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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의 진노(롬1:18~23)

by 【고동엽】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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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롬1:18~23)

 

 

오늘의 본문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학자 중에서 아마도 진노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한 신학자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루터 신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진노' 개념에 있다고 말합니다. Wrath of God--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크게, 얼마나 무섭게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그가 쓴 창세기 주석이나 혹은 로마서 주석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대로 사람들의 죄악 위에 내려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글 곳곳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또 설명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노 개념이 먼저 있고야 사랑이 사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진노가 있고야 은혜의 은혜 됨이 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그만큼 신앙과 신학을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신학이 곧 신앙이고, 신앙이 곧 신학으로, 그렇게 산 신학자가 별로 많지 않아요. 그저 신학은 신학대로 학문으로 연구하고, 신앙은 신앙대로 별도로 생각하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이 곧 신학이었고, 신학이 곧 신앙적 용기였습니다. 생명을 걸고라도 종교개혁을 단행할 만큼 큰 종교적 능력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진노에 기초한 확실한 신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별히 그가 로마서 주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한 것을 보면 이렇습니다. 인류가 저지른 모든 죄가 있고, 그 인류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그대로 예수님의 위에 ""하고 떨어질 때에 예수께서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견딜 수가 없음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진노 문제는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신학적 이해요 교리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세요. 그렇게 쉽게, 그저 무사히 보아넘길 수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까? 죄에 대한 그 벌이 3, 4대까지 내려가면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아요? 죄에 대하여, 그 행동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는 수천 대까지 내리시나 그 벌은 3, 4대까지 받게 하십니다. 본인이 벌을 받고, 또 그 자손이 벌을 받고…… 그 무서운 형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에게뿐만이 아니라 자연을 향해서도 엄청난 진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좀 의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 개념이라 할 때에 그 진노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다, 당치 않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느냐, 어떻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말이냐 함입니다. 하나님을 진노적 하나님으로 이해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는 해석이지요. 또하나,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노하실 수 있느냐 함입니다. 또 진노하실 뿐만 아니라, 순간이 아닌 영원 지옥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이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교파나 혹은 신학적 견해에서는 '아무리 지옥이 있다 하나 그저 유치장처럼 잠깐 있는 곳이리라'하고, 그렇게까지 억지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봅시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합니다. 현대신학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극대화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극소화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사랑의 이면으로만 소개하고자 해도, 이런 생각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하나님을 인간적 감정대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처럼 화를 내시겠느냐 함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해당되는 이 진노라 하는 용어를 하나님께까지 그대로 썼다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의인적(擬人的)이고,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구약은 물론 신약에서까지도 하나님의 진노를 확실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향하여, 인간들이 섬기는 우상을 향하여, 특별히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선민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나타납니다. 그 진노가 나타날 때에 그 결과로써 심판이 이루어지고, 재난이 있고, 홍수가 있고, 전쟁이 있고, 포로됨이 있고, 오욕이 있고, 질병이 있어서 사람들이 죽고…… 이런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여러 가지 사건도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의 일환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향하여, 특별히 숨겨진 죄악을 향하여, 특별히 스스로 정당화하는 죄악을 향해서 내려치십니다. 1차세계대전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신학자들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동안에 윤리문제로 치우치고, 사회문제로 치우치고, 심지어는 '이대로 50년만 흐른다며 성경이 휴지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을 만큼 교회가 타락하고, 무능해지고, 세속화했을 때, 특별히 신학이 세속화했을 때에 전쟁이 터졌습니다. 결국은 인간의 이성이 이렇고, 인간의 재주가 이렇고, 인간의 지혜가 이렇고, 인간들의 하는 짓이 이렇다, 하고 제 1차세계대전 이후에 모두가 회개하고, 특별히 신학자들 가운데 복음주의자들이 나타나서 여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다며 새로운 신학적 각성기를 가졌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앙의 기초에서 얻어지는,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할 때에 먼저 생각할 것이 '두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십니다. 불의를 용납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악을 용납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렇듯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의가 불의를 향하여, 악을 향하여, 혹은 죄를 향하여 나타나게 될 때에 공의의 계시로서 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것은 행동적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서만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역사 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격적이신 분이십니다. 더욱이 적극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로우시나 인간이 불의 합니다. , 멀리서 보고 팔짱을 끼고 기다리시기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심판해버리십니다. 곧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행동적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멀리서 바라보고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적극적이요, 계시적이요, 역사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진노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깊은 신앙에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공의로운 사랑의 계시입니다. 잘못된 것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바른 길로 인도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자녀들이 잘못한다 할 때에 그저 보고도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자식을 보고도 징계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다.' 보세요. 내 아들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어떻게 기다리기만 합니까? 무슨 방법으로든지 바른 길로 인도해야지요. 하나님의 공의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라 함은 생명의 근원이 그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부성애(父性愛)라고 하는 것은 진노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서 구체화한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길을 가로막아야 됩니다.

그 길로 못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이 사랑이지요.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적극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죄인에게는 진노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용서는 감상이 아닙니다. 그의 의로움이 진노와 함께 이루어져야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을 경험해보았습니까? 내가 잘못했을 때에는 차라리 한 대라도 맞아야 속이 시원해요. 부모가 때리지도 않고, 욕하지도 않고, 내 잘못을 알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면 오히려 점점 더 불안합니다. 차라리 "이것 잘못했지? 너는 맞아야 해!"라며 때리면, 그 다음에는 시원합니다. 내심 '맞았으니 이젠 됐다'합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잘못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 분명히 잘못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는지 모르는지 말도 없고, 행동도 없다--이것을 가리켜서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무관심은 가장 무서운 마지막 포기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에요. 이제는 버려진 사람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진노를 사랑으로 믿을 수 있을 때, 진노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구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에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상고하려면 먼저 117절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복음은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 의가 이제 죄인에게는 진노로 나타나게 된다 함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이 말씀과 연결해서 오늘의 본문을 생각해야 됩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의는 구원받는 자에게는 의로, 죄인에게는 진노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구원과 심판, 이것은 항상 동시적으로 역사 합니다. 한쪽으로 구원이 있는가 하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모습을 여러 가지로 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우리 생각 같아서는 이러이러한 것이 더 큰 죄일진대 하나님께서 좀 봐주시고 참아주시는 것이 있어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이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또 이사야서에 보면 이방사람들에 대해서도 심판하십니다. 두로에 대해서, 히돈에 대해서, 애굽에 대해서 계속 말씀을 하십니다. 따지고 보면 이방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죄 아닙니까?

우상 섬기고, 간음하고, 방탕하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오랫동안 봐주십니다. 기다려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정없이 내려치십니다. 그러면 어느 때에 진노하시느냐?--제가 하나님의 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진노하시나, 어느 때에 참지 못하시나, 어느 때에 심판하시나, 하고 상당한 시간을 두고 집중적으로 상고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봤더니 다른 데 있지 않아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겨도 하나님께서는 상당 기간 봐주십니다. 기다려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우상화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진노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길 때에도 상당 기간 참으십니다마는 하나님 당신을 우상화할 때에는 가차없이 내려치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이 우상 섬기고 사는 것은 그런 대로 기다리십니다.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에는 용서 없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우상 섬기는 방법으로 우상화해서 섬길 때에는 즉각적으로 진노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케이스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금송아지를 섬긴 일입니다. 저들은 본래 애굽에서 농업의 상징인 소를 섬기고, 송아지를 섬겼어요. 그러던 사람들이 이제 모세가 안보인다고 해서, 하나님 대신 모세를 바라보고 살던 사람들이 이제 모세가 안보인다고 해서,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래서 이 종교적인 심성을 모아놓기 위해서, 집약시키기 위해서, 응집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입니다. 그런데 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저들이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 모세도 없고, 하나님도 안보이니까 우리는 이제 금송아지나 섬기자"라고 아론이 말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다"--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망령되게도 금송아지를 보고 하나님을 빙자한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고 내려치십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요.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도 내버려두시면서 왜 믿는 사람인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내려치시고 이렇듯 민감하게 역사 하실까? 왜 그러실까?' 그러나 보세요.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될 때, 하나님의 이름을 향하여 인간이 도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8)"라고 말씀합니다. 진리를 막는 불경건,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를 향한 적극적인 악을 말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복음전파 하는 일을 가로막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사업을 가로막는 일, 이것은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억지 해석을 했습니다(누가복음 11). 그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도 이 때만큼은 저들에게 자비롭지 않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이여 서기관들이여"-----거기서는 현재적 심판을 해버리십니다. 이것이 진노입니다. 저들은 구원의 길을 다시는 얻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이런 능동적인 죄, 적극적인 죄, 하나님의 사업에 정면으로 대결해서 방해하는 이런 죄에 대해서는, 진리를 막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신다 함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19)"--이 신성을 부정할 때에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말씀은 1934년 에밀 브루노가 논문을 발표하고부터 자연신앙 논쟁에 중점이 되어온 부분입니다. 무슨 말인고하니, 당시 에밀 브루노와 칼 바르트는 엄청나게 많은 논문을 가지고 서로 변론을 벌였습니다. 에밀 브루노의 입장에서는 '사람은 타락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을 알만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그런 신성(神性)이 사람에게 남아 있다'며 자연신론의 가능성을 상당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입장에서는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로만 하나님을 알기도 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제가 1964년에 이 두 사람이 쓴 논문을 다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읽어보니, 3자의 입장에서 저는 '서로서로 악수 한번 하면 될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듭디다. 그 근본은 다 같은 뜻이에요. 그런데 어쨌든 두 사람이 피가 나게 논쟁을 벌이고 싸웠던 것이지요.

보십시오. 사람은 분명히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보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19, 20)"---자연계시를 말하고 있어요. 자연계시라는 것은 '이 대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하는 것이 그 첫째요. '역사의 맥락,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고 계신다, 당신 스스로를 계시해주신다'하는 것이 그 둘째입니다.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알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하는 것이 그 셋째입니다. 이게 자연계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정말 하나님을 알만하게 되어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알만하도록 창조된 것은 원리적인 것입니다. 또 사실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타락해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제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 하나님께 대한 성향이 작용을 하는 순간,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우상이에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 하나님이다, 하고 생각하니까 그게 우상이 되고 말더랍니다. 정말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만큼 타락했어요.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어요. 주님께서는 본래는 하나님을 충분히 알만큼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어요. 기능을 주셨어요. 그런고로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가끔 이런 얘기를 하지요? 네가 무슨 무슨 일을 잘했다 못했다 할 때에 '나는 몰랐다'고 대답합니다. 혹은 '내가 능력이 없었다. 그런고로 할 수 없었다'라고 핑계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왜 몰랐느냐?--알 때에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게 된 것예요. 그런고로 모른다고 해서 내가 죄 없는 게 아니예요. 본래 알 수 있었던 것인데, 내가 아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에 이제는 모르게 된 것이에요. 또 때로는 '나는 할 수 없다'라고 할 때가 있어요. 그것도 사실 할 수 없는 게 아니예요. 안 해서 못하게 된 것예요. 그 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때로는 워낙 의지가 약해서 뭘 좀 해야겠는데 못하기도 해요. '나는 본래 할 수 없다'합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안 해서 못하게 된 거에요. 예를 한 가지 들어볼까요? 가령 새벽기도회에 나오는데, 어떤 분은 일평생을 나오는가 하면 어떤 분은 '나는 못해. 새벽기도회에 갔다오니까 하루종일 정신이 없더구만. 다른 것은 몰라도 그건 절대 못하겠어'합니다. , 이제 묻습니다. 못하는 것입니까 안하는 것입니까? 안해서 못하게 된 것이지요. 그것을 알아야 해요. 모든 일이 다 그래요. 그런고로 핑계할 수가 없어요. 지금 못한다고 해도 안되는 것이고, 지금 모른다고 해도 잘못된 거예요. 공부 안한 죄가 있잖아요? 이미 아는 것을 내가 최선을 다해서 행했더라면 그 다음에 나는 이만한 수준에까지 알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호세아 4장에 보면 "저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저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버린 거예요. 스스로 버려서 이젠 모르게 된 것입니다. 보세요. 분명히 지금은 모르기도 하고, 무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따져보면 결국은 스스로 버린 거예요. 그런고로 핑계할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비교하지 못해요. 할 수 없다고 핑계할 수 없고,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적 입장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사람들이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우상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겨요. '하나님의 형상을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합니다. 우상숭배가 문제입니다. 이번에 일본 고베에서 지진이 났었지요. 그래가지고 많은 사람이 희생이 됐는데 그때에 저는 케냐에서 CNN방송을 열심히 봤습니다. 한 기자가 이제는 다 잃어버렸다며 슬피 우는 어떤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할머니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신상을 잃어버려서 너무 슬퍼요." 사람이 죽어서 슬픈 것도 아니고, 재산을 잃어버려서 슬픈 게 아니에요. 다름 아닌 신상을 잃어버려서 슬프다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잘됐지'라고 생각했어요. 일본사람들, 참 신상 많습니다. 가게고 상점이고 집이고 할 것 없습니다. 집집마다 신상을 다 해놓았습니다. 정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신상이지요. 자기네 딴에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일로 몽땅 다 때려부쉈어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우상을 섬긴다--이 과학시대에 컴퓨터 만지는 사람이 촛불 켜놓고 신상 섬기고 있더라는 말이에요. 그것 참 이상하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적 우상입니다. 제가 지난번 여행 때에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콘스탄쯔대제가 세웠던 비잔틴이라고 하는 지금의 이스탄불은 엄청난 도시입니다. 1700년 전에 교회가 300개나 있었어요. 이렇게 로마보다 더 큰 기독교 도시를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슬람으로 인해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았어요. 300개나 되는 교회 전부가 몇 곳만 빼놓고는 이슬람사람들의 성전이 되고 말았어요. , 왜 이렇게 되었느냐? 왜 기독교가 이슬람에게 먹혔느냐?--그 이유의 하나인즉 바로 기독교가 우상 숭배했다는 것입니다. 아이콘(icon)을 섬기고 상()을 만들어 섬기고, 그리고 성자 숭배하고, 성자의 유물을 숭배했습니다. 지금도 박물관에 가보면 그 당시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를 보니까 세례 요한의 해골, 세례 요한의 손이라며 금으로 싸놓았더군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옛날엔 성전에 있던 거예요. 성전을 지어놓고 이것을 가져다가 그 앞에 가서 복달라고 빌었어요. 지금도 거기에 한번씩 입맞추고 꾸벅하고 절을 합니다. 그게 예배랍니다. 기독교가 우상화한 것입니다. 왜 우상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섬길 뿐더러 자기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거예요. 복 주세요, 아들 주세요, 출세하게 해주세요…… 그것입니다. 이런 기복사상으로 빠질 때에 우상숭배가 되는 거예요. 기독교가 우상을 섬겨 성자 숭배니 뭐니 해 가지고 뼈다귀 가져다놓고 섬긴 거예요. 보세요. 기독교도 우상화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를 때려부수셨어요. 이것 보기 싫다 하신 것이지요. 이슬람 사람들이 다 점령해버렸어요. 그래 지금까지 천여 년을 그 꼴이 되어 있어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이 우상화해서는 안돼요.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 섬기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모하메드가 주장한 것이 우상 타파입니다. 지금도 이슬람교 성당에 가보면 아무 것도 없어요. 텅 비었습니다. 거기서 그냥 엎드려 절만 하는 거예요. 우상 타파의 증거가 여기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숭배--자기 생각이 우상이 되고, 자기 고집이 우상이 되고, 자기 욕망이 우상이 되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침해해오는 우상숭배는 결단코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때려부수고 진노하십니다.

또 한 가지, 오늘의 본문에는 고범죄(故犯罪)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21)." "하나님을 알되"--고범죄예요.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입니다. 아는데 알고서도 행하지 않는 거예요. 이것은 구제불능이에요. 이제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모르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러주면 되지만 알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잘못된 줄 알았으면 이제 끊으세요. 잘못된 일이면 이제 버리세요. 알고 지은 죄--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심판 밖에 없어요. 심판을 통해서 마지막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특별히 인간들은 초인간(超人間)을 꿈꿉니다. 니체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있으면 부자유해지고, 양심이 있으면 하나님을 인정해야 되니까 괴롭다 해서 초인간을 부르짖습니다. 알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떠납니다. 이런 불 신앙, 이런 무신론을 하나님께서 내려치셨어요. 이게 바로 공산주의의 멸망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감사치도 아니하고"--감사치 않는 것, 그것은 죄예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면서 감사하지 않아요. 이제 그것이 원망으로 바꾸어집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몰랐어요. 감사하지 않다 보니까 원망하게 되었어요. 고린도전서 1010절은 말씀합니다. '원망하지 말라. 원망하다가 다 죽었느니라.'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원망하지 말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마세요. 감사를 극대화하세요. 여러분이 원망하다보면 그 은혜 받은 것을 다 쏟아버리게 되고 어느 사이에 원망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보니 그 심판 중에 하나가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21)"입니다. 생각이 허망해지면 사람이 헛되게 됩니다. 허망해지니까 마음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어두워지니까 더 큰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상을 섬겨요. 그 마음에 우상을 섬겨요.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 서울에만도 점술가가 6만 명이나 됩니다. 공식적으로 허가 받은 사람이 6만 명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기록에 보니까 모 여대 앞에 있는 점집에는 하루에 여대생이 50명씩 와서 점을 친다고 그래요. 시집 잘 가게 해달라고요. 이게 문제입니다. 심지어 한 점술가는 240만 원씩이나 세금을 내고 있어요.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생각이 허망해지면 이렇게 어리석어집니다. 이렇게 어리석음에 빠져버려요. 결국은 버러지 형상을 섬겨요. 딴에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으나 나중에는 이상한 사람의 모습으로 만들어 섬겨요. 창조주를 피조물의 모습으로, 동물의 모습으로 섬기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도 저를 심판하시고, 진노하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며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지 않으면 내가 주인이 됩니다--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야만 비로소 밝은 믿음, 밝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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