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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0)

by 【고동엽】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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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0)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귄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당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어느 진화론자가 30년 동안을 고집스럽게 자기 학설에 매여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그가 저술한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내용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가 진화론을 주장할 때에는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를 볼 때마다 조상을 보는 것 같아 심정이 아주 착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물과 사람을 같다고 생각하니, 동물이 사람을 닮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동물을 닮은 것이 되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후로는 사람은 엄연히 동물과 다르며 사람은 동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기를 보고, 그 다음에 동물들을 보니 그 동물들이 어떻게 귀엽고 아름다운지 동물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내가 나됨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인생관이라고 하며 세계가 무엇이냐는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세계관이 곧 인생관이요, 인생관이 곧 자기관입니다. 내가 무엇이냐, 네가 무엇이냐는 곧 세계가 무엇이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작은 세계요. 작은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웃을 보는 것도 자기만큼 봅니다. 그러므로 남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입니다. 즉,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역시 이웃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하라고 했지만 사실 자기 몸 이상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됨은 세계와 관계가 있고,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나됨을 결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에 대한 고백, 그것이 바로 나됨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나의 나됨은 내 주인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대답은 내가 누구를 주로 섬기느냐에 있습니다. 내 주인은 나 자신의 자신됨을 결정해 주고 내 생의 목적이나 가치를 결정해 줍니다. 아무리 재주가 많고,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사는 목적이 저속하면 너절한 사람이 되고 속물이 되고 맙니다. 비록 이렇다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고상하고 거룩한 목적 즉, 하나님께 향한 목적을 두고 살면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요, 그 삶 자체가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생의 궁극적 의미가 오늘 내 생의 현실적 의미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시급한 문제요,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매 시간마다 우리는 새롭게 나의 나 됨을 확증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을 얼핏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되심을 묻고 계신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좀더 깊이 이해하고 보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 "너희들은 누구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고백하느냐 하는 그 고백 속에 내 존재가 있고, 나의 나됨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나 하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결론은 인간무상입니다. 혼자라는 생각은 결국 허무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좋은 머리로 열심히 연구한 현대 철학의 결론은 허무입니다. 사람 자신만을 가지고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가치한 것이고 아무 희망도 쓸모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사람됨을 아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 때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압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할 때에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 됩니다. 하나님을 고백하는 순간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된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아이들에게 철이 났다 라는 말을 합니다. 철난다는 말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자기가 제일인 줄 알고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다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자라면 아버지도 생각하고 어머니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이 생기면 자기만 생각하던 아이가 아버지 어머니께 먼저 드릴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그리고 내가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철이 난 것입니다. 나이가 얼마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있고 오늘 내가 있으며 선생님이 있고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요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인도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인도주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인도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답답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보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에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동물만이 있을 뿐입니다. 진화론 학자 토마스 헉슬레니는 인간이 사랑까지도 생식본능의 발로라고 말했습니다.
동물이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 진화론자로서는 그 이상의 말을 더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갖는 사람에 대한 개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없으니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신본주의 없이 인본주의를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에 사람된 존재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 특히 신부들에게 다음과 같은 히브리격언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이 격언 속에 "아내들이여, 남편을 임금님처럼 높여라. 그리하면 남편은 당신들을 왕후처럼 사랑하리라. 반대로 남편을 종처럼 부리려고 하면 남편은 당신에 대하여 폭군이 되리라" 요새 생각이 미흡한 아내들은 자기 남편은 종처럼 부리고 자기는 왕후가 되겠다고 합니다. 왕이 없이 왕후가 존재합니까? 왕이 있고야 왕후가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창조주로 고백한 후에라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 되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이 고백은 실제적인 것이요, 구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엄청난 사건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죄인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내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하시면서 까지 구원한「나」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됨의 가치가, 즉 무궁무진한 깊은 가치가 십자가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신비롭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인 진리는 그대로가 사실이지만 이것에 대한 우리들의 고백이 나의 나 됨을 결정하여 줍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앙사건으로 내게 와서 사실로 가치를 형성하고 가치를 창조해 주는 것입니다.
믿는 만큼 내게 있어서 사실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그릇 만큼 우리는 그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여름에 홍수가 나서 온 국민이 마음 아파했습니다. 집들이 물 속에 잠기니 사람들은 옥상으로 올라 갔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보니까 헬리콥터가 와서 줄사다리를 내리고 사람들은 차례차례로 줄을 잡고서 구조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줄사다리를 사람들이 타고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일단 붙들기만 하면 위에서 끌어올리더군요. 이상한 것은 그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인데도 사람들은 그 비행사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또는 그 줄이 튼튼한지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의지하며 믿고 붙들었습니다. 자, 만약 여기서 의심하여 저 위에서 끌어올리는 사람이 누구냐고, 과연 믿을만한 사람이냐고 따지고 드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를 구원하려고 해도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이 육신으로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놀라운 능력과, 사랑과, 생명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믿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귄세를 주신다"(요한 1:1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 고백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삼년 동안 병자들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많이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순간에 와서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예수님께서 만족해 하시는 대답을 합니다. "이것은 네 혈육이 네게 알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네게 알게 하신 것이다" 즉, 고백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베드로라" 다시 말하면 너는 반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좀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만, 만약에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베드로가 "당신은 의사입니다, 당신은 마술사입니다, 또는 당신은 물주입니다"라고 대답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때때로 그리스도를 잘못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병 고치시는 분, 이상한 능력을 나타내는 분, 내 소유를 때때로 채워주시는 분, 또는 사환으로, 종으로 그리고 소원 성취하게 해 주시는 분으로 잘못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유감된 일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구체적이고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병들든 가난하든, 살든, 죽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베드로와 같아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예수님을 독생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헬라 문화권에서는 예수님을 말씀(logos)으로 고백하며 로마 사람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주(主)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 사람들은 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말들을 써야 하는 문화적 신학적인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단어는 서로 달라도 종합하면 의미는 같습니다. 즉, 형식은 달라도 내용은 내게 오신 하나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나를 구체적으로 사랑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성령이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서 천국의 열쇠까지 주셨습니다. 이 고백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티켓이요, 보증서입니다. 음부의 귄세가 이기지 못하고 그 고백 앞에 천국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순간 벌써 그의 생명을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종말적으로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엄청난 약속이 이 신앙고백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베드로 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해변으로 가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베드로는 없고 시몬만이 있다는 뜻) 옛날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바른 신앙고백이 있을 때 베드로이며 주를 부인할 때는 요나의 아들 시몬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만류할 때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바른 고백이 있고서야 베드로가 베드로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나의 바른 고백이 있고서야 나의 나 됨이 있습니다. 물론 고백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요, 고백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갈릴리로 갔지만 예수님께서는 친히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며 다시 고백을 새롭게 해 주셨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로마로 떠날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어디로 가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Quo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여쭈었더니 "내가 너를 위하여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고 대답하셨다 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크게 깨달은 베드로는 그 길로 박해의 로마로 되돌아 가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 베드로는 휘청거리면서 이 고백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휘청거릴 때마다 이 고백을 지켜주셨고 새롭게 하여 주셨으므로 고백과 함께 순교하였으며 그 고백으로 오늘 교회가 연연히 이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이 고백 안에 내가 있고, 내 존재가 있고, 내 미래가 있고, 내 운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매 시간마다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확실한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나의 나 됨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는 이미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을 저버릴 때가 많았고 그 고백과 관계없는 생을 살 때가 많았습니다. 휘청거리며 쓰러졌던 지난 날을 용서하시고 이제 우리의 신앙 고백을 새롭게 하게 하사 이 고백 안에서 나의 나 됨을 찾고 하나님의 자녀되고 예수님의 제자되고, 그리스도인의 증인되어서 주님의 귀한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고백으로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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