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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된 소망(롬8:18~30)

by 【고동엽】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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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된 소망(롬8:18~30)

 

영광된 소망-귀한 말씀이 오늘의 본문에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세계관'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씁니다. 세계관-곧 우주관입니다. 또 세계관이 인생관으로 이어지고, 인생관이 곧 자기관으로 이어집니다.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이 시각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세계관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합니다.

세계관은 사람마다 나름대로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문의 세계 이전에 사실의 세계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누구든지 나름대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 탄식하는 것도 세계관이요, '아이고 못살겠다'라고 한탄하는 것도 세계관입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다'하고 세상을 보는 것도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계관'이라고 하는 철학적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관을 크게 나누어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이른바 염세적 세계관입니다. 인생무상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헛되고 헛되고 다 헛되다-이런 관점 말입니다. 염세적입니다. 세상을 어둡게만 보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북한에 갔을 때에는 금강산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갔을 때에는 묘향산을 보았어요. 이 두 산이 북한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산입니다. 보니 금강산은 바위가 많아요. 아주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 만물상같은 것을 보면 참 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산 위에 우뚝우뚝 서 있거든요. 일만이천 봉이라니까요. 그렇듯 많은 바위가 서 있는데 그게 실로 아름다워요. 금강산에 비하여 묘향산은 수목이 많아요. 나무로 가득 덮여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아주 기기묘묘하게 생긴 많은 바위가 오똑오똑 솟아 있는 것을 보고 ', 참으로 아름답다. 참으로 묘하게 생겼다' 하고 감탄해 마지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는 고작 "저 산은 고생대다"하는 사람이 있어요. 본래 흙이 덮였었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해서 다 씻겨 내려가고 이제는 앙상하게 뼈만 남았구나, 합니다. 말이야 되는 얘기지요. 메마른 바위만 우뚝 서 있는 것을 보면 앙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요. 보는 시각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이 슬프고 괴로워요. 새가 지저귀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새가 노래한다'하고, 염세주의자는 '새야 새야, 너는 무슨 슬픈 사연이 있길래 그렇듯 슬피 우느냐'합니다. 새가 운다-새가 우는지 웃는지 누가 압니까? 제 소리 제 마음으로 내는데요. 세계관은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이에요. 세계를 염세적으로 보는 거예요. 모든 것을 어둡게, 허무하게, 무상하게 보고 좀더 나아가서는 절망으로 이어져요. 절망, 허무감, 니힐리즘에 빠져들어가요. 페시미즘(pessimism)이라고 하는 것이 마지막에는 니힐리즘(nihilism)으로 빠져요. 아무 소망도 없다고 보는 세계관인 것입니다.

또하나,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이라고 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른바 낙천주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막연한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겠지 뭐, 고진감래(苦盡甘來) 아닌가, 살다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 하고 속아서 한세상 다 살고 마는 것입니다. ()를 당한다고 해서 반드시 감래(甘來)한다는 법은 없어요. 막연하게나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낙천적이에요. 좋게 보려고 애를 써요.

 

낙천주의입니다. 이것이 철학적으로 변할 때에 무엇이 되는고 하니 소위 이데올로기라는 게 됩니다.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유토피아니즘에서 나오는 거예요. 프롤레타리아가 독재하는 아름다운 평등사회가 있다, 그런고로 이런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자-이게 공산주의의 이념이었거든요. 온 세상은 저 끝에 가서 반드시 다 공산주의가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은 가장 영웅적인 일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것을 자꾸 가르쳐서 생각이 확 돌아가면 공산주의자가 되는 거예요. 지금도 그 망상에 사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사회주의가 다 망했는데,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지금 사회주의의 우월성, 사회주의가 가장 멋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야 말겠다고 장창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되나요? 끝난 지가 언젠데요. 그리고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독재주의자들, 군주정치 하는 사람들, 독재하는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낙천주의자들입니다. 나를 따르라, 좋은 세상이 올거다, 합니다. ,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 전부 낙천주의자들이에요.

나를 따르라, 천지개벽 할 때에는 잘 살게 해주마-그런 소리 하지 않습니까? 일련의 낙천주의자들이에요. 유토피아니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렇듯 아무 근거도 없고 막연하지마는 미래는 좋을 것이다, 아름다울 것이다, 잘될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세계관이 유토피아니즘입니다.

세 번째로, 신앙 안에 거하는 세계관이 있어요. 굳이 앞의 두 세계관과 나란히 놓기 위해 이를 신앙주의라 할까요? 신앙을 주의(主義)로 분류한다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마는. 이 세계관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요. 그 약속을 믿은 결과로 그 약속에 의해서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통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약속 안에, 하나님의 경륜 안에 이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간, 혹은 사회, 우주 할 것 없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능력과 그 경륜 안에서 지배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계다, 하고 그 약속 안에서 오늘을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미래를 볼 때에 소위 퓨처럴러지(futurology)라 해서 '미래학'이라는 게 있고 에스커탈러지(eschatology)라고 해서 '종말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학이냐 종말론이냐 하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이런 학술적인 얘기는 제가 이 시간에 다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마는 미래학이라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이런 일 저런 일 다 연구해서 '이렇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되나'하고 내다보는 거예요. 미래학의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래학의 결론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허무주의로 빠져요. 그러나 종말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된 종말을 먼저 생각해요. 그것에 의해서 오늘을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아름다웠어요. 오늘에 복잡한 문제가 이렇듯 많이 있는 것 같으나 깊은 세계에서 보면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천지에 틀림없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한치의 틀림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공산주의 속에 있다가 지금은 자유 얻은 사람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동독, 그리고 중국이라든가 혹은 러시아 같은 공산주의 속에 있다가 지금은 자유를 좀 얻은 이 분들이 내게 하려는 말을 먼저 해요. 좌우간 하나님을 부인하고 나니까 제일 어려운 것은 농사가 안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나라는 우선 농사가 안됩니다." 정말 그래요. 사실은 요즘의 세계에 식량 문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지금은 식량이 남아 돌아가요. 저장할 데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잉여농산물이 넘쳐요. 그런데 딱 공산주의 국가에만은 먹을 것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큰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데다가 덮치기로 흉년이 들어요. 여러분, 믿거나 말거나 이건 분명해요. 이건 역사적 사실이에요. 눈앞의 현실이에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나라마다, 하나님 섬기지 않는 나라마다 가장 기본적인 식량 문제에 시달리고 있어요. 하나님 섬기는 나라, 하나님을 완전히 섬기는 것은 못되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있는 나라에는 적어도 식량 문제는 없어요.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에요. 눈앞에 환히 보고 있는 현실이에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고로 지금 우리가 보기에 모든 일이 뒤죽박죽인 것 같고 곤두박질하는 것 같아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 지금은 무엇이 잘 안 되는 것 같아도 끝에 가면, 마지막에는 틀림없이 해피 엔드(happy end)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요. 또 우리의 현실을 통해서 확인해요. 매일매일 확인하면서 살아요.

간증하듯이 살아요. 그렇게 오늘을 보고 나를 봅니다. 이것이 신앙주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특별히 소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망과 소원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소망은 약속에 의해서 내가 가지는 바램이지마는 소원이란 내 욕망에 의해서 가지는 것입니다. 근거가 달라요.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요 믿음에서 이어지는 것이지만 소원이라는 것은 내 요구, 내 끝없는 욕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소망의 있고 없음에 따라 삶의 자세가 어떻게 되어지는지 살펴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자꾸 과거만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현재만 생각해요. 또 어떤 사람은 미래만 생각해요. 그런데 이 세 부류가 다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은 참 소망의 세계입니다. 참 소망의 세계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의 세계,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오늘을 보고, 오늘을 살피고, 오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나가느라면 여기서 우선 우리가 받는 인상이 있습니다. 첫째로 받는 인상은 강한 염세적 세계관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와 동시에 초월적으로 아주 높은 낙천적 세계관이 엿보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렇듯 이중적인 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요 주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에 의해서 온 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본문에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어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넓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넓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고, 동물도, 식물도, 자연도 다 해당하는 것입니다. '함께'라는 말도 여기에 여러 번 반복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라 합니다. '함께'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아들에 나타난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는 시간을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했어요. 간절히 기다린다-expectation 내지 anxious watching인데, 이것의 헬라 원문은 '아포칼라도키아'이며 그 뜻은 이렇습니다. 이마에 손을 얹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먼 지평선을 바라보는 마음, 멀리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하마나 배가 오려는가 하고 먼 지평선을 간절히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는, 밤을 새우는 사람이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간절한 기다림'의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또하나의 기다림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에서 두 번째로 우리가 받는, 받아야 할 인상은 구원과 고통이 다 함께 우주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고난을 당하고 또, 모두가 구원을 받아요.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난을 당하고, 또한 모든 피조물이 함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함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어요. '구원'하면 '개인 구원'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구원, 나 하나의 구원, 내 영혼 구원-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게는 영혼 구원, 조금 크게 생각하면 육체까지 구원-여기까지만 생각합니다. 어쨌든 개인의 구원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그게 아니예요.

우주적인 구원입니다. 모든 것의 구원이에요. 타락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타락하게 될 때에는 모든 것이 다 타락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만물의 탄식이 있다고 했어요. 만물도 탄식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구원 문제를 너무 협소하게 생각해서 영혼 구원, 그리고 나 하나의 구원만 생각하려고 합니다마는 사람만 구원하는 게 아니예요. 구원의 문제는 우주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구주 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사람만의 구주시라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구주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20절이나 23, 골로새서 115절로 20절 같은 데서도 그리스도는 만유 위에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만유를 추구하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고, 또한 모든 만물이 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에베소서 120절에서는 아주 강력하게 이 문제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만물의 탄식'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래요. 창세기 317절에 보면 아담이 범죄 했지요. 아담이 범죄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땅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셔요. 참 무서운 말씀이지요.

제가 전에 한번 말씀한 것 같습니다마는, 사람이 마음이 평안하고 기분이 좋을 때에는 입김을 확 불어서 이것을 유리관에 넣어 가지고 영하 400도로 식혀 고체화하면 파란색이 되는데, 화가 났거나 슬프거나 할 때에 그렇게 입김을 고체화하면 검은색이나 잿빛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검은색의 물질을 실험용 쥐에 주입해본즉 400마리가 죽더라고 해요. 반대로 기분 좋은 입김의 파란색 물질을 쥐에 주입했더니 쥐들이 아주 명랑하게, 아주 튼튼하게 잘 자라더라고 해요. 이제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화가 난 사람은 강아지도 만지면 안돼요. 그도 병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분이 좋은 사람이 화초를 만져야 화초가 자랍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키우는 화초가 잘 자랍니까? 그렇거든 그리스도인인 줄 아세요. 갖다놓기만 하면 죽습니까? 그렇거든 회개하세요. 화초가 잘 자라지 않는다면 something wrong입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어요. 부부싸움을 하면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 아기가 설사해요. 다음날엔 감기 걸려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명랑하고, 아주 가득한 기쁨 속에서 아기를 만져야 아기가 편안하게 자라는 거예요. 심장 뛰는 게 다른 것입니다. 어머니의 심장이 콩당콩당 뛰고 있는데, 입김이 독해져 있는데 그걸 불어넣으니 어찌 해롭지 않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이것을 확대해보세요. 우주적으로 말입니다. 서로 죽이겠다고 혁명, 혁명하고 외치는 판이라면 농사가 되겠어요? 혁명이라는 게 뭡니까? 내가 못사는 책임이 저 부자에게 있으니 저 부자 놈을 죽여라-그거예요. 밤낮 숙청이요, 밤낮 혁명, 혁명, 하지 않습니까? 밤낮 투쟁만 외치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만지는데 무엇이 되겠어요? 농사가 될 턱이 없지요. 자연이 자연이겠습니까? 동물이 살겠습니다? 특별히, 생각도 제대로 되지 않아요. 아주 어두워지고 말아요. 총명이 흐려져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얘기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니까 이제 땅이 저주를 받아서 곡식을 내지 않겠다고, 엉겅퀴가 날 것이라고, 잡초가 날 것이라고, 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어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정말이지 잘 믿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가보면 얼마나 아름답게 해놓고 삽니까? 또 생각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제가 이 교회에서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너무나 심각한 얘기이기 때문에 또 말씀드립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시골서 자라면서 겨울이 되면 노루 사냥, 토끼 사냥 많이 다녔거든요. 언제 가는지 아세요? 눈이 많이 오다가 잠깐 해가 나왔다가 다시 추워지면 그 때에 갑니다. 왜냐하면 눈이 가득 쌓였어요. 산에 가면 1미터씩 쌓여 있어요. 그 표면이 조금 녹았다가 다시 추워지면 얼거든요. 이렇게 몇 센티 두께로 얼면 토끼 같은 것이 다니다가 곧잘 빠져요. 자꾸 빠지다보면 발에 피가 나거든요. 그래서 잘 걷지 못하게 돼요. 그걸 잡으러 가는 거예요. 그뿐 아니라 눈이 많이 쌓이면 먹을 것이 없잖아요? 눈 밑에 라야 도토리라도 있는데 눈이 가득 쌓여 있으니 그것도 먹지를 못해요. 그렇게 며칠을 지내는 것이니 이것들이 비쩍 말랐어요. 그래서 비실거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 노루 잡으러 가자, 하고 몰려가서는 그 짐승들을 올려 몰았다가 밑으로 내려 몰면 영락없이 걸려들지요. 비실비실하기 때문에 잡기가 쉽거든요. 이렇게 사냥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런 사냥을 회개하게 되었어요. 1963년엔가, 미국 미시간 주에 갔을 때입니다. 겨울이라 눈이 많이 왔었어요. 1미터 50센티나 쌓였지요. 그래 짐승들이 굶어죽겠다 싶으니까 온 동네사람들이 다 나와 가지고는 눈 위에다가 신문이나 돗자리를 주욱 깔로 거기다가 옥수수나 먹을 것들을 놓아주더라고요. 그러니까 정말 짐승들이 그걸 얻어먹으러 옵디다. 사람들은 그 모양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면서 무슨 새가 왔다, 무슨 짐승이 왔다, 하며 기뻐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저는 뒤에서 회개했어요. 생각해보세요. 이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누구는 눈이 오면 짐승이 굶어죽을세라 걱정을 하는데 누구는 기회로 잡을 생각만 하다니, 말도 안 되는 거지요. 못된 사람들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 그들이 있는 곳에는 자연도 복을 받아요. 그러나 이렇듯 악한 사람들, 그들이 있는 곳에는 짐승도 살아남을 길이 없고, 자연도 복을 받을 수가 없어요. 실제로 복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런 말입니다.

피조물이 이렇듯 허무한 데에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예요.

, 말은 사람을 태우고 다닙니다. 사람이 좋은 일로 그 말을 타고 가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강도가 강도질하려고 말을 타고 간다면 그 말인들 좋은 일 하는 것입니까? 기분이 좋겠습니까? 좋은 일이 아니지요. 또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 그릇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술잔으로 쓰이는 게 있지 않아요? 아마 그릇이 말을 한다면 '나는 팔자가 기구하다'라고 할거예요. 나는 왜 좋은 일에 쓰임 받지 못하고 나쁜 일에 쓰임 받나, 사람을 죽이는 일에 쓰임 받고 정신병자 만드는 데 쓰임 받나, 하고 말이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릇도 좋은 일에 쓰임받고 좋은 사람에게 대접할 때에 쓰인다면 그게 그릇한테도 즐거운 일 아닙니까? 무릇 집도 그렇고, 자연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대로, 만물이 탄식을 하는 거예요. 허무한 데에 굴복하는 게 싫고, 무가치한 데에 끌려가는 게 싫고,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만물이 탄식을 한다, 인간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인도 함께 탄식을 한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면 피조물은 이제 그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본문 21절은 말씀합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해방 허무한 데 굴복하는 데서부터 해방되어 자유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어요. 만물도 탄식하면서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얼마나 좋아요? 모두가 다 제구실을 하게 되는, 꽃은 꽃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다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우주적인 구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함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성경은 '성도들은 몸의 구원을 기다린다'고 말씀합니다. 몸의 구원-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만이 구원이 아니예요. 몸의 구원-이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과거 구원만이 아니예요. 미래 구원만이 아니예요. 몸의 구원-현재입니다.

여기에는 좀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해서 주님 앞에 가서 누릴 수 있는 몸의 구원, 온전한 몸이 됨을 말씀합니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영도 온전치 못해요.

왜냐하면 육체라는 감옥에 매여 있거든요. 또 육체도 온전치 못해요.

밤낮 썩고, 병들고, 장차 죽을 것이고온전한 몸이 아니예요. 그런고로 온전히 구원받은 인격이라는 것은 영도 완전한 영, 몸도 완전한 몸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보세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몸이 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과 같은 영, 그와 같은 생명으로 우리가 변화할 것입니다. 바로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 날에는 자연도 새로운 의미의 자연이 될 것입니다. 오직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것이 궁극적인 것입니다.

다시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오늘도 내 영이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때에 그 육체도 윤택해집니다. 어느 박사의 말대로 엔도르핀이 나와요. 엔도르핀이 풍성하게 돼요. 몸도 건강해요. 그 사회생활, 그 생각, 총명, 다 건강해져요. 추석날 아침에 저는 문득 한경직 목사님이 생각나서 한번 찾아가 뵈었습니다. 어느덧 목사님 연세가 94세예요. 가서 뵈니까 건강하세요. 잘 들으시고, 총기가 좋으십디다. 그런데 말이 좀 어눌해요. 하지만 무슨 말을 하시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그래 함께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아주 즐겁게 한참을 얘기했습니다. 한 목사님은 늘 이런 얘기를 해요. "목사가 설교를 못하니까 좀"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한마디했어요. "목사님, 가만히 앉아만 계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 날은 또 이런 얘기를 해요. "예수 잘 믿으면 나만큼 오래 사느니라"-이보다 더 훌륭한 설교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모쪼록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오. 100세가 넘도록 계시면 충분합니다"라고 말했지요. 그러다가 한 목사님이 어느 분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보니까 이영하 목사님이라고, 지금 101세 되신 분입니다. 여전히 교회 잘 다니고 건강한 분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몸의 구원을 기다린다'-영의 구원만이 아니라 이제는 몸의 구원을, 영적 구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적 구원을, 나아가서는 가정에, 사회에 이르기까지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구원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지구에만이 아니라 우주적 구원인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양자될 것을 기다린다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고, 그 하나님의 자녀로 인해서 그 모든 환경도 아름답고 귀하며, 마치 범죄하기 전 에덴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구원의 그 날이 약속되어 있어요. 그것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에요. , 믿음은 기다림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 25)"-인내로 그날을 바라보며 기다립니다. 넉넉히 기다립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 처음으로 돌아가서 18절말씀을 다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유명한 말씀입니다. 칼뱅이 세상 떠날 때에 이 말씀을 외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도다"-현재에 고난이 있어요. 그러나 이 고난 때문에 막연히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예요. 현재의 고난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미래가 앞에 있다는 말씀이에요. 보세요. 장차 나타날 영광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 그 소망 안에 현재의 고난은 흡수되고 마는 거예요. 없어지고 말아요. 생각에 없어요. 아픔도 없어요. 다가올 영광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요. 이 큰 영광, 장차 나타날 큰 영광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속에서 내 현재의 고난은 다 없어지고 말아요. 흡수되어버리고 말아요.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고로 복잡한 문제에 골몰하고, 이것이 다 저것이다, 할 것 없어요. 장차 나타날 영광만 보세요. 그것만 확실해지면 돼요. 그래서 골로새서 31절은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비록 눈앞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현재를 보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저쪽을 바라보며, 그리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에요. 기쁨에 충만해 가지고 있어요. 이 소망으로 모든 어려움을 쉽게 이기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어요.

오늘의 본문말씀 첫절과 마지막 절을 함께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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