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자랑과 믿음(롬3:19~31)
오늘의 본문 가운데에는 자랑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 그 자랑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하는 이 확실한 교리를 수락할 때에 우리는 세 가지를 뒤따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자랑이 무너지는 데에는 특권층이나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사람이나, 헬라사람이나, 이방사람이나, 선민이나 간에 구별이 없습니다. 인간의 자랑은 다 무너지고 말았기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또 율법 앞에 동일한 위치에 있게 됐다는 것이지요. 셋째는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에게 있어서 율법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랑이 다 무너졌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그 새로운 신분 속에서 율법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여기서 다른 의미의 높은 자랑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뒤따라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자, 이 교리 앞에는 어느 누구의 자랑도 있을 수 없다, 하고 본문은 말씀합니다(27절). 특별히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자랑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헬라어로 '라우케이시스'라고 하는 이 말은 바울서신에만 서른 다섯 번이 나옵니다. 특별히 고린도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자랑'에 대해서 제가 깊이 생각해본 일이 있습니다. 무엇을 자랑하고 있나, 나로서는 자랑이 없다, 그리스도로 자랑한다, 약한 것을 자랑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의 자랑이 되리라-이렇듯 '자랑'에 대한 바울 나름의 특별한 신학적 이론이 있습니다. 이 '자랑'이라고 하는 말은 원래 '가슴 벅찬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거, 이것이 자랑입니다. 그러니까 꼭 말을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마음에 충만해 가지고 있는 그런 기쁨, 그 근거가 되는 자랑, 이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막 소리를 지르고 싶은 그런 정도의 자랑의 자랑을 말합니다. 무릇 이 자랑이라는 가치판단으로부터 모든 생활의 가치가 생성되고, 또 해석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자랑 중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의가 빠지고 나면 자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의의 문제의 해결이 없는 자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좋은 물건을 가졌다고 합시다. 좋은 옷을 입었다고 합시다. 굉장한 재물을 지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너무도 자랑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도둑질한 물건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랑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거든요. 여러분, 똑같은 물건이지만 내가 돈주고 산 것은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선물로 받은 것이라야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런고로 이런 데에 신경 많이 쓰는 사람이 집에 돌아가면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들은 자기 부인들이 동창회에 가는 것을 아주 싫어한대요. 아내가 동창회에만 다녀오면 싸우자고 그러니까요. 왜 그런지 아세요? 자기 친구들이 남편으로부터 이런 선물, 저런 선물을 받았다고 잔뜩 자랑하는 모양을 보고와서는 "당신은 왜 나한테 이런 것을 안 해주는 거예요?"하고 따지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도 돈주고 사지." "사는 것하고 이것하고 같아요?" "그래? 그러면 내가 당장에 사주지." "진작 사줬어야지, 이제 다 지나갔는데 지금 사주는 것은 무효예요." 그러면 어쩌라는 말이에요? 그래 이게 지금 꼭 싸움거리가 된 거예요.
어쨌든 사람에게는 이런 '자랑'이 있는데 그 자랑은 의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사랑 받는다 하는 것이 최고의 자랑입니다. 의롭다 하는 것이 가장 높은 자랑입니다.
그러니까 번영, 형통, 성공, 부귀, 영화… 다 있어보았자 의가 없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의가 없는 번영, 의가 없는 영광은 그 자체가 자랑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것입니다. 의가 없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절대로 축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의의 문제인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의롭고자 하는 노력, 그것조차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죄지은 사람이, 이미 많은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 이제 와서 바로 살아보고자 애쓴다고 하더라도 자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조차도 악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이것은 마치 빚진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죄의 문제를 빚과 같은 것으로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빚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집을 지었다, 화려한 옷을 입었다, 요새 우리말로 좋은 자동차를 탔다, 그런데 빚을 많이 지고 사는 사람이다-그러면 이게 자랑거리가 됩니까?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에요. 또 남의 빚을 많이 지고 사는 사람이 그렇게 화려하게 살면 뒤에서들 욕할 거예요. '저 사람, 정신없구먼. 그게 자기 돈이야? 빚이 얼마나 많은데 저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이렇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합당한 충족 없이 행하는 모든 일들은 다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도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자신 스스로 만족해본다 해도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자기 영혼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요, 사람 앞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고로 자랑은 무너지고 맙니다. 보세요. 의가 있어야 됩니다. 의가 있고, 사랑이 있을 때만이 자랑이 성립되는 것이다-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한다면 이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받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고, 그리스도의 자랑을 내 자랑 없이 수용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어요.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 비유 가운데 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이제 탕감 받아서 감격한 마음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고 합시다. 그가 무슨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런고로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에게 그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권리, 자기 자랑을 내세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도 잘 아는 탕자 비유를 생각해보세요.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큰 영광을 누립니다. 이제 그에게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아버지가 그렇듯 영접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마는 자랑할 것은 못됩니다. 그는 이미 죄인이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 그리고 그가 행하는 선행, 이것은 절대로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내 인간적, 혹은 율법적 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내 자랑은 없다-절대로 자기를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죄인에게 무슨 자랑거리가 있어요? 세속적인 자랑을 완전히 포기하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쇠는 아무리 갈아도 금이 되지 않는다.' 쇠를 자꾸 간다고 해서 금이 되는 게 아니예요. 쇠는 쇠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자랑거리는 없습니다. 자랑을 완전히 부정하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는 제사의식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식 율법, 제사의식을 통한 율법,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뿐입니다. 주께서 내 죄를 사하여주시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용서받고 나서 내가 자랑할 것입니까? 이것은 전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은 너나할것없이 누구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율법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자랑을 깨끗이 부정하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여기에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사람이나 이방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율법을 압니다. 그러나 알면 무엇합니까? 행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모르고 행하지 못하나, 알고 행하지 못하나 마찬가지예요. 알고 행하지 않았다면 죄가 더 크지요. 예수님 말씀대로 '본다고 하기로 죄가 거지 있느니라'-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다 같은 죄인입니다.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또 율법적 전통, 전승, tradition 역시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어차피 율법을 행하지 못했고, 다 이루지 못한다고 할 때에 율법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 이방사람이나 유대사람이나 마찬가지 인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가진 그 책임은 오히려 복음을 만방에 전하는 선교적 사명이 있을 뿐이요, 자기들에게 무슨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한 분 뿐이요,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그 은혜 안에 살아갈 뿐입니다.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속에 자랑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차를 타려고 급하게 기차역에 나갔는데, 마침 너무 서두르느라 기차표를 잃어버렸습니다. 분명히 표를 사기는 샀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도저히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는 기차를 타려고 했습니다. 안에서 막습니다. "당신은 표가 없으니까 못 탑니다." "표가 있었는데요." "그러면 가져오세요." "내가 돈을 많이 내겠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내도 안됩니다." 이것 참 야단났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 명함을 내놓고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역무원은 조용히 대답합니다. "그것도 안됩니다." 보세요. 기차를 타는 데에는 오직 기차표 한 장, 그것만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과거의 것은 소용없어요. 현재 필요한 기차표, 이것을 내놓는 수밖에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탑니다만 똑같이 기차표 한 장씩 들고 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되고, 어떤 사람은 안되고, 그런 것 없어요. 기차표를 가졌으면 기차는 타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사람의 지위 여하, 누가 의롭고, 덜 의롭고… 그런 이야기가 아무 소용없어요. 하나님 앞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는 그 문제 앞에는 동일합니다.
여기에 특권의식이 없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유대사람이나 이방사람이나 다 동일하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율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의롭다 함을 얻었으니까)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31절)"-이것이 로마서 전반에 흐르는 맥락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율법 앞에서는 아무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도 '그러면 율법은 필요 없느뇨? 그런 게 아니다.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을 온전케 한다'고 말씀합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1절)"-이것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이해입니다. 바울의 특별한 율법관입니다. 율법에 있어서는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율법과는 관계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뜻에서 율법은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의미에서 율법은 소중한 것입니다. 율법이 있음으로 계속적으로 나의 나됨에, 나의 존재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그 동기가 율법의 의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사람의 일반적인 개념으로 볼 때에 이제 율법은 끝났어요.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받을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알게 할뿐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심판합니다. 때문에 이제는 도리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대로 사도 바울은 '도리어 굳게 세운다'하는 새로운 이론을 내놓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로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가 꼭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유대사람의 모든 법을, 할례서부터 제사드리는 법까지 유대사람들이 요구하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죄가 없으시다고 성경은 강하게 증거 합니다. 자,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일단 율법을 다 지키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재물이 되십니다. 그는 죄인이 아니십니다. 죽을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처럼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자, 죄인은 죽습니다. 죄 값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이 죽었습니다. 의인은 죽을 필요가 없거든요. 의인은 살고 죄인이 죽어야 하는데, 죄인이 죽는 게 아니라 의인이 죽었어요. 그 말은 죄인이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우 중요한 이론입니다. 의인이 죄인처럼 죽었기 때문에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이 두 가지로 이루셨습니다. 행함으로 이루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느냐-주께서 행하심과 주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D.L. 무디가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예배당이 그렇게 크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할 수 없이 '16살 이하는 예배당에 들어오지 말라'고 제한을 했습니다. 그래서 16살 이하의 아이들은 다 쫓겨나고 어른들만 예배당에 들어와 앉아 있었지요. 그런데 참 믿음이 좋은 12살 바기의 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무디 선생님의 귀한 말씀을 꼭 듣고 싶었지만 저도 어쩔 수 없이 쫓겨났지요. 그래 다른 아이들은 다 가버렸는데도 이 아이만은 예배당 문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어요. 이 모습을 지나가는 한 어른이 보고 물었습니다. "너, 왜 우느냐?" "제가 오늘 말씀을 곡 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아이들은 다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쫓겨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그 어른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내 옷자락을 단단히 붙들어라." "그래도 되는 거예요.?" "꼭 붙들기나 해." 아이는 그 어른의 옷자락을 붙들고 많은 사람들 틈에 비집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른이 바로 무디 선생님이었던 것입니다.
무디 선생은 "너는 여기 앉아라"하고 아이를 강대상 위에 떡 앉혀놓았어요. 아이는 그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디 선생은 그 아이를 예로 들어 설교를 합니다. "이 아이는 여기 들어올 수 없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내 옷자락을 붙들었기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드세요. 천당까지 들어갑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5년 후, 이 아이가 바로 그 교회의 목사가 됐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로서는 율법 앞에 설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의, 그 의를 힘입어서, 그를 붙들고,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온전케 하러 왔노라,'
가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봅니다. '예수믿음으로 구원얻었으니까 이제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 율법은 나와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을 온전케 해야 됩니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런고로 사도 바울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으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케 하고, 온전케 합니다. 율법의 본뜻을 찾아서 온전케 합니다. 율법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그런고로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의 진리를 가르쳐줌으로써,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사랑의 맥락을 통하여 오히려 율법을 이루게 됩니다. 율법을 따르게 됩니다. 율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아주 온전한 율법을 이루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온전히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리새적인 율법이나, 형식적인 율법이나,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율법이나,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그런 의미의 율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율법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어떻게 완성하느냐, 어떤 방법으로 완성하느냐-이제 성경은 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두려운 마음으로가 아니라,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살인하면 죽는다 하는 그 두려움 때문에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셔서 주신 말씀이요, 보호하시기 위해서 주신 율법입니다. 우리 생명을 사랑하시는, 생명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지켜주시는 거예요. 이는 생명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사랑하고, 내 생명을 사랑하고, 남의 생명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않아요. 이렇게 함으로써 형벌이 무서워서 율법을 지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뜻을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대만에 한번 갔었는데, 그곳 거리에는 소매치기가 없다고 그래요. 그래 제가 일부러 시험해봤어요. 패스포드에다 돈을 얼마 넣어 가지고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거리를 돌아다녀봤지요.
그런데 하루종일 복잡한 거리를 다녀보아도 없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택시기사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소매치기가 없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랬더니 택시기사의 말이 "그것 하나 훔치면 '킥'합니다"하더라구요. 도둑놈은 아예 죽여버렸대요. 손을 자르고, 목을 쳐버렸답니다. 몇 사람 치고 나니까 깨끗해지더랍니다. 그러니 이것, 두려워서 되겠습니까?
요새 자꾸 공공 벌칙요금이 높아집니다. 침 한번 뱉으면 얼마, 담배꽁초 버리면 얼마, 딱지를 떼도 비싸게 떼고… 이렇게 자꾸 벌칙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 벌이 무섭고, 형벌이 무섭고, 벌금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법을 지킨다--이게 얼마나 불완전한 것입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가서 이 모든 일이 다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고 지켜보세요. 이렇게 하니 깨끗해서 좋고, 이렇게 하니 모두 평화로워서 좋고, 안심하고 살 수 있어서 좋고… 이렇게 자발적으로 지키게 되어야 그게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벌이 무서워서 덜덜 떨며 지켜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고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율법은 유대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율법이 아닙니다. 두려워서도 아니요, 형벌 때문도 아닙니다. 구원 얻은 감사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 선행을 할 때에도 선행으로 인해 무슨 보상을 받겠다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은 내가 받은 바에 대한 조그마한 보답일 뿐입니다. 그런고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혹이라도 무슨 선한 일을 할 때에 칭찬 받으려고 하는 마음이나, 보상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결국은 선행이라는 것을 통해서 내 이름을 내고,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아요. 참으로 잘못하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북한에 다녀온 김찬삼이라는 분의 얘기를 듣고 저는 가슴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북한에서 몰래 돌아다니며 죽 구경하고 온 것을 발표했어요. 결국은 어떻게 됐느냐, 이 일 때문에 북한에서 수천 명이 죽었어요. 어디에 어느 마을이라고 지명까지 다나오는 바람에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다 죽었지요. 이런 사람 다녀갔는데 그것도 몰랐느냐, 해서 그곳의 지도자들, 당 간부들이 전부 숙청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저 보고 오면 됐지, 그것 얘기해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예요? 남 못사는 얘기가 그렇게 재미납니까? 보세요. 나하나 유명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선행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때때로 보면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 이름 내고 자랑하는데, 그러고 나면 남는 게 무엇입니까? 무엇을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박절하게 말씀하셨어요. 아주 딱 잘라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선한 일을 하고 칭찬을 받으면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이제는 다 끝난 얘기예요.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의 선행이란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깨끗하게 성경은 말씀합니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정말입니다. 제가 북한에 갔을 때에 그 사랑의 쌀, 좀 많이 보내줄 테니까 받으라고 그랬더니 저들이 이렇게 대답합디다. "성경에 그러던데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그런데 무엇 좀 주고 나서 요란하게 신문에 떠드는데, 안 받아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깨끗한 동기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아무리 율법적이라고 하지만 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선행을 한다면 그 선행도 율법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일만 율법을 이룬 것이 됩니다. 또, 자기 의를 이루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칭찬 받고 내 의를 세워서는 안됩니다. 가만히 보면 선한 일을 하는 것까지도 자기 고집대로만 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 이름을 내지 마세요. 정말로 선한 일이라면 찬송가 가사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그래야만 진짜 선한 거예요. 이스라엘사람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준 사람과 받은 사람, 둘 다 몰라야 그것이 선행이다.' 내가 주었어요. 그러나 내가 누구를 주었는지 몰라야 해요. 받은 사람 역시 내가 누구로부터 받았는지 몰라야 해요. 그것만이 진짜 선한 일입니다. "내가 누구한테 뭘 줬는데 인사가 없어. 그 사람, 도대체가 인사불성(人事不省)이야"-이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받은 사람이 준 사람을 알고 그에게 가서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되면 안 되는 것이에요.
이래서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지키는 율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율법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 지켜서 하늘나라에 가겠다는 것이 아니예요. 율법은 하늘나라 가는 사다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어요.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조건적이거나 불확실한 가운데서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예요. 율법 지켜서 내가 구원받을까 못 받을까, 가봐야 알지, 죽을 때가 돼봐야 알지, 지금은 모르겠다--이렇게 불안하게 지내는 게 아니예요. 이미 구원받았어요. 그 확실한 약속을 받고, 그리고 오늘 선한 일을 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지키고, 이렇게 이루어 가는 율법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의 가는 길은 오히려 율법을 온전케 하느니라.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자랑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고 엄청난 은혜를 살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해도 이것도 은혜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만 되는 일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사람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아무 자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율법을 지켜가기 때문입니다. 자랑은 없습니다.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받아서 감사하고, 주면서 감사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 감사하고, 의를 이루면서 감사하고, 심지어 때때로 우리가 실수를 해도 감사합니다. 왜요? 이렇게 실수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시니까 감사할 수 밖에요. 왜 이런 말이 있지요? 수학적으로 0(영)에다 아무리 0을 많이 붙어도 그것은 0입니다. 그러나 1을 써놓고서 여기에 0을 자꾸 붙이면 숫자가 계속 불어납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그 은혜 안에서 살 때에만이 그 모든 생활이 은혜와 감사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자랑은 없습니다.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자랑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만해질 뿐만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 그 은혜의 생활이 점점 더 윤택해지고 율법을 온전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평의 복 (롬5:1 ~ 5) (0) | 2023.02.26 |
---|---|
특권과 의무(롬2:1~16) (0) | 2023.02.26 |
선택적 신앙의 증거(사도행전 22:11~21) (0) | 2023.02.26 |
천국 백성의 길(사도행전 14:19~28) (0) | 2023.02.26 |
로마에 도착하는 바울(사도행전 28:7~15) (0) | 2023.0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