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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는 기적, 교회의 영광 /엡 2:11-22

by 【고동엽】 2023. 11. 28.

2010.6.20 주일 설교(에베소서 강해 7)

 

하나되는 기적, 교회의 영광

2:11-22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보면 1805년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군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안드레이라는 장교가 크로우조프 장군의 부관으로 이 전쟁에 참여합니다. 러시아군은 아우스테르니쯔 결전에서 패배하고 안드레이는 적진에 돌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났는데, 전쟁터에 누운 채, 푸른 하늘이 보이는 것입니다. 순간 그는 전쟁터이고 자신이 중상을 입은 것도 잊은 채, 감동합니다. 평생 군인으로서 야심과 명예욕을 불태우며, 나폴레옹 같은 장군을 숭배하며 살아왔던 것이 얼마나 부질 없었던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립니다.“어째서 지금까지 이 높은 하늘이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라도 겨우 이것을 알게 되었으니 나는 정말 행복하다. 그렇고 말고! 이 끝없는 하늘 외에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모든 것이 기만이다. 이 하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다.....”

 

우리가 마음으로 안타까와하고 신경쓰고 몸부림치고 고민하고 미워하고 속상해 하고 밤잠을 자지 못하는 일들이 정말 가치있는 일일까요? 하늘을 한번 쳐다 보십시오.

 

지금 우리 모두는 두 가지 영적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워하고 싸우는 역사와 사랑하고 하나 되는 역사입니다. 미워하고 싸우는 역사는 사탄의 역사이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나라든 갈라지고 싸우는 일의 영적인 끈 , 영적인 뿌리를 보아야 합니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그렇게 미워하고 싸우고 갈라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너무 극단적이고 지나친 생각일까요?

싸우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듣고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어른들이 더 싸우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합니까? 배운 사람들이 더 싸웁니다. 사랑을 설교하는 성직자들이 더 싸웁니다. 무엇으로 설명해야 합니까? 영적인 배후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눈이 무섭습니다.

 

 

북한이 올림픽 무대에 처음 참가한 것이 1972년 뮌헨 올림픽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에 금메달을 안겨준 사격의 이호준 선수에게 기자들이 어떻게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딸 정도로 총을 잘 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그는 대답했습니다. "수령님의 교시대로 적의 가슴을 쏘는 마음 가짐으로 경기에 임했을 뿐이다." 이 대답에 모두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올림픽 정신과는 너무나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할 수 없이 공개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북한 정권의 배후에 악한 영이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매사에 영적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분열시키는 마귀의 역사를 분별 못하면 바보같이 당하고 나중에 깨닫습니다.

27:3-5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는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을 깨닫지 못하고 품었기에 결국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미워하고 싸우는 역사 뿐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역사도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역사입니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고 교회가 이루어질 때, 사람들은 교회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랑하고 하나 되는 기적을 본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 최초의 사건입니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고 충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불의 땔감으로 삼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방인 산모가 산고로 고통을 받을 때 그녀를 도와주는 것도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다른 이방인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한 교인이 된 것입니다.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도망 나온 종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관계로 하나 되는 역사가 나옵니다. 이것이 당시 교회였고, 이 역사 때문에 초대교회는 강한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들어와서 진정한 하나님의 기적,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정말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교회인지 유심히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감사드리는 것은 분열과 다툼이 없이 하나 되는 역사가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2기 장로 아카데미 수료식을 위한 12일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결단하는 기도를 하며 산 높은 곳에 이르러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장로님 부부를 위한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눈물로 성찬을 받고 서로 눈물로 뜨거운 포옹을 하였습니다, 더위에 온 몸이 땀에 절었지만 포옹하며 너무나 행복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되려고 노력해도 안된다! 결심해도 안된다! 기도해도 안된다! 말합니다.

낙심할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고 사랑하는 것은 배워서 가르쳐서 주장해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 되라, 화해하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더욱 닫힐 것입니다. 안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로 하나 된 성도들이 영광스런 교회를 세우게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가지 사실에 근거하였음을 말씀하십니다.

11절에서 말씀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생각하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라니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1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십자가 피로 죽었던 우리가 이제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죽었다가 산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못하고 하나 되지 못할 어떤 문제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신의 교회 문제로 깊은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면서 상담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목사님, 선한목자 교회 성도님들은 너무 행복하실 거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그 교회 성도님들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다들 죽으셨겠지요?^^” 죽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어느 분들은 왜 내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합니까?” “왜 나만 손해 봐야 합니까?” “제 사정을 알면 용서하라 하나 되라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 가서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며 죽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리고 그 십자가 고통이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한 희생 제물 되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 화해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먼저 손 내밀며 화목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면 해결 안될 갈등이 없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대부흥 때, 성령님께서 한국 교회 교인들의 죄악을 철저히 통회하도록 역사하신 가운데, 다툼과 분열을 해결하셨습니다. 방위량 선교사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북평양교회 강유문 전도사와 장대현교회 김장로 사이에 갈등이 심각하였습니다. 114일 저녁 집회 때, 강유문 전도사가 일어나 김장로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회중 앞에 숨김없이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방위량 선교사가 보니 김장로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가 강단 앞으로 나와 역시 자백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거슬러 싸운 죄인입니다. 교회 장로이면서 강유문 전도사 뿐만 아니라 방위량 목사님도 미워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 말에 방위량 선교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몰랐었기 때문입니다.

북평양교회 강유문 전도사가 일어나 김장로에게 다가가 자신의 두 팔을 사랑스럽게 벌리고 그와 함께 흐느껴 울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회개하고 끌어안은 것을 보며 예배당에 모인 교인들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후 김장로는 방위량 선교사에게 다가가 선교사님, 나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방위량 선교사는 아버지, 아버지...” 만 계속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스왈른 선교사님은 이 때 일을 기록에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미워하는 죄가 어떤 다른 죄 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교회의 유능한 두 지도자, 한 명의 장로와 전도사가 강단 앞에 나와 서로 부둥켜안고 마치 자신들의 심장이 터지는 듯이 울부짖었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인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그림이 분명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걸면 다 교회가 아닙니다. 교인이 많은 교회, 건물이 큰 교회 목사가 유명한 교회가 꼭 좋은 교회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유명해도 다툼과 분열이 있다면 예수님이 주님인 교회는 아닙니다. 하나됨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도무지 하나 될 수 없는 이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가 된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렇게 세우신 것은 세상을 덮고 있는 미움과 다툼의 세력을 꺽기 위함입니다.

 

 

주후 4세기에 텔레마쿠스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별명은 사막의 개혁자입니다. 그는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사막에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텔레마쿠스에게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너는 로마로 가야 한다. 그곳은 바로 너의 일터이며 그곳은 너를 부른다.” 텔레마쿠스는 즉시 로마로 발걸음을 옮기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이미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말이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는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의 칼싸움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는 경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잔인한 칼싸움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텔레마쿠스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도 로마의 원형경기장 안에는 8만이 넘는 관중들이 모여 검투사 놀이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경기장은 이미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피를 본 관중들은 흥분할 대로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막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로마로 보내셨구나!" 그는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 온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쇼인 줄 알고서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텔레마쿠스가 검투사들 사이에 들어가서 결사적으로 그 싸움을 막으려고 할 때, 사람들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급기야 경기를 진행시키던 지휘관이 검투사 가운데 한 사람에게 텔레마쿠스를 먼저 처치해버리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번쩍이는 칼과 함께 텔레마쿠스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숨이 멈추기까지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그 순간 경기장은 숙연해졌습니다. 황제 호노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했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중에는 두 검투사들 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퇴장했습니다. 주후 391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검투사들의 경기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죽었다 다시 산 성도와 하나 된 영광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할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리고 항상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13절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했습니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로 사는 자가 되고 나니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의 화해하다!” 기가막힌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날 놀라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던 큰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사라졌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욥기 2221절에서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에 다시 그러므로라고 말합니다. 이 감격으로 에베소 교회가 선 것입니다.

19-22“...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사랑의 기적, 하나 되는 기적을 이루는 교회를 세우게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갈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영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분열과 싸움의 마귀의 역사 안에서 살다가 죽을 것입니까? 사랑과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 안에 살다 죽을 것입니까?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함을 먼저 누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안에서 주위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된 교회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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