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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생명(골로새서 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는 누구나 생명에 대한 여섯 가지 질문을 받고 또 이 질문에 계속적으로 대답하면서 살아갑니다. 여섯 가지 질문의 첫째는 'Why of Life'--왜 사느냐입니다. 목적이 무엇인가, 그 의미는 어떤 것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입니다. 둘째는 'Who of Life'--누구냐 하는, 정체(正體)에 대한 질문입니다. 생물학적 질문이요 분류학적인 질문입니다. 셋째는 'What of Life'--특성, 성격, 질에 대한 질문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는 'Where of Life'--생태학적 환경을 묻는 것입니다. 생명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 그리고 그 생명은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변과의 관계로 볼 때에 그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When of Life'--도대체 어느 때에 존재하는 생명인지, 시점(時點)을 묻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기와 리듬을 묻는 것입니다.
또는 얼마나 살아갈 것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섯째는 'How of Life'--존재 양식을 묻는 것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저러한 여섯 가지의 질문보다 한결 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Whose of Life'입니다. 내 생명은 누구의 것이냐, 어디에 속한 것이냐--속성(屬性)을 묻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속해 있습니까? 돈과 함께 있다가 돈 좀 손해봤다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 속한 것일까요? 그 변변찮은 명예와 지위에 목을 매달고 있다가 그것 떨어져나갔다고 죽을상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도대체 무엇에 속한 사람일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무엇에 소속하여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완숙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기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희귀한 꿈을 꾸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꿈입니다. 그가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국 문에서 천사가 그를 심문합니다. "너는 누구냐?"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답합니다. "일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러더니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너의 머리와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키케로의 사상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통곡을 하면서 철저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가슴을 가득채움으로 비로소 참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나의 생명은, 그 정체는, 그 속성은 이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합니까? 다시 여섯 가지를 물어봅시다. 도대체 누구의 소속이냐, 누구의 것이냐고 물어야 하겠습니다. 본문말씀에는 그리스도인의 생명 정체를 본질적으로 설명해주는 아주 원초적 평가기준이 있습니다.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꼭 알아야 합니다. 아주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오묘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한순간도 여기서 떠날 수 없습니다. 생명문제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첫째,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일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already) 죽었다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걱정근심이 많습니다. 복잡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별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죽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아직도 덜 죽어서, 아직도 설죽어서 그렇게 버둥거리고, 생각도 많고 복잡한 것입니다. 이미 죽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결혼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결혼과 함께 결혼 전의 과거는 다 죽어버려야 됩니다.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제주도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신혼여행을 간 터에 옛날 애인에게 몰래 전화를 걸다가 들켜 가지고 얻어맞은 신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식과 동시에 이제는 옛 생활, 옛친구를 다 잊어야 합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 할 것 없이 딱 끊어버려야 돼요.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결혼입니다. 우리 한국의 대부분의 가정에 복잡한 문제가 많은 이유는 부모를 못 떠나서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마마 보이'가 있어요. 딱 떠나버려야 되는데 떠나지도 않고, 떠나보내지도 않고 왜 그리도 말이 많고 간섭이 많습니까? 결혼식 날로 끝내야 합니다. 부모된 사람들은 그저 추석 때나 한번 인사 받으면 그것으로 고마운 줄 알 것입니다. 대가족제도에 얽매여 못살겠다며 미국으로 이민 가는 젊은이들이 요즘은 의외로 많습니다. 대가족제도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이것이 가정입니다. 그런데 떠나지도 않았고, 떠나보내지도 않았어요.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고 될 일이 하나도 없어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를 얼마나 깨끗이 묻어버리느냐, 깨끗이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느냐? 깨끗이 끊어지고야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란 눈물 흘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과거를 완전히 십자가 밑에 묻어버리고, 과거를 떠나고, 과거와 관련을 끊고, 주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실패와 절망과 좌절이 아닙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온전히 죽었습니다. 그만이 아닙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은혜 앞에서 죽었습니다. 큰 은혜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작아지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저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사랑이 너무나 고맙고, 은혜가 너무나 고마운 나머지 나는 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하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와 교수직을 거쳐 문교부 고등교육국장까지를 30대에 했습니다. 일찍 출세한 것이지요. 그리고는 다시 또 교수일을 하다가 다 털어 버리더니 재차 미국으로 가버립디다.
온 집안 식구 다 데리고 이민을 간 것입니다. 가서 또 대학교수로 있어요. 거기서 또 잘 지냈어요. 그런가보다 하고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웬걸, 식구들 다 데리고 또다시 한국에 나왔어요. 왜 나왔느냐 했더니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신세를 너무 많이 지고 보니 미국 가 교수일 하면서 편안히 살기가 괴로워 잠을 잘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크고, 너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내가 감격하는 순간 내 모든 것, 내 욕심, 내 자기중심적인 교만, 내 세속적인 욕망과 고집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봄날에 눈녹듯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은 해탈(解脫)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비하(卑下)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사라지는 자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닙니다. 은혜에 대한 긍정 앞에 자기를 부정하는 자연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큰 은혜 앞에서 '나'는 사라지고 맙니다.
스퍼전 목사님의 설교 중에 퍽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홍수가 나서 물이 많이 불었는데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가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수영을 잘하는 구조대원 두 사람이 그쪽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그런데 건질 생각은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간 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그 사람은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기진맥진해서 더 버둥거리지를 않습니다. 두 구조대원은 그제야 손을 써서 그 사람을 건져냅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왜 빨리 건지지 않고 기다렸느냐고 물으니까 그들은 대답합니다. "저 사람이 힘이 남아 있어서 버둥거릴 때에 손을 잡았다가는 내목까지 끌어안아서 둘 다 죽게 됩니다. 살겠다는 생각을 아주 버리고 손을 들어야 안심을 하고 건져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은혜 앞에 죽고, 율법 앞에 죽고, 그 넓은 사랑 안에 완전히 죽어져야만 합니다. 성 마카리우스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 하는 말들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자는 아주 실질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너, 오늘 밤에 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 보고 '이 나쁜놈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부자놈들아, 이 천하에 고약한 놈들아'하고 욕이란 욕은 있는대로 다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성자가 시키는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를 보고 성자가 묻습니다. "어떻더냐?" 제자가 보고합니다. "아무 반응도 없던데요." "그렇더냐? 그러면 내일 아침에 다시 가서 이번에는 칭찬을 해보아라. 아,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이여, 하고." 제자는 아침이 되자 다시 묘지로 가서 성자가 시키는대로 무덤들을 향하여 잔뜩 칭찬의 소리를 늘어놓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떻더냐?" 성자가 묻습니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습디다." 비로소 성자는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죽은 사람, 반응이 없습니다. 칭찬해도 교만할 것 없고 모략 중상을 당해도 말이 없습니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갖은 모략 중상을 당해도 말씀이 없으십니다. 왜요? 대답할 가치도 없으니까요.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었습니다. 깨끗이 죽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 이하를 보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5장 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이미 그 옛날 바로 거기 골고다 언덕에서 내 정과 욕심도 저 십자가에 다 못박아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율법 앞에 죽고 다시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원초적 생명입니다. 나의 나된 의미, 나의 나된 목적 전부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분을 위하여 삽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분을 위하여 시는 것이 내 생애의 목적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것이 내 이상입니다. 내 기쁨도 그리스도요, 내 영광도 그리스도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To live is Christ, to die is gain.--너무나도 신비롭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생의 목적이요, 생의 의미요, 생의 기쁨이요, 생의 영광이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과거를 잊었습니다. 마땅히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은혜로 삽니다. 이제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할말이 영 없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슨 일이 있든지 오직 돌아온 감격과 감사 그것으로만 살아갑니다. 다시 태어납니다. 다시 살아난 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는바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이 말은 헬라 원문대로 보면 '케크뤼프타이'로, 현재완료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완료형의 생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생물학자가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는데 조그마한 씨앗을 집어들고, "이 씨앗 하나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생명은 신비 그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그 성분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질소, 수소, 탄소로 합성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성분대로 씨앗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은 땅에 심으면 죽어버립니다. 싹을 틔우지 않고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내 손에 있는 이 조그마한 씨앗은 땅에 심으면 다시 싹이 납니다. 그리고 똑같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씨앗 하나는 현재완료형인 것입니다." 맞습니다.
현재완료형, 그러한 생명의 신비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오묘한 신비 속에 살아갑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벌써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거기가 있습니다.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주님 오실 때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 나타날 때의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이미 가 있는, 감추어진 생명을 생각해봅시다. 구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오직 사랑과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큰 사랑에 시간, 시간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생을 돌아볼 때에, 지난날에 왜 내가 고독해야 했던가, 이제 돌아보니 그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그 때에 왜 실패해야 했던가, 되돌아보니 그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비참해서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에 나는 버려진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그 때에도 나와 함께 하셨어요. 은혜였던 것입니다. 내가 병들어 슬퍼하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 때에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내 남편이 먼저 갔는지, 내 사랑하는 자녀가 왜 먼저 세상을 떠났는지, 왜 세상에는 이렇게도 모순이 많은지, 답답하고 괴로웠는데, 감추어진 신비로운 세계에서 회고할 때에는, 그 차원에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생명의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그 순간을 놓고 여기서부터 생각을 합니다. 이 감추어진 생명을 아는 사람은 오늘 이 땅에 살면서도 낙심이 없습니다. 스데반은 엄청나게도 돌에 맞아죽는 순교를 하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이 생명의 신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죄수들이 있는 감옥을 한번 방문해보았더니 젊은 사람 하나가 얼굴이 다 죽어서 썩은 낯빛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낙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임금님은 "자네는 젊은 사람이 어찌 그렇게 기가 죽어서 사나?"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제가 죽을는지 살는지, 감옥에 있다보니 참 근심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한 가지 묘수를 가르쳐줌세"하고 왕은 기름을 가득 채운 컵을 하나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것을 들고 알렉산드리아의 온 시내를 한바퀴 빙 돌아서 다시 여기로 돌아오게. 만일 이 컵의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면 내, 자네를 석방하겠네." 그 청년은 감격하여 이 컵을 들고 두 시간 동안 알렉산드리아 거리 구석구석을 돌았습니다. 극장 앞도 지나가고, 사창가도 지나가고, 시장도 지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혹하고 소리를 지르고 해도 그는 전혀 동요 없이 시내를 빙 돌았습니다. 결국 그는 무사히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금님은 젊은이에게 칭찬을 했습니다.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구먼. 내 물어보겠네. 시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봤나 못 봤나?" "못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사창가를 지날 때에 창녀들이 유혹하는 소리는 들었나?" "보지도 못했는데요." "아니 두 시간 동안 시내를 돌고도 사람들을 하나도 못 보았다는 말인가?" "아무 것도 본 것 없고 들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그처럼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이것을 무사히 가지고 오면 석방해준다고 하는 나의 약속에 너는 그 생명 하나를 위하여 온 마음을 쏟아 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래서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생을 살도록 하라"하는 조언과 함께 그 청년을 석방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생명 위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지향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좀 잘살면 뭘 하고, 좀 못살면 뭘 합니까?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한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다 잊어버리십시오. 오직 생명, 생명지향적인, 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에 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을 삽니다. 그러므로 그는 위를 생각하고, 위엣 것을 바라봅니다. 현재완료형의 생을 삽니다. 위엣 것을 보며, 위엣 것을 생각하며 오늘을 삽니다. 그리고 함께 나타날 바로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삽니다. 감추어진 현재완료형의 신비로운 생명을 거듭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감추어진 생명(골로새서 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는 누구나 생명에 대한 여섯 가지 질문을 받고 또 이 질문에 계속적으로 대답하면서 살아갑니다. 여섯 가지 질문의 첫째는 'Why of Life'--왜 사느냐입니다. 목적이 무엇인가, 그 의미는 어떤 것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입니다. 둘째는 'Who of Life'--누구냐 하는, 정체(正體)에 대한 질문입니다. 생물학적 질문이요 분류학적인 질문입니다. 셋째는 'What of Life'--특성, 성격, 질에 대한 질문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는 'Where of Life'--생태학적 환경을 묻는 것입니다. 생명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 그리고 그 생명은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변과의 관계로 볼 때에 그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When of Life'--도대체 어느 때에 존재하는 생명인지, 시점(時點)을 묻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기와 리듬을 묻는 것입니다.
또는 얼마나 살아갈 것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섯째는 'How of Life'--존재 양식을 묻는 것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저러한 여섯 가지의 질문보다 한결 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Whose of Life'입니다. 내 생명은 누구의 것이냐, 어디에 속한 것이냐--속성(屬性)을 묻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속해 있습니까? 돈과 함께 있다가 돈 좀 손해봤다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 속한 것일까요? 그 변변찮은 명예와 지위에 목을 매달고 있다가 그것 떨어져나갔다고 죽을상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도대체 무엇에 속한 사람일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무엇에 소속하여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완숙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기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희귀한 꿈을 꾸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꿈입니다. 그가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국 문에서 천사가 그를 심문합니다. "너는 누구냐?"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답합니다. "일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러더니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너의 머리와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키케로의 사상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통곡을 하면서 철저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가슴을 가득채움으로 비로소 참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나의 생명은, 그 정체는, 그 속성은 이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합니까? 다시 여섯 가지를 물어봅시다. 도대체 누구의 소속이냐, 누구의 것이냐고 물어야 하겠습니다. 본문말씀에는 그리스도인의 생명 정체를 본질적으로 설명해주는 아주 원초적 평가기준이 있습니다.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꼭 알아야 합니다. 아주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오묘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한순간도 여기서 떠날 수 없습니다. 생명문제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첫째,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일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already) 죽었다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걱정근심이 많습니다. 복잡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별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죽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아직도 덜 죽어서, 아직도 설죽어서 그렇게 버둥거리고, 생각도 많고 복잡한 것입니다. 이미 죽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결혼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결혼과 함께 결혼 전의 과거는 다 죽어버려야 됩니다.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제주도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신혼여행을 간 터에 옛날 애인에게 몰래 전화를 걸다가 들켜 가지고 얻어맞은 신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식과 동시에 이제는 옛 생활, 옛친구를 다 잊어야 합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 할 것 없이 딱 끊어버려야 돼요.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결혼입니다. 우리 한국의 대부분의 가정에 복잡한 문제가 많은 이유는 부모를 못 떠나서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마마 보이'가 있어요. 딱 떠나버려야 되는데 떠나지도 않고, 떠나보내지도 않고 왜 그리도 말이 많고 간섭이 많습니까? 결혼식 날로 끝내야 합니다. 부모된 사람들은 그저 추석 때나 한번 인사 받으면 그것으로 고마운 줄 알 것입니다. 대가족제도에 얽매여 못살겠다며 미국으로 이민 가는 젊은이들이 요즘은 의외로 많습니다. 대가족제도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이것이 가정입니다. 그런데 떠나지도 않았고, 떠나보내지도 않았어요.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고 될 일이 하나도 없어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를 얼마나 깨끗이 묻어버리느냐, 깨끗이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느냐? 깨끗이 끊어지고야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란 눈물 흘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과거를 완전히 십자가 밑에 묻어버리고, 과거를 떠나고, 과거와 관련을 끊고, 주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실패와 절망과 좌절이 아닙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온전히 죽었습니다. 그만이 아닙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은혜 앞에서 죽었습니다. 큰 은혜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작아지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저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사랑이 너무나 고맙고, 은혜가 너무나 고마운 나머지 나는 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하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와 교수직을 거쳐 문교부 고등교육국장까지를 30대에 했습니다. 일찍 출세한 것이지요. 그리고는 다시 또 교수일을 하다가 다 털어 버리더니 재차 미국으로 가버립디다.
온 집안 식구 다 데리고 이민을 간 것입니다. 가서 또 대학교수로 있어요. 거기서 또 잘 지냈어요. 그런가보다 하고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웬걸, 식구들 다 데리고 또다시 한국에 나왔어요. 왜 나왔느냐 했더니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신세를 너무 많이 지고 보니 미국 가 교수일 하면서 편안히 살기가 괴로워 잠을 잘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크고, 너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내가 감격하는 순간 내 모든 것, 내 욕심, 내 자기중심적인 교만, 내 세속적인 욕망과 고집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봄날에 눈녹듯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은 해탈(解脫)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비하(卑下)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사라지는 자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닙니다. 은혜에 대한 긍정 앞에 자기를 부정하는 자연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큰 은혜 앞에서 '나'는 사라지고 맙니다.
스퍼전 목사님의 설교 중에 퍽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홍수가 나서 물이 많이 불었는데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가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수영을 잘하는 구조대원 두 사람이 그쪽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그런데 건질 생각은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간 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그 사람은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기진맥진해서 더 버둥거리지를 않습니다. 두 구조대원은 그제야 손을 써서 그 사람을 건져냅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왜 빨리 건지지 않고 기다렸느냐고 물으니까 그들은 대답합니다. "저 사람이 힘이 남아 있어서 버둥거릴 때에 손을 잡았다가는 내목까지 끌어안아서 둘 다 죽게 됩니다. 살겠다는 생각을 아주 버리고 손을 들어야 안심을 하고 건져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은혜 앞에 죽고, 율법 앞에 죽고, 그 넓은 사랑 안에 완전히 죽어져야만 합니다. 성 마카리우스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 하는 말들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자는 아주 실질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너, 오늘 밤에 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 보고 '이 나쁜놈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부자놈들아, 이 천하에 고약한 놈들아'하고 욕이란 욕은 있는대로 다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성자가 시키는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를 보고 성자가 묻습니다. "어떻더냐?" 제자가 보고합니다. "아무 반응도 없던데요." "그렇더냐? 그러면 내일 아침에 다시 가서 이번에는 칭찬을 해보아라. 아,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이여, 하고." 제자는 아침이 되자 다시 묘지로 가서 성자가 시키는대로 무덤들을 향하여 잔뜩 칭찬의 소리를 늘어놓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떻더냐?" 성자가 묻습니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습디다." 비로소 성자는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죽은 사람, 반응이 없습니다. 칭찬해도 교만할 것 없고 모략 중상을 당해도 말이 없습니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갖은 모략 중상을 당해도 말씀이 없으십니다. 왜요? 대답할 가치도 없으니까요.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었습니다. 깨끗이 죽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 이하를 보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5장 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이미 그 옛날 바로 거기 골고다 언덕에서 내 정과 욕심도 저 십자가에 다 못박아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율법 앞에 죽고 다시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원초적 생명입니다. 나의 나된 의미, 나의 나된 목적 전부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분을 위하여 삽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분을 위하여 시는 것이 내 생애의 목적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것이 내 이상입니다. 내 기쁨도 그리스도요, 내 영광도 그리스도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To live is Christ, to die is gain.--너무나도 신비롭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생의 목적이요, 생의 의미요, 생의 기쁨이요, 생의 영광이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과거를 잊었습니다. 마땅히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은혜로 삽니다. 이제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할말이 영 없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슨 일이 있든지 오직 돌아온 감격과 감사 그것으로만 살아갑니다. 다시 태어납니다. 다시 살아난 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는바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이 말은 헬라 원문대로 보면 '케크뤼프타이'로, 현재완료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완료형의 생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생물학자가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는데 조그마한 씨앗을 집어들고, "이 씨앗 하나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생명은 신비 그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그 성분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질소, 수소, 탄소로 합성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성분대로 씨앗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은 땅에 심으면 죽어버립니다. 싹을 틔우지 않고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내 손에 있는 이 조그마한 씨앗은 땅에 심으면 다시 싹이 납니다. 그리고 똑같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씨앗 하나는 현재완료형인 것입니다." 맞습니다.
현재완료형, 그러한 생명의 신비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오묘한 신비 속에 살아갑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벌써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거기가 있습니다.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주님 오실 때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 나타날 때의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이미 가 있는, 감추어진 생명을 생각해봅시다. 구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오직 사랑과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큰 사랑에 시간, 시간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생을 돌아볼 때에, 지난날에 왜 내가 고독해야 했던가, 이제 돌아보니 그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그 때에 왜 실패해야 했던가, 되돌아보니 그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비참해서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에 나는 버려진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그 때에도 나와 함께 하셨어요. 은혜였던 것입니다. 내가 병들어 슬퍼하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 때에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내 남편이 먼저 갔는지, 내 사랑하는 자녀가 왜 먼저 세상을 떠났는지, 왜 세상에는 이렇게도 모순이 많은지, 답답하고 괴로웠는데, 감추어진 신비로운 세계에서 회고할 때에는, 그 차원에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생명의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그 순간을 놓고 여기서부터 생각을 합니다. 이 감추어진 생명을 아는 사람은 오늘 이 땅에 살면서도 낙심이 없습니다. 스데반은 엄청나게도 돌에 맞아죽는 순교를 하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이 생명의 신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죄수들이 있는 감옥을 한번 방문해보았더니 젊은 사람 하나가 얼굴이 다 죽어서 썩은 낯빛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낙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임금님은 "자네는 젊은 사람이 어찌 그렇게 기가 죽어서 사나?"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제가 죽을는지 살는지, 감옥에 있다보니 참 근심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한 가지 묘수를 가르쳐줌세"하고 왕은 기름을 가득 채운 컵을 하나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것을 들고 알렉산드리아의 온 시내를 한바퀴 빙 돌아서 다시 여기로 돌아오게. 만일 이 컵의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면 내, 자네를 석방하겠네." 그 청년은 감격하여 이 컵을 들고 두 시간 동안 알렉산드리아 거리 구석구석을 돌았습니다. 극장 앞도 지나가고, 사창가도 지나가고, 시장도 지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혹하고 소리를 지르고 해도 그는 전혀 동요 없이 시내를 빙 돌았습니다. 결국 그는 무사히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금님은 젊은이에게 칭찬을 했습니다.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구먼. 내 물어보겠네. 시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봤나 못 봤나?" "못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사창가를 지날 때에 창녀들이 유혹하는 소리는 들었나?" "보지도 못했는데요." "아니 두 시간 동안 시내를 돌고도 사람들을 하나도 못 보았다는 말인가?" "아무 것도 본 것 없고 들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그처럼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이것을 무사히 가지고 오면 석방해준다고 하는 나의 약속에 너는 그 생명 하나를 위하여 온 마음을 쏟아 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래서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생을 살도록 하라"하는 조언과 함께 그 청년을 석방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생명 위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지향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좀 잘살면 뭘 하고, 좀 못살면 뭘 합니까?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한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다 잊어버리십시오. 오직 생명, 생명지향적인, 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에 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을 삽니다. 그러므로 그는 위를 생각하고, 위엣 것을 바라봅니다. 현재완료형의 생을 삽니다. 위엣 것을 보며, 위엣 것을 생각하며 오늘을 삽니다. 그리고 함께 나타날 바로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삽니다. 감추어진 현재완료형의 신비로운 생명을 거듭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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