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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만 하라(마가복음 5:34-43)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서 헌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보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어느 장군의 아홉 살 난 귀여운 딸이 밖에 나가 놀다가 낯선 손님으로부터 선물을 하나 받아들고 자기 아버지 앞에 가서 자랑을 했습니다. 그 선물은 보석 상자였습니다.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고 이 아이에게 그 보석 상자를 내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울먹이면서 아버지가 언제 이렇게 좋은 선물을 내게 주어 봤느냐고, 이걸 왜 버리라고 하느냐고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또 그것을 믿을 수 있지?" "그래요" "그렇다면 내 말대로 내다 버려라." 아버지의 권고를 듣고 이 아이는 결국 이 상자를 밖에 내다 버리고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그 상자가 꽝 하고 터지는 폭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은 그 장군을 살해하기 위해서 어린아이의 손에 들려 들여보낸 시한폭탄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당하게 됩니다. 꼭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꼭 버려야 할 것이지만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버리지 못해서, 어떤 때는 끊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또 울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돈이 좀 있으면 돈을 의지하고, 건강이 있으면 건강을, 지혜가 있으면 지혜를, 그리고 젊음이 있으면 젊음을, 어쨌든 인간적인 가진 바 그 무엇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시원치 않고 순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는 그릇입니다. 이 그릇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이 그릇이 없이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물리적으로는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믿음이 없는 한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가 은혜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축복이 축복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 믿음은 꼭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은혜가 은혜 되고 축복이 축복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그릇이 상처가 났습니다. 병들었습니다. 또 어떤 정신적 공해로 인하여 더러워졌습니다. 어떤 때는 이 그릇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식만 남아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담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지 못하고 은혜가 은혜 될 수 없는 그런 깨어진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D뭆TXT部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실 때 그 하신 말씀 가운데에서 공통적으로 몇 마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도 나타난 대로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으니 딸아 평안히 가라" 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하여 그의 믿음을 지적한 말씀이 있고, 또 "그 믿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고쳐 주셨다" 하는 말씀이 있고, 또 "믿음이 크다"고 한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네 믿음이 위대하다. 그런고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칭찬한 그런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하면 마태복음 8:10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 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극찬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만한 믿음." 그 위대한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의 소원을 들어 주신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 믿음, 이 믿음의 그릇이 있고야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또 그 믿음의 크기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시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이로의 믿음, 이것은 전형적인 지성인의 믿음이라고 제 나름대로 생각해봅니다. 그의 동기와 그의 시작과 그의 과정과 그 믿음의 결과와 그 믿음의 성격이 철저하게 지성인적입니다.
지성인의 바로 그것입니다. 지성인을 자처하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도대체 지성인의 신앙이란 것이 어떤 것일까? 오늘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라고 그 직명을 밝혔습니다. 회당장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속에는 이 회당이라는 것이 생활의 중심이 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라고 하겠지만 교회보다 휠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선민의 공동체에서 생활 중심의 터전입니다. 이래서 이곳은 예배도 드리고 여기서 공부도 합니다. 그러니까 공회당도 되고 회당도 되고 학교도 되고 예배당도 됩니다. 종교, 정치, 문화의 센타가 회당입니다. 이런 중요한 회당의 그 모든 행사를 주관하는 것이 장로님들입니다. 이 장로님D뭆TXT&들의 회의에 회장이 회당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야이로는 지위가 높은 사람입니다. 명예가 있고 권세가 있으면 좀더 나아가서는 많은 사람들의 높은 존경을 받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께 나왔습니다. 예수께 나왔다고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네 믿음이 크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그러한 믿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믿음들이냐 하면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성경 말씀에 의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러한 구체적이고 확실한 신앙의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 나아가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이래서 지붕을 뚫고 예수를 만나려고 하는 한 환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또 옷자락을 만지는 여인, 많은 군중 속에서 어쨌든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만 만날 길이 없어서 마침내 예수님의 옷자락을 두려움 가운데 만지는 이 한 여인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 믿음이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나아갔다고 하는 자체가 중요합니다. 오늘로 말하면 교회에까지 나왔다는 말입니다. 교회까지 들어서는 것이 아주 중요한 믿음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많은 말로 간구했다 했습니다.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서 23절을 읽으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했습니다. "많은 말로 간구했다." 헬라 원문으로 보아도 말을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D뭆TXT,
원래 지성인이란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야이로도 무얼 꼭 오셔야 되겠습니까, 그저 그래줘야 되겠습니다고 말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여러 말로 간절히 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선 중요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의 지성의 결과입니까? 그의 철학의 결과입니까? 그의 명상의 결과입니까? 그의 종교심의 결과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의 덕성과 그의 인격과 인품에서 나온 그러한 신앙이나 행위가 아니었더란 말입니다. 누구의 권면을 받은 것도 아니고, 누구의 강권에 끌려서 교회에 나온 것도 아니었더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나온 것 같으나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성인이 대개 그렇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사건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사건입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사건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지성인들이 교회에 나왔다 하면 알 만합니다. 하나님이 손을 본 것이지요. 자기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도약의 사건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지성입니다.
열두 살 된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속으로는 열두 살부터가 성인입니다. 열두 살이 되면 모든 성인의 의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제 모처럼 잘 키워서 성인이 되는 바로 이 마당에 이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야이로는 자기의 선입관과 편견을 다 버리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됐습니다.
편견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 전에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성인은 모든 일에서 확인을 필요로 합니다. 좀더 생각해보고 좀더 따져보고 행동하는 것이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딸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D뭆TXT긝그런가 하면 경험 전에 판단하는 교만을 가진 것이 지성인입니다.
그래서는 해 보지도 않고 된다, 안 된다, 필요하다, 필요없다는 식으로 미리 다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고민도 많고 걱정거리도 더 많으며, 또 용기도 없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더 이상 편견을 가지고 시비를 벌일 겨를이 없었습니다. 딸이 죽어 가니까요. 자기의 편견으로는 우선 갈릴리 청년, 초라한 30세의 청년 앞에 위엄있는 회당장이 무릎을 끓는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런 편견을 가지고 시비할 때가 못 됩니다.
또한 그 갈릴리 청년은 율법을 거역한 자, 안식일을 범한 자라는 좋지 못한 평판이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개의할 시간이 못 됩니다. 예수께서 고쳐 주실 수 있을까 없을까,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도 더 이상 물어 볼 겨를이 없습니다.
또한 극복해야 할 어려운 것은 바로 위선과 체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발 앞에 가서 엎드려 많은 말로 간구했다 했습니다. 아주 체면 불구한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은 아람의 장군이었습니다.
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서 결국은 자기 집에 있는 이스라엘 하녀 한 사람의 충고를 받아서 원치 않지만 일단 사마리아로 가서 선지자 엘리사를 만납니다. 찾아가서 위엄있게 내가 왔노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사 선지는 나와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내세워서 가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 나아만 장군은 몹시 불쾌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가버립니다. 가는 중에 그 신하 한 사람이 말하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래도 할 터인데 목욕해 보고 볼 것이지 안 그러느냐고 합니다. 체면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하는 말에 따라 그는 목욕을 하고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D뭆TXTuS이 체면과 위신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은 예수를 꼭 믿을 것 같은 분입니다. 교회에서 심방을 가 보면 갈 때마다 꼭 같이 앉아 예배를 드리는 분인데 교회를 못 나온다는 말입니다. 늘 두고 두고 권면하다가 또 한번 권면해 봤지요. "교회에 나오십시오" 그랬더니 그 분 대답이 "나 며칠이나 나가면 장로 줄랍니까?" 어째서 그러냐고 했더니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어쩌다가 제 아내가 먼저 나가기 시작해서 아내가 지금 권사입니다. 내가 남자 체면에 장로는 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남자들의 이 멋없는 것 보십시오. 가만히 보면 이 체면 때문에 내가 먼저 나간다면 모르지만 아내의 손에 끌려 나갈 수는 없잖냐, 이래서 예수 못 믿는 남자도 많답니다. 이것 참 답답한 얘기지요. 그 변변치 않은 체면, 위신 때문에 엄연히 해야 될 일을 못하고, 끊어야 할 일을 끊지 못하는 맹랑한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어찌 구원의 문제를 여기에 비교할 것입니까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손을 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힘이 듭니다.
사람의 체면, 위신을 벗어 버린다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 시간이 와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때로 제게 부탁을 많이 합니다. 목사님 제 아들, 제 남편을 만나서 권면해 주세요. 해도 잘 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나서 말해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저 하나님이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프라이드, 이 자존심, 이런 것들을 깨끗이 벗어 버려야 되는데 이것이 이렇게 힘이 듭니다. 오늘 이 사람은, 이 야이로는 예수님께 나옴으로써 친구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을 때 그 주위의 친구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딸이 죽으면 죽었지 그래 당신의 위신으로 우리 이스라엘 종교의 이 위엄을 가지고 갈릴리 청년 앞에 무릎을 끓으면 어쩐다는 거요?"
D뭆TXT?역시 절박성은 본인만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친구를 잃어버리고 자기의 모든 체통을 잃어 버릴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는 이것을 극복하고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끓고 간구하였습니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지금 집으로 갑니다. 초조하게, 죽지 전에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부지런히 가는 중에 소식이 왔습니다. 한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의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세요 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야 합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정말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모처럼 큰 희생을 하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인데 여기서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는 초조했습니다. 23절에 보면 "죽게 되었으니 와 주세요" 했는데, 재촉 재촉 하면서 가는 길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그 일로 인하여 이 환자를 고쳐야 했고, 이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이 좀 지체되어서 자기 어린 아이가 죽기 전에 예수님과 만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회를 놓쳤습니다. 아마도 이 지체된 일 때문에 몹시 원망스럽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여인이 원망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 때문에 우리 딸이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분하고 그리고 몹시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이제 인간들의 인간적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서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지적 판단과 경험적 판단에 의한 가능성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기다릴 뿐입니다. 주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한 의사, 한 유능한 의사를 모시려고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고백해야 하는 단계D뭆TXT?에 왔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는 의사를 모셔 가던 중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는 그리스도로 고백해야만 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를 믿어야 할 이런 단계에 왔습니다.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내 사정을 돕는 분만이 아니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끄시는 참 생명의 주인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 11:32 이하에 보면 나사로라는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누이 동생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좀 오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안 가셨습니다. 그런 중에 이 나사로는 죽었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뒤에 예수님께서 오시니 마르다와 마리아가 따라 나가서 동구 밖에서 예수님을 만나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신앙입니다. 인간적 신앙입니다.
37절에 보면 우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지 않게 할 수 없더냐?" 그러나 4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 과정도 마음에 안 들고, 그 타이밍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방법도 석연치 않습니다. 그러나 믿어야 했습니다. 죽지 않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습니다. 병들지 않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부활시키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를 보고 잔다고 하시는 그 예수님, 실패하지 않게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다 죽은 다음에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오히려 그 속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내 마음은 그리고 내 믿음은 어디로서 온 것입니까? 어디까지 믿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정한 한계가 어딥니까? 된다는 말, 안 된다는 말이 다 어디 근거한 것입니까? 행복하다 불행하다가 어디 근거한 것입D뭆TXT,
니까?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가 다 누가 한 말입니까? 우리는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엄청난 말씀을 믿을 때 새로운 기적을 볼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모처럼 자존심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이기고 여기까지 왔는데 들려 오는 소식은 절망뿐입니다. 우리에게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죽었다는 얘기뿐이요, 끝났다는 얘기만 들려 옵니다. 그러나 고요히 옆에서 들려오는 또 하나의 음성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깨끗한 마음으로 내 이성적 비판, 지성적 비판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기도 : 아버지 하나님, 모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들을 다 극복하고 이기고 주님 앞에 나왔사오나 믿음대로, 믿음을 따라 살고자 애썼지만 이제 우리 앞에 들려오는 소식은 또 절망된 소식뿐이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은 소식뿐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 야이로처럼 길에서 주춤거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이대로 믿고 이대로 받아들여서 죽은 자가 사는 것 같은 놀라운 기적을 낳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믿기만 하라(마가복음 5:34-43)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서 헌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보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어느 장군의 아홉 살 난 귀여운 딸이 밖에 나가 놀다가 낯선 손님으로부터 선물을 하나 받아들고 자기 아버지 앞에 가서 자랑을 했습니다. 그 선물은 보석 상자였습니다.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고 이 아이에게 그 보석 상자를 내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울먹이면서 아버지가 언제 이렇게 좋은 선물을 내게 주어 봤느냐고, 이걸 왜 버리라고 하느냐고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또 그것을 믿을 수 있지?" "그래요" "그렇다면 내 말대로 내다 버려라." 아버지의 권고를 듣고 이 아이는 결국 이 상자를 밖에 내다 버리고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그 상자가 꽝 하고 터지는 폭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은 그 장군을 살해하기 위해서 어린아이의 손에 들려 들여보낸 시한폭탄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당하게 됩니다. 꼭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꼭 버려야 할 것이지만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버리지 못해서, 어떤 때는 끊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또 울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돈이 좀 있으면 돈을 의지하고, 건강이 있으면 건강을, 지혜가 있으면 지혜를, 그리고 젊음이 있으면 젊음을, 어쨌든 인간적인 가진 바 그 무엇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시원치 않고 순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는 그릇입니다. 이 그릇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이 그릇이 없이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물리적으로는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믿음이 없는 한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가 은혜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축복이 축복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 믿음은 꼭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은혜가 은혜 되고 축복이 축복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그릇이 상처가 났습니다. 병들었습니다. 또 어떤 정신적 공해로 인하여 더러워졌습니다. 어떤 때는 이 그릇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식만 남아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담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지 못하고 은혜가 은혜 될 수 없는 그런 깨어진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D뭆TXT部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실 때 그 하신 말씀 가운데에서 공통적으로 몇 마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도 나타난 대로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으니 딸아 평안히 가라" 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하여 그의 믿음을 지적한 말씀이 있고, 또 "그 믿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고쳐 주셨다" 하는 말씀이 있고, 또 "믿음이 크다"고 한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네 믿음이 위대하다. 그런고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칭찬한 그런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하면 마태복음 8:10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 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극찬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만한 믿음." 그 위대한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의 소원을 들어 주신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 믿음, 이 믿음의 그릇이 있고야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또 그 믿음의 크기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시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이로의 믿음, 이것은 전형적인 지성인의 믿음이라고 제 나름대로 생각해봅니다. 그의 동기와 그의 시작과 그의 과정과 그 믿음의 결과와 그 믿음의 성격이 철저하게 지성인적입니다.
지성인의 바로 그것입니다. 지성인을 자처하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도대체 지성인의 신앙이란 것이 어떤 것일까? 오늘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라고 그 직명을 밝혔습니다. 회당장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속에는 이 회당이라는 것이 생활의 중심이 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라고 하겠지만 교회보다 휠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선민의 공동체에서 생활 중심의 터전입니다. 이래서 이곳은 예배도 드리고 여기서 공부도 합니다. 그러니까 공회당도 되고 회당도 되고 학교도 되고 예배당도 됩니다. 종교, 정치, 문화의 센타가 회당입니다. 이런 중요한 회당의 그 모든 행사를 주관하는 것이 장로님들입니다. 이 장로님D뭆TXT&들의 회의에 회장이 회당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야이로는 지위가 높은 사람입니다. 명예가 있고 권세가 있으면 좀더 나아가서는 많은 사람들의 높은 존경을 받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께 나왔습니다. 예수께 나왔다고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네 믿음이 크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그러한 믿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믿음들이냐 하면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성경 말씀에 의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러한 구체적이고 확실한 신앙의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 나아가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이래서 지붕을 뚫고 예수를 만나려고 하는 한 환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또 옷자락을 만지는 여인, 많은 군중 속에서 어쨌든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만 만날 길이 없어서 마침내 예수님의 옷자락을 두려움 가운데 만지는 이 한 여인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 믿음이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나아갔다고 하는 자체가 중요합니다. 오늘로 말하면 교회에까지 나왔다는 말입니다. 교회까지 들어서는 것이 아주 중요한 믿음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많은 말로 간구했다 했습니다.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서 23절을 읽으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했습니다. "많은 말로 간구했다." 헬라 원문으로 보아도 말을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D뭆TXT,
원래 지성인이란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야이로도 무얼 꼭 오셔야 되겠습니까, 그저 그래줘야 되겠습니다고 말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여러 말로 간절히 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선 중요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의 지성의 결과입니까? 그의 철학의 결과입니까? 그의 명상의 결과입니까? 그의 종교심의 결과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의 덕성과 그의 인격과 인품에서 나온 그러한 신앙이나 행위가 아니었더란 말입니다. 누구의 권면을 받은 것도 아니고, 누구의 강권에 끌려서 교회에 나온 것도 아니었더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나온 것 같으나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성인이 대개 그렇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사건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사건입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사건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지성인들이 교회에 나왔다 하면 알 만합니다. 하나님이 손을 본 것이지요. 자기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도약의 사건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지성입니다.
열두 살 된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속으로는 열두 살부터가 성인입니다. 열두 살이 되면 모든 성인의 의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제 모처럼 잘 키워서 성인이 되는 바로 이 마당에 이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야이로는 자기의 선입관과 편견을 다 버리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됐습니다.
편견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 전에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성인은 모든 일에서 확인을 필요로 합니다. 좀더 생각해보고 좀더 따져보고 행동하는 것이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딸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D뭆TXT긝그런가 하면 경험 전에 판단하는 교만을 가진 것이 지성인입니다.
그래서는 해 보지도 않고 된다, 안 된다, 필요하다, 필요없다는 식으로 미리 다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고민도 많고 걱정거리도 더 많으며, 또 용기도 없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더 이상 편견을 가지고 시비를 벌일 겨를이 없었습니다. 딸이 죽어 가니까요. 자기의 편견으로는 우선 갈릴리 청년, 초라한 30세의 청년 앞에 위엄있는 회당장이 무릎을 끓는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런 편견을 가지고 시비할 때가 못 됩니다.
또한 그 갈릴리 청년은 율법을 거역한 자, 안식일을 범한 자라는 좋지 못한 평판이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개의할 시간이 못 됩니다. 예수께서 고쳐 주실 수 있을까 없을까,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도 더 이상 물어 볼 겨를이 없습니다.
또한 극복해야 할 어려운 것은 바로 위선과 체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발 앞에 가서 엎드려 많은 말로 간구했다 했습니다. 아주 체면 불구한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은 아람의 장군이었습니다.
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서 결국은 자기 집에 있는 이스라엘 하녀 한 사람의 충고를 받아서 원치 않지만 일단 사마리아로 가서 선지자 엘리사를 만납니다. 찾아가서 위엄있게 내가 왔노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사 선지는 나와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내세워서 가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 나아만 장군은 몹시 불쾌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가버립니다. 가는 중에 그 신하 한 사람이 말하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래도 할 터인데 목욕해 보고 볼 것이지 안 그러느냐고 합니다. 체면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하는 말에 따라 그는 목욕을 하고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D뭆TXTuS이 체면과 위신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은 예수를 꼭 믿을 것 같은 분입니다. 교회에서 심방을 가 보면 갈 때마다 꼭 같이 앉아 예배를 드리는 분인데 교회를 못 나온다는 말입니다. 늘 두고 두고 권면하다가 또 한번 권면해 봤지요. "교회에 나오십시오" 그랬더니 그 분 대답이 "나 며칠이나 나가면 장로 줄랍니까?" 어째서 그러냐고 했더니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어쩌다가 제 아내가 먼저 나가기 시작해서 아내가 지금 권사입니다. 내가 남자 체면에 장로는 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남자들의 이 멋없는 것 보십시오. 가만히 보면 이 체면 때문에 내가 먼저 나간다면 모르지만 아내의 손에 끌려 나갈 수는 없잖냐, 이래서 예수 못 믿는 남자도 많답니다. 이것 참 답답한 얘기지요. 그 변변치 않은 체면, 위신 때문에 엄연히 해야 될 일을 못하고, 끊어야 할 일을 끊지 못하는 맹랑한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어찌 구원의 문제를 여기에 비교할 것입니까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손을 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힘이 듭니다.
사람의 체면, 위신을 벗어 버린다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 시간이 와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때로 제게 부탁을 많이 합니다. 목사님 제 아들, 제 남편을 만나서 권면해 주세요. 해도 잘 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나서 말해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저 하나님이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프라이드, 이 자존심, 이런 것들을 깨끗이 벗어 버려야 되는데 이것이 이렇게 힘이 듭니다. 오늘 이 사람은, 이 야이로는 예수님께 나옴으로써 친구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을 때 그 주위의 친구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딸이 죽으면 죽었지 그래 당신의 위신으로 우리 이스라엘 종교의 이 위엄을 가지고 갈릴리 청년 앞에 무릎을 끓으면 어쩐다는 거요?"
D뭆TXT?역시 절박성은 본인만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친구를 잃어버리고 자기의 모든 체통을 잃어 버릴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는 이것을 극복하고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끓고 간구하였습니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지금 집으로 갑니다. 초조하게, 죽지 전에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부지런히 가는 중에 소식이 왔습니다. 한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의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세요 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야 합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정말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모처럼 큰 희생을 하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인데 여기서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는 초조했습니다. 23절에 보면 "죽게 되었으니 와 주세요" 했는데, 재촉 재촉 하면서 가는 길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그 일로 인하여 이 환자를 고쳐야 했고, 이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이 좀 지체되어서 자기 어린 아이가 죽기 전에 예수님과 만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회를 놓쳤습니다. 아마도 이 지체된 일 때문에 몹시 원망스럽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여인이 원망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 때문에 우리 딸이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분하고 그리고 몹시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이제 인간들의 인간적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서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지적 판단과 경험적 판단에 의한 가능성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기다릴 뿐입니다. 주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한 의사, 한 유능한 의사를 모시려고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고백해야 하는 단계D뭆TXT?에 왔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는 의사를 모셔 가던 중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는 그리스도로 고백해야만 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를 믿어야 할 이런 단계에 왔습니다.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내 사정을 돕는 분만이 아니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끄시는 참 생명의 주인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 11:32 이하에 보면 나사로라는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누이 동생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좀 오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안 가셨습니다. 그런 중에 이 나사로는 죽었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뒤에 예수님께서 오시니 마르다와 마리아가 따라 나가서 동구 밖에서 예수님을 만나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신앙입니다. 인간적 신앙입니다.
37절에 보면 우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지 않게 할 수 없더냐?" 그러나 4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 과정도 마음에 안 들고, 그 타이밍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방법도 석연치 않습니다. 그러나 믿어야 했습니다. 죽지 않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습니다. 병들지 않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부활시키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를 보고 잔다고 하시는 그 예수님, 실패하지 않게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다 죽은 다음에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오히려 그 속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내 마음은 그리고 내 믿음은 어디로서 온 것입니까? 어디까지 믿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정한 한계가 어딥니까? 된다는 말, 안 된다는 말이 다 어디 근거한 것입니까? 행복하다 불행하다가 어디 근거한 것입D뭆TXT,
니까?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가 다 누가 한 말입니까? 우리는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엄청난 말씀을 믿을 때 새로운 기적을 볼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모처럼 자존심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이기고 여기까지 왔는데 들려 오는 소식은 절망뿐입니다. 우리에게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죽었다는 얘기뿐이요, 끝났다는 얘기만 들려 옵니다. 그러나 고요히 옆에서 들려오는 또 하나의 음성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깨끗한 마음으로 내 이성적 비판, 지성적 비판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기도 : 아버지 하나님, 모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들을 다 극복하고 이기고 주님 앞에 나왔사오나 믿음대로, 믿음을 따라 살고자 애썼지만 이제 우리 앞에 들려오는 소식은 또 절망된 소식뿐이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은 소식뿐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 야이로처럼 길에서 주춤거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이대로 믿고 이대로 받아들여서 죽은 자가 사는 것 같은 놀라운 기적을 낳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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