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04일] 목자 없는 양과 같이(마 9:35~38)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Fxhj8RhDtYI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9장 35절부터 38절에 있는 말씀을 봉독하게 됩니다. 신약성경 14년입니다. 신약성경 14년 마태복음 9장 35절부터 봉독하게 됩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봉독할 때에 다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아멘.
저는 아주 오래전에 이스라엘 나라를 방문한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의 유목민 생활입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생활 습관을 가진 유목민 생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서 일부러 그 전문가 한 사람을 제가 불러 가지고 함께 원시적 목장, 수천 년 동안 그대로 그 목장 생활을 지켜 오는 유목민, 원시적 유목민 목장을 한번 찾아 방문했습니다. 그것은 참 일생 동안 제일 중요한 제 경험이었습니다.
한 300마리 정도 되는 양이 있는데 한 사람의 목자가 그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의 문이라는 것이 그 우리에 있는데 우리 문이 없어요. 문에 그대로 이렇게 옆으로 누워서 목자가 거기서 잠을 잡니다. 그러면 양들이 절대로 목자를 넘어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양의 문이라는 것이 양의 목자가 지키고 있는 잠자리, 그것이에요. 그리고 작은 허술한 천막이 있는데 그게 목자의 저택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양 한 마리를 찾아서 목자가 머리에다가 손을 얹고 툭툭 치고 그 다음에 목자가 앞으로 가면은 양 300마리가 줄지어 가지고 쭉 따라갑니다. 무리를 지어 가지고 가는 게 아닙니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갑니다. 한 마리씩 쭉 한 줄로 가는데 그래서 이 목장에는 그 초원이 전부 다 망가집니다. 왜냐하면 300마리가 그대로 한 줄로 쭉 지나가면 전부 길이 패이는 거예요. 초장이 없어지는 거예요. 길이 패이고 패이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마치 그 등산을 보니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오선지가 돼요. 이렇게 줄이 쭉쭉 나 있는 이 공간이 양이 지나간 자리예요. 한 줄로 그대로 따라갑니다.
어디든지 따라갑니다. 목자가 가는 대로 이 양들이 따라가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를 믿고 줄줄이 따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골짜기나 시냇물이 상관없습니다. 목자가 가는 대로 그대로 따라갑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더라도 따라갑니다. 목자는 저리 가는데 나는 이리 간다, 그거 없습니다. 목자가 가는 대로 한 발자국 한 발짝 그대로 줄지어 가지고 따라가는 모습을 볼 때 아,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다 저런 양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양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양이 행복하려면 먼저 푸른 초장이 있어야 됩니다. 아주 넓은 초장이 그 초장에서 풀을 뜯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도 이걸 보았고 저쪽 호주에 갔을 때도 이런 장면을 보았는데요. 양은 절대로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 넓은 들판에 풀이 많은 데도 있고 적은 데도 있고 뭐 그렇지 않겠습니까마는 여기 맛이 있는 풀이 있다고 해서 양 몇 마리가 모여서 싸우고 그러는 거 없습니다. 그대로 한 양이 이쪽에서 풀을 뜯으면 다른 양은 이쪽으로 뜯습니다. 딱 갈라집니다. 서로 양보합니다. 그래서 그 넓은 초장이 전부 이렇게 꼭 바둑판처럼 이렇게 널려 있지요. 여기 맛이 있는 풀이 있다고 해서 서로 먹겠다고 다투고 싸우고 그러는 게 없는 게 양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어쨌든 푸른 초장 이것이 절대 조건이죠. 그게 양식이니까요.
두 번째는 시냇물입니다. 목마를 때 물을 마실 수 있어야 하니까. 그 다음에는 밤에 맹수로부터 양을 지켜 줄 수 있는 든든한 우리가 있어야 됩니다. 목장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 양은 목자를 믿습니다. 그리고 따릅니다. 목자가 양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어느 위험한 곳이라도 목자가 가는 대로 즐겨, 즐겁게 따라갑니다.
전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엄숙한 마음으로 나는 선한 양인가. 내가 염소가 아닌가. 양이냐 염소냐. 아니면 길을 잃은 양이냐. 방황하는 양이 아닌가. 정말 내가 목자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선한 양인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앞에 선한 목자가 보이는가. 다시 묻습니다. 목자의 음성이 들리는가. 꼭 잘 보이고 목자의 음성이 들리기만 하면 나는 분명 선한 양입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그저 아무 생각할 필요 없어요.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목자의 뒤를 따라가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당시에 있는 많은 시민들, 그 가난과 질병과 전쟁과 정치가 바로 위험해서 이렇게 시달리고 있는 백성들, 그래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이렇게 허우적거리고 방황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민망히 여기시고 하는 말입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목자 없는 양같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특별한 통찰력이 있습니다.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갈 바를 모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흩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자가 없다는 겁니다. 따를 만한 목자가 없고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서 헤매고 있는 그 양들을 예수님 불쌍히 여기시면서 딱 한마디로 목자 없는 양같이 그렇게 보셨다는 말입니다.
문제의 근본은 초장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냇물이 문제도 아닙니다. 요새 우리 말로 한다면 경제, 정치, 문화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단순합니다. 목자의 문제,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목자가 없어요.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어요.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정말로 전적으로 뭐 비판할 것 없이 그냥 따르면 되고, 그러면 기뻐하면 되고, 사랑하면 되고,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렇지 못하다는 것, 우리는 지금 이렇게 어려운 세대, 다시 말하면 목자 없는 양 같은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목자다 아닙니다. 나는 양인가. 정체 의식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목자입니다. 그렇다면 자, 경제, 정치, 문화 모든 문제의 뿌리가 목자의 문제입니다. 목자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양과 목자 같은 신뢰, 그 아름다운 관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양의 양 됨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양이다. 먼저 양 된 위치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양은 크기만 합니다. 많이 보면 모든 동물 중에 가장 착한 것 같아요. 그러나 뿔도 없어요. 그러나 무슨 날개도 없어요. 또 그러나 독한 이빨도 없어요. 무방비 상태입니다. 양은 착하기만 합니다. 양은 그저 목자를 사랑하고 목자를 따르고 그 분이 아주 순진해요. 그리고 행복해요.
모든 동물 중에 가장 가장 순진하고 착실하고, 그러니까 순진하고 착실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어리석다는 말도 됩니다. 아주 어리석은 것 같아요. 그저 목자를 따르는, 목자를 사랑하는 그 속에 양의 속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야 합니다. 확실한 목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자를 믿어야 합니다.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절대 신뢰, 절대 순종, 그리고 절대 평안. 목자가 함께 있기만 하면 양은 평안합니다.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성경 말씀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지라도 목자를 따라가면 됩니다. 왜요? 그 다음에 푸른 초장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줄지어 목자를 따라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를 찾았으면 이제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니, 목자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그의 인도하심에 감사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선한 양인가 한번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도 이런 양 찾는 비유가 있습니다. 양이 우리를 떠나서 멀리 방황하기 때문에 목자가 아주 가진 고생과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고 찾고 돌아올 때 기뻐서 어깨에 메고 오면서 내가 이런 양을 찾아 놓으라 하고 기뻐하는 그런 아름다운 장면을 보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왜 이 양은 길을 잃은 겁니까? 왜 이렇게 멀리 떠나서 목자를 고생시키는 겁니까? 이런 양, 그 양이 많지만 가끔 그렇게 길을 잃은 양, 튀려고 하는 양, 원치 않는 양도 있는가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양인가 염소인가. 양이라면 내가 어떤 양인가 깊이 생각하며 선한 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양이 되어야 선한 목자를 찾을 수 있고 선한 목자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지금 내가 선한 목자로 앞에서 있는 목자를 바라보며 그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그에게 온 운명을 다 위탁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 목자를 따르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하지요.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예수님의 말씀 속에 이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을 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양은 양이에요. 모르기 때문입니다. 순진하기만 해요.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복음이 있습니다. 왜 범죄합니까? 왜 잘못됩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게 된 이유가 뭡니까? 가르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의심이 많습니까? 또 선한 목자로부터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이야. 전적으로 믿고 전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평안하고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실상이 그렇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비판해야 되고 판단해야 되고 때로는 반대해야 되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 사는 거 있거든요. 이게 얼마나 불행합니까? 아름다운 목장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 같은 그런 아름다운 사회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가 예수를 부인하고 멀리 갔던 베드로, 부인한 그 베드로를 부끄러워하는 베드로를 불러 놓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페로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부끄러운 가운데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빌리아로 대답합니다. 아가페 사랑하느냐 하고 물었는데 그 빌리아의 사랑을 합니다. 희생적 사랑을 하겠느냐 대답하기를 친구의 우정 같은 사랑을 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얘기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그 보혈의 공로로 착한 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탄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중생이 있습니다. 그렇게 구속하신 양, 얼마나 소중한 양입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하여 선택해서 양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예수님 말씀합니다. "베드로야 내 양을 네가 먹이라. 내 양을 네가 먹이라." 참 귀한 말씀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서 제물이 돼서 구속한 바 양이다. 이 내 양을 네가 먹이라. 얼마나 소중한 얘기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예수님을 목자로 생각합니다. 이 말씀의 주라면 아니요, 베드로가 목자가 되는 겁니다. 오늘 목사님들이 목자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양이면서 동시에 목자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네가 먹이라. 네가 기르라. 네가 돌보라." 아주 귀중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여러분 문제의 초점이 어디 있습니까. 경제, 사업, 오늘 정치, 문화 모든 문제가 있습니다만 문제의 핵심은 지도자의 부재입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지도자만 만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완전히 양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선한 목자를 찾지 못해서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내 문제요. 목자의 문제요. 내가 선한 양이 되어서 선한 목자를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의 선한 양. 이런 관계 그리되면 의심할 것 없습니다. 비방할 것도 없습니다.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저 앞에 있는 목자를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 직접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먼저 앞서가고 양들이 그 뒤를 따른다고. 그렇습니다. 목자가 앞서갑니다. 핍박을 받아도 먼저 받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먼저 당합니다. 위험에 먼저 노출됩니다. 이게 목자입니다. 그 목자는 양을 위해서 온 정성을 다 합니다. 여러분 문제의 해결은 목자에게 있고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깊이 생각합시다. 영적 지도자가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길을 잃은 양처럼, 들판에 목자 없는 양같이. 자 이제 우리가 영적으로 바른 목자를 찾고 항상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목자가 앞에 보여야 됩니다. 앞서가는 목자가 보이고 그 목자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내가 그 뒷모습을 보고 따라갑니다. 이런 아름다운 관계, 이런 아름다운 영적 상태, 거기에 평화가 있는 겁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안정이 있고 또 능력도 있는 겁니다. 영적 지도자를 찾지 못해서 선한 목자를 찾은 선한 양, 그런 관계로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스스로 물어봅시다. 내 앞에 선한 목자가 보입니까? 선한 목자의 음성이 들려옵니까? 내가 진정으로 선한 양인가 한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선하고 착하고 깨끗한 양이 된다면 우리 앞에 선한 양이 보일 것임. 선한 목자가 보일 것입니다.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충만한 은혜의 생활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흩어졌던 저희들이 양을 성전으로 모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의 선한 양 된 정체를 재점검하게 하시고 모든 의심과 모든 거친 것들과 잘못된 생각을 다 버리고 착하고 순진하고 깨끗한 그런 착한 양이 되고 우리 앞에 먼저 가시는 선한 목자를 바라보며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목자의 음성을 따라 조용조용히 우리의 남은 해를 살아가게 하시고 늘 승리하게 하시며 주의 능력과 주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 우리 생활에 충만히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한 목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omprehensive◑ > Seonhe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2년 12월 18일] 내 자랑의 허상(약 4:13~17) (0) | 2022.10.23 |
|---|---|
| -[2022년 12월 11일] 말씀은 생명이시다(요 15:1~10) (0) | 2022.10.23 |
| -[2022년 11월 27일]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의 본질(롬 4:13~25) (0) | 2022.10.23 |
| -[2022년 11월 20일] 한 수난자의 감사 기도(욥 1:13~22) (0) | 2022.10.23 |
| -[2022년 11월 13일] 능력 없는 믿음의 실체(막 9:25~29) (0) | 2022.10.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