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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을 수 없는 빛(롬13:1~10)
오늘의 본문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총괄한 귀한 진리이자 교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 즉 그리스도인됨의 윤리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어떤 환경, 혹은 사랑 받느냐 못 받느냐, 어떤 처지에 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윤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 문제는 사람을 사랑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사랑 받으면 사랑하고 사랑 안 받으면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 윤리적입니다. 그리고 절대적 의무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강한 연대성을 가지고 있고, 강한 유대 가운데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습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은 비유로써 말씀합니다. 기독교인의 절대적 의무감, 혹은 강한 책임성, 이런 것을 가리켜 '빚'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치 빚을 지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원리를 우리는 깊이 이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윤리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오늘의 본문 맨 마지막을 보세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절)"-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율법을 완성합니다. 그러니까 형벌 의식에 매이는 것도 아니고, 보상 심리에 매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율법을 지키는 그 동기와 그 방법과 그 근본은 사랑에 있습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입니다. 창조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윤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참 중요하고 강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은 이것을 빚에 비유합니다. 빚--사랑이라는 것은 무한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사랑처럼 자유로운 것이 없어요. 그러면서도 사랑처럼 강한 끈이 없습니다. 사랑에 한 번 매이면 노예가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즐거운 노예예요. 자유의 노예예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빚을 진 사람같이 강한 의무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실 사랑의 끈이고 사랑에 대한 의무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향유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빚'이라고 하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헬라어로 '오페일레테'하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는 'owe' 혹은 'debt'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물건을 삽니다. 그럴 때에 주인이 물건을 싸서 주면 나는 돈을 내 주어야 합니다. 돈을 내줄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물건을 받고 돈을 안 준다면 도둑놈입니다. 그게 조금 지나치면 강도입니다. 물건을 받았으면 당연히 돈을 내주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리고 이 돈을 주면서 아깝게 생각합니까? 그러면 그 물건, 잘못 산 것입니다. 그야말로 밭에 감추어진 보화같이 아주 좋은 것, 아주 예술성이 있는 것, 정말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물건은 가지고 돈은 안 준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뿐만 아니라 돈을 줄 때에 아깝지 않아야지요. 가만히 보면 장바구니 가지고 다니는 분들이 물건값을 자꾸 깎아요. 좀 괜찮다 싶어도 깎아요. 그러나 정말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살 때에는 깎는 것이 아니예요. 너무 중요하고 너무 좋은 것이니까요. 내 마음에 드니까요. 얼마냐고 묻는 그대로 내줄 수 있는 것이지요. 아깝지 않게 돈을 주는 그 마음이 바로 '빚'이라는 말입니다.
이 빚은 꼭 갚아야 하는 것이에요. 갚기는 갚되 할수 없이, 빼앗기는 마음으로, 강도 만나는 것 같이 갚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갚는 것이지요. 바로 그런 상태에서 빚이 무엇이며, 사랑의 빚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이것이 당연히 갚아야 하고 즐거움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리고 갚아야 할, 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자기 제자에게 이렇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무개 집에서 닭 한 마리를 외상으로 가져왔는데 아직 갚지 못했다. 네가 좀 대신 갚아다오." 그는 이 한마디를 하고 나서 세상을 떠났어요. 꼭 갚아야 하니까요. 갚지 않고 세상을 떠나면 안 되는 거예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옛날 로마시대, 즉 성경에 기록된 당시의 로마사람들이 가진 빚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본문도 로마서이니까요. 그들의 정치 문화 속에서의 '빚'이란 이렇습니다. 그들에게는 '토지세'라는 것이 있습니다. 토지세-땅은 원래 다 나라 땅이기 때문에 요샛말로 하면 나라한테서 '임대'를 하는 것이에요. 그래, 내 땅이라 해도 그실 내 땅만은 아니예요. 토지는 나라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하면서도 반드시 세금을 내야 해요. 그래서 자기 땅에 농사를 지었어도 보통 10분의 1, 그러니까 소출의 10분의 1을 나라에 바쳤어요. 단 포도농사는 예외예요. 포도는 약간 사치성이 있다 하여 5분의 1을 냈다고 합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을 때에는 100분의 1, 그러니까 1%를 바쳤어요. 또 poll tax라는 것이 있었어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두세'입니다. 사람의 머리 수대로 세금을 내는 것이에요. 그 나라에 태어났으면 무조건 내야 되는 것이에요. 14세 미만과 65세가 넘는 사람은 면제예요. 그 사이의 모든 국민은, 그러니까 14세에서 65세까지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내야 했습니다. 그밖에도 도로세, 다리세, 시장세, 항구세, 지방세, 국세 등이 있었어요. 예나 오늘이나 세금의 종류가 참 많아요. 그래도 이런 것들을 다 내야 했습니다. 모두 내야 했습니다. 이것을 내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할 수가 없어요. 로마시민으로 살려면 반드시 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것은 빚이다, 너희가 나라에 대해서 빚지고, 세금을 꼭 내야만 자유할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인은 사랑의 의무를 다하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할 수 없다-행동에서, 양심에서, 신앙에서, 영적으로 절대로 자유할 수 없다 함입니다. 그런고로 빚을 갚아서 자유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라고 말씀합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사랑의 빚은 지라 함입니다. 사랑의 빚 외에 다른 빚은 지지 말라-무슨 말씀입니까? 세금을 못내서 문제되는 인간은 되지 말고, 국민의 의무를 다해서 자유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병역의무, 교육의무, 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우리에게 다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에 걸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세금을 내는 것이라든가, 혹은 사회에서 해야 될 일을 못해가지고 구설수에 오르내려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빚은 절대로 지지 말라, 이런 것은 다 내라, 오직 사랑의 빚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함입니다.
우리의 말에 실수가 있을 때에 이것이 빚이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나친 교만도 빚이 됩니다. 흔히 말하는 '열등의식'이라는 것도 마치 빚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가책의식, 죄의식, 저주의식…… 이런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런 인간은 되지 말라, 사랑 이외의 빚은 어떤 종류의 빚이라도 지지 말라, 심리적이든,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그런 빚은 지지 않도록 하라,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하는 자유인이 되라-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이 말씀의 깊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랑의 빚, 이것은 지라 말씀합니다. 지고 갚고-강하게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빚'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요. 인격자는 빚을 빚으로 압니다. 그러나 비인격적인 인간은, 인격의 수준이 낮은 인간은 빚을 지고도 자기가 빚진 것을 모릅니다. '뭐 어때?'해요.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런고로 빚에 대한, 사랑의 빚에 대한 민감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사랑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 받지 않고 태어난 사람도 없고, 사랑 받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도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삽니까? 나는 사랑을 안 받은 자인 것처럼, 세상에 자기 혼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실 우리는 많은 신세를 지면서 사는 거예요. 이미 빚을 졌어요. 지금도 빚을 지고 있는 거예요. 이 빚진 마음, 사랑에 빚진 의식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전혀 빚을 지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오만불손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많은 빚을 졌어요. 뿐만 아니라 빚을 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앞으로도 빚을 지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는 그 마음도 잘못된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빚을 질 생각을 해야 합니다. 벌써 빚을 졌고 앞으로도 질 거예요. 최소한 내가 죽은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내 장례식을 해줘야 하잖아요? 아직도 신세질 것이 많아요. 앞으로도 많은 신세를 져야 합니다. 많은 빚을 져야 합니다. 바로 그 의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빚을 자유롭게 져야 합니다. 빚지는 데 대해서 너무 꺼려할 것 없어요. 어차피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거니까, 신세지고 사는 거니까요. 신세지겠다는 마음을, 사랑 받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너무 똑똑한 나머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바람직하지 않은 마음이에요. 받으세요. 그리고 많이 주세요. 만일에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면 지금까지는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앞으로도 안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어차피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은 사랑 받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 받으면서 뻔뻔스러워도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는 데에 있어 '나는 항상 많은 사랑을 받고야 사는 사람이다'--그런 마음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사랑의 수준에 있습니까? 사랑의 수준이 높아지면 어떻습니까? 사실은 이런 때도 있어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뭘 달라고 하는 것이 참 괴로워요. 다 줄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내가 주겠다는데 안 받겠다는 사람은 더 밉습니다. 내가 정성을 다해서 주겠다는데 '나는 신세 안 지겠습니다'하면 참 괴로워요. 사랑이 거절당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랑의 빚에 대해서는 우리가 서로서로 빚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또 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여유, 그런 겸손, 그런 온유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고린도서에서도, 갈라디아서에서도 여러 번 이런 말씀을 합니다. 고린도서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주었다. 그런데 너희로부터 물질 받는 것이 잘못되었느냐, 나는 영생의 복음을 전해주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나한테 음식과 여비를 좀 주었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것을 준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하고 말씀합니다.
또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좋은 말씀이 있어요. '너희들은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너무너무 고맙게 여기는구나. 할 수만 있으면 너희의 눈이라고 빼어주었으리라'-바울이 눈이 나빴거든요.
늘 시력이 안 좋아서 고생하는 것을 교인들이 알아요. 그래,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할 수만 있으면 눈을 바꿔치기 하고 싶은 거예요. 요즈음이라면 그것이 가능했겠지만 옛날에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럴 수가 없었거든요. 그저 마음뿐이었지요. 우리 같은 사람이 눈 좋아서 뭘해요, 눈 나빠도 밥 먹고사는 데 큰 지장 없는데요,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야말로 눈이 좋아야겠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자기가 편지를 못쓰고 다른 사람이 대필하지 않습니까,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을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습니다-이 얼마나 극진한 사랑입니까? 이 사람들이야말로 사랑의 빚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많은 핍박을 당하면서도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기에 자기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었어요. 이 얼마나 큰 일입니까? 엄청난 거예요.
그까짓 눈이 문제예요? 어차피 썩어질 눈인데요. 사실 생각하면 얼마나 귀한 일이니까?
바울 역시 그런 사랑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빌 2:17)."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빌립보 교인들이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에게 성금을 모아서 보냈어요.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게 너무너무 고마웠던 것 같습니다. 이것 또 빚을 졌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내 피를 쏟아부어 관제로 드려도 좋다, 그래도 기뻐할 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렇듯 사랑의 빚을 주고 갚는 이러한 유대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아니겠어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의 빚-그것은 사랑의 빚을 주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빚을 지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진 다음에는 갚으라고 합니다. 항상 갚는 마음, 그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갚아야 할 일이니까요.
1779년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런던 근교에 아크사이드라는 거리가 있는데, 이곳은 책방 거리입니다. 매일매일 책을 파는 그런 곳이 아니라 며칠에 한 번씩 책을 사고 팔고 하는 거리예요. 우리네도 5일장이다, 7일장이다 하는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어쨌든 그 날이 되면 책 장수들이 그 거리에 와서 책을 팔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낡은 책이나 새책을 사고, 서로 교환하고 그랬지요. 이 거리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날씨는 춥고 비가 많이 오는데, 노인 한 사람이 이 시장 한복판에서 그 비를 그냥 맞고 서 있는 것예요. 이 노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다들 그 노인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서 있느냐고 감히 묻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영국의 대 저술가 사무엘 존슨이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문필가입니다. 그 자리에 서서 그는 50년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열네 살이던 때에, 그의 아버지는 책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막 시장에 나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차갑게 부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날은 무슨 책을 갖다주겠노라고 어떤 손님과 약속한 날이었습니다. 분명히 그 손님은 날씨야 어떻든 약속대로 그 거리에 책을 사러 올 것입니다. 그러니 꼭 가야겠는데, 마침 아버지는 감기에 걸려서 기침이 심하고 몸이 쇠약해져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사무엘아, 오늘은 네가 내 대신 그 거리에 가 주었으면 좋겠구나 내가 지금 몸이 이래서 갈 수가 없단다. 하지만 약속은 꼭 지켜야 하지 않겠니? 그 사람이 오거든 이 책을 주고, 다른 책도 좀 팔아다오." 그 때에 존슨은 방바닥에 엎드려서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한답시고 안가겠다고 그랬어요. 거절을 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거절한다면 어쩌면 일생동안 후회하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니 어서 가거라." 그러나 어머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가지 않겠다고 버티었습니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책 보따리를 지고 비 내리는 그 거리에 나갔습니다. 결국은 그날 이후로 병이 더 악화되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며, 이제 50년 후, 아들은 그 책방거리에 서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 때 일을 생각하면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저는 불쌍한 아버지에게 너무 잔인했었습니다.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저는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사랑의 빚을 영영 갚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빚은 평생 두고 갚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진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있다, 그런데 주인이 이것을 탕감해주었다--자, 여기서 생각해보세요. 만 달란트 빚진 것은 나중에 얼마를 벌어서라도 갚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탕감받은 그 고마움은 갚을 길이 없어요. 차라리 빚이 빚으로 그냥 있다면 내가 이만 달란트를 벌어가지고 가서 이자까지 합쳐서 갚을 수 있어요. 그러나 탕감받은 그 감격은 갚을 수 가 없는 거예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탕감받은 그 감격은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에요. 못 갚는 거예요. 내 일생을 다 바쳐도 못 갚는 거예요. 이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요, 물질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종 사랑의 빚은 너무 쉽게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뭐, 나중에 얼마로 갚으면 되잖아?'---아니예요.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불효자는 말합니다. 부모님께 사랑 받고 얻어먹은 것을 다 갚겠다고요. 그러나 어떻게 갚겠습니까? 우리는 한평생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거예요. 그런고로 어떻게 하면 보답할까, 하는 마음으로 사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1984년 미테랑 대통령이 대통령 집무시에 있었던 일로, 해외 토픽에 게재되었었지요. 그 때에 그는 189년 전 나폴레옹이 스위스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을 넘을 때에 스위스의 한 마을에 들어가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대가 잠깐 그곳에 머무르면서 빌려간 냄비와 주전자 180개, 벌채한 나무 2,372그루, 징용 당한 마을 사람들의 품삯, 노새의 값…… 이런 것을 다 빚지고서는 이런 증서를 만들어주었어요. '모든 것을 결제할 것이며 보상도 하겠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것을 갚지 못했지요. 결국은 189년 후에 미테랑 대통령이 이 빚을 갚았는데, 이자를 다 계산하고 나니까 5,000억 원이나 되더랍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양보를 해서 원금만 15억 원 갚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사랑의 빚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것이에요. 다만 갚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한평생 갚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사랑,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이것은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9절)" 등의 법들이 있습니다마는 사랑 하나로 이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율법 준수는 율법의 본뜻을 이행한 것이 아닙니다.
보세요. "간음하지 말라"-상대방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정조를 내가 소중히 여겼다면 왜 간음죄가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며 거기에 간음죄가 있을 수 없어요. 또 생명을 사랑합니다. 상대방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생명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왜 살인이 있겠습니까? 상대방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 사유재산을 내가 함께 사랑합니다. 내가 소중히 여겨줍니다. 그렇다면 왜 도둑질이 생기겠습니까? 상대방의 자존심과 인격을 소중히 여깁니다. 어떻게 거짓말이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는데 왜 탐심이 있습니까? 그러고도 이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물리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요, 형식적으로 지킬 것이 아닙니다. 사랑함으로써만 지켜진다는 말씀이에요. 이것이 사도 바울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웃사랑을 말씀합니다. 이웃사랑-예수님 말씀 그대로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유기체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가만히 보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렇게 '말고'로 합니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에서 지킬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지켜나갈 것입니다. 선을 행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여기에 승리가 있고 여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사랑함으로써 모든 율법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이 지는 이 빚은,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께 진 빚을 이웃에게 갚는 것입니다. 이렇게 갚을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부모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이들면서 점점 더 절절하게 느낍니다. 이제 효도하는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모님이 소중히 여기던 손자, 내 자녀를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이것이 효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 빚을 졌어요. 우리가 그리스도께 빚을 갚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 그리스도께서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내가 사랑을 베풀어서, 무조건 사랑을 베풀어서 만에 하나 그리스도께 빚진 것을 갚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마음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빚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사랑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예요. 이것은 절대적 윤리입니다. 꼭 갚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갚는 마음으로 살 때에만 그는 사랑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옵시고'-내게 빚진 자를 내가 사하여주어야 합니다. 사하여줌으로써야 비로소 내가 주님 앞에서 또 사함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 이것은 절대적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공로가 아니요, 다만 의무입니다.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그 빚을 갚는 빚진 자의 자유, 빚 갚는 마음의 감격--그 속에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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