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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뛰어넘은 교제-성경본문 / 사도행전 10장23절-33절

by 【고동엽】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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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찌니라.
참회의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들을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 앞에 나왔으나 우리에게 의가 있으므로 우리에게 성결함이 있으므로 주 앞에 세워짐이 아닙니다. 그저 주께서 용서하셨고 용서 하실 줄을 믿기에 감히 두려움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저 돌아오는 탕자를 아무런 물음도 없이 비판도 없이 받아 주시고 맞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기에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회의 기도를 드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죄악에서 나서 죄악으로 더불어 살기에 우리가 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주께서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를 못했고, 축복의 사람으로 선택을 받았지만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
거짓된 세상을 살면서 진실을 이루어야 할 것이건만 우리로 인해서 진실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어두운 세상이 우리로 인해서 밝아야 하건만 우리로 인해서 혼탁해 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미약함과 무력함을 주님 고백을 드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불성실한 세상을 탓하면서 나 자신의 성실을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험악한 세상이라고 규탄을 하면서 나 자신의 악이 있음을 주님 앞에 고백을 하지 못 했습니다. 세상이 암담함을 보면서 우리의 진실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도움을 청하고 우리에게 위로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베푼 것이 없고 그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든 죄를 주님 앞에 고백을 드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만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을 만나고 보지 말아야 하는 일을 보고 있습니다. 해서는 아니 되는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나는 비판을 원하지 아니하면서 나의 입술은 끊임없이 비판적이고 어두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직도 세상에 메여서 신령한 것을 외면하며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부적한 저희들을 용납하시고 다시 한 번 용서하시고 새 은혜로 감싸주시고 그 의로 옷 입혀 주시옵소서.
지금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를 생각하며 묵묵히 참회의 기도를 계속합니다.
용서의 선언/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장벽을 뛰어넘은 교제
성경본문 / 사도행전 10장23절-33절
요즘 나오는 영화들이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인기가 있는 것이 한두 가지는 아닙니다. 그 중에 한참 주가를 올리는 영화가 친절한 금자씨. 그리고 웰컴투 동막골입니다. 두 영화가 다 공통적인 것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모두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친절한 금자씨는 자기가 당한 아픔을 보복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복수 심리를 그린 영화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 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어떻게든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를 한다는 겁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복수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해결점은 아니라는 겁니다.
한 영화는 웰컴투 동막골입니다. 한 미군 조종사가 한 마을에 추락을 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남북을 뛰어넘는 인간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지만 무거운 내용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지를 않습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을 내던지는 아름다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모두가 마음을 합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는 인간들의 왜곡된 삶이 어떤 모습으로든 풀려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불화하고 갈등을 하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이기에 누구에게나 쉽습니다. 남을 미워하고 다투는 것은 우리의 심리적인 상태이기도 하고 우리의 가정과 사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는 적대감과 갈등, 다툼이 있습니다. 때론 평생 사랑을 약속한 아내와 남편도 서로 다툽니다. 부모와 자식도 이념이나 가치관의 차이로 또는 세대의 차이로 갈등하기도 합니다. 지역적인 갈등도 있습니다. 남과 북이 영,호남이 수도권과 지방간의 서로가 나뉘어서 갈등할 때도 있습니다.
창세기 33장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과 에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속권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를 속이고 그로 인해서 분노가 일어나고 자기를 죽이겠다고 날뛰던 그 형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형의 분노를 피해서 집을 떠나온 20년의 세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이 흘러도 잊혀 지지 않는 형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그는 그의 식구들과 재산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거기서 너는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귀중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름이 바뀌고 모든 것이 새로운 모습의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거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은혜를 받으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그의 태도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는 장자의 소유권에 아주 강한 집착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얍복강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 분의 지시가 내게는 강한 힘이다. 그것을 알고서는 그것에 많은 것을 걸고 삽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정말로 어울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한 쪽은 지배의 권력층에 선 사람이고 다른 쪽은 지배를 당하는 피지배자의 입장입니다. 전혀 안어울립니다. 그런데 거기서 볼 것은 이런 겁니다. 자 베드로라는 사람이 지붕에 올라가서는 비몽중에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너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라는 사람의 집으로 가라. 그의 생각에는 나는 부정한 이들과는 전혀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나 가라. 그러니 갑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치 아니합니다.
언젠가 오래전에 영화를 본 겁니다. 보잉747기가 사고를 당합니다. 기장이 죽고 그리고 다른 승무원들이 다 사고를 당한 그런 상태에서 그곳에 여자승무원이 조종석에 앉아서 무전으로 교습을 받습니다. 그는 차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전혀 비행기를 조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기종의 비행기에 조종사가 앉아서 지시를 합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마침내 무사하게 착륙을 합니다. 그런데 내려 와서는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의 지시가 나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라는 대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나의 생각도 멈추고 판단도 멈추고 그대로 한 것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단 한 번의 인생입니다. 두 번의 인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미래를 직면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겁니다. 새로운 세계를 항상 경험을 맞이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누구도 살아 본분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태도를 늘 생각을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새벽에 만납니다. 그때 주님이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려라. 그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을 하여 내립니다. 저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부여잡으며 하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주여 내가 당신을 놓기가 싫습니다. 나를 축복을 해주세요. 너 이름을 바꿔라. 그리고 끝입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이스라엘로 불려 집니다. 아니 생각을 해 보세요. 이름을 바꾸면 사기꾼이 달라지냐? 그래도 그게 아닙니다. 어제까지 그런 못된 인간이 교회에 들어가서 누구 집사님아라고 불려 지면 달라지냐? 그겁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형과의 아름다운 화해의 장을 열어 갑니다.
자 말씀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달라진 그 순간에 형님이 옵니다. 형이 달라진 겁니다. 그게 중요해요. 형이 변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중요합니다.
고넬료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의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그이가 베드로입니다. 아무것도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집안의 사람들을 다 모으고 하나님 앞에 앉은 자의 자세로 그를 대합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합니다. 발 앞에 엎드려 '절하니' 헬라어로 '프로세쿠네센'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단어 자체가 발에 입을 맞춘다는 뜻입니다. 우리네처럼 보통으로 꾸벅 절하는 게 아니고 또 무슨 큰절하느라고 엎디었다가 일어서는 게 아니라 입을 발에다 대는 것입니다. 입을 땅에다 대어야 진짜 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절했다고 만 말하지 못하고 '경배했다'라고 번역을 합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발에 입을 맞추는, 그런 절입니다. 왕 앞에 백성이 절하는, 그런 절입니다. 저마다의 신상 앞에 절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절이 '프로세쿠네센'입니다. 그래서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 굉장한 신앙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고넬료는 로마군인입니다. 그리고 점령 지구에 와 있습니다. 당당한 백부장이니 군복도 위용이 있고 훈장도 번쩍거립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화려한 사람이요, 지체가 높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갈릴리의 한 초라한 어부 입니다. 옷차림부터 초라합니다. 위상이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 상대가 안돼요. 세상 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넬료가 그런 갈릴리 어부를 모셔다놓고, 모시는 순간에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합니다.
육안으로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것입니다. 마음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외모는 상관이 없어요. 나이의 많고 적음도 상관없어요. 키가 크냐 작으냐도 상관이 없어요. 잘생겼느냐 못 생겼느냐도 문제가 안돼요. 문제는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베드로를 봅니다. 우러러봅니다. 높이 존경하여 봅니다. 그래서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매우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그 경외심의 구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 의 이름이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왜 하나님의 집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베드로는 우쭐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지체가 높은 군인과 유대의 어부를 하나로 만드는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나? 그것은 그를 대하는 고넬료의 겸손함이 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형님의 얼굴의 뵈오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 같습니다. 그의 겸손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목사를 길들이는 것은 집사다. 그 교회는 아닙니다. 서로의 겸손이 나와야 합니다. 아주 많이 부흥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아주 전통이 있는 그런 교회입니다. 그런데 아주 어린 목사님이 시무를 합니다. 아들 같은 목회자를 섬기는 장로님들의 태도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아. 그 다음은 알아서 생각을 하세요. 고넬료의 듣고자 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그를 지금은 보는 겁니다.
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흡족하게 들려주십니다. 내가 당신을 부른 것은 하나님이 내게 환상을 주셨습니다. 지체 없이 말씀에 머리를 숙입니다. 그리고 피장이 시몬의 집에서 베드로를 청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즉각적인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게 중요해요.
교회사에 보면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존 칼빈이라는 분이 모든 교리적인 체계를 세우신 분으로 나옵니다. 그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고서 일을 하다가 너무나 핍박이 심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을 갑니다. 그는 원래 종교개혁을 포기를 하고서는 가는 겁니다. 스트라우스버그에 이르러서 여기서 책이나 쓰고 조용히 생을 마감을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서 내가 이루지 못하는 것을 제자들을 키워서 이루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네바에서 사람이 옵니다. 그가 다른 종교개혁자 윌리엄 파렐입니다. 제네바에서 당신이 필요를 합니다. 당신이 오셔서 마지막 개혁의 깃발을 올려주세요. 그런데 칼빈은 가슴이 새 가슴이거든요. 그래서 거부합니다. 그러자 파렐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우리를 보내셔서 종교개혁을 이루시려고 하신다. 그런데 너는 거부를 했다. 너 하나님이 그냥 안 두신다. 벼락이 두렵니 않느냐? 거기서 그는 제네바로 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을 합니다. 그의 즉각적인 결단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의 역사를 이룹니다. 그가 듣지를 안았다면 다른 사람이 쓰임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말씀이 들릴 때 들으려는 마음이 항상 있었기에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겁니다.
자 고넬료가 화해의 장을 어디서나 열어가는 그런 사람인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대가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를 드릴 때 응답의 확신이 없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구호자금이 부족해서 한 마을은 씨앗을 나누워 주고 한 마을은 나누어 주지를 못했습니다. 파종을 하고 기다려도 비는 오지를 안습니다. 싹이 나기를 기다려도 기미는 보이지를 아니합니다. 이제 가뭄이 심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 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씨앗을 나눠준 마을의 사람들은 한 명도 죽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데 다른 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들은 씨앗이라는 기대가 있었거든요.
말씀이 들리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멈추고 순종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예배자의 마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대가 있고요 소망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잊어버린 예배자는 아무런 기적을 체험하지를 못합니다.
예배자는 예배가 시작이 되기 전에 이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정말로 기억을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늘 하나님의 얼굴에 세워진 자의 심장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28, 29절-----이방사람의 집에 들어섰는데 베드로는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 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법인 줄 알면서도 이 집에 찾아왔노라 합니다. 그리고 고넬료에게는 "무슨 일로 불렀느냐"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앞세우는 귀한 마음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고넬료는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33절)"하고 환영 인사를 합니다. 이어서 고넬료는 "이제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하고 말하는데, '있나이다'----헬라어로 '파레스맨'이라고 하는 이 말은 현존한다는 뜻입니다. '재림'은 '파루시아(Parousia)'라고 하는데, 이란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뜻은 실제로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댄다 하는 뜻입니다. 생각한다는 것도 아니고 느낀다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실존적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 실존적 관계가 곧 신앙입니다. 너무나도 훌륭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눈으로는 베드로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마음은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같은 관계가 곧 신앙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보여지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 노출된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낸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때의 일이고, 지금도 하나님 앞에 환하게 벌거벗은 모습으로, 노출된 모습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무슨 거짓이 있으며, 무슨 교만이 있으며, 무슨 낙심이 있고 무슨 의심이 있고 무슨 문제가 따로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대면하고 삽니다.
얼마 전에 아주 감동적인 영화가 있었습니다. 흑인 가수 레이 촬스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는 시각장애우입니다. 그 영화가 상을 타고 안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실제를 그린 겁니다. 원래 레이는 나면서부터 장애가 있던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일곱 살에 녹내장으로 인해서 시각장애인이 됩니다. 중도실명을 하면 그것처럼 힘이 드는 게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한참 보다가 실명이라는 고통을 딛고서 레이는 R&B의 거장이 됩니다. 그가 열 살 무렵에 일어난 일입니다. 남의 도움이나 받으며 살아야 하는 그가 어느 날 의자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그래서 그때 엄마를 찾기 시작을 합니다. 아주 애처롭게 엄마를 부릅니다. 그의 엄마가 그에게 달려가다가 갑자기 멈춰섭니다. 아니다. 이 아이에게 이제는 홀로 서는 법을 가르치자 생각이 여기에 머뭅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납니다. 계속해서 엄마를 부르다가 지쳐서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의 소리가 들리고요. 주변의 닭이 우는 소리. 귀뚜라미소리,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를 따라서 주방으로 갑니다. 계속 집중을 하면서 주변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는 엄마 여기 계시지요? 지금 엄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노라고 그는 말을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합니다. 계속 여기서 너를 지켜보고 있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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