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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되신 하나님(롬3:1~8)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참되심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여러분도 읽어서 아시는 바와 같이 로마서에는 많은 변론이 있습니다. 그러하뇨,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는 논조의 말씀이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만 해도 '무엇이뇨'라든가 '맡았음이니라' '어찌하리요' '폐하겠느뇨' '같으니라' '무슨 말하리요' '불의 하시냐' '아니하니라' '심판하시리요' '받으리요' '하지 않겠느냐' '옳으니라' 등으로 변론조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을 놓고 이런 측면에서 질문을 하고 또 저런 방면에서 대답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본래의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투의 논법입니다.
더욱이 이런 식의 논조 가운데서도 오늘의 본문은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편에 속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이 잘못된 게 아니라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만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여 해석할 것인가--논리적으로는 끝까지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제기하는 바의 내용은 결국 실제의 신앙 경험에서라야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신앙 체험 그 자체보다 더 훌륭한 논리는 없는 것입니다.
논리라는 것은 언제나 정론이 있으면 반론이 있습니다. 반론 없는 논리는 없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생각하면 이것이 옳고,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면 저것이 옳아요. 이론적으로는 이것이 옳지만 실제생활 속에서는 다른 것이 옳아요. 실제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엄연한 사실은 우리가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가끔 설명이 되는 것처럼 생각을 할 따름이지요. 자신의 감정과 의지가 그 쪽으로 쏠려 있을 때에 그런 것입니다. 감정과 의지가 쏠려 있어서 그 논리에 무게가 실리니까 자연히 그 쪽이 옳은 것 같은 것입니다. 이를테면 연애하는 사람들이 서로 한창 사랑에 취해 있을 때, 인사불성으로 빠져 가지고 돌아갈 때에 가령 상대가 키 작은 사람이면 마냥 '역시 키 작은 사람이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돌아갑니다. 이러니 좋고 저러니 좋고, 옷감이 덜 드니 좋고…… 합니다. 그 쪽으로만 쏠려 보는 것이니 다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다 그만 바람이 확 돌아 불어서 이번에는 키 큰 사람하고 좋아졌다 합시다. 그러면 이제는 또다시 키 큰사람 이래서 좋구나 저래서 좋구나 하게 됩니다. 서서 볼 때에 멀리 볼 수도 있고 어쩌고 합니다. 이런 경우, 어느 쪽이 옳은 것입니까? 어느 쪽도 옳다고 못해요. 내 감정과 내 의지가 어느 쪽으로 무게를 더 줬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내 감정과 내 의지가 기우는 쪽, 그 쪽이 옳고 좋은 것입니다.
논리라는 게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봐서 어떻고'하지만 객관적이라는 그 소리도 주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로, 체험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설명이 다 못되어도 괜찮아요. 언젠가는 될 때가 있겠지요. 그러나 체험하는 그 순간은 확실한 것이에요. 다른 사람에게는 상관없어요. 내게는 확실한 것이에요. 이것이 신앙 간증이며, 성경적 증거이며, 그리고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란 이미 다 설명돼서 고백인 것이 아니예요. 고백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결론을 가지고 설명을 할뿐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러고 나서 보니까 여기에 문제가 많아요.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인지는 잠시 뒤에 말씀하겠고, 우선 우리가 한 가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하는 데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고,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할 때에야 우리의 믿음의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에는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 같아져요. 왜 다른 사람에게만 복을 다 주시고 하필이면 나한테는 안 주시는가, 다른 사람에게는 이것도 저것도 두루두루 주시면서 나한테는 왜 한 가지도 안 주시는가--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거든요. 안 믿는 사람은 못된 짓 다 하면서도 잘만 살더구만 나는 이렇듯 착하게 살아보고자 애쓰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어이 이리도 인색하시다말인가--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해요. 믿음이 휘청거릴 때에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남다른 불행을 당했으면서도 끝내 '하나님은 옳으시다, 결국은 물질을 가져가시고 믿음을 주셨구나, 현재적인 생각을 거두어 가시고 내세적인 것을 생각하게 하셨구나'하고 감사하는 믿음도 있는 것입니다. 장님이면서도 생전에 6천여 곡이나 찬송가를 남긴 미국의 여류시인 프랜시스 제인 크로스비(Crosby, F. J.) 할머니는 자신의 장님 된 것을 하나님께 이와 같이 감사드렸습니다. "Thank God, making me blind."--"하나님이여, 나를 장님 만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요. 세상 보는 눈을 거두어 가시고 영원한 세계를 보는 눈 주시니 감사합니다--이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장님된 것은 하나님의 실수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실수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확실히 여기에는 놀라운 경륜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은 공평하신 것입니다. 의로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내세울 수 있을 때에야 그게 믿음인 것입니다.
회개도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거 하면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이게 회개입니다. 사람 사이에도 무슨 일로 해서 사과를 할 때에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합니다" 이러고 "끝"해야 되는데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합니다, 해놓고는 "그러나……"하고 본전 챙기려 하는 통에 다시금 시비가 붙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은 사과가 아니지요. 회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전적으로 "당신이 옳았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하는 것에서 끝이어야 합니다. 잘한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못한 것은 다 나의 것입니다. 구석구석 다 살펴보아도 어느 것이나 내가 잘못했어요.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어느 것 하나 의로운 게 나에게는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내가 전적으로 죄인이 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의로운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온전하게 인정하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십니다, 내가 거짓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꼭 지키셨습니다, 내가 못 지켰습니다, 복 받지 못하는 것은 내 잘못입니다'--이게 진실입니다. 겸손은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옳으십니다, 나를 때리신 것도 옳으셨고, 나를 병들게 하신 것도 옳으셨고, 나로 실패하게 하신 것도 옳으셨습니다. 백 번 옳으셨습니다'--이렇게 나올 때에 이게 진짜 겸손이거든요. 여기에 원망이 없어요. 털끝만큼도 불평이 없어요. totally acceptance - 전적으로 수락하는 거예요. 이것이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온전히 시인합니다.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불 신앙의 사람은 그와 반대로 언제나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절반만이라도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있었습니다마는 만족치 않습니다. 내 의가 이만큼 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요만큼만 돌아봐 주십니까 - 이런 불만이 있는 거예요. 보아하니 더러 큰소리로 기도하는 분들 가운데 그런 기도가 많아요. "왜 나를 안 도와주십니까요?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요?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기도를 해왔는데 또다시 언제까지 기다리라십니까요?" 이러면서 몸부림을 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한 도전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원망하게 됩니다. 모든 원망은 하나님께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께 까지 올라가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도 거울을 보시지요? 거울에 내 얼굴을 보니 참 잘생겼다고 생각됩니까? 하나님께서 어쩌면 이렇게도 잘 만드셨나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하필이면 요렇게 만들었나, 나보고 만들라 했다면 턱은 요렇게, 코는 요렇게 했을 것을…… 그랬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졌을 것을……' 이렇게 생각됩니까? 도대체 누구를 원망하는 것입니까? 조상 원망하는 거예요. 부모가 낳아준 것 아닙니까? '같은값이면 좀 잘생긴 사람을 어머니로 택해서 태어날 것이지 저 못생긴 여자한테서 태어나 가지고 요 모양이 되었단 말이야 하는 것입니까 아버지에게서도 못된 것만 닮았고, 어머니한테서도 못된 것만 닮았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어머니하고 인연을 맺게 해준 자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따위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됩니다. 정 원망이 나오거든 거울을 자주 보지 마세요. 그 편이 낫습니다. 거울을 보더라도 마음보가 그런 식으로 삐딱해진다면 그 원망이 다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거예요.
보세요. 일이 잘될 때에는 어느 만큼 잘되어도 욕심이 많아서 그보다 더 잘되지 않는다고 불만입니다. 모자라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기대치보다 적다고 해서도 불만입니다. 또, 일이 안되고 고난 중에 있게 되면 나만 죄인인가 하고 원망해요. 끝까지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리할 때, 곧 내 의를 내세우는 순간은 하나님의 의에 도전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의롭지 못합니다, 당신이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를 일 백 퍼센트, 전적으로 인정하고, 높이고, 찬양하는 거기에 신앙이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찬송가, 특히 잘된 찬송가는 전부가 하나님의 옳으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송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게 진정한 찬양이거든요. 이게 우리의 마땅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찬양합니다. 공의로우심을 인정함입니다.
그런데 그 공의의 극치가 십자가 사건에 있는 것임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도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나타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의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사람들의 버림받은 모습을 말씀합니다. 여기에 아주 오묘한 바가 있어요. 보세요. 유대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안 믿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마는 그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외식적입니다. 위선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내심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렇듯 불 신앙적인 유대사람들에게 전도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대사람은 안 믿고 이방사람은 믿어요. 이런 결과를 보면서 그는 몹시도 마음이 상했어요. 여기서 사도 바울은 놀라운 진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유대사람들에게 분명히 특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유대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이 분명한데, 저들을 선민으로 택하셔서 저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것이 확실한데, 그런데 어인 일로 저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가, 예수를 왜 안 믿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무너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이걸 말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보니, 먼저 유대사람의 의로운 점, 좋은 점을 말씀합니다.
유대사람의 유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타 로기아 투 데우'--하나님의 말씀, '로고스'입니다.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모세 오경을 비롯하여 모세가 계시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말씀을 맡았어요. 확실히 말씀을 맡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이 무엇입니까? 가끔 처음 믿는 사람, 생전처음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하고 "성경을 읽으세요"하고 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성경을 읽고 나서 말하는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읽어보니까 역사던데요. 이스라엘사람들의 역사 아닙니까?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사실이에요.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굉장한 신학적 비약이 있는 것이에요. 그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보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1, 2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계시적 역사입니다. 역사 하나 하나가 여느 민족의 역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주셨어요. 그런고로 계시적 역사입니다. 또, 그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우리 믿음의 표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렇게 내려오지 않습니까? 그 많은 믿음의 조상들 이야기가 전부 '믿음이 뭐냐' '믿음대로 산다는 게 뭐냐'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사건들은 신학적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inspired cases--영감된 사례들입니다. 그냥 우연한 사례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 하나 하나가, 창세기 1장에서부터 되어지는 모든 사건들, 그 모든 케이스가 전부 영감된 사례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나갈 때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문화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 중의 몇 가지를 거론해봅시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우리가 믿는 믿음은 아브라함 계통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를 의로 여기시고"--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몰라요. 아브라함의 믿음, 그 믿음의 성격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어요. 바로 의롭다 함을 얻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의 계통을 따라, 그 맥락을 따라서 우리는 지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이 받은 것이지요? 그 생애가 받은 것이지요? 그 역사가 받은 것이지요? 그가 만나는 경험 전체가 말씀이 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해설하는 것이 성경이요 설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특별히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의 출애굽 역사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반복해서 말해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 세상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홍해 건너는 것을 가리켜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까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말씀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죽음의 강을 넘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에요. 가나안땅은 영원한 나라의 상징입니다. 광야 생활은 교회 생활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행 7:38)"라고 말씀해요. "광야교회에 있었고"--이 한 말씀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몰라요. Ecclesia in the desert--광야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는 너무도 굉장한 것입니다. 애굽이 어디냐, 홍해에서는 무슨 사건이 있었느냐, 광야에서는 뭘 잘못했고 뭘 잘했느냐, 요단강은 어떻게 건너가게 됐느냐, 가나안땅은 어떻게 점령했느냐--이 모든 이야기는 그대로가 구원론이요 교회론인 것입니다. 이게 다 '말씀'이에요. 역사, 사건 전체가,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그대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굉장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말씀을 그들의 문화 속에 담아서 우리에게, 만백성에게 전해주셨어요. 이같이 소중한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가 있어요. 이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택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간직하고, 전하는 일에 쓰임 받았을 뿐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그들이 자동 케이스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안 믿으면 심판 받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떠났으면 벌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오늘의 본문을 다시 보세요. 자,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예수 잘 안 믿어주었어요. 그래서 많은 징계, 많은 환난 당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말씀의 역사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에게 특권이 있어요.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에는 에누리없이 벌을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는 거냐--아니지요. 의로우신 거예요. 사도 바울의 유대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는 이렇습니다. 우리 한번 이것을 요령껏 알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왜 이스라엘을 이렇게 버리셨는지, 혹은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을 잘 안 믿어 주는지, 왜 예수를 안 믿는지--이런 고뇌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 같은 중요한 고뇌가 있었어요.
다시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로마서 9장에서부터 이스라엘의 문제가 설명이 됩니다마는 이 시간에 조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인즉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세 가지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첫째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사람들을 벌하십니다. 선민이지만 벌하십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지마는 벌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징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벌함으로 의가 무너졌느뇨--아니라, 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 오히려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건은 사실입니다마는 사랑 사건의 이해는 고난 중에 이루어집니다. 오히려 심판 중에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유대사람들을 징벌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이지 하나님께서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벌받을 짓을 했기에 하나님의 선민이지만 벌을 받고 있다--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가 있습니다. remnant가 있어요. 비유로 말할 때에는 그루터기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되 다 멸하시지 않아요. 그루터기는 남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남은 자가 있는 것입니다. 남은 백성이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의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다 죄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고 있지마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남은 자, remnant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의 계시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은 유대사람들이 지금 예수 안 믿는데 이에는 오묘한, 아주 초월적인, 아주 높은 경륜적 역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지마는 그것은 하나님의 final judgement가 아니라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는 유대사람들이 믿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안 믿음으로 이방사람들이 믿고, 이방사람들이 다 믿은 다음에 결국 유대사람들도 믿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같이 역설적, paradoxical한 이론을 내놓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9장 10장 11장에서 설명하는 바 바울의 유대사람에 대한 신앙적 신학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의 본문을 다시 봅시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중심해서 이루어진 사건 속에 필요악이 있었어요. 필요악이 의로 인정될 수 있느냐--성경은, 사도 바울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건 의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불의 하신 것이냐, 징벌하시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냐--이에 대한 본문의 대답인즉 오히려 의로우시니라, 불의한 게 아니라 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왜요? 죄인은 심판하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그 심판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실제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것은 뭔고 하니, 결과적으로 의가 됐으면 의로 인정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인간의 불의, 유대사람의 불의, 불신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사건들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이를 높은 능력으로 관리하시고 끝에 가서 선을 이루게 하실 때가 있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합동하여 선을 이루어요. 그리됐을 때에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선을 드러냈다고 해서 그 행위가 의로 인정될 수 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예요. 절대로 아니예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렸을 적 일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게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책을 빌리러 갔었어요. 그 때가 해방되자마자 이니 아직 학교는 시작되지 않았고, 공부는 하고 싶고 해서였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가진 분이 있어 찾아가 영어 공부를 하고 싶으니 책을 좀 빌려주십사 했어요. 그런데 그 분은 그런 저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농사꾼 집안이면 농사나 배울 것이지 공부는 왜 하겠다는 거냐?" 그 말을 들은 저는 어린 마음에 상처가 생겼어요. 40리길을 버스도 타지 않고 걸어 돌아왔어요. 4시간이나 엉엉 울면서 걸었어요. 끝까지 울면서 걸었어요. 얼마나 섭섭했던지 몰라요. 조금 나쁜 마음이지만 '두고보자'했어요. 무슨 생각까지 들었는고 하니 '훗날 당신 아들과 나를 비교해보시오. 누가 더 공부를 잘하나 두고보시오!'정말이에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오기였지요. 꼭 좋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가끔 무심결에라도 스스로 게을러지려고 할 때, 특별히 군에 있을 때에 콘사이스 가지고 영어단어를 외우고 할 때에 보초서면서도 영어단어 외우고 할 때에, 아마도 그 옛날 그 분에게 당한 수모 때문에도 더 열심히 했는지 몰라요.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판에서 뭘 기대하여 영어단어나 외우고 앉아 있나 하고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어요. 그러나 저는 열심히 외웠어요. 그 때에 그 분이 내게 안겼던 수모, 그것이 자극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분은 나에게 결국 잘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어린 나를 그렇듯 마음 섭섭하게 만든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지요. 끝까지 잘못한 거예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제가 박사가 됐다 하더라도 그 분이 그런 소리 잘한 것이라고는 못해요.
때때로 우리에게 어떤 불의 함이나 잘못함이 있어요. 그 불의나 잘못으로 인해서 어쩌다 한번 둔갑을 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돌아갈 때가 있어요. 좋은 방향으로 회전을 해요. 큰 역사를 이루기도 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악했던 일, 불의 했던 일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그가 예수님을 팔았어요.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만백성을 구원하시게 됐어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가룟 유다 상 줄까요? 유공자입니까? 아니예요. 가룟 유다가 만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그는 은 30을 생각하고 팔았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죄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히려 좋아졌다고 해서 의로 평가받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구약에서 보는바 요셉의 형들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이 17세 어린 소년인데 형들이 이 동생을 팔아먹었으니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한 번 노예가 되면 한평생 노예가 되지 않습니까?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끔찍하지요.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팔아먹었다, 이거예요. 그러나 노예로 팔려갔기 때문에 요셉은 13년 동안 고생을 했으나 마침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러면 요셉의 형들은 총리대신 만드는 데 공을 세운 것이 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어디까지나 잘못한 거예요. 그 죄는 그대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동하여 엄청난 선을 이루신다고 하더라도 악은 악 그대로, 불의는 불의 그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만이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의 의는 절대로 거기서 인정될 수 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죄인을 벌하십니다. 죄인을 벌하시는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요. 아무리 선택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보전하고 말씀을 전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액면대로 벌하십니다. 이렇게 벌하심이 곧 의인 것입니다. 징벌 속에 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징계 속에 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 죄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어요. 또 징계를 받았어요. 죄짓고, 징계 받고, 얻어맞고, 바벨론 포수 되어 가고 하나는 이스라엘의 그 굉장한 고난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높고 귀한 당신의 의, 당신의 사랑을 계시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의 역사를 보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복잡다단한 사건 속에서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일별 해서 상고해보면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도 똑똑한 사람이 없어요. 다 부족해요. 다 허물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읽을 때마다 많이 위로가 돼요. 만일 다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만 있고, 몇 사람밖에 죄인이 없다 한다면 그것들을 읽을 때에 몹시도 부끄럽겠어요. 나는 영 자신이 없겠어요.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바 하나님의 쓰시는 인물들이 다행스럽게도 누구 하나 온전한 사람이 없어요. 모세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솔로몬도 그래요. 누구 하나 허물없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다 쓰셨어요. 훌륭하게 쓰셨어요. 오히려 그들의 숱한 약점까지도 쓰셨어요. 그들의 실수까지도 다 높이 들어 쓰셨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윗의 그 많은 시편 가운데 가장 감명 되는 시편은 참회록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시편 51편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그가 죄를 지었고, 죄인이기에 참회록이 있고, 참회록이 있었기에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 인간의 실수며 범죄가 많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에 털끝만큼도 지장을 받으시지 않아요. 한치도 손해보시지 않아요. 오히려 더 높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놓으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몸소 우리에게 증거 해주셨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모든 사건 속에서도 한치의 착오 없이 당신의 사람을 구원하셨어요. 당신의 사람을 교육하셨어요. 당신의 사람을 당신의 사람답게 훈련시키셨어요. Purify--성화 시키셨어요. 나아가 당신의 놀라운 역사를 고난 중에 이루셨어요. 참 이상하지요. 요새 와서 선교만 해도 그래요. 하나님의 사람만 하더라도 그래요. 고난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되지 못해요. 고난 당하는 중에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져요. 선교하기 자유로운 세계에서 선교가 이루어진 역사가 거의 없습니다. 고난 중에,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 속에, 심지어는 환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오묘하고 놀라운 우주적 진리를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구원하시고, 고난 중에서 택하시고, 고난 중에서 훈련하시고, 고난 중에서 가르치시고, 고난 중에서 성결케 하시고, 그리고 고난 중에서 선교역사를 효과적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본문 8절을 보세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그럴 수 없는 것이지요. 악은 악으로 심판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 이루신 것일 뿐이지, 우리가 의를 이룬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참되심을 항상 새롭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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