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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사도행전 1:6-14)

by 【고동엽】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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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사도행전 1:6-14)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나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라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이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들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구속 사업은 베들레헴 작은 마구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의 시작은 저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됩니다.

이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사역과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 관계가 때때로 신학적으로 문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가 역사적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냐, 아니면 초대교회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냐? 이 두 관계의 연결에 있어서 의심을 품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된 생각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그 귀중한 생활이, 또는 그 복음의 사역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결론을 맺고 그리고 절정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성찬 예식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 장소에서 시작이 됩니다.

이 다락방에서의 성찬 예식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으로 이룬 성찬 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출발인 동시에 크나큰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신학과 그들의 세계관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새 기원을 이루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끈질긴 것이요, 처음부터 가졌던 본래적 욕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욕망과 양보할 수 없는 간절한 소원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일단 실망으로 돌아갔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또 다시 나타납니다.

그들은 끈질기게 예수님께 물어 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다른 말로 바꾸면 이 나라에 혁명을 일으킬 때가 지금입니까? 로마 사람들의 제국주의적 정치 하에서 짓밟히며 고생하는 이 약소 민족의 서러움을 언제 씻을 것입니까? 주께서 이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어입니다. "주께서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주님이 하실 때가 이때입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복을 주실 때가 언제입니까 묻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것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너희가 내 증인이 되어야 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다락방은 이 문제의 해답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질문이 바꾸어져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관심의 방향이 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실 것인가 하고 묻던 사람들이 다락방을 거치는 중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강하고 끈질긴 지속적 욕망을 다락방에서 비로소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계속 품고 있던 그 본래적인 소원을 이제야 그 의미를 바꾸어서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무남 독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스런 딸 단 하나를 슬하에 두고 사니까 너무 지나치게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심방을 가면 교인들이 그 귀한 딸을 위해 어떤 때는 사탕이나 과자를 싸주며 귀한 딸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을 받아 가지고 와서 그 어린이에게 주면 그 아이는 좋다고 받아먹곤 하는 중에 그만 좋지 못한 버릇이 생겨서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아버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빠" 하고는 가방부터 뒤집니다. 그리고 무엇이 나와야지 만일 안 나오면 "으앙" 하고 울어버립니다. 목사님은 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과자를 못 얻어 가지고 들어가는 날은 사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이 아이는 항상 과자를 받아먹는 재미로 아버지를 맞이했는데, 그 버릇이 시집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지만 내내 데리고 있을 수 없어서 시집을 보냈는데, 보내고 나니 그 아버지가 딸이 보고 싶어 못 견디겠기에 얼마 후에 딸네 집에 갔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쵸코렛과 캔디를 한 가방 사 가지고 갔습니다. 초인종을 누르니까 딸이 반갑다고 맞이하면서 가방을 받아 들고 들어갑니다. 아버지는 뒤따라가면서 "저놈이 저 가방을 열어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따라 들어갔는데, 딸은 가방을 응접실에 놓고는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을 만드니라 지지고 볶고 바쁘단 말입니다. 아버지는 섭섭했습니다. "저놈이 왜 저 가방을 안 열어 볼까? 저걸 열어봐야 되는데." 참다 못해서 아버지는 딸을 불렀습니다. "이리 오너라. 너 왜 저 가방을 안 열어 보느냐?" 그 말에 "그 동안에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오늘은 뭘 또 얻어먹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께 무엇을 대접할까?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까 그걸 생각하는 시간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철이 났다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여기서 변해서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그리스도를 보던 눈이 변해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나를 보는 눈으로 바꾸어집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남을 보호하고 사랑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내가 사랑하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나와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그러한 새로운 세계관으로 바꾸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여서 비로소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희미하고 그리고 핍박이 있을 듯해서 엠마오로 피해갔던 제자도 이제 새 용기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모였습니다.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다시 가 버렸던 일곱 제자도 이제 그물을 내버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이 자리에 안 계시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계시던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던 곳에 모였습니다. 열두 제자가 아닌 120명이 모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이 자리에 나타나기를 바라서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세상에 계시던 그 예수가 또 다시 나타나서 초자연적 능력을 행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천 명을 먹이던 기적을 이들 가운데서 나타내 주기를 바랐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 옛날 일을 기억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서 광야로 나올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세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하며 계시를 받는 시간을 참지 못해서 모세가 보이지 않을 때에 이들은 낙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소란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겼습니다. 모세가 잠깐 보이지 않는다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입니다.

제자들은 그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부활 승천하셔서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준행했습니다. 그 말씀은 이러합니다. 사도행전 1: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떠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두려움도 잊었습니다.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잔악하게 십자가에 못박는 그 사람들이 제자들을 그저 둘 리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먹고살아야 되기도 합니다. 가정 문제도 있습니다. 문제는 많았습니다. 그래도 모여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 위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그 지혜와 용기를 기다렸습니다. 성령의 임함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기도 없는 용기는 만용입니다. 기도 없는 지혜는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기도 없는 선행은 향락주의에 불과합니다.

증인이 되려면 먼저 경험과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했습니다.

둘째는 깨달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진리가 내게 향한 것이 무엇인지 그 경험에 대한 의식화, 즉 체계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이 꼭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보고 들었지만 그분을 위해서 내가 증인이 될 만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이 증인이 됨으로써 오는 핍박을 함께 받고 고난을 함께 받을 만한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증인이 될 수 있는 의로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증인이 될 만한 체험을 가졌다 하더라도 비겁해서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6:7을 보면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고 이제 성령이 임함으로 더 큰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떠나가시고 그리고 성령이 임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이 사실을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면 저들 앞에서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가 이제는 저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믿게 됩니다.

주님께서 일하시고 제자들은 줄렁줄렁 따라다니며 구경했습니다. 얻어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저들과 함께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그들은 지난날의 일들을 생각합니다. 3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해 따랐던가? 무엇을 생각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가?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왔던가 생각합니다.

또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전략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구속함의 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좀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경험과 그들의 미래를 향한 그 뜻을 성서적 의미 안에서 해석하게 됩니다. 성경적 해석을 얻었습니다. 그렇게도 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는데 들을 귀가 없어서 듣지 못했습니다. 마음 눈이 어두워서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락방에서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 같은 일들이 있어야 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성경적으로 꼭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모순된 재판도 성경 안에서 소화합니다.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 사역 중에 가장 결정적으로 오점이라고 하는 가룟 유다 사건, 그리스도의 제자 12사람 가운데 하나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문제에 대해서도 성서적 해답을 얻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뒤에서 베드로가 성경적으로 해석합니다. "제 갈 곳으로 갔느니라."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의 생애나 오늘의 생애에서 성서의 해답을 얻었습니까? 내가 오늘 여기에 있고 이 일을 해야 하는 성경적 이유가 있느냐 말입니다. 성경적 해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락방의 역사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방언의 문제도 다시 요한 1서에서 해석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나가서 전도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머무르며 자기가 받은 신령한 체험에 대해서 성서적인 해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름대로 신학을 세우게 됩니다. 이런 구체적인 성서적 해석을 얻어 가지고 나아가서 사도가 된 것입니다.

무리들은 말씀에 붙잡혀서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아우들도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생하게 마음에 기억하며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들은 친교하러 모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위로하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주시는 역사를 기다리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그런고로 오로지 기도하는 그러한 모임이었습니다. 그 응답으로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말씀의 교통이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 용기와 담력을 얻어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핍박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동안에 소원했던 이스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일, 이 복음의 역사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락방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이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체험을 얻었고 동역 동사하게 됩니다.

우리의 다락방은 어디입니까? 간혹 흩어지는 교회라는 말을 듣습니다. 모이지 않는 교회가 언제 흩어집니까? 한갓 흩어짐이 흩어짐으로 끝나면 세속화합니다. 모이는 교회에서 얻은 성령의 역사가 있고서 흩어져야 선교입니다.

여러분, 다락방에 모여야 합니다. 이 다락방을 거쳐서 문제의 해결을 얻고, 여기에서 하나님과 나와 함께 하는 체험을 얻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나를 고용하시고 그의 선교 전략을 따라서 나를 인도하심을 따라 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그리스도의 길에 서야 합니다. 그럴 때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이 내게 용기를 주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 용기가 아니면 잘못 됩니다. 이 사명적 용기라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 주시는 말씀이 아니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뜨거운 사랑을 주시기 전에는 내가 누구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나를 그의 사역의 제물로 바칩시다.

그들은 이제 아무 소원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뜻, 그 말씀을 위해서 사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알고, 순교를 가장 큰 기쁨으로 맞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썩어지는 밀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세워졌고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바로 이 자리가 우리의 다락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주께서 다락방에서 역사 하신 그 역사를 우리가 믿습니다. 원컨대 이 자리가 120명 문도가 모였던 그 다락방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 다락방에 있었던 변화가 우리에게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그 온전하시고 크신 뜻이 이루어지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날의 모든 생을 여기에 시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씀과 그 용기와 그 약속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사도행전 1:6-14)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나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라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이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들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구속 사업은 베들레헴 작은 마구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의 시작은 저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됩니다.

이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사역과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 관계가 때때로 신학적으로 문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가 역사적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냐, 아니면 초대교회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냐? 이 두 관계의 연결에 있어서 의심을 품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된 생각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그 귀중한 생활이, 또는 그 복음의 사역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결론을 맺고 그리고 절정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성찬 예식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 장소에서 시작이 됩니다.

이 다락방에서의 성찬 예식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으로 이룬 성찬 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출발인 동시에 크나큰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신학과 그들의 세계관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새 기원을 이루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끈질긴 것이요, 처음부터 가졌던 본래적 욕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욕망과 양보할 수 없는 간절한 소원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일단 실망으로 돌아갔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또 다시 나타납니다.

그들은 끈질기게 예수님께 물어 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다른 말로 바꾸면 이 나라에 혁명을 일으킬 때가 지금입니까? 로마 사람들의 제국주의적 정치 하에서 짓밟히며 고생하는 이 약소 민족의 서러움을 언제 씻을 것입니까? 주께서 이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어입니다. "주께서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주님이 하실 때가 이때입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복을 주실 때가 언제입니까 묻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것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너희가 내 증인이 되어야 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다락방은 이 문제의 해답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질문이 바꾸어져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관심의 방향이 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실 것인가 하고 묻던 사람들이 다락방을 거치는 중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강하고 끈질긴 지속적 욕망을 다락방에서 비로소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계속 품고 있던 그 본래적인 소원을 이제야 그 의미를 바꾸어서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무남 독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스런 딸 단 하나를 슬하에 두고 사니까 너무 지나치게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심방을 가면 교인들이 그 귀한 딸을 위해 어떤 때는 사탕이나 과자를 싸주며 귀한 딸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을 받아 가지고 와서 그 어린이에게 주면 그 아이는 좋다고 받아먹곤 하는 중에 그만 좋지 못한 버릇이 생겨서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아버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빠" 하고는 가방부터 뒤집니다. 그리고 무엇이 나와야지 만일 안 나오면 "으앙" 하고 울어버립니다. 목사님은 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과자를 못 얻어 가지고 들어가는 날은 사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이 아이는 항상 과자를 받아먹는 재미로 아버지를 맞이했는데, 그 버릇이 시집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지만 내내 데리고 있을 수 없어서 시집을 보냈는데, 보내고 나니 그 아버지가 딸이 보고 싶어 못 견디겠기에 얼마 후에 딸네 집에 갔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쵸코렛과 캔디를 한 가방 사 가지고 갔습니다. 초인종을 누르니까 딸이 반갑다고 맞이하면서 가방을 받아 들고 들어갑니다. 아버지는 뒤따라가면서 "저놈이 저 가방을 열어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따라 들어갔는데, 딸은 가방을 응접실에 놓고는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을 만드니라 지지고 볶고 바쁘단 말입니다. 아버지는 섭섭했습니다. "저놈이 왜 저 가방을 안 열어 볼까? 저걸 열어봐야 되는데." 참다 못해서 아버지는 딸을 불렀습니다. "이리 오너라. 너 왜 저 가방을 안 열어 보느냐?" 그 말에 "그 동안에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오늘은 뭘 또 얻어먹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께 무엇을 대접할까?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까 그걸 생각하는 시간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철이 났다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여기서 변해서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그리스도를 보던 눈이 변해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나를 보는 눈으로 바꾸어집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남을 보호하고 사랑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내가 사랑하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나와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그러한 새로운 세계관으로 바꾸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여서 비로소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희미하고 그리고 핍박이 있을 듯해서 엠마오로 피해갔던 제자도 이제 새 용기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모였습니다.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다시 가 버렸던 일곱 제자도 이제 그물을 내버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이 자리에 안 계시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계시던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던 곳에 모였습니다. 열두 제자가 아닌 120명이 모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이 자리에 나타나기를 바라서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세상에 계시던 그 예수가 또 다시 나타나서 초자연적 능력을 행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천 명을 먹이던 기적을 이들 가운데서 나타내 주기를 바랐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 옛날 일을 기억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서 광야로 나올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세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하며 계시를 받는 시간을 참지 못해서 모세가 보이지 않을 때에 이들은 낙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소란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겼습니다. 모세가 잠깐 보이지 않는다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입니다.

제자들은 그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부활 승천하셔서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준행했습니다. 그 말씀은 이러합니다. 사도행전 1: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떠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두려움도 잊었습니다.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잔악하게 십자가에 못박는 그 사람들이 제자들을 그저 둘 리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먹고살아야 되기도 합니다. 가정 문제도 있습니다. 문제는 많았습니다. 그래도 모여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 위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그 지혜와 용기를 기다렸습니다. 성령의 임함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기도 없는 용기는 만용입니다. 기도 없는 지혜는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기도 없는 선행은 향락주의에 불과합니다.

증인이 되려면 먼저 경험과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했습니다.

둘째는 깨달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진리가 내게 향한 것이 무엇인지 그 경험에 대한 의식화, 즉 체계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이 꼭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보고 들었지만 그분을 위해서 내가 증인이 될 만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이 증인이 됨으로써 오는 핍박을 함께 받고 고난을 함께 받을 만한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증인이 될 수 있는 의로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증인이 될 만한 체험을 가졌다 하더라도 비겁해서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6:7을 보면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고 이제 성령이 임함으로 더 큰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떠나가시고 그리고 성령이 임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이 사실을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면 저들 앞에서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가 이제는 저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믿게 됩니다.

주님께서 일하시고 제자들은 줄렁줄렁 따라다니며 구경했습니다. 얻어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저들과 함께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그들은 지난날의 일들을 생각합니다. 3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해 따랐던가? 무엇을 생각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가?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왔던가 생각합니다.

또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전략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구속함의 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좀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경험과 그들의 미래를 향한 그 뜻을 성서적 의미 안에서 해석하게 됩니다. 성경적 해석을 얻었습니다. 그렇게도 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는데 들을 귀가 없어서 듣지 못했습니다. 마음 눈이 어두워서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락방에서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 같은 일들이 있어야 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성경적으로 꼭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모순된 재판도 성경 안에서 소화합니다.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 사역 중에 가장 결정적으로 오점이라고 하는 가룟 유다 사건, 그리스도의 제자 12사람 가운데 하나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문제에 대해서도 성서적 해답을 얻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뒤에서 베드로가 성경적으로 해석합니다. "제 갈 곳으로 갔느니라."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의 생애나 오늘의 생애에서 성서의 해답을 얻었습니까? 내가 오늘 여기에 있고 이 일을 해야 하는 성경적 이유가 있느냐 말입니다. 성경적 해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락방의 역사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방언의 문제도 다시 요한 1서에서 해석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나가서 전도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머무르며 자기가 받은 신령한 체험에 대해서 성서적인 해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름대로 신학을 세우게 됩니다. 이런 구체적인 성서적 해석을 얻어 가지고 나아가서 사도가 된 것입니다.

무리들은 말씀에 붙잡혀서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아우들도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생하게 마음에 기억하며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들은 친교하러 모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위로하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주시는 역사를 기다리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그런고로 오로지 기도하는 그러한 모임이었습니다. 그 응답으로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말씀의 교통이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 용기와 담력을 얻어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핍박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동안에 소원했던 이스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일, 이 복음의 역사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락방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이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체험을 얻었고 동역 동사하게 됩니다.

우리의 다락방은 어디입니까? 간혹 흩어지는 교회라는 말을 듣습니다. 모이지 않는 교회가 언제 흩어집니까? 한갓 흩어짐이 흩어짐으로 끝나면 세속화합니다. 모이는 교회에서 얻은 성령의 역사가 있고서 흩어져야 선교입니다.

여러분, 다락방에 모여야 합니다. 이 다락방을 거쳐서 문제의 해결을 얻고, 여기에서 하나님과 나와 함께 하는 체험을 얻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나를 고용하시고 그의 선교 전략을 따라서 나를 인도하심을 따라 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그리스도의 길에 서야 합니다. 그럴 때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이 내게 용기를 주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 용기가 아니면 잘못 됩니다. 이 사명적 용기라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 주시는 말씀이 아니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뜨거운 사랑을 주시기 전에는 내가 누구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나를 그의 사역의 제물로 바칩시다.

그들은 이제 아무 소원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뜻, 그 말씀을 위해서 사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알고, 순교를 가장 큰 기쁨으로 맞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썩어지는 밀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세워졌고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바로 이 자리가 우리의 다락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주께서 다락방에서 역사 하신 그 역사를 우리가 믿습니다. 원컨대 이 자리가 120명 문도가 모였던 그 다락방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 다락방에 있었던 변화가 우리에게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그 온전하시고 크신 뜻이 이루어지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날의 모든 생을 여기에 시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씀과 그 용기와 그 약속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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