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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된 생명(롬6:1~14)

by 【고동엽】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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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된 생명(롬6:1~14)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생명에 대해서 아주 논리적으로, 또 세밀하게 증거해 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 상고한 마지막 말씀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이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다 하더라도 죄보다 은혜가 더 큽니다. 죄의 권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은혜의 권세가 그보다 더 강합니다. 죽음의 권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생명의 권세가 그보다 더 강합니다. 그것을 믿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은혜에 살지 못하는 사람의 불 신앙적인 생각으로 볼 때에는 사망이 제일 무서워요. 사망과 함께 모든 것이 다 끝납니다. 죄가 무서워요.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다 쓰러져요. 죄의 능력이 무서워요. 이것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요. 이 무서운 욕심, 이 무서운 정욕, 그리고 이 악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어요.

여러분도 개인적으로는 저런 경험을 많이 가집니다. 어떻게 나 스스로 이겨보려고 애를 씁니다마는 되지를 않아요. 죄를 이겨보려고, 욕심을 이겨보려고, 아주 악한 마음을 없애보려고, 미운 마음을 없애보려고, 이기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안돼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래서 '나는 아마 구제불능인가보다'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젊은 대학생들 가운데 좀 바르게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그 모든 젊은 정욕과 욕심을, 시기, 질투를 다 이겨보려고 딴에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다가 그게 안될 때에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젊은이다운 얘기에요. "아무래도 저는 애시 당초 유전자가 못 돼먹었나봐요"-아주 구제불능인 것 같다는 말이에요. 도저히 안되겠어요,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나같은 존재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이런 얘기도 해줘보았습니다. "그 고민, 참 좋은 고민이니까 조금만 더 해라. 그 고민을 좀더 깊이 해야 거기서 저쪽으로 나아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니라." 사실입니다. 이런 고민을 못해보고 흐리멍덩하게 사니까 아직도 그 모양으로 사는 거예요.

고민해야 됩니다. 그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보다 은혜는 더 큽니다. 사망이 있습니다. 사망보다 생명이 더 큽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로써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나를 사로잡을 때에 죄가 나를 사로잡아서 끌려가는 것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은혜의 힘이 나를 사로잡을 때에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새로워집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말씀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참 기막힌 말씀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생각을 한 단계 더 깊이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간증하고, 그 귀한 복음을 전하고 보니 오해할 사람이 있을 것 같단 말이에요. 어떤 진리든지, 더구나 소중한 말씀일수록 오해가 따라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며? 그렇다면 죄를 더 많이 지어야 되겠구먼, 그래야 은혜가 더 많을 거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가 있기에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공부하느라 바쁘고, 여기저기 학원 같은 데 쫓아다니느라 바쁘고, 이래저래 날마다 시간에 쫓겨 숨돌릴 새 없이 지내면서도 그러구러 건강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몸에 탈이 나서 자리에 눕는다 해보세요. 평소에는 그렇게도 공부하라 놀지 마라 닦달해대던 어머니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한테 이렇게 쩔쩔맬 수가 없어요. 앓아누워 있으니 나한테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스러운지 몰라요. ', 이거 재미있구나'-아이는 새로운 꾀가 납니다.

'공부하기 싫을 때에는 아픈 척해야 되겠구나' 합니다. 이래서 툭하면 짐짓 아픈 척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이런 병리적인 생활 속에 안주하려는 타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게 재미있어서지요. 내가 아프다고 하면 사랑받는 거예요. 내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가 쩔쩔매는 거예요. 온집안이 그래요. 이게 재미있는 것입니다. , 그러면 사랑 받자고 아파야 되겠습니까? 아프다고 해야 되겠습니까? 아내들도 아프면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면서요? 사실이지요. 사랑 받지요. 여느 때는 본 척 만 척하고 지내다가도 막상 아프다고 하면 겁나지요. 그렇다고 해서 사랑 받자고 생으로 병원에 입원해야 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이에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강한 부정입니다. 헬라 원문상으로 강한 부정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이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깊은 죄에서 큰 은혜를 체험했다면 이제 죄에서 나왔으면 은혜 속에 살아야지, 또 은혜를 체험하겠다고 해서 일부러 죄를 짓겠느냐,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가끔 이런 걱정도 있습니다-'방종에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니냐'--용서해주면, 자꾸 용서해주면 무질서해지지 않겠는가, 죄를 모른척 묵인해주면 점점 더 깊이 범죄에 빠지지 않겠는가, '자식이 잘못하는 것 알아요. 그러나 아는 대로 다 잔소리하고, 다 때리기로 들면 매일 때리다 말 것이지만 그런 것 아니지요.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 알고, 거짓말 하는 것 알면서도 어른들은 때때로 묵인할 때가 있어요.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고 묵인해요. 그럴 때에 우리 걱정은 무엇인고 하니, 묵인했다가 점점 더 많은 죄를 지으면 어떡하나 하는 것입니다. 죄짓는 게 재미나서 아주 죄에 빠져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입니다. 관용이 악을 조장할까 해서 잔소리가 많아져요. 관용이라고 하는 것이 때때로 악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사랑을 베풂으로써 죄를 더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용서하고, 묵인하고, 관용하고, 사랑하고 한다면 이로 인해서 죄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은 아닌가, 죄를 묵인하고, 죄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이런 걱정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했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 강하게 이 말씀을 죽음이라는 말로 말씀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고, 율법에 대해서 이미 죽어버렸어요. 죄악 중에 있었지마는 그 죄악 중에 있었던 욕망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다 죽어버렸어요. 그 방향으로는, 그 성향으로는, 그 욕망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상태라는 말씀이에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이제 무의식입니다. 죽은 사람이 의식이 있습니까? 죽은 사람을 보고는 욕을 해도 그만이요 칭찬을 해도 그만입니다. 말이 없어요. 죽었어요, 이미 행동도 없어요. 의욕도 없어요. 욕망도 없어요.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하면 세상에 대한 욕망이 다 없어졌다는 것이 됩니다. 부러울 것도 없고, 바랄 것도 없고, 미련도 없어요. 그래야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죽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야 하고, 죄에 대하여 무의식적이어야 합니다. 이미 입맛을 잃었어요. 욕망도 잃었어요. 죄의 종 되었던 데서 벗어나 이미 자유해졌어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씀이에요.

그렇다면 그가 어찌 다시 죄에 빠지겠느냐 함입니다. 가장 원리적이고, 가장 생명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이미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들이다---이것이 첫째입니다. 여기서 좀더 깊이 들어가 어떤 죽음인가 하면 이 죽음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내가 죽은 게 아니예요. 그리스도 때문에 죽은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좀더 강한 표현을 쓴다면 사실은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에 십자가가 나를 죽여요. 그런고로 내 욕망은 스스로 죽어지고 마는 거예요. 달리 도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죽여버렸기 때문이에요. 사랑의 노예, 은혜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꼭 명심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어요.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2:20)"-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I am crucified with Christ.)-유명한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오직 그를 사랑하는 믿음, 그를 향한 믿음으로 사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의미상으로는 나는 이미 죽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극기에 의해 사는 것도 아니요, 망각에 의해 사는 것도 아니요, 스스로 절제해서, 혹은 스스로 고행을 해서 자기를 구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어요.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나는 죽어요. 이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물 속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이미 죽어버렸어요. 그런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랄프 윈터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참 기발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세례'에 관해서도 그는 이런 얘기를 했어요. 세례를 줄 때에 물로 할 것이 아니라, 사람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관을 갖다놓고 그 관 속에다 사람을 한 번씩 집어넣어야 될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관 속에다 사람을 집어넣고 꽝하고 닫은 다음에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일어나라"하면 벌떡 일어나고…… '옛사람은 관 속에 죽었다'하는 뜻으로 말입니다. 뉴질랜드에 피지 족이 있는데, 일찍이 그 피지 족의 문화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 한가운데에 동그란 바위가 있어요. 어디서 굴려다놓았는지 꽤 큰 바위인데 그 바위에는 빨간 피가 줄줄 흘러요. 그것을 닦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어요. 그들은 범죄한 사람 처형을 할 때, 화형도 교수형도 전기의자 형도 아닌 특별한 방법을 썼어요. 사람을 꽁꽁 묶어놓고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돌로 머리를 짓이겨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 보는 데서 피가 그대로 흘러요. 그걸 닦지 못하게 합니다. 이 피를 보는 사람들에게 같은 범죄를 하지 않도록 경고, 각성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을에 갔던 선교사가 이 사실을 알고 교인들에게 세례를 줄 때에 일부러 그 바위 곧 killing stone 앞에서 했어요. "당신은 예수와 함께 지금 죽는 겁니다. 옛사람은 지금 죽는 겁니다. 정과 욕심을 다 죽이는 시간입니다"하는 뜻에서였다고 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나는 죽었어요.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는 죽어지는 거예요. 혹시라도 꿈틀거리거나 무엇인가에 집착하려 하다가도 십자가만 쳐다보면 나는 죽어요. 십자가가 나를 죽이는 것을 여러분은 얼마나 체험했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많은 성도들, 믿음의 조상들은 여기서 신비로운 능력을 경험하고 있어요. 내 욕심, 내 정욕, 허탄한 생각, 더러운 것, 다 있지마는 십자가를 쳐다보는 순간에 십자가로부터 신비로운 능력이 나에게 임해서 내 모든 더러운 것이 깨끗이 죽어지는 것을, 다시 죽어지는 것을 체험하고 있는 것예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내 힘으로 이걸 이기고 저걸 끊고 하는 게 아니예요.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다시 확인하면서 그 능력이 나를 죽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예요.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은혜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이렇게 죽으셨는데 내가 어찌 이 죄를 또 지을 것이냐, 어찌 내가 이 욕심을 가질 것이냐, 어찌 내가 이렇게 누구를 미워할 것이냐, 어찌 내가 혈기를 부릴 수 있을 것이냐-그런고로 잘못이 있다면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십자가를 그 순간에 쳐다봐야 되는데 십자가를 못보는 것이 잘못입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 벌써 죽었다, 옛사람 나는 이미 죽었다 할 때에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구절구절 자세하게 읽으면 죽는 길에 대해서 세 가지로 분명히 말씀합니다. 첫째는 세례와 함께입니다. 이미 세례받았어요. 여러분이 세례받는 그 순간에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이지 세상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 누구의 사람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여기서 인쳐진 것입니다. 세례와 함께 십자가와 합하여 나는 죽었어요. 하나가 되었어요.

그 다음으로 오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나가느라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본받아야 돼요.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고, 또 오늘 다시 확인하고--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요.

본받는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요, 깨닫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비슷한, 내가 나 스스로를 희생하는 일을 해보세요. 정말로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 11)"-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같은 죽음, 거기까지 감히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같은 그것을 만의 하나라도 본받아보세요. 좀 억울하더라도 주님을 생각하며 참아보세요. 좀 분하더라도 한번 더 희생해보세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나도 가는 거예요. 함께 가는 거예요. 내 마음이 가고, 생활이 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거예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8절에 보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합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거예요. 확실하게 믿는 순간에 그와 나와 생명적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서 생각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이 죽음이라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에요. willing to die--죽어져서 죽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죽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죽는거예요. 심판 받아서 죽는 게 아니라, 저주받아서 죽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또 회개와 함께 이루어지는 온전한 믿음이요 헌신인 것이에요. 스스로 자발적으로 죽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할수없이 죽어지는 때가 있지요. , 어떤 때에는 눈치가 빨라 이 시간에 자기주장 하다가는 손해가 많을 것 같아서 죽는 척하는 수가 있어요. 죽어지내는 척해요. 하지만 그실 죽은 게 아니지요. 그게 어느 때에 드러나지느냐 하면 부부싸움할 때에 드러나요. 내가 얼마동안이나 참았는데, 해요. 내가 죽어지냈는데, 해요. 죽어지내기는요. 죽어지내는 척했지 죽은 게 아니었지요. 정말로 죽었으면 아예 다 잊어버렸을 거예요.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죽지를 않았어요.

죽은 척 만 했었어요. 그래서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자발적인 것이에요. 나 스스로 버리는 것이에요. 누가 나를 뺏는 게 아니예요. 심판이 무서워서도 아니고, 또 자기의 어떤 실리를 계산해서도 아니예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격하면서 내가 죽어버리는 거예요. 욕망을 다 버렸어요. 아무 욕심도 없어요. 스스로 버리는 거예요. 은혜를 깨달음과 함께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그런 의미의 죽음이에요. 이것은 자발적이고, 자원적입니다.

네 번째로, 이것은 부활을 보증받은 죽음입니다. 이것은 죽기 위해 죽은 게 아니예요. 그리스도와 살기 위해 죽는 것이에요. 오늘의 본문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5)"-아주 귀한 말씀이에요.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연합한다고 할 때에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이것은 과거예요. 그 다음에는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리라'--이것은 앞에 있을 것, 미래예요.

약속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에 내가 이미 죽었으면 이제는 저 앞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생명의 연합하는 일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게 됩니다. 여기에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우리가 죽는다 할 때에 그냥 혼자 죽는 게 아니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거예요. 혼자 죽는 죽음은 부활이 없어요. 율법 앞에 죽어도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거예요. 은혜로 인하여 죽었으면 은혜로 인해서 사는 것이에요. 혼자 죽으면 못삽니다. 함께 죽어야 삽니다. 할 수 없이 죽으면 못살아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면 신비로운 생명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빼앗기면 상이 없습니다. 줄 때에만 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선한 일이라는 것도 빼앗기는 마음으로 주면 그것은 선한 일이 아니예요. 아무 보상도 바람도 없이 나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주면 바로 이것이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 할 때에 이제 부활의 능력은 분명히 그가 주시는 거예요. 그가 나를 살리시는 거예요. 그런고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내가 죽어지는 것을 체험한 사람은 곧 이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부활의 생명력을 체험할 수 있어요. 지금도 체험할 수 있어요. 희한하게 환하게 미래가 열려요. 이상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져요.

저 앞에 있는 은혜의 세계가 지금 당장 내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은 2천 년 전 얘기요, 우리의 부활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있을 일입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것이 있지만 그러나 오늘의 성경이 누누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주 실존적입니다.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아주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은혜 안에서 함께 체험하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래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꼭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이제 내가 죄의 사슬에서부터 벗어나 은혜의 사람으로, 나도 모르게 어느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도 내 기분도 언제부터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나, 할 만큼 신비로운 은혜의 왕노릇을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다스려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모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말씀에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6)"-그런고로 알아야 돼요. 9절에 가서 보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여기서도 안다고 말씀했어요. , 부활하신 예수께서 온전히 자유 하십니다. 그와 같이 오늘 우리도 부활생명에 사로잡혀서 온전히 자유 할 수 있어요. 우리의 몸은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살겠지마는 우리는 영은 온전히 은혜 안에 자유로울 수 있어요.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고, 옳다 그르다 말이 많겠지마는 상관없어요.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은혜가 내 마음을 다스리므로 그 부활의 생명력을 분명하게 알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어요.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생명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살아가게 될 때에 끝에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세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여기서 '여길지어다''로기제스데'라고 하는데 이 말은'reckon'이라는 뜻이에요. 장부에 기록한다, 간주한다는 뜻이에요. 여길지어다-나 스스로를 은혜의 사람으로 여겨야 됩니다. 내가 나를 의인으로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나를 의인으로 여길 것입니까? 내가 나를 은혜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인정할 것입니까?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용서할 것입니까?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기에, 먼저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자신을 너무 학대하지 마세요. 자기를 무가치한 존재라고 스스로 악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그것은 불 신앙이에요. 사랑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자기를 사랑해요. 나는 주께서 위하여 죽으신 존재입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고로 이 말씀 그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상관없는 자로 여겨야 합니다. 이제 나는 죄와 관계가 없다, 과거에는 죄인이었지마는 이제 나는 그 죄인과는 상관이 없다, 하는 관계로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이제 나는 소망적인 존재예요. 나의 높은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참 소중합니다.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어요.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러므로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소중한 존재로 여길지어다. 산 자로 여길지어다'--그리스도 안에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산 자로 여길 때, 이렇게 소중하게 여길 때에 비로소 쓸데없는 생각을 아니하게 됩니다. 죄를 이길 수 있게 됩니다. 허탄한 곳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나는 소중한 존재니까요. 함부로 내굴리지 마세요. 함부로 내굴릴 수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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