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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받은 사람의 여정(창세기 28:10-2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우리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는 복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복받기를 원합니다. 실제로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복을 기원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막연히 복을 비는 것입니다. 복에 대한 개념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허황한 것은 다시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없기에 불행합니다.
여러분, 돈을 복이라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자신 돈을 관리할 만한 인격이 못되면 그 돈은 자기에게도 이롭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게 됩니다.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돈이 주어져야지, 형편없는 인간에게 돈만 주어진다면 저 망하고 남 망하고 나라까지 망하는 꼴이 됩니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인격이 없는 사람에게 지위가 주어지고 권력이 주어진다는 것처럼 낭패가 없습니다. 그리고 보면 복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복 받을 그릇이 더욱 중요합니다. 복 받을만한 인간이, 그 그릇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복을 기원합니다' '복 받으세요' 합니다. 이런 부도수표가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복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복된 자가 되어야겠다' 하는 각오와 생각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미 복을 주었건만 그 복을 복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에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영원히 불행합니다. 행복하면서도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행복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옛날이 좋았지'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삽니다. 그 때 그 당시에는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나이드신 분들도 돌이켜보니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졌던 그 젊은 시절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아직도 살아가야 할 많은 날들이 있습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어느 시간보다도 지금이 더 중요하고 가장 복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현재적 복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고, 늘 과거와 막연한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여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복(福)에 대해서 배우고, 복된 자로 양육되고 훈련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복 자체와 복된 자는 별개입니다. 복과 자기 존재, 자기됨과 되어지는 존재--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적어도 이것만은 잊지 마세요. 복이란 환경이 아닙니다. 공기가 좋고, 집이 넓고, 가세가 넉넉하고, 몸이 건강하고…… 이런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적인 여건에서 오는 복을 막연히 기다리지는 마세요. 복된 자는 어디에서든지, 어느 때든지 복됩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 숱한 고난 가운데서 남다른 깨달음을, 남다른 행복을, 남다른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경이나 여건에 대해서 더는 기대하지 말 것입니다. 복이란 나의 낮음에 있습니다. 나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의 개념을 바로 정리하고, 새롭게 다시 출발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은 복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복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좀 못돼먹은 사람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간사하고도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 하나만은 간절합니다. 복을 추구하는 데에만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주 열렬한 의지의 사람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는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쌍둥이일지라도 그 시차로 해서 장자와 차자를 구별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형이라고 해도 그저 몇 분 먼저 나왔을 뿐입니다.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순서는 순서입니다. 형은 형이요, 동생은 동생입니다. 이 몇 분 차이로 장자의 기업을 에서가 차지하게 됩니다. 당시 유대에서의 장자의 역할이나 권리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동생인 야곱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야곱은 장자의 기업을 탐내어 그 장자의 위치를, 그 복된 자리를 에서로부터 빼앗고자 마음먹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력 끝에, 결국은 그 장자권을 빼앗게 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 가장하여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렇게 바라고 가지고 싶었던 장자권을 받았습니다마는,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듯이 야곱의 현실은 크게 불행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장자의 복을 받은 다음날로부터 불안과 두려움과 공조에 시달리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고향을 떠나는 처지에까지 이릅니다. 부모님의 사랑, 특별히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아온 나약한 성격의 야곱이 이제 안정된 가정을 떠나 외롭고 험한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피난길에 오른 첫날에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루스까지 갑니다. 장장 60킬로미터입니다. 150리길 입니다. 장정이라 할지라도 이 150리의 길은 하루에 무리입니다. 한 100리 정도가 적당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이 150리나 되는 길을 쉬지도 않고 거의 뛰다시피하며 달려왔다는 말이 됩니다. 급하게 루스에 도착해보니 이미 해는 저물었습니다. 광야에서 노숙을 합니다. 돌베개를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누우니 정말 막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세가 처량하기만 합니다.
분명히 복은 받았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환경적으로는 가장 불행한 곳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두려움과 고독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복이란 무엇인가, 내가 받은 복은 어디로 갔는가, 그 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복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복받으려다가 제 명도 살지 못하고 죽는가보다'하며 두려워했겠지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복이란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야곱은 복을 받고자 온갖 노력과 수고를 기울였습니다마는 보십시오. 그의 수고와 노력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은혜를 베푸시어 그를 복된 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시지 않으셨다면 야곱은 형편없이 불행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살아남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시고 복을 주시고, 나아가 야곱의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고치시어 그의 가치관을 조정해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의 마음 속에서부터 계속적인 새로운 개혁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목숨처럼 여기던 것을 이제는 헛된 것으로 바라봅니다. 계속적으로 그의 인격이 성장해 나갑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철저하게 교육하십니다. 이로써 야곱은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찌 보면 그의 일생은 그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재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별것 아니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사랑에 삶의 목표를 두고 라헬이라는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데에 온 심신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십사 년 동안 머슴살이를 해서 자기가 원하는 여자 라헬과 결혼했으니, 그것이 보통일입니까? 야곱은 자식을 많이 낳아보기도 했습니다. 일가의 가장이 되고 족장이 되어 명예와 권세를 누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따르는 책임은 무거웠습니다. 흉년이 들 때마다 온 식구와 살아남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고된 생을 살면서 야곱은 번영과 안정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번영은 화목을 깨뜨렸습니다. 야곱은 잘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저버렸기에 야곱은 이처럼 난민의 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나름의 고생을 혼자서 치르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야곱은 꿈이 많은 생을 살았기에 고생도 많았습니다.
창세기 47장을 보십시오. 야곱이 바로 왕 앞에 섰을 때에 나이를 묻는 왕에게 야곱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절).' 지난 일백삼십 년 동안에 숱한 고생을 했노라고 고백하는 가운데서 야곱은 새롭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복된 자로 가는 여정(旅程)은 야곱으로 하여금 복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복된 자로 가는 여정은, 먼저 고독의 길이었습니다.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고독이란 하나의 길입니다. 여러분, 고독은 축복입니디. 우리는 때때로 많은 일과 사람들에 시달립니다. 어느덧 여기에 익숙해진 우리 도시생활자들은 고독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도 혼자는 있지를 못합니다. 홀로 서지를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혼자서 생활할 수도 있고, 고독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언젠가는 홀로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나약해져서 고독을 견디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의존적인 인격으로 살아왔습니다. 예속된 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이 벧엘에 도달했을 때에 야곱은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멀리 있는 부모님은 이제 상관이 없습니다. 야곱은 홀로 서야 했기에 고독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독이 사람되는 길이요, 복된 길의 출발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이 '고독'이라는 말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 하나가 'loneliness'입니다. 이것은 큰 행사가 끝난 다음에 이어지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주일날이면 4부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듯 가득히 수만 명이 모여서 같이 지내다가 마지막 예배가 끝난 다음에 여러분들이 다 가고나면 세상에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쓸쓸합니다. 그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서 혼자서 차를 몰고 정처없이 돌아다닙니다. 드라이브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듯 허전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독입니다.
또 하나가 'solitude'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망대에 올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고독하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다리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만나는 고독--이것이 적극적인 고독입니다. 지금 야곱은 이 두 가지 고독을 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고향을, 부모 슬하를 떠났습니다마는 그 고독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직선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이었습니다. 식구가 주렁주렁 많이 있어야만 복이 아닙니다. 돈이 많고 재산이 많다고 복이 아닙니다. 고독한 인간의 실존을 바로 경험할 줄 아는 사람이 복된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가 고독하기 때문입니다. 고독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독하지 않으려는 데서 병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 때에도 홀로 살 뿐더러 홀로 결정해야 하고 홀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도 홀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줄 아는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독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를 때로는 건강을 빼앗기도 하시고, 때로는 재산을 빼앗기도 하시고, 때로는 가정을 잃게도 하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당신 앞에 불러 개별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새롭게 계시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야곱은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 '꿈'을 프로이트학파 학자(Freudian)들은 과거에 경험한 일, 축적된 경험이 무의식적인 잠재의식으로 있다가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심리학자 융(Jung, C. Gustav)은 사람이 가진 미래에 대한 욕망이 꿈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 꿈에 대한 해석은 구구합니다. 바빌로니아사람들과 앗시리아사람들은 꿈이란 망령과 악마가 나타나서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사람들은 신이 주는 메시지가 꿈 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해석을 바로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사람들은 인간의 영혼 안에, 그 자신 안에 꿈이라는 현상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잠자는 자를 영적으로 방문해 주시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성경에, 특별히 구약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꾸는 꿈 가운데는 인간적인 꿈이 참으로 많습니다마는, 더러는 하나님께서 꿈속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방문해서 인간을 만나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계시적 환상적 꿈을 유대사람들은 현실과 동일시하여 해석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데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遍滿)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13,14절)"--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말씀하심입니다. 땅에 대한 복, 자손에 대한 복, 만민에 대한 복--이 세 가지의 복을 약속해주십니다. 그 약속이란 미래적 현실입니다. 내가 오늘날에 복된 자가 될 뿐더러, 이 복의 실현은 장차 저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네 자손이 편만할 것이요, 이 땅을 덮을 것이요, 모든 만민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아직 결혼도 하지 아니한 사람, 야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엄청난 미래지향적인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종말입니다. 네가 이리 저리로 방황도 하겠고 여러 가지로 배회도 하겠지만, 종국에는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종말을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무사히 이리로 돌아올 것이다----그 마지막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종말론적인 약속을 받고 이것을 어떻게 믿느냐, 어떻게 인내하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성실할 것이냐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축복은 지극히 인격적이요 종말론적이요 신령한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복된 자로 살아갑니다. 복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과거에 그렇게 좋아했던 것을 이제는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셨습니다. 과거에 야곱은 남을 속이기도 했고 남에게 속기도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마음도 고치고, 욕심도 고치고, 성격도 고치고, 인격도 고치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신앙과 세계관마저도 하나하나 다듬어 나가십니다. 인간 의지로 하는 일은 다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이제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사는 인간으로 키워가십니다. 번영도 안정도 영광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야곱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응답합니다. 그 응답이 본문말씀에 나타납니다. 그 첫째가 예배입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이 베개삼았던 그 돌을 세워놓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 예배드렸습니다. 예배의 자세를 바로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하나님께 대한 가장 귀중한 응답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성장 정도를 저는 예배 자세로 가늠합니다. 항상 늦게 나오던 사람이 일찍 나오고, 항상 뒤에 앉던 사람이 앞에 앉고, 예배 시간 내내 졸던 사람이 정신차리고, 설교를 먼 이야기로만 듣던 사람이 이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예배의 자세가 바로 되는 것을 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자세가 바로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의 자세가 어디까지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데까지 다듬어 가실 것입니다.
생전 성경을 읽지도 않던 사람을 기도하게 만드실 것이요, 세상일만 하던 사람의 소원을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다듬고 고치고 개혁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의 자세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두 번째, 야곱은 삶의 현장을 거룩한 곳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하루를 묵은 그곳은 시시한 벌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7절)"라고. 야곱은 이곳을 '벧엘'이라고 이름짓습니다.
벧엘--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이든 직장이든, 여러분의 처지든 삶의 현장이든, 이곳이 하나님의 집임을 알고 있습니까? 이곳은 버려진 현실도 아니요 저주받은 현실도 아닙니다. 내 실수로 인하여 징계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생의 현장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이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는 생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장이나 직업, 나아가 지금의 남편과, 아내와 사는 것을 저주받은 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게 주어진 현실 이대로가 여호와의 전입니다. 하나님의 집이요 거룩한 현장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시기에 야곱도 약속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여기에 하나님의 집을 지을 것입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이렇듯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야곱은 20년 후에 무사히 돌아왔지만, 13년 동안 세겜에 머물면서 벧엘로 돌아오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맙니다. 등한히 여겼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야곱을 내려치십니다. 거지꼴이 된 야곱은 그제야 온 가족과 함께 original point--원점인 벧엘로 돌아옵니다. 야곱은 그 소중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놓고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역사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직선적으로 만나서 약속한 것, 바로 그 자리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복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복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복된 자의 여정은 어떠해야 하고, 복된 자의 그릇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에게 복받을만한 인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셨고, 또한 주신 그 길을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복된 자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재촉해서 이 길을 바로 가야 할 것입니다.
복받은 사람의 여정(창세기 28:10-2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우리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는 복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복받기를 원합니다. 실제로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복을 기원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막연히 복을 비는 것입니다. 복에 대한 개념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허황한 것은 다시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없기에 불행합니다.
여러분, 돈을 복이라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자신 돈을 관리할 만한 인격이 못되면 그 돈은 자기에게도 이롭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게 됩니다.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돈이 주어져야지, 형편없는 인간에게 돈만 주어진다면 저 망하고 남 망하고 나라까지 망하는 꼴이 됩니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인격이 없는 사람에게 지위가 주어지고 권력이 주어진다는 것처럼 낭패가 없습니다. 그리고 보면 복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복 받을 그릇이 더욱 중요합니다. 복 받을만한 인간이, 그 그릇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복을 기원합니다' '복 받으세요' 합니다. 이런 부도수표가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복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복된 자가 되어야겠다' 하는 각오와 생각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미 복을 주었건만 그 복을 복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에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영원히 불행합니다. 행복하면서도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행복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옛날이 좋았지'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삽니다. 그 때 그 당시에는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나이드신 분들도 돌이켜보니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졌던 그 젊은 시절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아직도 살아가야 할 많은 날들이 있습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어느 시간보다도 지금이 더 중요하고 가장 복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현재적 복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고, 늘 과거와 막연한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여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복(福)에 대해서 배우고, 복된 자로 양육되고 훈련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복 자체와 복된 자는 별개입니다. 복과 자기 존재, 자기됨과 되어지는 존재--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적어도 이것만은 잊지 마세요. 복이란 환경이 아닙니다. 공기가 좋고, 집이 넓고, 가세가 넉넉하고, 몸이 건강하고…… 이런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적인 여건에서 오는 복을 막연히 기다리지는 마세요. 복된 자는 어디에서든지, 어느 때든지 복됩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 숱한 고난 가운데서 남다른 깨달음을, 남다른 행복을, 남다른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경이나 여건에 대해서 더는 기대하지 말 것입니다. 복이란 나의 낮음에 있습니다. 나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의 개념을 바로 정리하고, 새롭게 다시 출발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은 복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복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좀 못돼먹은 사람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간사하고도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 하나만은 간절합니다. 복을 추구하는 데에만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주 열렬한 의지의 사람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는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쌍둥이일지라도 그 시차로 해서 장자와 차자를 구별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형이라고 해도 그저 몇 분 먼저 나왔을 뿐입니다.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순서는 순서입니다. 형은 형이요, 동생은 동생입니다. 이 몇 분 차이로 장자의 기업을 에서가 차지하게 됩니다. 당시 유대에서의 장자의 역할이나 권리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동생인 야곱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야곱은 장자의 기업을 탐내어 그 장자의 위치를, 그 복된 자리를 에서로부터 빼앗고자 마음먹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력 끝에, 결국은 그 장자권을 빼앗게 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 가장하여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렇게 바라고 가지고 싶었던 장자권을 받았습니다마는,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듯이 야곱의 현실은 크게 불행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장자의 복을 받은 다음날로부터 불안과 두려움과 공조에 시달리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고향을 떠나는 처지에까지 이릅니다. 부모님의 사랑, 특별히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아온 나약한 성격의 야곱이 이제 안정된 가정을 떠나 외롭고 험한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피난길에 오른 첫날에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루스까지 갑니다. 장장 60킬로미터입니다. 150리길 입니다. 장정이라 할지라도 이 150리의 길은 하루에 무리입니다. 한 100리 정도가 적당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이 150리나 되는 길을 쉬지도 않고 거의 뛰다시피하며 달려왔다는 말이 됩니다. 급하게 루스에 도착해보니 이미 해는 저물었습니다. 광야에서 노숙을 합니다. 돌베개를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누우니 정말 막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세가 처량하기만 합니다.
분명히 복은 받았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환경적으로는 가장 불행한 곳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두려움과 고독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복이란 무엇인가, 내가 받은 복은 어디로 갔는가, 그 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복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복받으려다가 제 명도 살지 못하고 죽는가보다'하며 두려워했겠지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복이란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야곱은 복을 받고자 온갖 노력과 수고를 기울였습니다마는 보십시오. 그의 수고와 노력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은혜를 베푸시어 그를 복된 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시지 않으셨다면 야곱은 형편없이 불행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살아남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시고 복을 주시고, 나아가 야곱의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고치시어 그의 가치관을 조정해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의 마음 속에서부터 계속적인 새로운 개혁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목숨처럼 여기던 것을 이제는 헛된 것으로 바라봅니다. 계속적으로 그의 인격이 성장해 나갑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철저하게 교육하십니다. 이로써 야곱은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찌 보면 그의 일생은 그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재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별것 아니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사랑에 삶의 목표를 두고 라헬이라는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데에 온 심신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십사 년 동안 머슴살이를 해서 자기가 원하는 여자 라헬과 결혼했으니, 그것이 보통일입니까? 야곱은 자식을 많이 낳아보기도 했습니다. 일가의 가장이 되고 족장이 되어 명예와 권세를 누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따르는 책임은 무거웠습니다. 흉년이 들 때마다 온 식구와 살아남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고된 생을 살면서 야곱은 번영과 안정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번영은 화목을 깨뜨렸습니다. 야곱은 잘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저버렸기에 야곱은 이처럼 난민의 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나름의 고생을 혼자서 치르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야곱은 꿈이 많은 생을 살았기에 고생도 많았습니다.
창세기 47장을 보십시오. 야곱이 바로 왕 앞에 섰을 때에 나이를 묻는 왕에게 야곱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절).' 지난 일백삼십 년 동안에 숱한 고생을 했노라고 고백하는 가운데서 야곱은 새롭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복된 자로 가는 여정(旅程)은 야곱으로 하여금 복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복된 자로 가는 여정은, 먼저 고독의 길이었습니다.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고독이란 하나의 길입니다. 여러분, 고독은 축복입니디. 우리는 때때로 많은 일과 사람들에 시달립니다. 어느덧 여기에 익숙해진 우리 도시생활자들은 고독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도 혼자는 있지를 못합니다. 홀로 서지를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혼자서 생활할 수도 있고, 고독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언젠가는 홀로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나약해져서 고독을 견디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의존적인 인격으로 살아왔습니다. 예속된 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이 벧엘에 도달했을 때에 야곱은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멀리 있는 부모님은 이제 상관이 없습니다. 야곱은 홀로 서야 했기에 고독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독이 사람되는 길이요, 복된 길의 출발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이 '고독'이라는 말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 하나가 'loneliness'입니다. 이것은 큰 행사가 끝난 다음에 이어지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주일날이면 4부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듯 가득히 수만 명이 모여서 같이 지내다가 마지막 예배가 끝난 다음에 여러분들이 다 가고나면 세상에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쓸쓸합니다. 그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서 혼자서 차를 몰고 정처없이 돌아다닙니다. 드라이브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듯 허전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독입니다.
또 하나가 'solitude'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망대에 올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고독하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다리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만나는 고독--이것이 적극적인 고독입니다. 지금 야곱은 이 두 가지 고독을 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고향을, 부모 슬하를 떠났습니다마는 그 고독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직선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이었습니다. 식구가 주렁주렁 많이 있어야만 복이 아닙니다. 돈이 많고 재산이 많다고 복이 아닙니다. 고독한 인간의 실존을 바로 경험할 줄 아는 사람이 복된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가 고독하기 때문입니다. 고독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독하지 않으려는 데서 병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 때에도 홀로 살 뿐더러 홀로 결정해야 하고 홀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도 홀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줄 아는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독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를 때로는 건강을 빼앗기도 하시고, 때로는 재산을 빼앗기도 하시고, 때로는 가정을 잃게도 하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당신 앞에 불러 개별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새롭게 계시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야곱은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 '꿈'을 프로이트학파 학자(Freudian)들은 과거에 경험한 일, 축적된 경험이 무의식적인 잠재의식으로 있다가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심리학자 융(Jung, C. Gustav)은 사람이 가진 미래에 대한 욕망이 꿈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 꿈에 대한 해석은 구구합니다. 바빌로니아사람들과 앗시리아사람들은 꿈이란 망령과 악마가 나타나서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사람들은 신이 주는 메시지가 꿈 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해석을 바로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사람들은 인간의 영혼 안에, 그 자신 안에 꿈이라는 현상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잠자는 자를 영적으로 방문해 주시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성경에, 특별히 구약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꾸는 꿈 가운데는 인간적인 꿈이 참으로 많습니다마는, 더러는 하나님께서 꿈속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방문해서 인간을 만나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계시적 환상적 꿈을 유대사람들은 현실과 동일시하여 해석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데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遍滿)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13,14절)"--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말씀하심입니다. 땅에 대한 복, 자손에 대한 복, 만민에 대한 복--이 세 가지의 복을 약속해주십니다. 그 약속이란 미래적 현실입니다. 내가 오늘날에 복된 자가 될 뿐더러, 이 복의 실현은 장차 저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네 자손이 편만할 것이요, 이 땅을 덮을 것이요, 모든 만민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아직 결혼도 하지 아니한 사람, 야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엄청난 미래지향적인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종말입니다. 네가 이리 저리로 방황도 하겠고 여러 가지로 배회도 하겠지만, 종국에는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종말을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무사히 이리로 돌아올 것이다----그 마지막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종말론적인 약속을 받고 이것을 어떻게 믿느냐, 어떻게 인내하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성실할 것이냐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축복은 지극히 인격적이요 종말론적이요 신령한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복된 자로 살아갑니다. 복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과거에 그렇게 좋아했던 것을 이제는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셨습니다. 과거에 야곱은 남을 속이기도 했고 남에게 속기도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마음도 고치고, 욕심도 고치고, 성격도 고치고, 인격도 고치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신앙과 세계관마저도 하나하나 다듬어 나가십니다. 인간 의지로 하는 일은 다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이제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사는 인간으로 키워가십니다. 번영도 안정도 영광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야곱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응답합니다. 그 응답이 본문말씀에 나타납니다. 그 첫째가 예배입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이 베개삼았던 그 돌을 세워놓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 예배드렸습니다. 예배의 자세를 바로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하나님께 대한 가장 귀중한 응답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성장 정도를 저는 예배 자세로 가늠합니다. 항상 늦게 나오던 사람이 일찍 나오고, 항상 뒤에 앉던 사람이 앞에 앉고, 예배 시간 내내 졸던 사람이 정신차리고, 설교를 먼 이야기로만 듣던 사람이 이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예배의 자세가 바로 되는 것을 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자세가 바로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의 자세가 어디까지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데까지 다듬어 가실 것입니다.
생전 성경을 읽지도 않던 사람을 기도하게 만드실 것이요, 세상일만 하던 사람의 소원을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다듬고 고치고 개혁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의 자세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두 번째, 야곱은 삶의 현장을 거룩한 곳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하루를 묵은 그곳은 시시한 벌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7절)"라고. 야곱은 이곳을 '벧엘'이라고 이름짓습니다.
벧엘--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이든 직장이든, 여러분의 처지든 삶의 현장이든, 이곳이 하나님의 집임을 알고 있습니까? 이곳은 버려진 현실도 아니요 저주받은 현실도 아닙니다. 내 실수로 인하여 징계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생의 현장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이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는 생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장이나 직업, 나아가 지금의 남편과, 아내와 사는 것을 저주받은 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게 주어진 현실 이대로가 여호와의 전입니다. 하나님의 집이요 거룩한 현장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시기에 야곱도 약속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여기에 하나님의 집을 지을 것입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이렇듯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야곱은 20년 후에 무사히 돌아왔지만, 13년 동안 세겜에 머물면서 벧엘로 돌아오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맙니다. 등한히 여겼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야곱을 내려치십니다. 거지꼴이 된 야곱은 그제야 온 가족과 함께 original point--원점인 벧엘로 돌아옵니다. 야곱은 그 소중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놓고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역사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직선적으로 만나서 약속한 것, 바로 그 자리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복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복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복된 자의 여정은 어떠해야 하고, 복된 자의 그릇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에게 복받을만한 인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셨고, 또한 주신 그 길을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복된 자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재촉해서 이 길을 바로 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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