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낌없기를 힘쓰노라(사도행전 24:10~23)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송사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대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다름이니이다 하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 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사도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로서는 세 번째로 하는 변명이 됩니다. 그가 체포될 때에 영문 층대에서 변명한 일이 있고, 또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생사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총독은 로마를 대신하여 사실상 법적으로 사형을 선고, 집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의 대제사장은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할 권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죽이기로 작정하고 로마사람들에게 넘겨서 사형케 할 수는 있지만 사형에 대한 권한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아 사형 선고와 함께 곧 집행이 되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어볼 때에 지금 벨릭스 앞에 섰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선 것과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 생사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이렇듯 절박한 재판정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는 대로 바울은 담대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인가 결단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아마도, 분명히,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네가 가이사랴에서야 하겠다''네가 로마로 가리라'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과 또 자기를 담대케 하시던 성령의 역사와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자 앞에서 재판 자체에 대해서는 대수롭게 여기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난은 좀 당하겠고, 매도 맞겠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로마로 간다는 것까지는 분명하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변명을 구차하게 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해서 내가 무엇을 믿고 있으며, 내가 무엇을 전하고있으며, 내가 왜 핍박을 당하고 있는지를 역력히 만인 앞에 증거 하고자 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자세는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는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구차한 자세가 아닙니다. 이런 말로 저런 말로 벨릭스 앞에 잘 보여 가지고 우선 이 자리부터 모면해보겠다는, 혹은 고통을 면해보겠다는 비겁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송사한사람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3절)"하고 아첨의 긴 인사를 하는 저 한심한 무리들과 대비해볼 것입니다.
사실은 고소한 사람들보다 피고인인 바울 쪽이 더 다급합니다. 고소하는 사람들이야 고소해버리면 그만이지만 피고인인 바울은 생사가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입을 열어 말씀하는 첫 마디를 보세요.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10, 11절)"-이렇게 시작하고 맙니다. '당신은 오랫동안 사마리아에서 총독을 지냈고, 예루살렘에서도 총독을 지냈고, 이제 가이사랴에 있어서 이 지방을 이렇듯 오랫동안 다스렸으니 우리 종교 문제나 나의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말합니다.' 이런 자세입니다. 구구하게 긴 설명을 하려 하지 않아요. 이 담대함, 이 선명함, 이 용기 있는 모습이 오히려 벨릭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공부하겠습니다마는 급기야 벨릭스는 바울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합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예수가 누구며, 부활이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이며, 영생이 무엇이며…… 알고 싶어하는 모습으로 감동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말이 길어야 능사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담력과 용기에 있습니다. 설명이 길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이 문제입니다. 진실에 감동이 있는 것이지 긴말이나 웅변에 사람의 마음이 감동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 체포당해 와 있는 하나의 죄수가 있습니다.
한낱 죄인의 모습으로 시퍼런 재판정에 서 있는 '피고'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감히 서슬 푸른 로마총독을 설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깊은 인상과 감명을 심어준 것으로 본문의 결론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구구하게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용기 있게, 담대하게 믿음으로 말씀했습니다. 본문에 스데반이 죽을 때처럼 '천사의 얼굴 같더라'하는 기록은 없습니다마는 바울의 모습은 태연, 온유, 담대했다는 것을 말씀의 행간에서 넉넉히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사실을 간단하게 말씀하려 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려 합니다. 사실 자체를 설명하려 합니다. 구차하게 긴 이야기나 부탁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그는 고난을 당해도 좋습니다. 사형을 당해도 좋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결론이 내려도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지금 의도하는 바는 오직 '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다'하는 것을 분명하게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전한다는 것, 이 한 가지연유로 고난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이라면 다 좋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예수 전하는 것, 이것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당하겠다, 매를 맞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순수하게 복음 전하는 일로 인하여 고난 당하는 일이라면 기거이 감수하리라-이것이 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설파합니다.
유대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 때에는 선동죄로 고소했습니다. 선동죄로-이 사람은 염병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있는 곳에는 으레 trouble이 일어납니다, 이 사람은 바로 trouble maker입니다, 어디서나 이 사람만 있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선동하기 대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로마정부의 치안 문제, 안보 문제에 걸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닙니까, 따라서 이런 사람은 애저녁에 없애야지요-그런 뜻으로, 마치 로마정부를 생각해서 말하는 것처럼, 마 정부의 치안문제를 염려해서 말하는 것 처럼요. 그들은 지금 바울의 일을 정치 문제로 돌려서 정치적 관심으로 차 있는 벨릭스에게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가리켜 선동자라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주동자라고, 이런 사람 내버려두면 세상이 소란스러워진다고, 혁명이 일어난다고, 폭동이 생긴다고, 그러니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게 벨릭스를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고소의 내용에 대하여 바울은 지금 자상하고도 간단하게 발명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11절)." 그러니 무슨 선동이 있겠느냐, 선동할 시간도 없지 않느냐, 선동할 만큼 무슨 공작을 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되는데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가 겨우 열 이틀 밖에 못된다, 그리고 나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한 것밖에는 한 일이 없다-선동한 일이 없거든요.
우선 선동한 사건이 일어난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선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렇듯 선동죄로, 정치적인 반란을 일으킬 위험인물로 취급당하면서 고난 당하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이 고난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구실로 매맞는 것 싫고, 이런 구실로 죽는 것도 싫다, 사실이 아니니까-그래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일으켰다, 그들에게도 물어 보라, 정말로 고소할 것이 있다면 여기 와서 당당히 말하게 하라-이렇게 말씀합니다.
19절 말씀을 보세요.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 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말할 사람 없어요. 자신 있어서 하는 말씀입니다. 선동한 일없고, 선동할 까닭도 없고, 선동할 시간도 없고, 선동할 기회도 없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선동죄인이란 말인가, 이유가 있어 박해를 당하는 것이라면 내가 즐겨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오해로 핍박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 로마정부를 위해서도 옳지 않고 벨릭스 각하 당신을 위해서도 옳지 않고, 나 자신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해주기를 바란다-이것의 그의 변명 내용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오해를 받을 때가 있어요. 그 오해가 풀려 사실이 사실대로 밝혀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해로 문제가 생길 때에는 정말 변명하고 싶어져요. 그러나 변명해도 소용없어요.
오늘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지마는 그로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어요. 소용이 없었어요. 바울의 변명 그 자체보다는 변명하는 자세가 벨릭스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변명의 내용 때문에 벨릭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의 얼굴 표정이, 표정 관리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제가 어느 책을 보니까 재미있는 말이 있습디다. 소위 재벌 총수들이 가끔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는 일이 있잖아요? 대통령과 재벌이 만나는 때면 기자들이 열심히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재벌 총수가 청와대에 들어가게 되면 대통령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재벌 총수에게 아주 간청하는 주문이 있다고 해요. 바로 "표정 관리 잘해주세요"입니다. 들어가서 대할 때에 좀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웃으면서 대하라, 혹 꾸중을 듣거나 무슨 복잡한 문제가 생겼더라도 적어도 회담을 마치고 나올 때에는 활짝 웃는 얼굴로 나서라고 한답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증권시장의 주가가 떨어진 대요. 말 되거든요. 내가 그것 읽으면서 '맞다'고 생각했어요. 여러분, 아무쪼록 표정 관리 좀 제대로 하세요.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나올 때의 표정이 근심에 차 있으면 '아하, 저 재벌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보다'해서 그대로 매스콤에 나타나고 보면 그날로 주가가 곤두박질치거든요.
우리 교인들이 굳이 예수 믿어라, 전도하라 할 것 없습니다. 예배 마치고 나갈 때에 표정 관리 하나 잘하세요. 예배 드리고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나 남편에게 활짝 웃고 대해야만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는 모르나 은혜가 있었는가보다 싶어하지, 들어가면서부터 우거지상이라면 망조지요. 이걸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바울의 설명이 길었던 것도 아니요, 바울의 말씀이 논리 정연해서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표정이었습니다. 충만한 은혜가 그의 표정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벨릭스의 마음에 감동이 온 것입니다. 변명을 한들 별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의 심정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오해로 인하여 핍박당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서 다시 그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변명하는 중에 바울의 참모습, 그의 신앙적 충성과 그 자세가 밝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누구냐, 바울은 무엇 때문에 수고했느냐, 오늘 무엇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서 힘쓰고 있느냐, 이 짧은 문맥에도 신학적 문제가 잘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핍박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 섬기는 일 때문이다-이것이 총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열심히 섬깁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16절)"-하나님을 바로 섬기고자 하는 중입니다. 이게 충성입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섬기려고 합니다. 여러분, 예배라고 하는 말이 원래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예배'를 'service'라고도 해요.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뭘 달라 하고, 뭘 받겠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섬긴 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섬기는 방법이 달라요. 섬기는 길이 달라서 문제가 됩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14절)"-저들이 생각하는 이단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좇아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단이라 하는 도'-기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길을 좇아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유대사람들은 유대주의라고 하는 자기네 나름의 종교사상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딴에는 다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섬기는 방식이 달라요. 섬기는 목적이 달라요.
섬기는 방법이 달라요.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Let God be God."-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내 방법으로가 아닙니다.
내 뜻으로가 아닙니다. 내 발상으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방법대로 내가 주를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께도 이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가야바도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생의 목적이요, 직업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섬깁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충돌합니까?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했습니까? 다같이 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되어 있지마는 실상은 그 개념이 전혀 다른 하나님이요, 다른 길이요, 정반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율법에 대해서도 저들 나름의 인본주의 방법으로, 형식적인 방법으로, 외식적으로, 인간중심으로, 기복적(祈福的)으로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벌을 받지 않을까, 그것도 이 세상에서-이같이 기복적인, 자기중심적인, 인본주의적인, 율법주의적인 사상으로 하나님을 섬겼어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으나 그실은 나 자신이 목적이고, 하나님은 수단이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 섬기시는 것은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 뜻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고로 율법을 지키되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지킬 것이지 복 받으려고 지킬 것도 아니고, 벌받을까봐 무서워서 지킬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율법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으니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고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니 지키는 것입니다. 흔히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하는데 역겨운 효도가 많아요. 다른 때에는 골방에 처박아두었다가 누가 온다 하면 내어다 모셔놓고 효도하는 척합니다. 생전 용돈 한번 안 드리다가 또 관광 가라고 강제로 떠밀어 가지고 내보내는데, 이것도 위세 하느라고, 남들에게 보여주느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효도하는 척하고 내가 복을 받겠다는 것이지 정말 부모님을 위해서가 아니요, 부모님을 사랑하는 게아니지요.
자, 안식일 문제 놓고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안식일은 무엇입니까? 이게 충돌이 되거든요. 제일 많이 충돌한 것이 안식일 문제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그리고 선한 일 하고-이래야 되는 것이라 하십니다. 사실 선한 일 하는 게 그대로 휴식이 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일 하면 얼마나 마음이 기쁩니까? 낮잠 자는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님께는 선한 일 하는 안식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주일날에는 선한 일 좀 합시다. 병원도 방문합시다. 모르는 사람도 좀 방문합시다. 고아원도 방문합시다. 양로원도 방문합시다.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마, 해보면 알 거예요. 그랬더니 오늘은 내 마음이 편하다, 내 몸도 참 편하다-진정한 안식을 경험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합시다. 이렇게 볼 때에, 일하는 안식일입니다. 선한 일 하는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예수님께서는 일하는 안식일로 쉬셨어요. 그런데 유대사람들은 왜 주일날, 안식일 날에 병을 고치느냐고 말썽을 일으킵니다. 더욱이 안식일 지키는 것을 공로화했어요. 안식일을 지켜서 우등생이요, 안식일을 지켜서 높은 선민, 바리새인적이고 훌륭한 선민이 될 수 있다-도도하고 교만했습니다. 저들에게는 이런 의미의 안식일이었어요. 그러니 기독교와 충돌할 수밖에.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까지 생기게되지 않았습니까?
그런고로 이제 우리 생각해봅시다. 예수의 도를 좇아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종교학적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계시자로 믿는 유일신 종교다-이것은 바른 정의입니다. 우리는 예수만 입니다. 예수를 좇아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수만이 계시자요 예수만이 우리의 구주입니다.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길을 좇아서, 이 도를 좇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들은 이 길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길,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인적이고 세속적이고 외식적인 길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래서 부딪치게 됐어요. 부딪칠 때에 어떻게 되느냐-하나의 스파크가 일어나게 됩니다. 가야바의 위선이 노출됐어요. 바리새인들의 거짓이 폭로됐어요. 저들의 거짓과 허상이, 율법주의가 뿌리째 무너지는 거예요. 여기서 저들은 견디지 못했어요. 예수님은 말씀이 없지만 저들은 예수님 때문에 심판을 받았어요. 이 때문에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볼 때에 이 도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다시 우리 성경에 보니 율법과 선지자를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달라요.
저 사람들이 믿는 율법은 구원의 사다리, 축복의 길, 복 받는 길로서 입니다. 그런 율법을 생각하고 있지마는 기독교의 율법은, 율법관은 어떻습니까? 유명한 로마서 10장 4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고 말씀합니다. Jesus is end of the law.-율법의 끝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율법은 이제 끝났어요. 이러니 충돌이 안될 수 있어요? 사도 바울이 말할 때에 '내가 율법을 믿습니다'하는 말과 유대사람들이 '내가 율법을 믿는다'하는 말은 틀려요. 같이 율법이라고 말하지마는 얘기가 다릅니다. 또 선지자 문제만 하더라도 바울의 견해는 예수로 인하여 선지자의 예언은 다 성취됐어요. 오랜 세월에 걸쳐 누누이 계시되어온 바 메시야에 대한 에언, 선지자가 기록해 마지않은 그 예언은 다 성취되었어요. 끝났어요. 예수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유대사람들은 아직도 멀었어요. 또 언제인 줄 알고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지요.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이 한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14, 15절)"-그랬더니 중요한 나머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셨어요. 예언대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율법을 완성하셨고 부활 승천 하셔서 이제 재림하십니다.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요. 그런데 유대사람들은 지금도 육체로 오시는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어요. 초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고, 저들은 초림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우주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저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율법, 같은 선지자라고,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래서 내가 지금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인가?-이 어려운 말을 벨릭스가 알아들을 턱이 없지요. 그러니까 "다시 듣겠노라"합니다. 내가 좀 개인적으로 들어야지 이렇게 들어 가지고는 다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마지막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지요. 충심과 충정을 말씀함입니다.
독일의 유서 깊은 고도 보름스(Worms)에 가보면 일찍이 마르틴 루터를 재판하고자 열렸던 소위 '보름스 국회'의 자리가 지금도 있고, 루터가 서서 하늘을 향하여 "주여, 내가 여기 섰습니다(Here I stand)."하고 기도했다고 하는 그 자리에 땅에다가 표시를 해놓았는데 그 집은 500년 전이니까 지금은 무너져 없고, 옆에 다른 성당을 지어놓았습니다. 루터가 섰던 그곳에 내가 서서 루터의 음성이 들리는 듯 귀를 기울여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루터가 거기서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대답했던 말은 아주 유명한 것입니다. 교황의 명령에 따라서 독일의 황제가 루터를 끌어다가 보름스 의회에 소환합니다. 그래놓고 협박하기를 "네가 그 동안 쓴 책을 다 소각하여 없애고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법을 따르겠느냐?"합니다. 그 때에 루터가 담대하게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비추어 오류가 지적되지 않는 한 나는 나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나의 양심은 이미 성경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양심의 지시하는 바를 역행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내 양심에 따라서는 이것이 성경이요, 성경이 말씀하는 데야 나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섰습니다."
참된 용기는 그 신앙과 양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길을 가셨습니다. 바울도 이 길을 갔습니다. 우리 또한 그 길을 갈 것입니다. 양심에 따라서, 성경이 지시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없다"-예수로 말미암아 오늘의 본문 말씀대로 '이 도를 좇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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