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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보화(마태복음 13:44)
곽선희 목사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오늘의 본문이 천국으로 시작되었듯이 주제 역시 천국임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에는 이 "천국"이라는 표현을 34회에 걸쳐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곧 "하늘나라"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라 하고 그 외 헬라 사람이나 로마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 자체의 사용을 대단히 꺼려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그리고 못합니다. 특별히 십계명의 제 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기억하며 그 이름 앞에 항상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히브리어에는 여호와란 말이 자음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모음이 없기 때문에 읽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읽을 때에는 "아도나이"라는 대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주"라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여호와라고 하면서도 그 이름을 잘못 부르면 하나님의 노하심이 크다는 것으로 알아 감히 여호와라고 쉽게 부르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 다음으로 중요한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쉽게 부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는 너무 쉽게 망령되이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아차 하면 "하나님 맙소사"하고 나오는 잘못된 입버릇을 보게 되는데 이는 다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들 사회에서도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되어있는 것이 중요한 법도라면,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야 되겠습니까?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마구 부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혹시라도 잘못 실수할까봐 하나님의 이름을 잘 부르지 못하고 대칭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나라로 바꾸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심해야 될 것은 하늘이라고 해서 은하수가 있는 푸른 하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름의 대명사 격인 대칭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 하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이방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방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달리 하늘을 묘한 세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하늘에는 귀신들이 많이 있으면서 결혼도 하고 싸우며, 그러다가 부딪혀 비가 오고 하는 식의 귀신들이 사는 공중 세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 하게 되면 귀신의 나라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를 염려하여 원뜻대로 돌아가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하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천국은 마치……와 같으니"라는 말씀은 뜻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와 같으니"란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말씀들을 문맥상으로 연결하여 그 뜻을 생각하면 오늘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께서 전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복음, 곧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이더란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의 임함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요,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며, 복음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나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는 동시적이고 동일선상에 놓여있는 절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요즈음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려는 경향 하에서는 특별히 강조되고 거듭 확인되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에 우주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구조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인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치 겨자씨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이 조용하고 미미한 출발이 있을 뿐인데 이는 동시에 개인적인 관계를 먼저 말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개인 하나 하나와의 만남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개인이 누룩처럼 퍼지어 확장되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는 특별하거나 돌발적인 사건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개인적으로 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신학계의 어떤 이들은 현대는 개인이 무력한 사회이기 때문에 구조적인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 사회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후에 개인적인 것이 와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합니다만, 오늘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 그것도 그 사람의 심령을 향하여 중생의 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본인이 의식하지도 못하고 미처 깨닫지도 못한 순간에 벌써 임하여 있음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인격이 변하고, 그로 인하여 가정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하고 마침내 세계가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정치적으로 오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행적이 지금의 기록과는 많은 대조적인 차이점을 낳았을 것입니다. 다른 부분은 두고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도망간 못난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부탁하실 것이 아니라, 최소한 빌라도를 만나셔서 "정치 좀 잘하라, 그리고 재판은 똑바로 하라"는 한 마디쯤은 했어야하고 또 그럴 법도 합니다. 그런데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하고 계시니 이래 가지고서야 어느 세월에 하나님의 나라가 되겠느냐는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용하게 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 거기에서부터 펴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오늘 본문에서 밝혀지는 대로 극히 개인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이 천국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 만난 천국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 때에 그 개인과 받아들이는 천국과의 관계가 어떤 사건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주어진 본문을 바로 해석하기 위하여 2천여 년 전 유대나라, 유대풍속으로 돌아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좀 알아보아야 되겠습니다.
먼 옛날이었던 당시에도 정치가 있었고 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듯이, 정치는 예루살렘에서나 하는 것이었고 구석진 조그마한 마을에서는 그같은 것을 알 바도 없었으며 따라서 보호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외딴 작은 마을에 있어서는 정치나 법 따위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었는데 여기서 제일 무서운 것은 강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불한당과 마적떼들이 한 번씩 휩쓰는 날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은행도 없는 당시의 사람들은 돈을 벌어 재산이 생기면 땅을 파고 묻어두는 것입니다. 이는 그 옛날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던 풍속입니다.
이렇게 땅 속에 돈이 든 항아리를 묻어두고는 자기만 알고 있으면서 필요에 따라 몰래 꺼내기도 하고 더 넣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돈 항아리 주인이 자기만 알고 있다가 돈을 다 꺼내지 못하고 죽어버리게 되면 그것은 몇백 년이 되든 발견되어질 때까지 그대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발견하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그야말로 노다지인 것입니다. 이 노다지 하나를 만나면 횡재하는 것인데 오늘 주신 본문은 유대 땅에 있었던 이 노다지를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풍속대로 하면 먼저는 발견한 사람이 임자가 되지만, 문제는 밭 주인에게도 해당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밭 주인이 발견했으면 전부를 차지할 수가 있겠고, 그 외 다른 사람이 발견했을 경우는 밭 주인과 반씩 나누어 가져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반씩 나누기가 싫었습니다. 그 보화를 조금이라도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은 자기의 밭을 갈이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집의 머슴이었거나 아니면 품꾼이나 품앗이 일을 하다가 묻혀있는 항아리를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보화가 가득한 항아리, 가슴이 두근거리는 횡재, 그러나 이 놀라운 기쁨을 공개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되면 반은 빼앗겨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는 척 덮어두고는 집으로 돌아가 자기의 재산을 다 판 것입니다. 이 사람은 욕심이 많음과 동시에 침착하고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밭, 곧 보화의 밭을 사기 위해서 숨겨놓고 돌아가서 있는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밭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만들어놓은 다음 그 보화를 꺼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비유는 당시에 있었던 실제의 한 사건을 예로 들어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는 물론 예수님께서 정보에 빠르셨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마치 그 사건과 같다는 뜻으로 전개시켜 나가신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는 비록 보화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보화로서 숨겨진 상태로만 있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발견되는 보화로 감추어지지 않는 사건으로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귀한 보화가 수많은 성경책 속에 담겨져 있고, 방송과 인쇄물을 통하여 그리고 이런 저런 모습으로 복음이 전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상태에 있기에 그 가치를 아는 자들만이 교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보화인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죄와 타락성에 감추어져 있으며 죄스러운 경험과 고집스러운 온갖 이해, 또한 인간의 육적이요 물질적인 지나친 욕망에 감추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를 않고 교회에 나오기는 했는데 졸리기만 합니다. 한마디로 들려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는 곧 세상 욕심과 타락성에 씌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보아도 모르겠고 들어도 알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특수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계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신학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 그리고 인간의 육체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그 사건은 육체 안에 감추어진 보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매일 매일의 구체적인 사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숨겨져 있습니다. 이 보화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늘 듣던 그 말씀이 오늘 내게 와서 새롭게 들려지고,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뜨겁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 말씀의 의미와 사건이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참 사랑의 실천을 다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의 보화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 문을 열어주시고 내 눈을 뜨게 하실 때에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만나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값진 진주를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자기가 찾아 만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과 같이 우연히 만나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처음부터 구도자가 되어 불교에로 가는가하면, 유교에도 가보고 이것저것에 철학적 관심을 쏟으며 어디에 길이 있을까?를 찾아 헤매다가 예수를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후자의 경우는 특별한 생각도 없이 그저 지내다가 장가 잘 가서 예수를 믿게 된다거나, 혹은 좋은 친구, 좋은 직장 만나서 아무런 갈등과 수고도 없이 예수 믿게 된 사람 등입니다. 그야말로 이 얼마나 우연한 횡재입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연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하나님께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다 아시고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중에 그렇게 만나게 되었을 뿐입니다. 자기로서는 아무런 의식이나 의도가 없었는데도 이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지난날 하던 방법대로 밭을 갈다가 보화를 만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 길에 있어서도 내가 모르는 길을 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는 길로 인도하셨고, 나의 길, 내 인생의 한 복판에서 나를 가로막으며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열어보니 보화가 가득합니다. 이제 크게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가난한 한 사람이 보화를 발견하고 갖는 그 기쁨! 그야말로 비길 데 없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기쁨을 감정에 맡겨 날뛰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전부를 소유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본 것만이 아니요 들은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책장이나 뒤적거리듯 객관시해 버린다면 아무리 놀라운 진리라 할지라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의 것으로 삼지 않은 상태에서의 복음이란 마치 묻혀있는 보화 위를 무감각하게 지나가듯이 어떠한 기쁨이나 변화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발견된 보화는 나의 것으로 소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정당한 방법으로 해결의 길을 찾습니다. 우선은 숨겨놓고 보화의 값어치를 생각해보고 그리고 밭의 값어치를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그 전부를 다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귀한 것이니 당연히 지불해야할 대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결코 쉽게 공짜로 얻겠다는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 보화 전부를 몰래 도둑질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발견한 것이라 그렇게 하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커집니다. 가난하고 돈 없던 사람에게 돈이 생겼으니 그 출처를 추궁 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은 남의 물건 절반은 도둑질한 셈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정당한 방법으로, 필요한 값을 지불하고 찾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너무 지름길로 가려하지 마십시오. 정당한 코스로 성경보고, 기도하고, 교회에 나오며, 봉사하는 기본적인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정당한 길을 밟아서 자기의 소유를 삼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지불해야 할 대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도 지불해야 할 대가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가는 지불되어야 하고 자기는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렇게나 거저 얻는 식으로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이 사람이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이미 부자가 되어있는 기분으로 버리는 것처럼 다 팔아 치우면서도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는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며, 포기를 위한 포기가 아닙니다. 진실로 영원한 긍정을 위한 부정이며, 더 큰 소유를 위한 작은 포기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포기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주 예수를 발견하고 그 예수를 믿고 따르기 위하여 지불하는 희생, 그것은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다 팔아서 살 만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것 앞에 아까울 것이 따로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 3:4-11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지난날 좋아하고 유익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잃어버리며, 배설물로 여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너무도 소중하고,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이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전에 좋아하던 그 무엇이라도 다 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사는 사람의 참모습입니다. 비할 데 없는 천국의 가치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둘 다 가지려는 경향이 없지를 않습니다. 세상도 쥐고, 천국도 쥐고, 도대체 어느 쪽으로 가겠다는 것입니까? 누가 뭐래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천국의 그 놀라운 가치를 진정으로 깨달은 자에게는 이 모든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힘입니다. 다 파는 힘, 다 버리는 힘,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중에 덧붙여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다 팔아서 보화를 산 것이 아니라 밭을 샀다는 점입니다. 지금 자기가 바라는 것은 보화뿐입니다. 그러나 그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부득불 확대하여 그 보화와 관계된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리를 찾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에 관계된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생활을 사야 합니다. 때로는 교회의 조직이나 예배 의식, 행사 등이 내 마음에 꼭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말씀이 있고 복음이 있고 진리가 있기 때문에 일단은 교회 생활을 수긍하고 교회라고 하는 전체의 구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성경 66권 중에서 내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구절은 한 장이 될지, 한 절이 될지 모릅니다. 더구나 내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외울 수 있는 요절이 몇 마디나 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나에게 구원의 감격을 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 성경 66권은 다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밭을 사야 합니다. 보화만 사겠다고 하다가는 오히려 보화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보화와 관계된 모든 것을 사는 것이 보화를 지키며 전부를 소유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요 교회 생활인 것입니다. 다 팔아서 밭을 사고 그리고 보화를 꺼내어 기뻐하면서 자랑하는 그 모습이 다른 사람 아닌 나 자신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되며, 나아가서는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기쁨이란 더는 비교할 것도 또한 바꿀 수도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믿음으로 오늘도 이 세상을 승리의 생활로 이끌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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