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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종이 된 사람(고린도전서 9:15-23)

by 【고동엽】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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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종이 된 사람(고린도전서 9:15-23)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네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있다 하더라도 은혜를 생각할 수 있는 그만한 마음의 여유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불행한 사람은 일자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 할 일이 없다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도와야 할 사람,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그보다 불행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헛된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인데,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 없는 일입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으며, 결과가 좋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안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전혀 허무한 일을 꼭 해야만 하는 사람 이보다 불행한 일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가 지불되는 것입니다. 혼자서 난 사람도 없고, 혼자 사는 사람도 없고, 혼자서 죽을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많은 신세를 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많은 은혜 속에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교도소에 가서 여러 번 교도소에 오게 된 사람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무나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내가 살아있는 것, 아직 이 자리에 살아 있다는 그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느냐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은혜를 모른다는 것, 은혜가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 은혜가 기억되지 않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당한 것이 절박한 일인 것은 사실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지요.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을 가려는 청년이 가정 사정으로 못 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부모의 사랑을 한 번도 받아 본 일이 없노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설사 대학은 못 가도 오늘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대학을 못 보내는 부모님의 마음이야말로 더 아픈 것입니다. 왜 은혜를 은혜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 많은 은혜를 불식하려고 드니 이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정말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거지요. 그 순간에 고마운 생각이 먼저 나야겠는데 원망과 불평으로만 꽉 차게 되면 그것은 끝이 아니냐 말입니다.

한강대교 난간에 "잠깐만 참으세요. 인생은 허무합니다." 그런 팻말이 붙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대개 죽는 사람이 그렇게 죽는 겁니다.

그 시간만은 "나는 사랑을 받아 본 일이 없고, 나를 사랑하는 자가 없다" 그런 생각인가 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거지요. 정말 이것이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말합니다.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은 없다." 심지어는 복음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되 자랑할 것은 없고, 많은 희생을 하되 내가 이것을 자랑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받은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평생토록 주고받으며 삽니다. 받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받은 것은 적고 주는 것은 많다고 말입니다. 그는 완전히 손해보는 셈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토록 생을 손해보고 삽니다. 반대로 주는 것은 적고 받은 것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은 흑자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이에 대한 비유를 예수님은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 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이 있었다. 도저히 갚을 수가 없게 될 때에 그 주인이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다. 그만큼 많은 은혜를 입었단 말입니다. 이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빚진 사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에게 자기 빚을 갚으라고 했다. 안 갚는다고 때리고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그 주인이 듣고 섭섭히 여겨서 불러다가 내 빚을 도로 갚아라, 그리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만 달란트는 천만불에 해당한다고 하며, 백 데나리온은 20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교한다면 오십만 분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계산은 이렇습니다. 받은 것은 많고 주는 것은 오십만 분의 일, 도대체 얼마를 받고 얼마를 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받은 바는 누구나 많습니다. 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은혜를 아는 자라야 사람입니다. 은혜를 생각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습니다. 바울을 예로 들어봅시다. 설사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왕년에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과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거에 핍박자요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그런고로 이제는 이대로 억울하게 그 어떤 고난을 당해서 어떻게 죽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또 한 번 감사하고 죽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십니까? 이제 복은 좀 받아야겠습니까? 이제 보상을 받을 것 같습니까? 보상이야 있든 없든 이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죽어간다 할지라도 "난 이제 할 말이 없노라.

그저 또 한번 감사할 뿐이라." 이것이 은혜를 아는 자의 자기에 대한 평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득불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득불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 은혜를 알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는 생산적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백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였고, 또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가다가 극적 장면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사도가 된 사람이 아닙니까. 이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지요. 그 뿐입니까?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구제 불능한 사람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한 생각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주관적인 간증입니다만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데 이 사람이 가만히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다고 했습니다. 값없이 전한다고 했습니다. 값을 바랄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미 받은 것이 너무나 막중하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만 가지고도 족합니다. 이제 그는 은혜에 사는 자가 된 것만 가지고도 족합니다. 이제 그는 은혜에 사는 자가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죽어 가니 감사하고, 같은 고난을 받되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니 감사하고, 매를 맞되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으니 감사하고, 주의 거룩한 역사에 가담된 그 높은 긍지와 그 사랑으로 그는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간증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된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고용되었다고 한 사실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다시 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래서 값없이 상도 보답도 보상도 바람이 없이 그저 감사, 그저 기쁨으로 봉사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행복은 여기 있습니다.

행복은 첫째로 자유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매이지 않는 사람, 경제적으로 빚 없는 사람, 정치적으로는 자유한 사람,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팔리지 아니한 인격,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는 이런 자유함, 이것이 바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체면이다, 위신이다, 살림이다, 잔뜩 붙들어 매놓으면 괴롭습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부끄러움이 없고 항상 자유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와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에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설사 경제적인 자유는 없어도 양심의 자유는 있고, 정치적인 자유는 없어도 도덕적인 자유는 가진 사람, 그리고 신앙적 자유를 가졌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는 줄 압니다. 자유, 바로 그것이 행복입니다. 불가피성에 매인 것이 없습니다. 빚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 더 행복한 사람은 그 고귀한 자유를 스스로 버릴 줄 아는 자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이 귀한 자유를 내 스스로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벌벌 떠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0:18에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지우는 십자가가 아니고 내 스스로 선택한 십자가란 말입니다. "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이 포기라고 하는 것, 내 스스로 종이 된다고 하는 것, 이처럼 행복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되는 것, 스스로 매이는 것, 이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저는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이 가장 큰 자유임을 아는 자가 결혼할 자격이 있다." 한 남자에게 매이고, 한 여자에게 매이는 것을 불편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결혼하지 말아야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을 섬기고 한 사람에게 매인다는 그것이 무한한 자유라고 하는 것을 아는 자가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매인다는 것, 스스로 매인다는 것, 이 얼마나 자유할 수 있는 길입니까? 매이고 그리고 미쳐야 합니다. 몸은 매였는데 마음은 따로 돌아간다면 불행합니다. 매이고 미쳐야 합니다. 정신까지 함께 매일 수 있어야만 그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매임은 선택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불가피적인 것이 아닙니다. 대상과 목적이 분명한 것입니다. 지혜도 내가 정한 것입니다.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이유를 가진 자, 그리고 위해서 자기를 몽땅 바쳐 버릴 수 있는 그러한 대상과 그러한 정열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이렇게 묘사하고 싶습니다. 행복의 피크를 뭐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최고로 행복한 시간, 젊은 사람은 화끈하다고 그럽니다. 가장 큰 행복은 이렇게 말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다"는 그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한 순간일 줄로 압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미쳐서 하고 사랑해서 하는 일이라면 피곤을 모르는 일입니다.

자기 포기,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혹 건강을 해칠까봐 벌벌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두어 봤댔자 별 것도 아니니 그저 한번 완전히 바쳐 버릴 마음은 없습니까? 완전 투자, 이러한 자기 포기는 곧 투자요, 생산적 투자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쓰는 말에 수지 균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7에 보면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얻기 위하여 버리는 것이요, 긍정하기 위하여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닙니다. 버린만큼 얻습니다. 얻어지는 것을 알기에 버립니다. 이래서 스스로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곧 투자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히 말하기를 "복음을 위하여 내게 주어진 권을 다 쓰지 않았노라"고 했습니다. 권리를 다 쓰지 않는다는 것, 스스로 제한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권리를 다 쓰고 모자라서 남의 것까지 뺏어 씁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권을 스스로 제한하면서 스스로 포기하며 사는 것처럼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종이 된 것은 얻고자 함이라. 얻는 바가 있기 때문에 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얻기 위해 종이 됐다. 이것은 하나의 원리입니다. 종이 되어야 주인이 됩니다. 사랑해야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자기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 받는 것은 어린이입니다. 사랑함으로 어른이 되고, 사랑함으로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받기만 하면 뭐합니까? 주기만 하면 됩니다.

언제든지 사랑함으로만이 자유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버리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자기의 생을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수고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맺어지는 아름다운 열매를 보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일생을 피아노 공부하는데 피아노를 아주 열심히 쳤습니다. 피아노를 계속 쳐 나갔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까 손이 말을 안 들어서 낙심합니다. 한계가 온 것이라고 죽고 싶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어야지" 그랬습니다.

여러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피아노를 잘 치고 기뻐했습니다. 많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기뻐했을는지 모릅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을 잘 가르쳐 놓고 내 제자가 박수를 받을 때에 기뻐하는 두 번째의 기쁨도 알아야 합니다. 어찌 이 음식을 내가 먹어야 됩니까. 다른 사람에게 잘 먹이고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그 재미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수고합니까? 내 수고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얻고, 내 손해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내 희생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진다고 할 때에 그것을 내 생명, 내 이득처럼 기뻐할 줄 아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차원 높은 행복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아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가 있겠는데 잘못하면 그러지 못한 때가 있습니다. 나도 손해보고 다른 사람도 손해봅니다. 내가 손해본다고 그 누구도 이익 보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한 일을 허무라고 합니다. 헛된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피곤합니다.

나도 손해보고 다른 사람도 손해보는 상징적인 예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겠습니까? 담배 피우는 것입니다. 나도 몸에 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약간은 해롭고, 아무도 이로운 자가 없습니다. 내 몸에는 해롭고 다른 사람의 몸에도 해로운데 어떤 사람은 이 일은 꼭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불쌍한 사람이지요. 담배를 끊지 못합니다. 백해 무익한데 절대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거리가 세상에 많습니다. 내게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로워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꼭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불행이라는 겁니다. 이게 허무입니다. 적어도 내가 손해를 보니까 그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야지요. 내가 울음으로써 다른 사라에게 웃음이 돌아가야지요. 내가 희생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이 돌아가야지요. 그럴 수 있는 수고라야 의미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처럼, 이방 사람에게는 이방 사람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로 나타났습니다. 요새 말로 말하면 체통이 없습니다.

체통은 없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요새는 주체성은 있는데 목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체성을 잃었습니다. 체통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얻었습니다. 뚜렷한 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행복했습니다.

그는 무능자가 되고, 무력자가 되고, 여러 모양의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목적의식은 분명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됨으로써 저쪽이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종이 됨으로 저쪽이 주인이 되고, 내가 처절해짐으로 저쪽에 영광이 돌아갑니다. 내가 죽음으로 저쪽에 삶이 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는 그 희생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코자 하고 얻고자 하는 복음적인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그는 스스로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복음 전파에 목적을 둔 사람, 복음 전파에 목적을 둔 직업, 그리고 그 생업이 얼마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일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입니까? 남들이 나를 칭찬하느냐 멸시하느냐 입니까? 그것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다 칭찬 받아 봐도 허무한 것이요, 멸시를 받아도 흔적이 남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 목적은 생명을 구원하는 데만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진실한 생의 목적을 오늘 세워야 하겠습니다.

영원히 헛되지 않는 일, 복음에 참여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자기 생을 쏟아 나가는 일처럼 보람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종이 되십시다. 그래야 주인이 될 것입니다. 내가 아깝지 않게 수고를 하십시다. 이 수고 뒤에 영광이 올 것입니다.

내 엄청난 희생을 그대로 지불할 때 그 어디인가에 생명의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이 영광과 긍지에 사는 귀한 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 사랑하시는 주님, 허무와 아무 의미도 없는 이 절망에 허덕이는 생을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오늘도 주의 말씀으로 훈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의 수고가 반드시 어딘가에 열매가 있는 수고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인내가 장차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이 되게 해 주시고, 내가 손해봄으로 그 누군가에 이득이 반드시 있어질 수 있는 이러한 수고를 하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우리는 수고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게 하시고, 희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복음의 그 거룩한 역사에 가담된 긍지를 가지고 하나의 썩어지는 밀알로 자기를 땅에 심고 자기를 죽여 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기다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시간 시간 새 믿음을 주시고 그리고 그 모든 희생과 수고 위에 아름다운 열매와 영광을 드리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스스로 종이 된 사람(고린도전서 9:15-23)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네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있다 하더라도 은혜를 생각할 수 있는 그만한 마음의 여유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불행한 사람은 일자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 할 일이 없다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도와야 할 사람,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그보다 불행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헛된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인데,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 없는 일입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으며, 결과가 좋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안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전혀 허무한 일을 꼭 해야만 하는 사람 이보다 불행한 일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가 지불되는 것입니다. 혼자서 난 사람도 없고, 혼자 사는 사람도 없고, 혼자서 죽을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많은 신세를 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많은 은혜 속에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교도소에 가서 여러 번 교도소에 오게 된 사람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무나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내가 살아있는 것, 아직 이 자리에 살아 있다는 그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느냐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은혜를 모른다는 것, 은혜가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 은혜가 기억되지 않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당한 것이 절박한 일인 것은 사실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지요.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을 가려는 청년이 가정 사정으로 못 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부모의 사랑을 한 번도 받아 본 일이 없노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설사 대학은 못 가도 오늘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대학을 못 보내는 부모님의 마음이야말로 더 아픈 것입니다. 왜 은혜를 은혜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 많은 은혜를 불식하려고 드니 이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정말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거지요. 그 순간에 고마운 생각이 먼저 나야겠는데 원망과 불평으로만 꽉 차게 되면 그것은 끝이 아니냐 말입니다.

한강대교 난간에 "잠깐만 참으세요. 인생은 허무합니다." 그런 팻말이 붙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대개 죽는 사람이 그렇게 죽는 겁니다.

그 시간만은 "나는 사랑을 받아 본 일이 없고, 나를 사랑하는 자가 없다" 그런 생각인가 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거지요. 정말 이것이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말합니다.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은 없다." 심지어는 복음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되 자랑할 것은 없고, 많은 희생을 하되 내가 이것을 자랑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받은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평생토록 주고받으며 삽니다. 받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받은 것은 적고 주는 것은 많다고 말입니다. 그는 완전히 손해보는 셈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토록 생을 손해보고 삽니다. 반대로 주는 것은 적고 받은 것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은 흑자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이에 대한 비유를 예수님은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 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이 있었다. 도저히 갚을 수가 없게 될 때에 그 주인이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다. 그만큼 많은 은혜를 입었단 말입니다. 이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빚진 사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에게 자기 빚을 갚으라고 했다. 안 갚는다고 때리고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그 주인이 듣고 섭섭히 여겨서 불러다가 내 빚을 도로 갚아라, 그리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만 달란트는 천만불에 해당한다고 하며, 백 데나리온은 20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교한다면 오십만 분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계산은 이렇습니다. 받은 것은 많고 주는 것은 오십만 분의 일, 도대체 얼마를 받고 얼마를 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받은 바는 누구나 많습니다. 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은혜를 아는 자라야 사람입니다. 은혜를 생각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습니다. 바울을 예로 들어봅시다. 설사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왕년에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과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거에 핍박자요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그런고로 이제는 이대로 억울하게 그 어떤 고난을 당해서 어떻게 죽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또 한 번 감사하고 죽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십니까? 이제 복은 좀 받아야겠습니까? 이제 보상을 받을 것 같습니까? 보상이야 있든 없든 이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죽어간다 할지라도 "난 이제 할 말이 없노라.

그저 또 한번 감사할 뿐이라." 이것이 은혜를 아는 자의 자기에 대한 평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득불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득불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 은혜를 알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는 생산적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백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였고, 또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가다가 극적 장면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사도가 된 사람이 아닙니까. 이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지요. 그 뿐입니까?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구제 불능한 사람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한 생각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주관적인 간증입니다만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데 이 사람이 가만히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다고 했습니다. 값없이 전한다고 했습니다. 값을 바랄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미 받은 것이 너무나 막중하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만 가지고도 족합니다. 이제 그는 은혜에 사는 자가 된 것만 가지고도 족합니다. 이제 그는 은혜에 사는 자가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죽어 가니 감사하고, 같은 고난을 받되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니 감사하고, 매를 맞되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으니 감사하고, 주의 거룩한 역사에 가담된 그 높은 긍지와 그 사랑으로 그는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간증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된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고용되었다고 한 사실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다시 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래서 값없이 상도 보답도 보상도 바람이 없이 그저 감사, 그저 기쁨으로 봉사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행복은 여기 있습니다.

행복은 첫째로 자유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매이지 않는 사람, 경제적으로 빚 없는 사람, 정치적으로는 자유한 사람,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팔리지 아니한 인격,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는 이런 자유함, 이것이 바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체면이다, 위신이다, 살림이다, 잔뜩 붙들어 매놓으면 괴롭습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부끄러움이 없고 항상 자유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와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에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설사 경제적인 자유는 없어도 양심의 자유는 있고, 정치적인 자유는 없어도 도덕적인 자유는 가진 사람, 그리고 신앙적 자유를 가졌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는 줄 압니다. 자유, 바로 그것이 행복입니다. 불가피성에 매인 것이 없습니다. 빚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 더 행복한 사람은 그 고귀한 자유를 스스로 버릴 줄 아는 자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이 귀한 자유를 내 스스로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벌벌 떠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0:18에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지우는 십자가가 아니고 내 스스로 선택한 십자가란 말입니다. "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이 포기라고 하는 것, 내 스스로 종이 된다고 하는 것, 이처럼 행복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되는 것, 스스로 매이는 것, 이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저는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이 가장 큰 자유임을 아는 자가 결혼할 자격이 있다." 한 남자에게 매이고, 한 여자에게 매이는 것을 불편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결혼하지 말아야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을 섬기고 한 사람에게 매인다는 그것이 무한한 자유라고 하는 것을 아는 자가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매인다는 것, 스스로 매인다는 것, 이 얼마나 자유할 수 있는 길입니까? 매이고 그리고 미쳐야 합니다. 몸은 매였는데 마음은 따로 돌아간다면 불행합니다. 매이고 미쳐야 합니다. 정신까지 함께 매일 수 있어야만 그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매임은 선택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불가피적인 것이 아닙니다. 대상과 목적이 분명한 것입니다. 지혜도 내가 정한 것입니다.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이유를 가진 자, 그리고 위해서 자기를 몽땅 바쳐 버릴 수 있는 그러한 대상과 그러한 정열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이렇게 묘사하고 싶습니다. 행복의 피크를 뭐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최고로 행복한 시간, 젊은 사람은 화끈하다고 그럽니다. 가장 큰 행복은 이렇게 말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다"는 그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한 순간일 줄로 압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미쳐서 하고 사랑해서 하는 일이라면 피곤을 모르는 일입니다.

자기 포기,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혹 건강을 해칠까봐 벌벌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두어 봤댔자 별 것도 아니니 그저 한번 완전히 바쳐 버릴 마음은 없습니까? 완전 투자, 이러한 자기 포기는 곧 투자요, 생산적 투자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쓰는 말에 수지 균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7에 보면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얻기 위하여 버리는 것이요, 긍정하기 위하여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닙니다. 버린만큼 얻습니다. 얻어지는 것을 알기에 버립니다. 이래서 스스로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곧 투자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히 말하기를 "복음을 위하여 내게 주어진 권을 다 쓰지 않았노라"고 했습니다. 권리를 다 쓰지 않는다는 것, 스스로 제한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권리를 다 쓰고 모자라서 남의 것까지 뺏어 씁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권을 스스로 제한하면서 스스로 포기하며 사는 것처럼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종이 된 것은 얻고자 함이라. 얻는 바가 있기 때문에 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얻기 위해 종이 됐다. 이것은 하나의 원리입니다. 종이 되어야 주인이 됩니다. 사랑해야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자기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 받는 것은 어린이입니다. 사랑함으로 어른이 되고, 사랑함으로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받기만 하면 뭐합니까? 주기만 하면 됩니다.

언제든지 사랑함으로만이 자유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버리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자기의 생을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수고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맺어지는 아름다운 열매를 보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일생을 피아노 공부하는데 피아노를 아주 열심히 쳤습니다. 피아노를 계속 쳐 나갔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까 손이 말을 안 들어서 낙심합니다. 한계가 온 것이라고 죽고 싶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어야지" 그랬습니다.

여러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피아노를 잘 치고 기뻐했습니다. 많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기뻐했을는지 모릅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을 잘 가르쳐 놓고 내 제자가 박수를 받을 때에 기뻐하는 두 번째의 기쁨도 알아야 합니다. 어찌 이 음식을 내가 먹어야 됩니까. 다른 사람에게 잘 먹이고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그 재미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수고합니까? 내 수고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얻고, 내 손해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내 희생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진다고 할 때에 그것을 내 생명, 내 이득처럼 기뻐할 줄 아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차원 높은 행복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아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가 있겠는데 잘못하면 그러지 못한 때가 있습니다. 나도 손해보고 다른 사람도 손해봅니다. 내가 손해본다고 그 누구도 이익 보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한 일을 허무라고 합니다. 헛된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피곤합니다.

나도 손해보고 다른 사람도 손해보는 상징적인 예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겠습니까? 담배 피우는 것입니다. 나도 몸에 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약간은 해롭고, 아무도 이로운 자가 없습니다. 내 몸에는 해롭고 다른 사람의 몸에도 해로운데 어떤 사람은 이 일은 꼭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불쌍한 사람이지요. 담배를 끊지 못합니다. 백해 무익한데 절대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거리가 세상에 많습니다. 내게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로워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꼭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불행이라는 겁니다. 이게 허무입니다. 적어도 내가 손해를 보니까 그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야지요. 내가 울음으로써 다른 사라에게 웃음이 돌아가야지요. 내가 희생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이 돌아가야지요. 그럴 수 있는 수고라야 의미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처럼, 이방 사람에게는 이방 사람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로 나타났습니다. 요새 말로 말하면 체통이 없습니다.

체통은 없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요새는 주체성은 있는데 목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체성을 잃었습니다. 체통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얻었습니다. 뚜렷한 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행복했습니다.

그는 무능자가 되고, 무력자가 되고, 여러 모양의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목적의식은 분명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됨으로써 저쪽이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종이 됨으로 저쪽이 주인이 되고, 내가 처절해짐으로 저쪽에 영광이 돌아갑니다. 내가 죽음으로 저쪽에 삶이 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는 그 희생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코자 하고 얻고자 하는 복음적인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그는 스스로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복음 전파에 목적을 둔 사람, 복음 전파에 목적을 둔 직업, 그리고 그 생업이 얼마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일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입니까? 남들이 나를 칭찬하느냐 멸시하느냐 입니까? 그것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다 칭찬 받아 봐도 허무한 것이요, 멸시를 받아도 흔적이 남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 목적은 생명을 구원하는 데만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진실한 생의 목적을 오늘 세워야 하겠습니다.

영원히 헛되지 않는 일, 복음에 참여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자기 생을 쏟아 나가는 일처럼 보람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종이 되십시다. 그래야 주인이 될 것입니다. 내가 아깝지 않게 수고를 하십시다. 이 수고 뒤에 영광이 올 것입니다.

내 엄청난 희생을 그대로 지불할 때 그 어디인가에 생명의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이 영광과 긍지에 사는 귀한 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 사랑하시는 주님, 허무와 아무 의미도 없는 이 절망에 허덕이는 생을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오늘도 주의 말씀으로 훈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의 수고가 반드시 어딘가에 열매가 있는 수고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인내가 장차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이 되게 해 주시고, 내가 손해봄으로 그 누군가에 이득이 반드시 있어질 수 있는 이러한 수고를 하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우리는 수고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게 하시고, 희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복음의 그 거룩한 역사에 가담된 긍지를 가지고 하나의 썩어지는 밀알로 자기를 땅에 심고 자기를 죽여 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기다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시간 시간 새 믿음을 주시고 그리고 그 모든 희생과 수고 위에 아름다운 열매와 영광을 드리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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