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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의 복 (롬5:1 ~ 5)
로마서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교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어떤 불쌍한 사람을 구제한다는 구제적인 의미만 있다든가, 병을 고친다든가, 사업의 형통을 꾀한다든가, 혹은 일신상의 소원을 성취한다든가, 하는 정도의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할 때에 구원은 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의의 문제다-여기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함을 얻게 될 때, 그의 모든 허물이 가리워집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부족한 것이 많아요. 실수도 많아요. 실제적으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것만 보아도 많은 허물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 하나로 인해서 의롭게 여기시고 나머지를 다 덮어주십니다. 그이 허물을 다 없는 것으로 도말해 버리십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 믿음 하나만을 귀히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의롭게 여기시는 동안 의인이 되고, 이로 말미암아 의인의 성격을 가지게 되고, 의인의 정체를 가지게 됩니다.
이 '의'는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순간, 과거에 잘못된 모든 것, 현재에 잘못된 모든 것도 덮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 용서하고, 다 도말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현재 오직 의인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나를 영접하신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의롭다 하심과 함께 의롭게 된 신분이기에 그 의롭게 된 신분에게 보장된 미래를 전망하게 됩니다. 미래가 약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런고로 의롭게 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자녀된 특권, 자녀된 바에 대한 미래적 약속, 이 결정적인 미래를 전망하게 됩니다. 그 약속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의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의인으로 대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에 따른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로 여기셨다, 나를 의인으로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네 죄사함 받았느니라"하고 말씀하실 때에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은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도 '글쎄올시다.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내 죄가 없어지겠습니까?' 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네 죄사함 받았느니라 하는 순간에 예수님께 죄사함 권세가 있다는 것을, 그가 내 죄를 대신 씻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되고, 그리고 나 자신의 죄사함 받았음을 믿어야 됩니다.
그런고로 두 번째로 나도 나 자신에 대하여 의인됨을 믿어야 됩니다. 여기서 자기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러한 귀중한 존재라고 하는 자기 존재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나는 소중합니다. 그런고로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 그 거룩한 존재됨을, 그런 존재된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울증 환자는 하나같이 자기를 미워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바로 우울증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자기 사랑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소중한 의미에서, 아주 깊은 의미에서 자기 사랑이 중요합니다.
굳이 오래 살겠다든가 그런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존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명분, 이 명예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고로 함부로 내어굴리고, 함부로 먹고,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함부로 잡된 생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왜요? 나는 소중한 신분의 사람이니까요. 현재가 그렇고, 미래도 그렇습니다. 때문에 언제나 자기 사랑, 신령한 의미에서의, 신앙 안에서의 자기 사랑이 중요합니다. 라인홀트 리버는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절)."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라고 하고, 히브리말로는 '샬롬'입니다. 이 '샬롬'이라고 하는 관계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이웃과의 화목, 자기 자신과의 화목을 말합니다. "화평을 누리자"-여기서 누리자는 말은 영어로 enjoy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Let us enjoy the peace-화평을 즐겨야 되는 것입니다. 화평을 enjoy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다시 불화의 관계에 매이지 말고, 또다시 편협한 생각에, 혹은 자기 저주에, 절망의식에 붙들려서는 안됩니다. "화평을 누리자"-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자 함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화평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내가 의롭다 함을 얻었어요. 의롭다 함을 얻은 그 신분으로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으로 하나님 만나는 게 아닙니다. 의롭게 된 신분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종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사랑 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런 화평의 관계를 누리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평안이요, 기쁨이요, 감사요, 동시에 번영과 건강과 모든 형통을 다 포함하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린다'라는 말은 무엇이냐-먼저 화평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누린다는 것은 언제든지 깨달음과 동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졌더라도 그 돈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그 돈으로 인한 기쁨은 없어요. 그 돈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좋은 신분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내가 복되다고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 신분을 누릴 수가 없어요. enjoy할 수가 없어요. 여전히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고로 이 '누린다'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화평을 누리자"--화평의 뜻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너무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엄청난 값을 지불해서 이루어진 화평이에요. 그런고로 화평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뜻을 극대화하고, 그 뜻을 점점 깊이 깨달아갈 때에 우리가 모든 문제를 즐겁게 화평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또하나, 화평된 것으로 인한 기쁨을 누려야 됩니다. 즐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행복하다--하나님을 대할 때나, 이웃을 대할 때나, 자기를 대할 때나, 과거․현재․미래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뻐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좋아요.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이 한 가지만을 가지고 충분히 그는 기뻐할 수 있어요. "화평을 누리자"-'이 기쁨이 충만해야 한다, 기뻐하자'함입니다.
또하나, 이제는 화평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화평한 관계에서 이해합니다. 설사 좀 어려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화평한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설사 내가 좀 병들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절대로 저주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내 죄를 책망하는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나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내게 주시는 시련일 뿐이요, 나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을 화평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절대로 저주의식을 가질 수가 없어요. 어떤 죽음을 만나도 그것 때문에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모두가 화평한 관계에서 맞는 일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화평한 관계에서 맞으면 모든 일이 다 좋습니다.
가끔 어떤 가정을 보면 참 좋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농담하다가 싸우는 집들이 많아요. 이는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평한 관계에서는 거북한 말을 해도 소화가 잘 됩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목사님 댁 에 갔는데 그 사모님이 미국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손수 된장찌개에 한식을 대접해주는 거예요. 아무튼 다같이 식사를 하는데 목사님이 사모님을 옆에다 두고 막 핀잔을 주었습니다. "된장찌개 할 줄도 모르면서 밤낮 된장찌개만 끓여요? 아니, 양부인이면 비프스테이크를 만들든지 하지 왜 굳이 할 줄도 모르는 한식을 갖추느냐 말이오." 그래도 사모님은 빙글빙글 웃으며 이런 말을 합니다. "조금 있다가 커피 드릴께요. 커피는 미국것이잖아요? 또 쿠기는 미국식으로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것 드릴께요." 저는 그 때에 가만히 지켜보았어요 '보통 가정에서 저렇게 핀잔을 주면 보나마나 터지는데, 무사하기 어려운데…'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사랑하니까, 화평하니까 그렇게 구박을 해도 그게 전혀 상관없더라구요. 하나도 상관없어요.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화평한 관계에서는 모든 것을 다 소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떡하니 비껴 있으면 조금만 건드려도, 또 칭찬을 해도 문제입니다. 마냥 서로 부딪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화평을 누리자"--화평 관계에서 모든 것을 소화해야 합니다. 정신병 환자는 적대감에 차 있습니다.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요. 적대감이 정신병을 만드는 거예요. 화평,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과의 화평, 샬롬을 즐기자 할 때에 우리가 모든 것을 화평한 관계에서 소화하고 이해하고, 화평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화평을 즐기자는 것은 소극적으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즐기자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화평이 능력을 생산합니다. 지혜를 생산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놀라운 역사를 나타냅니다. 보세요. 탕자가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아버지와 화평합니다. 아버지와 화평하는 그 순간에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는 다 잊어버렸어요.
형님이 질투하고 있다는 것도 개의치 않아요. 넉넉히 극복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와 화평했다고 하는 그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화평으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말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깊이 이해해야 됩니다. 화평이 얼마나 중요한가-화평하고야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그 유명한 성화, 성만찬 예식을 행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에 하필 돈 관계로 인해서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서로 치고, 때리고, 붙들고, 목덜미를 움켜쥐면서 격하게 충돌했는데, 보다못한 친구들이 이를 말렸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피가 나도록 싸웠을 것입니다. 아무튼 간신히 싸움을 말린 친구들이 이 둘을 억지로 붙들고 서로 화해하라고 시켰어요. 그래 어물쩡 "미안하다!"하고 적당히 화해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가 성만찬 속의 예수님을 그리는데, 아무리 그려도 안되는 거예요. 그렸다가 지우고, 그렸다가 지우고, 그렇게 며칠 동안 애를 썼지만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어요. 하려고 해도 안돼요. 마침내 그는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람이 재주 있는 손을 가졌다고 해서 동물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해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마음속에 진실로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없을 때에 나는 예술가가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없다.' 그는 이같은 이치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다시 돌아가서 그 다투었던 친구와 만나 진정으로 화해하고,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얼굴을 잘 그릴 수가 있었습니다.
자,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화해가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화해하고야 창작도 이루어지고, 정신적 능력은 물론 심지어 육체적 건강도 여기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병이 낫는다는 기적도 여기서 있는 것입니다. 속은 썩어 가지고 있는데 어찌 병이 낫겠습니까? 약을 먹는다고 병이 낫는 게 아닙니다. 오직 화평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정신도, 그 영혼도, 그 육체까지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놀라운 생산적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의 자녀 되는 관계-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화평은 생산적 능력이다, 혹은 창조능력이다, 라는 말도 하게 됩니다. 불화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피를 마르게 합니다. 증오라고 하는 것은 그 영혼을 비틀어져 죽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몸까지도 그렇게 만듭니다. 분명히 알 것입니다.
이제 이 화평의 관계에서 우리는 미래를 보게 됩니다. 이 화평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자에게 약속이 있어요. 이 바른 관계 속에 약속이 있습니다. 화평한 자는 먼 미래를 전망하게 됩니다. 저 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마음에 벌써 희망이 있어요. 소망이 눈앞에 다가옵니다. 그래서 영원한 복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화평이 바로 영원한 축복에 대한 sign으로 내 앞에 다가오게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절)"라고 말씀합니다. 화평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화평이 없는 사람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점점 죽음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합니다. 어두워집니다. 화평한 사람은 점점 세상이 멀어질수록 주님 앞에 가까이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그 마음이 열립니다. 하늘이 열리고, 미래가 열립니다. 그래서 영광을 바라고 저 앞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미래를 바라볼 수 있고, 약속된 영원한 세계를 확실하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그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현재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 지식은 달관적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매이는 게 아니라 전체를 봅니다. 또 어느 순간에 매이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저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출발점에서 골인 장소를 바라보는 거예요. 시작하면서 벌써 끝을 보는 거예요. 이것이 화평을 이룬 자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약속에 비추어 현재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달관된, 신앙적인 달관의식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니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4절)"라고 말씀합니다. 3절부터 보세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이루는 줄 앎이로다"-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알기 때문에, 미리 알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해도 즐거워합니다. 이는 환난의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절대로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당하는 시점에서, 혹은 환난 중에서 벌써 환난의 결과를 알고 있어요. 결과가 눈에 보여요. 그런고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얘기입니까? 그런데 화평이 없는 사람은 생각이 현재에 붙들리어서 현재밖에 는 못봐요. 죽을 지경이에요. 다 망했다, 다 쓰러졌다, 다 끝났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평의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그는 현재에서 미래를 봅니다. 환히 내다봐요. 결과를 미리 다 알고 있어요. 그런고로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어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다니… 이는 알기 때문이다'--무엇을 아는고 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아는 것입니다. 논리 정연합니다. 보세요.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환난은 화평한 자에게 주어지는 환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은 인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난은 인내를 만든다'-'휴퍼모네'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은 우리말로 번역하기에 조금 어렵습니다. 단순히 참는다는 뜻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억지로 버티고 견딘다는 말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괴롭게 견디는 그런 모습도 아닙니다. 이것은 순종하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그런 의미의 인내입니다. 그런 참음입니다. 적극적인 인내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피할 수도 있어요. 도망갈 수도 있어요. 그러나 도망가지 않아요. 왜요? 결과를 알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잘 참아야 저 앞에 상급이 있을 것이니까요. 그 결과를 알고 오늘을 참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망 중에서 참는 거예요. 약속을 받고 참는 거예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막연하게 인내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확실하게 결과를 알고 오늘을 참는 것입니다.
자, 이런 인내라면 어떻습니까? 환난이 좀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어요? 될 수 있으면 환난이 많은 게 좋지요. 그렇지 않아요? 결과만 분명하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걱정하느냐 하면 이렇게 참다가 아주 그냥 거꾸러지고 말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나 결과만 분명하다면 환난은 많이 당할 수록 좋아요. 본문의 인내는 그런 인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넉넉히 이기는 영을 뜻하는 것입니다. 인내의 영을 뜻합니다. 이것은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환난은 잘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생산합니다. 잘 참고 견디게 만들어줍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이 인내라고 하는 덕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높은 덕인 겸손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이 인내하게 합니다. 믿음이 참게 합니다. 그것이 인내를 나타나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할 때에 잘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고전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자장이라고 하는 제자가 잠깐 어디로 떠나면서 공자에게 여쭈었습니다. "원컨대 도를 닦고, 몸을 닦는 미덕이 될 길이 어디 있는지를 한마디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공자가 대답합니다. "모든 행실의 근본은 참는 데 있다. 참는 덕이 제일이니라." 자장은 다시 물었습니다. "어째서 참아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을 것이요, 제후가 참으면 땅이 커질 것이요, 벼슬아치가 참으면 그 지위가 올라갈 것이요, 형제가 참으면 집이 부유해질 것이요, 부부가 참으면 일생을 같이 해로할 것이요, 벗끼리 참으면 서로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요, 자신이 참으면 화나 해가 없을 것이니라." 참으로 공자다운 가르침입니다. 자장이 또 물었습니다. "만일에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간단하지. 천자가 참지 않으면 나라가 빈토로 화할 것이요, 제후가 참지 않으면 그 몸조차 없어질 것이요, 벼슬아치가 참지 않으면 법에 걸려 죽게 될 것이요, 형제가 참지 않으면 각각 곤고할 것이요, 부부가 참지 않으면 자식을 외롭게 만들 것이요, 벗끼리 참지 않으면 정의가 무너질 것이요, 자신이 참지 않으면 근심이 떠날 길이 없느니라." 자장이 대답했습니다. "아, 좋고도 좋으신 말씀입니다. 참는 것은 어렵고 어렵도소이다. 그러나 사람이 아니면 참을 수 없을 것이요, 참지 못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인내라고 하는 것, 그 인내의 결과를 아는 사람은 인내가 어려운 게 아니예요. 그런데 어째서 어려워지느냐, 인내의 결과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에 대한 믿음이 희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걸 참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 아무 의미도 없을 거야'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참기가 어려운 거예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환난에서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거기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하나,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연단'은 헬라어로 '도키메'라고 하는데 이것은 단단해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쇠붙이에 쓰는 말입니다. 불 속에다 쇠를 넣었다가 꺼내가지고 때립니다. 자꾸 때려서 강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제가 옛날에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에 큰 제철공장에 가서 일해보았는데 참 엄청납디다. 30톤이나 되는 큰 해머(hammer)가 공중에서 떨어집니다. 쇠붙이를 달구었다가 그 해머 아래로 갖다대면 그 쇳덩어리 해머가 증기로 올라갔다가 '쾅'하고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그곳에서 차를 타고 30분 갈 때까지의 넓은 지역 안에는 집을 못지어요. 자, 이렇게 자꾸 쇠를 때립니다. 그래가지고 더 강한 쇠를 만들어요. 이 강한 쇠를 어디에 쓰느냐고 물어보니 그것 가지고 쇠를 깎는다고 해요.
쇠를 깎는 쇠를 만드는 거예요. 그래 "왜 이렇게 때리면 강해지느냐"고 또 물었더니 그 설명이 재미있어요. 때리면 분자가 자꾸 가까이 결합된답니다. 쇠 속에도 여러 분자가 있는데 이 분자들의 간격이 좀 멀어요. 이것을 자꾸 때려 가지고 좁히는 거예요. 좁히고 또 좁히면 쇠가 강해진다고 해요. 간단합니다. 많이 맞은 쇠가 강해요. 더 얘기할 것 없어요. 많이 맞은 사람이 믿음이 좋아요. 그런고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룹니다. 욥기 23장 10절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시고 내가 그 많은 고통을 감당한 다음에 내가 귀한 금처럼, 그런 신앙적 인격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은사입니다. 그런고로 잘 참고 견뎌야 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보다 더 강한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튼튼한 믿음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되는 것 아는 사람은 즐거워할 수 밖에요.
또, 오늘의 본문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소망을 이룬다-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몰라요. 지금은 그런 법이 다 사라졌지만 옛날에 법이 잘 정해져 있던 서구사회에서는 이랬다고 해요. 딸이 시집을 갈 때에 친정어머니가 딸에게 무얼 주는고 하니, 진주를 하나 주었어요.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이 진주를 보라는 것이지요. 진주를 이름하여 frozen tears, 얼어붙은 눈물이라고 합니다.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여러분도 잘 아는대로 진주조개나 혹은 굴의 몸 속에 모래가 들어가요. 그래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 조개는 즙액을 분비합니다. 결국에는 그 즙액이 모래를 녹여버려요.
즙액을 내고 또 내고, 그렇게 해서 진주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고통스럽게 이 진주라고 하는 게 하나 생기는 거예요? 우리가 쉽게 목에 걸고 다니지만 진주는 이렇게 고통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런고로 어머니는 시집가는 딸에게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고 진주 하나를 주면서 "이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보아라. 그 과정이 있고야 이렇게 아름다운 진주가 탄생하는 것이다"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곧 참고 견디라는 얘기지요. 여러분,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하면 소망이라는 것이 평안한 가운데 이루어질 것 같지요? 그러나 평안한 가운데 있는 소망은 소망 자체도 너절합니다. 그래서 부잣집 아이들의 소망은 너절해요. "너 뭘 바라느냐?"고 물으면 "초콜렛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별것 없어요. 그런데 고통 당하는 자에게, 환난 중에 있는 자에게 있는 소망은 고상해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그런고로 연단은 소망을 생산합니다. 순수한 생산, 순수한 소망, 신령한 소망, 먼 미래적인 소망, 위대한 소망, 영원한 소망을 이룹니다. 특별히 순수한 소망을 이룹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 믿는 사람 사이에도 그 소망의 수준이 낮을 때가 있어요. 소원이 뭐냐 할 때에 그 대답은 언제나 세속적이에요. 그러나 많은 환난을 겪고 나면 그 소망이 점점 미래지향적이 되고, 신령한 것이 되고, 영원한 것이 됩니다. 이제 다른 것들은 다 소망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참으로, 정말로 소망할 것, 그것을 똑바로 가지게 됩니다. 이렇듯 소망이 순수해진다, 소망이 아주 높아진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반드시 이루도록 되어 있어요. 이 '이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이것을 깨닫고 있는 동안,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왜요? 환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저 결과를 미리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화목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를 도우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절)"-보세요. 성령으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이 도우세요. 가끔 쓰러질 때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십니다. 또 넘어질 때에도 성령이 일으켜주십니다. 성령이 힘을 주십니다. 어떻게?-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물 붓듯이 부어주심으로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도 사랑이구나, 저것도 사랑이구나-이렇게 깨닫기 시작할 때에 그는 다시 일어납니다. 넘어졌다가 또 일어나요. 약해졌다가 또 강해질 수 있어요. 그래서 본래부터 하나님이 품으셨던 그 귀한 뜻을 반드시 이루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화평과 함께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항상 이 신령한 은혜 속에 간증이 있는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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