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가까울수록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장 19절~25절)
인생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산다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분류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그 차이점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어리석은 사람은 남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생각도 다른 사람에 대한 것으로 가득차 있어서 지나치게 남한테 신경을 씁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 다른 사람의 평판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아하고, 싫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누가 나를 칭찬하면 천하를 얻은 듯이 기뻐하고, 조금만 섭섭하게 대해 주어도 끝없는 자기비하(自己卑下)에 빠집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나도 그를 미워하고 누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대 맞으면 나도 한 대 때립니다. 빼앗기면 나도 빼앗습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종속적(從屬的)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 나름의 주체의식이나 개성이 없이 남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그러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을 이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평할 때에도 자기를 먼저 반성합니다. 남의 집 불난 것을 보면 빨리 돌아와서 내 집 불 단속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았을 때에 그것을 오래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그런 실수가 없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충실을 기하고 자기 진실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에 집착해서 삽니다. 족보 찾고 학벌 따지면서 '내가 그래도 왕년에는……' 하고 허구한 날 옛 자랑 늘어놓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혹은 지난날의 괴로웠던 일을 자꾸 생각합니다. 과거에 섭섭했던 일, 과거의 실패---여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뛰쳐나올 줄을 모릅니다. 그 마음과 생각이 과거에만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못하고 점점 더 무기력해집니다. 이런 과거 지향적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가 어떠하든지 그것을 딛고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의미를 찾아서 미래 지향적으로 승화(昇華)시킵니다. 오늘이 있기 위해서 어제가 있었다, 미래가 있기 위해서 과거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앞을 바라보며 10년 20년 후, 아니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저 먼 미래를 생각하며 사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이런 일들이 자꾸 일어납니다. 충무공의 종부들의 이야기나 가풍을 따지면서 계승이니 이런 일들이 자꾸 일어납니다. 과거에 집착을 하면 그것은 끝나는 겁니다.
셋째, 어리석은 사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을 씁니다. 세상에는 반반(半半)의 가능성을 지닌 일이 많습니다. 꼭 이러리라고도 못하고 꼭 저러리라고도 못합니다.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에 하나',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만일 그렇다면' 하고 '만일'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때문에 항상 고민입니다. 다른 나라에 지진이 났다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데, 한국에도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하나,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하나, 하늘이 내려앉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한도 끝도 없이 만일, 만일, 만일의 일들을 상상하며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걱정 근심하는 일의 태반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꼭 일어난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런 일들을 가지고 자꾸 마음을 쓰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일어날 일,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내다볼 수 있는, 반드시 내 앞에 다가올 일을 위해서 항상 준비하고 대비하는 생을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10월에 와 있습니다. 겨울이 벌써 문턱에 있습니다. 머지않아 땅이 꽁꽁 얼어붙고 매서운 겨울 추위가 닥칠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겨울은 아닙니다. 연말이 되고, 새해가 되고---그러면 다시 봄도 올 것입니다. 여러분,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도 지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쇼핑할 때에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여름에 겨울옷을 삽니다. 여름에는 겨울옷이 싸거든요. 또 여름은 이제 곧 끝나고 조금 기다리면 겨울이 될 터이니까요. 마찬가지 이유로 겨울에 여름옷을 사 둡니다. 지혜로운 생활방식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꼭 겨울이 와야 겨울옷 사고, 여름이 와야 여름옷 삽니다. 눈앞의 일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그래서 손해를 봅니다. 어리석은 생활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금요기도회가 끝나고 잠시 외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 사고가 크게 났습니다. 사람이 죽고 그렇게 일어난 그것을 보면서 생각을 한 겁니다. 나도 저럴 수가 있다는 겁니다. 남 죽는 것 보았으면 내 죽음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 어디 남의 일입니까? 다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언제 일어나도 일어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예사로 잊고 지냅니다. 나이가 들면 늙고, 늙으면 죽는 것 아닙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성경도 말씀하지만,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죽음과 같이 반드시 일어날 일, 그 결정적인 사건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을 생각을 하면 이런 겁니다. 죽음이나 어떤 일이든 거기에 개방적인 자세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그러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그 나라는 그냥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혈연으로 똘똘 뭉친 민족을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출애굽기12장 38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그들만이 나오고 그들만이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하였으며” 여기서 우리는 중다한 잡족이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은 혈연이 다르더라도 믿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이스라엘이란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이 가능한 겁니다. 자 성경에 보면 모압여인 룻이 나오기도 하고요, 우스땅에 사는 욥이라는 이방인이 나오기도 합니다. 모든 사건이나 일에 개방적인 자세로 들어올 것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는 장면을 기억을 하십니까? 헷 사람이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 헷 사람은 다른 족속이 아닙니다. 히타이트 민족으로 세계에서 제일 먼저 철기를 발명한 민족입니다. 히타이트족의 사람인 우리야를 장군으로 쓰는 개방성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십자가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개방적인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그 말씀을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그런 집을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다 들어오라는 개방성입니다. 예수님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다면 아마 우리의 구원은 없을 겁니다.
사실은 교회가 텃세라는 것이 사라져야합니다. 그것은 아주 악한 일입니다. 새로 교회가 부흥을 하려면 이 텃세를 부리는 무리가 모든 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는 교회의 걸림돌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입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의 이야기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커다란 국가가 되는 이유를 로마의 개방성이라고 합니다. 로마인들은 정복을 하며는 피정복민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왕으로 삼으려는 그 정도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매력은 개방성과 또 모두에게 기회가 부여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매력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개방적이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차별이 없는 그런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좀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좀 오래 다닌 사람들이 그냥 공격을 합니다. 말로 공격을 합니다. 어느 젊은이가 한말입니다. 목사님 나중에 제가 크면 나갈게요. 마음이 아파서 나오기가 싫어요. 좀 마음을 열고서 보면 안 되나요? 그저 젊은이들이 있는 곳에서 말을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개방성의 부족입니다. 나만이 중심으로 착각을 하면서 그렇게 산다는 게.
오늘의 성경 본문 끝에 '그 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그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것을 원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다시 되돌아오는 것, 빙빙 도는 것이라고, 윤회적(輪廻的)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시간을 직선적인 것으로 말씀합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창조가 있고 말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날'의 개념은 히브리 신학의 핵을 이루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상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그 날'을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날(Lord's Day)', 곧 '메시야의 날'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상입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이 말을 '오메가 포인트 (omega point)'라고 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있어서 '그 날'이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날'이 있어서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배가 항구를 떠날 때에 '이제부터 바람 부는 대로 동으로나 서로나 되는대로 떠다니다가 아무데나 가서 닿으면 거기가 내 목적지다' 하고 떠납니까? 아니지요. 떠날 때부터 어디로 간다 하는 목적지가 분명히 정해져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 내일 하다가 우연히 가서 닿는 것이 '그 날'이 아닙니다. 그 날이 먼저 있고 우리는 그 날을 향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우리들에게 성경이 계속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그날이 있다고, 그 날이 먼저 주어진 것이라고, 역사에 종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오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날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한 계시로 확고하게 결정된 날입니다. 그 날은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입니다. 창조요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시간이라는 현재가 있습니다. 이것은 숨겨진 세대요, 감추어진 세대요, 신비의 계시적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신비롭게 감추어진 바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에도 이 오메가 포인트가 거듭거듭 강조됩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 : 3-12)"이미 정해진 천국이 전제되고, 그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을 보아도 모두 그 오메가 포인트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라지 비유, 악한 농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 금방 생각나는 몇 가지 비유들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 비유들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세대에는 잠시 잠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의와 불의가 뒤바뀔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암흑시대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생하며 악한 자가 득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의 형통(亨通)을 부러워하지 말아라. 악인의 형통을 질시하지도 말아라. 그 날은 반드시 온다.'
겨자씨의 비유에서와 같이 이 혼돈 가운데서도 겨자씨는 자라고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따로따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반드시 끝이 옵니다.
이 역사의 종말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 날이 오면 가리워진 것들, 숨겨진 것들이 모두 노출될 것입니다. 거짓은 거짓대로, 진실은 진실대로 벌거벗은 것같이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날이 있다고 믿으며, 그 믿음대로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강북강변로를 따라서 가다가 보면 양화대교가 나옵니다. 양화대교 부근이 마포구 합정동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기념비적인 장소가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절두산이고 하나는 양화진이라고 합니다. 원래 절두산은 잠두봉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봉우리였습니다. 잠두봉은 원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카톨릭에서 성지로 절두산이라고 합니다. 병인양요때 대원군이 천주교신자를 박해를 하면서 신자를 많이 죽였는데 그곳이 잠두봉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머리를 잘라서 한강에 떨어뜨렸는데, 그 후로 자를 절에 머리 두를 써서 절두산이라고 부릅니다. 절두산 건너편에는 양화진이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10개국의 400여명이상의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선교사들의 묘비의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섬기러 왔습니다. 젠슨의 묘비에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캔드릭 선교사의 묘비에는 이런 글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1000개의 생명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서 바치고 싶다.
여러분은 죽은 뒤에 어떤 말을 듣고 싶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장례식을 인도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장례식에 가든지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그의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물어봅니다. "이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혹은 "고인이 즐겨 부르던 찬송가는 무엇입니까?" 하고요. 이럴 때에 상대방이 묵묵부답(黙黙不答)이거나 "찬송 부르는 것 못 봤는데요" 하고 대답하면 제 마음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고인이 좋아하던 찬송가가 한 가지라도 있으면 장례식 인도하는 데 훨씬 더 은혜가 있습니다. "이제고인이 즐겨 부르던 마지막 찬송을 부릅시다"---이것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그 찬송 하나가 없어서 모두 곤란해 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알 재간이 없어요. 그의 오메가 포인트가 허무해지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끝은 어떻게 맺어질 것 같습니까? 어떠한 조사(弔詞)로 결론이 내려지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서겠습니까? '그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영생의 날입니다. 모든 거짓이 벌거벗는 날입니다. 모든 허위가 무너지는 날입니다. 모든 가식(假飾)이 벗겨지는 날입니다. 헛된 것들이 다 무너지는 날입니다. 바벨탑의 교만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재주가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거짓 없이 노출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이미 문 밖에 서 있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역사 속에 징조가 보입니다. 종말의 징조가 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어떤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지금은 종말론적인 새로운 가치, 새로운 윤리 체제를 세워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요? 오늘 성경 말씀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 날이 가까워 올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요. 예배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자세를 분명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예배는 혈연관계로 모이는 친목회도 아니고, 이익 때문에 모이는 이익 공동체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겁니다. 너희가 누구의 능력을 힘입어 가는 곳이 성소냐? 그겁니다. 논공을 앞세워서 나오는 것이 옳은 것이냐?
열왕기상9장11절-14절을 보면 두로왕 히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을 하고 왕궁을 건축을 하는 그 자리에 이런 모습을 가지고 나옵니다. 자기의 힘이 닿는 선까지 그는 열심히 솔로몬을 돕습니다. 그런데 다 끝이 나고 솔로몬이 그를 치하하며 여러 고을을 그에게 선물로 줍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니 히람이 영 쓸모가 없거든요. 그래서 이름을 가불이라고 합니다. 국경의 땅이요. 변방의 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하고 꼭 문제가 되는 것이 논공행상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개척공신은 언젠가 다 떠납니다.
조선시대에 두 번의 반정이 있었습니다. 성종이 죽고 나서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의 반정이 일어납니다. 중종의 반정이 일어난 다음에 4대 사화가 있습니다. 그중에 기묘사화는 반정공신들이 일으킨 사화입니다. 광해군을 쫓아내는 인조반정이 있고 난 다음에 인조는 공신들에게 일등공신 그리고 이등공신 이런 자리를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공으로 보면 일등공신인 이괄에게 2등공신의 자리가 주어집니다. 이에 불만을 품고서 일어난 반란이 이괄의 난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다음에 태종이 공신들을 하나씩 제거를 합니다. 역사를 보는 눈이 있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대사를 치르고 나면 꼭 공신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논공행상이 문제가 되어서 일을 그르칩니다. 내가 어떻게 세웠고 어떻게 지켰는데 이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서 뒤로 물러나야합니다.
여기는 공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문제입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 이것이 바른 예배입니다. "그 날이 가까워 올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그렇습니다. 가끔 우리는 '흩어지는 교회'를 말합니다. 하지만 모이지 않고 흩어질 수 있습니까? 모이는 교회 없이 흩어지는 교회가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봉사, 전도만을 너무 강조합니다. 어느 교인은 교회에서 하도 전도하라 하니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나도 간신히 나오고 있는데 누구를 데려오라는 것입니까?" 나 자신이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고 바른 은혜와 성령이 충만해서 돌아가면 전도는 자연히 이루어집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에 봉헌함이 없이 무슨 힘으로 봉사를 합니까? 바른 예배, 바른 은혜 없이는 봉사도 없습니다. 사랑도 인내도 없습니다. 예배의 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라---시간 시간 하나님을 만나는 충만한 체험이 있을 때에 우리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는 궤도 수정이 필요 없는 올바른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종합적인 결론을 내려 봅시다.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예배의 자세를 분명히 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확증하여야 합니다. 궁극적 관심을 새롭게 합시다. 까맣게 잊고 지내온 '그 날'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 그 날이 가까워 올수록 우리는 모이기를 더욱 힘쓰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말씀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고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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