 일체의 유혹과 맞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유일회적인 부활 사건을 의미함과 아울러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과도기가 극한 불확실성을 동반한다점을 경각시킨다.
하지만 부활의 현실적인 결과들은 우리 시대의 고통을 비신화화시킨다. 그 중에 우리를 가장 괴롭힌 것의 하나는 숙명론의 유혹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활의 현실성과 신앙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부활신앙은 운명에 대한 체념과 자포자기를 타파한다. 부활 메시지는 십자가 아래서, 역사의 숙명적인 경향과 극복을 부활의 빛에서 보면서 집요하게 좌절과 체념과 대결한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새로움의 가능성은 신앙고백의 전망에서 결코 파탄된 것은 아니다.
5. 승천하셔서 성령을 파송하신 예수님(행 2:33, 34-36)-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의 승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
이 단락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 승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힌다(34-35절). 33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파송을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으로 파악한다. 33절의 상반절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올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령 파송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행하신 첫 사역인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요청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파송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 3위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1054년 동서방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던 필리오케(and from the Son) 논쟁을 자세히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양측의 논쟁은 언어적 자구의 뉘앙스를 사이에 둔 논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로마교회로 대표되는 서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from the Father and the Son) 출원하신다”고 주장하였고 콘스탄티노플로 대표되는 동방교회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 성령이 출원하신다”고 주장했다. 요한복음 14-16장과 사도행전 2장을 종합해 보면, 아들의 요청에 따라 아버지께서 성령을 파송하신다. 따라서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합의와 연합으로 성령을 파송하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은 일차적으로는 아들 하나님을 증거하고 아들 하나님의 사역을 바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첫 보혜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토대로, 그의 이름으로 오셔서 그를 증거하실 성령은 둘째 보혜사인 것이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 강조되듯이 성령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가지고 당신 자신을 증거하실 “또 다른 보혜사”인 것이다.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고 보좌 우편으로 되돌아가 주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착수하셔야만 제자들에게 오시도록 예정된 또 다른 보혜사였다. 따라서 성령이 강림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올리우셨음을 의미한다.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의 결정적 증거인 것이다.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에게 심어준 가장 강력하고 즉각적인 확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다(마 28:18-20; 행 7:55; 빌 2:10-11).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주(主)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깨달았는가? 아니면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임을 깨달았는가? 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요한복음 14:26, 15:26, 16:7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의 논리적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시면 아버지께 요청하여 제자들을 위하여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았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아서 처음으로 착수했던 최초의 통치행위는 무엇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主)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착수한 통치행위는 성령을 파송하신 사건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심을 증거하는 영(靈)이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게 된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 주권(主權)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확신하려면 성령 충만에 이르러야 한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는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을 뜻한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을 향한 감정이 단지 감미롭게 순화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意志)와 책임감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 계심을 믿을 만큼 성령충만한 신앙고백을 드리지 못하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성령의 단기적 과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보혜사 역할이었다. 예수님은 성령의 감동과 감화 속에서 감미로운 순종 모드(mode)로 전환된 제자들을 자유자재로 다스리신다. 성령으로 달구어지고 감동된 제자들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끊게 하시고 아주 사이가 나쁜 인간 관계에 머물던 사람들을 하나의 가족같은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고립된 개인들이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루되, 성령의 능력에 무장해제된 개인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게 하신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33절에 의하면 그들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과 공동체에게 일어난 사태의 외양과 현상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위대한 공생애를 실선적(實線的)인 사건으로 목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보거나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과 주장만 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의 신앙(信仰) 여부(與否)에 상관없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영적 도취상태를 경악과 당혹, 의심과 경이 속에서 쳐다보고 있다. 새 술에 취한 듯 세계 만방의 지방 언어로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하는 이 사건의 일차적 목격자요 관찰자로 서 있다. 성령강림의 결과 나타난 사건은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만민(萬民)이 경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선 사건이다.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은 실선 사건(實線 事件), 부활과 승천은 점선 사건(點線 事件), 오순절 성령강림의 결과 나타난 방언 현상은 다시 실선 사건(實線 事件)인 것이다. 국외자들이 볼 때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아직도 미궁(迷宮)에 쌓여있다(다빈치 코드의 대담한 주장을 보라). 예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증명될 수 있는 진리다. 존 스토트가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제시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간접적인 증거, 방증은 그 자체로는 무기력하다. 빈 무덤설, 시체도난설, 기절설(氣絶設), 환생설(還生設) 등을 반박한다고 예수 부활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빈 무덤설, 시체 도난설, 기절설, 환생설 등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데는 물론 반증하는 데도 무기력하고 불충분할 뿐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들에게 과학적으로 설복시킬 만큼 공개적인 증거가 약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방식으로 증거해야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데는 증명 방법이 중요한데 그것은 증인의 역량에 있다. 증인의 삶과 사역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기대되는 삶과 사역이어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갈릴레오나 케플러식으로 증명(證明)하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게 할 수는 있다. 부활의 증인은 법정(法廷) 진술(陳述)처럼 증거 능력을 가져야하고 신빙성있는 진술과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이 표방하는 가치를 내면화(內面化)하고 육화(肉化)시켜서, 죽음의 권세를 압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는 것은 믿지 못할망정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자신의 부활도 믿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주장이 개연성(蓋然性)이 있다고 인정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부활 사실을 증거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논한 여러 방식의 신(神) 존재 증명(證明)(우주론적 증명, 도덕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은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았다.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
34절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리우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선포한다. 주(主)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약간 다른 말이다. 당시에 주(主, kyrios)라는 말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신적 대권을 가진 왕을 의미하였다. 고대 로마 제국 안에서는 제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이사)에게만 사용된 호칭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종교의 창시자에게도 주(主)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 황제의 주권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로마 총독 관저(官邸)가 소재하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다(마 16:15).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主) 고백을 요청하실 때는, 우리가 우리에게 절하라고 하는 거짓 주들을 거절하고 배격하는 담력을 발동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부왕(副王)을 일컫는다(Second King). 헬라어 그리스도(christus)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마시아흐’(massiaḥ)를 번역한 단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신정통치의 인간 지도자를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왕과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1) 신학적인 의미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代理) 왕(王)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부왕(Second King)을 뜻한다. 부왕은 항상 아버지 왕의 오른편에 앉아 아버지 왕과 함께 공동통치를 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부왕(副王)을 뜻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런 의미의 부왕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것이다.
35-36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원수(怨讐)를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다. 원수를 발등상 삼는다는 것은 원수를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고전 15:20-2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서 주와 그리스도 역할을 하신다는 말이다. 원수를 발등상 삼는다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고대 앗수르의 왕국 조각물이나 문헌(文獻)을 참조하면 된다. 고대 앗수르의 신상(神像)들이나 왕의 원정 전쟁을 기록한 부조물들 중에는 원수의 목을 밟고 있는 앗수르 대왕(大王)을 묘사한 부조(浮彫)가 많이 발견된다. 예수님은 원수인 사망을 완전히 정복하여 무력화시킬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고, 때가 오면 왕권(王權)과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라를 바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가 불가불 왕노릇 하는 시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이 정적(靜寂)인 느낌이 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이 보좌에 앉아있다”는 말은 아주 역동적인 통치행위를 묘사하는 말이다. 히브리서 1:1-2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붙드는 일을 하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다. 누가복음 24:47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일이다. 죄를 정결케 하는 예수님의 과업은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저항하는 진지와 요새가 되어버린 개인의 자아와 집단 이념과 기득권을 거룩하게 분쇄하는 일이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 전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확장시키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동일한 사역이다. 결국 누가복음 24:47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되돌아오는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세계를 통치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이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교회가 사람들의 죄와 반역, 불순종과 불신앙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진실은 의심되고 타기(唾棄)되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인들 자신조차도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임을 믿으면 믿는 우리가 그의 다스림에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영향을 받게 되어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主)를 지금 이 시간 믿지 못하면, 다른 주(主) 앞에 절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절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거짓 주들에게 절하지 않아도 되는 용기와 담력을 얻지 않았는가?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고 절하고 나면, 우리에게 절하라고 요구하고, 윽박지르고 회유하며, 공갈치는 거짓 주(主)들을 단칼에 칠 수 있는 담대함과 자유가 생긴다. 예수님께 제대로 절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경배해 보라. 엄청난 자유와 용기가 생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거짓 주(主)들이 우리의 양심을 세차게 정련(精鍊)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것은 순교를 의미한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면 부동산 투기 못한다. 이런 때 일수록 우리의 예수 주(主) 고백은 위력을 발휘한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일은 우리의 정신적 담력을 단련(鍛鍊)시켜 주고, 엄청난 자유를 확보해 준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들은 스승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으나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에 의하여 완전히 부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위로 지상의 인간 권력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III. 베드로의 구원설교(행 2:37-42)
37-38절은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경악하는 청중들의 적대적 반응을 보여준다. 이 두 절은 베드로의 논리적이고 설득렸있는 설교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예루살렘과 유다 청중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베드로의 영적 권위를 부각시킨다.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이여”라고 부른다. 그 다음 그들은 탄식을 터뜨린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넘겨준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양심이 찔린 청중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요구하고 성령의 선물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킨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38절).
회개(悔改)한다는 말은 참회한다는 말과 다르다. 참회는 도덕적 가치 판단이 중심이 된 도덕적 반성(反省)인데 회개는 도덕적 반성이 채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영악하게 계산해서 가던 길을 바꾸는 행위다. 예수를 저주받아 죽은 자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고백할 것인가? 회개한다는 말은 예수를 저주받아 죽은 자가 아니라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 죽은 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다(고전 12:1-3). 예수를 저주받아 죽은 자라고 믿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 대속적인 죽음을 죽었다”고 믿고 자신의 옛 사람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롬 6:3-5; 고전 15:3; 갈 2:20). 이것이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죄사함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자유임과 동시에 죄의 권세, 즉 동일한 죄를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습관적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죄사함을 누리는 사람에게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는데, 성령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의 통치 아래 머물도록 격려하고 돕는 보혜사 하나님이시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이 약속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먼 데 있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장된다(39절). 성령은 원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자들에게도 선물로 주어진다(행 10:44-47; 11:17; 15:8). 39절은 성령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믿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보편적으로 주어질 것임을 가리킨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유대인들을 넘어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포섭시키는 보편적인 사랑의 영이시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의 오순절 설교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과 유대 청중들에게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함으로써 종료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단지 죽어 혼백(魂魄)이 천당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거절하고 패망할 수밖에 없는 길로부터 돌이켜 살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에서 돌에 맞아죽은 제사장 바라갸(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예후 왕과 함께 바알주의자들을 척결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의 피를 흘린 죄(대하 24:20-22)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범해진 모든 범죄의 죄값을 치르는 세대였다(마 23:35-36).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불순종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세대라는 것이다. 모든 패역을 총집결시킨 세대라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무력항쟁을 북돋우는 과격한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멸망당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스스로 자기 구원의 길을 강구하다가(로마제국과 무력항쟁을 벌임으로써) 자멸의 길로 접어드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패역한 세대의 시대정신으로부터 돌이키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이 경고한대로 한 세대가 못 되어 유대인들은 열심당원들의 선동과 지도력 아래 속수무책으로 66년경에 로마제국에게 항쟁을 벌였다. 나라는 멸망당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항쟁에 참여하지 않고 갈릴리의 펠라 지역으로 피신하여 영적 지도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패역한 세대로부터의 구원은 이처럼 단지 영적인 권고가 아니라 당대의 현실주의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동산 투기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광풍, 패역한 맴모니즘(mammonism)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경쟁과 탐욕으로 담금질된 세대로부터, 그 시대의 왜곡되고 비인도적인 중심가치, 지배가치로부터 해방되어야한다. 원자적 파편주의, “나만 살아야 한다”는 독점주의, 과잉 욕망을 추구하는 쾌락주의가 우리 공동체를 패망으로 몰아가는 패역적 에너지들이다. 이 에너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다.
베드로의 설교가 양심의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예수 안에서 침수되어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되었다. 예루살렘 사도 교회는 120문도에서 3,000명 이상의 대형 회중으로 급성장하였다. 42절은 이런 급진적이고 역동적인 변화에 한 가운데 12 사도들의 공동체적 가르침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는 각각의 은사를 통해 공동체를 섬긴다는 점에서 은사민주주의가 형성되었지만 여전히 영적 위계질서는 남아있었다.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 떡을 떼며 기도하는 데 전력투구한 것이다.
IV.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탄생-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공동체 탄생(행 2:43-47)
이 단락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직접적인 결과를 보도한다.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전위와 거점이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의 오순절 설교 과정에서 사도들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갔다. 경건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의 손을 통한 기사와 표적은 대중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통치 현장을 생동감있게 체험하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전투적인 사랑의 공동체라는 진지(陣地) 구축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적인 사랑의 공동체 탄생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믿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육체적 현존을 포함하여 모두 다 함께 있었다. 함께 있음의 위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영적 지도 아래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가족같은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둘째, 모든 물건을 통용하였다. 그래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 돈과 재물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적 위력이나 휘광(輝光)을 발휘하지 못했다. 셋째,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썼다. 예배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회중적인 공예배에 투신한 것이다. 넷째, 그들은 회중적 공예배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또 안온하고 가족적인 친밀함이 지배하는 공동체인 집을 중심으로 모여 공동식사를 하였다. 46절의 “떡을 떼며”라는 표현은 성만찬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나누는 성만찬을 한 것이다. 성만찬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나눠진 공동체적인 애찬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국외자들인 예루살렘 백성의 칭찬을 받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래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를 날마다 더하셨다. 이런 공동체의 일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목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줄기에 붙어있는 포도나무 가지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에 친밀하게 접촉된 가지만이 결실한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성령충만을 경험하다가, 강력한 영(靈)의 공동체(共同體)에 소속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구원받지 않은 자처럼 급격하게 완악해지고 경화(硬化)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강력한 구원을 경험하고 강력한 간증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을 계속 유지해주고, 영적 고도(靈的 高度)를 온전히 유지시켜주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하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급격한 영적 경화(硬化)와 냉담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서 묘사한 그 강력한 성령 충만의 공동체 즉 물질적인 차원까지 소통(疏通)하는 신코이노니아(syn-koinonia) 공동체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공동체이고, 가족과 같은 친밀함과 돌봄, 책임감과 의무로 결속된 공동체다. 구원받은 신자가 이런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으면 성령 충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본문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와 유사(類似)한 사상처럼 들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본문이 제시하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은 초대교회 시대의 한 때만 있음직한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일회적(一回的)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이 사건은 성령충만한 개인들과 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수 있는 삶의 모습이다. 성령이 지배하는 공동체는 물질까지 포함하는 나눔의 공동체, 즉 유무상통의 공동체다. 표준적인 성령경험 안에 어느 시점에서든지 반드시 실현될 수 있는 공동체적 모습이다. 이 단계를 거쳐야만 우리는 초대교회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이런 총체적 유무상통의 공동체를 이루어 이 땅에 예수님의 통치권을 확정하자는 것이다. 이런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엄청난 영적 흡인력을 드러낸다. 하루에 삼천 명씩 제자의 수가 증가되기도 한다.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엄청난 카리스마와 더불어 유무상통의 역동적인 잔치스러운 교제는 주변 세계를 뒤흔들고 전복시키는 변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교제는 말과 혀로만 나누는 사랑이 아니라 지갑을 열어젖힌 교제였다. 초대교회는 집에서 탄생해 성전을 통해 확장되고 다시 집을 통해 내실적 성장을 기했다. 오순절 성령은 집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을 덮쳤다. 가족과 같은 친밀한 공동체가 초대교회의 모태가 되었는데 이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활동무대는 집을 벗어나 성전으로 확장되었다. 성전은 예루살렘 당국자들과 일반백성들에게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유감없이 증시(證示)하는 공적 증언 무대였다. 46절에 따르면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였다. 그들은 “집에서” 성령 받고,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집회한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학자들이 말하는 전투적인 아가페 공동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떡을 떼며 공동체적인 식사를 통해 가족 공동체적 친밀감을 고양하고 바깥 세계를 향한 증언 공동체로서의 담력을 함양해 간다.
이처럼 45-46절은 초대교회가 어떤 점에서 전투적인 아가페 공동체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겨 하나님과 동급(同級)으로 숭배하는 돈, 재산, 동산, 부동산을 공동체 앞에 바쳐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성령께서 자연적 양심의 공감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강도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예민하게 느끼는 마음을 각각의 성도에게 심어주신 것이다. 성령충만한 마음은 막걸리 한 잔 마셔서 컬컬했던 마음이 묘해지고 격앙된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지갑을 열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데 쓸 공동체적 자산(資産)을 만들만큼 자유해지는 상태다. 성령충만한 마음은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처럼 여겨졌던 사유재산(私有財産)을 하나님께 바쳐 이웃을 사랑하는 데까지 활짝 열린 마음이다.2) 오늘날 돈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거의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도 돈의 힘에 초연한 척 할 수 없다. 돈을 경멸하는 사람도 돈의 힘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돈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일을 그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하여 돈을 순교시킬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성령에 강력하게 사로잡힐 때만이 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앞에 제 본분을 다하는 유순한 종이 된다.
사유재산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 제도를 상대화시킬 만큼 강력한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힌 전투적 아가페적 공동체는 돈을 신으로 숭배하는(마 6:22) 집단과 조직을 초토화(焦土化) 시켜버림으로써 그것을 구원한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공동체의 사랑을 전투적인 사랑이라고 부른다. 전투적 사랑의 특징은, 전투에서 진 자를 구원하는 사랑이다. 자신들의 동산과 부동산을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내놓고 자기 재산을 아무 대가없이 양도(讓渡)하는 이 엄청난 담대함과 자유는 성령이 창조해 주신 자유요 사랑의 능력이다. 이 자유케 된 사랑이 돈을 신처럼 숭배하는 개인들과 집단을 무력화시키고 초토화시키기 때문에, 전투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성령의 강권적인 설복(說服)으로 가능한 일이지 강제적인 법이나 이념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절대로 사회주의(社會主義) 법(法)이나 프롤레타리아 유일정당인 노동당의 이념으로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또한 히피적인 군중심리나 집단정신으로 실현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성령충만을 경험하면 반드시 이 단계(段階)를 거칠 수밖에 없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충만함을 물질적으로 표현하게 마련이다. 성령충만한 상태가 영(靈)으로 표현되지 않고, 물질과 육체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영과 육은 변증법적(辨證法的)인 순환 관계를 이루며 서로를 표현한다. 성령충만 할수록 물질에 자유해 진다. 성령충만 할수록 내가 가진 물질, 계급적 위치, 나의 기득권적 이득을 강하게 부인하고 그것들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자유함이 더 커진다. 개개인이 이것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집단정신이나 집단 이데올로기 이름으로 개인의 양심을 강압하거나 위협해서 실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V. 거기에서부터 산 자 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러 오시리라(딤후 4:1-4)
우리는 여기에서 “오르사, 앉다, 다시 오시리라”는 시간의 세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사도신경이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와 미래를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세계의 창조자), 오늘(세계의 구원자), 내일(세계의 완성자)의 시간들 안에서 불변의 주체요 대주재시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보좌 앉으심은 세계 심판 및 개인 심판의 근거와 토대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세계를 감찰하시고 통치하시다가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러 오실 것이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계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야말로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존립근거와 사명 수행의 능력을 공급하는 원천이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실천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부활과 성령 강림,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속적 통치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활과 오순절은 사도들의 신앙의 프락시스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승천과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주제는 신학과 교회로부터 성급하게 비신화화될 수 없을 것이고, 우선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역사는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재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통치하시다가) 세계를 변화시키고, 해방하실 것이라는 고백은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게 선사하는 가장 위대한 희망이다.
결론
예루살렘에 탄생한 초대교회는 유대 당국과 로마제국의 음모와 담합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사형수 나사렛 예수의 죽음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님을 뒤로한 채 뿔뿔이 도망친 제자들이 다시 돌아와 이렇게 용감무쌍한 증인 공동체로 재집결한 것은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다. 프로이드를 비롯한 역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죄책감을 보상하기 위한 제자들의 보상심리적 행동이라고 주장하나 제자들의 남은 생애와 그 이후에 전개된 기독교 복음의 전파 과정을 보면 이런 심리역동적 설명은 턱없이 무기력하고 불충분한 가설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고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 비겁하고 무기력한 오합지졸같은 제자들이 용감무쌍한 신코이노니아 공동체, 전투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형성할 수 있었다는 사도행전의 주장을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
갈릴리의 첫 제자들은 갈릴리발(發) 태풍이신 나사렛 예수를 처음 만나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얼마나 경탄하며 열광하였던가? 하나님의 아들이 현신하여 땅 위를 걸어다닌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마 16:16)? 유대인 모두가 다 아는 바처럼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전 까지는 얼마나 강력한 이적과 기적의 공생애를 펼치셨던가? 그런데 예수님이 무기력하게도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어 버리시자 제자들은 얼마나 낙담했던가? 십자가에 끌려가는 예수님을 뒤로 한 채 자신들만 살려고 줄행랑치던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은 또 어떠했던가?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장사한 지 3일 만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이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장면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스승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깊은 죄책감에 찌들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얼마나 두렵고 당혹스러운 일이었을까? 제자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져가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일부 제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수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났고, 모든 사람들에게 다 관찰되거나 경험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미궁(迷宮) 속에 빠진 사건이거나 적어도 논란(論難) 중에 쌓인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증거주의에 입각하여 제판하는 법정의 증언대(證言臺)에서 증언할 수 있는 증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깊은 확신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 번 보았다고 부활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두 일곱번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일곱 번 나타난 것은 나타날 만큼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서 수제자 베드로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가련다”라고 말하며 다시 옛 생업으로 되돌아간다. 초기 제자들 모두가 베드로와 함께 밤에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나갔다. 이것은 단지 하룻밤 소일을 위해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3년 동안 보냈던 갈릴리 신학수업 경험을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되돌리겠다는 말이자 예수님과 함께 이룰 꿈이 깨어진 이상 이제 과감하게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역소명(逆召命)을 위한 결단(決斷) 표명이었다.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소명이 아니라 생업을 위하여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부활 신앙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신앙은 감각 경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해야만 진정한 부활신앙이 생기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능력을 구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증거하는 증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의 비밀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겨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체 도난설과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믿게 된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은 시체도난설을 믿고 있다. 시체도난설은 부활 신앙보다 훨씬 더 믿기가 쉽고, 순교자의 순교적 전도 없이도 전파될 수 있는 사상이다. 시체도난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부활 신앙보다 훨씬 더 빨리 퍼질 수 있었을 법한 사상이다. 자연인인 인간의 이성에는 어떤 소식이 빨리 전파되고 설득력이 있을까? 시체를 도둑맞았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도난되었다는 설은 일부 로마 병정들에게만 통하고 전혀 전파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예수가 부활했다는 믿음은 250년경 즈음에 로마 제국의 모든 변방에까지 퍼졌다. 완전히 고사리가 늪지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듯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버린 것이다. 이 두 믿음의 전파 속도와 범위의 차이는 목숨 바치는 증인의 유무에 달려있었다. 시체도난설에는 목숨 바치는 증인이 없는데 비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는 목숨 바치는 선교사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가 주(主)라는 고백은 성령 강림 없이는 있을 수 없고, 성령의 공중 내습(來襲)없이는 예수가 주(主)라는 확신이 자랄 수 없다. 예수가 주(主)라는 고백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고, 예수가 주(主)라는 고백이 없으면 전(全) 재산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바칠 만큼,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전(全) 존재를 쏟아 부을 공동체에 대한 결속감을 느낄 수도 없다. 이런 사랑의 진지(陣地)가 형성되지 않고는, 세상에 대하여 공세적(攻勢的)인 복음을 외칠 수 없다. 이런 강력한 사랑의 진지가 구축되지 않으면 로마 제국의 변방과 그늘에 주저앉아 있는 연약한 자들, 노예들, 어린이들, 포로들, 군인들, 여인들의 희망이 되기까지 자기를 내어주는 선교사들이 나올 수 없다. 사도행전 2:37-43은 아주 미미한 출발을 보였던 교회가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세계인의 복음이 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을 조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전투적인 아가페 사랑의 진지 구축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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