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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고린도전서 10 : 1-10)

by 【고동엽】 202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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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고린도전서 10 : 1-10)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자유의 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유의 높은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자유하게 되는 것과 자유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자유의 학습은 어려운 길이요 긴 여정의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유를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자유의 소중함을 압니다. 또한 건강을 잃어버린 뒤에야 건강의 귀중함을 압니다. 돈을 잃어버리고야 돈의 소중함도 압니다. 젊음을 다 보내고 나서야 젊음의 나날과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후회로 남은 생을 삽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유할 때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할 때에 건강의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내 손에 돈이 있을 때에 이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그 돈을 향유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역사는 자유를 찾는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은 하나의 계시적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애굽에서 노예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담부지역(擔負之役)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노예라고 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행복이다, 불행이다, 가졌다, 못가졌다 하는 그런 이야기는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단지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죽을 뿐입니다. 이는 나만이 아니라 그 후손 대대로 말입니다. 그렇다고 몸만 노예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생각도 의식도 노예화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토록 비참한 처지에서 자유한다! 해방이 된다!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적 행사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바로에게 내리시고 그 재앙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십니다. 이제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도 아닌 60만 대군이 구원을 받아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갑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시니 그 길을 통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서게 됩니다. 완전한 출애굽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저들은 너무도 감격스러워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고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계속 찬양하고 감격의 눈물로 춤을 추었습니다. 이러한 감격은 우리 또한 충분히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815,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목사님께서 저희 집으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셔서는 장로님이신 저희 할아버지를 붙드시고 "우리가 해방이 되었습니다"며 온 집안 식구들을 다 모아 놓고 서로 끌어안으며 눈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기를 시작하여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특별히 일본 사람들이 마지막에 부리지 못하게 했던 찬송인 "예수의 이름 권세여"를 목이 터져라고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정말 한 달 동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그 때에 어디 일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저 놀고, 축하하고 찬송 부르고 춤추며, 동리마다 이렇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 바로 뒤에 공산당이 따라오고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무질서의 노예가 되는 것을 몰랐고 게으름과 방탕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유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코스가 40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40년 동안 자유를 학습하게 됩니다. 자유케 되었으나, 자유하는 공부를 무려 40년 동안이나 받게 됩니다. 그 기간에 자유의 뜻을 알고, 자유의 가치를 알며, 자유를 지켜나가는 법을 알고, 자유하는 생활을 익혀 나가게 됩니다. 그들은 지정학상으로 애굽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애굽의 영토로부터, 그리고 정치적 영역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경제 문제가 있었고, 또 다른 함정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모처럼 소중하게 얻은 그 귀한 자유를 어이없게도 쉽게 다른 것에 빼앗기고 마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생활을 보게 됩니다. 애굽으로부터는 자유했으나 사실상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었습니다. 자유할 수가 없었고 자유를 지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름만의 자유인일 뿐 실상은 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애굽에서 그처럼 굉장하게 나왔는데도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자유! 그 뜻이 무엇인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는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밝혀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는 저들이 우상 숭배를 한 것입니다. 저들은 몸은 나왔으나 마음은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몸은 출애굽을 하였지만 그들의 생각, 그들의 의식은 출애굽을 하지 못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애굽에서 하던 짓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여기까지 나와서도 그대로 다시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런고로 몸의 자유가 자유는 아니더란 말입니다. 정신적인 그 노예 생활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금 우상을 섬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섬기고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하는 말이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32:8)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시어 저들을 진멸하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우상이 곧 금 우상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무서운 죄악이 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매사가 물질에 의한 가치관으로 일관되고 만다는 것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옛날 우리가 들은 말에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돈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 결혼 중매를 하는 것을 보아도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요?"라며 돈부터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 때문에 만났으니 돈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요! 사람의 인격은 아랑곳없습니다. 알고 보면, 공부를 한다, 그 사람 머리가 좋다는 것에 대한 관심도 결국은 뒤늦게 돈 좀 벌고 살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 외 별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부가 돈, 기술도 돈, 만사를 물질, 물량적으로 평가하는 이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할 때 계를 많이 하던 어느 교인 한 분이 그 계가 깨어지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는데 그 충격 때문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심방을 가 보았더니 미쳐서는 돈만 헤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돈을 빼앗으면 난리가 납니다. 그것을 보며 제 속으로 "미쳐도 영 잘못 미쳤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간절한데 돈 때문에 못합니다. 사랑하고 싶으나 돈 때문에 못합니다. 진실하고 싶으나 돈 때문에 아니 됩니다. 고상한 인격을 바라고 싶으나 돈 때문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어쩌다가 이렇게도 꼼짝 못하는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느냐는 말입니다. 몸이 묶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묶였습니다. 의식이 묶였습니다. 생각도 느낌도 몽땅 묶여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비참한 노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저축을 많이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상자는 남대문 시장에서 지게를 지고, 리어카를 끌며 아주 어렵게 사는 사람인데 5천 만원을 저금했다고 하여 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나운서가 그 수상자에게 묻기를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말하자 그의 대답인즉 1억이 소원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저 사람 그 1억 벌려고 애를 쓰다가 도중에 죽으면 어떻게 되나 하고 대단히 가엾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것을 목적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이처럼 비참한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유의 목적을 아는 자만이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시는데 이를 어떻게 보면 조금 감질나게 하십니다. 만나를 주시려면 아예 한 1년 먹을 것을 한꺼번에 주셨으면 좋으련만 매일매일 주시고, 매일매일 거두어 먹게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마고 약속하셨고 그대로 지켜 줄 것을 원하셨습니다. 성서는 분명 매일매일 거두어서 매일매일 먹고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벌어서 죽을 때까지 먹고살겠다는 것은 성서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의 일용할 양식!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주시는 은혜로 살게 되어 있는 것이지 지금 내가 저축하고 어떻게 함으로 미래가 보장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고로 그날 일하고 그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가 되고 맙니다. 현대인의 이 무서운 우상! 여기에 매인 불쌍한 사람들을 봅니다. 어느새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질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물질이 최우선적인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자유하지 못 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친척이 찾아와도 또 무엇이나 얻으러 오는가 하여 반갑지가 않습니다. 매순간 순간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무슨 대단한 것도 아니요 언젠가는 다 내어놓고 가야함에도 이렇게 미련한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죽는 줄은 모르고 돈만 벌고, 그것만 쥐고 앉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속절없이 망하는 것인데 어쩌자고 이런 비참한 노예가 되었느냐는 말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간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향락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니까 육체 주도적인 생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어떤 이가 기록하기를 세계적인 문제아인 유대 사람 둘이 있는데 그들은 곧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로이드(Freud)라고 합니다. 하나는 물질주의인 유물사관의 대표요, 하나는 성 문제의 대표자라는 것으로 매우 함축성이 있는 이야기인 줄 압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우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모 대학 교수로 강의를 하면서도 늦게야 박사 학위를 받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쓴 끝에 박사 학위를 받고 나니 학장과 모든 교수들이 축하를 하면서 이제는 한턱 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바람에 큰마음 먹고 장로님이신 이 우 교수가 "그럼 오늘 저녁만은 제가 마음껏 대접을 할터이니 당신들 원하는 곳으로 가십시다"하고 가자는 대로 따라가 보았더니 다름 아닌 기생집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기생 파티를 하는 것입니다. 이 교수님이 참다못해 그 곳을 나오면서 하는 말씀이 "내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 가 보아야 하겠는데 오늘 저녁에 드는 비용이 얼마가 되든지 내가 다 내겠소" 하고는 싸인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학장님도 조금은 민망하게 생각을 하였는지 이 우 교수를 불러서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 교수님이 학장에게 "어쩌면 그렇게들 할 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학장의 대답이 무엇이냐 하면 "당신이야 예수를 믿으니까 그렇지, 우리는 예수도 믿지 않고, 천당도 안 믿는데 돈이 없어서 못 가지 돈만 있으면 매일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이 말에 이 우 교수님은 당장 사표를 내고 그리고 낙향하고 말았습니다. 현재 부산에 모 교회의 장로님이십니다.

그러고 보면 가난하기를 잘 하였지요! 돈이 많았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사느냔 말입니까? 그렇게 뼈가 빠지게 벌어서는 향락하고 방탕 하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면 이것이 노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참으로 비참한 존재입니다. 무엇 때문에 출세하자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돈을 벌고, 무엇 때문에 그 많은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토록 땀 흘려 수고해 온 마지막 종착역이 기껏하여 육체의 쾌락, 도덕적인 타락, 이것이었더냔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까? 어느 사이에 이렇게 노예가 되어버렸습니까? 정치에는 이기고 도덕에는 패했습니다. 기술에는 이겼으나 자기를 다스림에는 실패했습니다. 갖가지 하는 일이 전부 후회 막급입니다. 몸 버리고, 마음 버리고, 인격 버리고, 이제와 생각하노니 후회와 낙담이요 절망뿐입니다. 이것이 곧 노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바로 이것 때문에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정적인 무서운 함정에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 사랑을 동반하지 않는 육체의 행위를 간음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보면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의 사랑을 보기가 힘이 듭니다. 숭고한 사랑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육체적이요, 너무나도 물질적이며, 너무나도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동경하는 아가페(agape)적인 그 고상하고 숭고한 사랑을 어디에서 들어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래가지고 서야 어찌 인간이라 하겠습니까? 이 향락! 이 방탕! 이것은 실로 망국의 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빠져 들어갔고 여기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원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오직 감사하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믿습니다. 또한 앞으로 주실 약속도 어렴풋이나마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당하는 이 고난 때문에 과거의 은혜도 부정하고 앞에 있는 약속도 믿지 않은 채 이제도 원망만 남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하는 그 속에는 또 다른 무서운 노예 생활이 깃들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믿는 이상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원망이라는 것은 하나의 체질이요 습관입니다. 그 욕망의 지정표를 계속 옮기는 사람은 절대로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가도 가도 원망뿐입니다. 이는 무슨 말씀인고 하면 하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 소원이 또 문제란 말입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동차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자동차를 하나 샀습니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는 더 좋은 것, 그리고 그 다음에는 더 큰 것 해서는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 소원만 생각하십시오.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말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피난 나올 때에 성경책 한 권만 손에 쥐고 나오면서 오직 한 가지 소원하기를 자유롭게 교회에 나가 예배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주세요 하는 이 한 가지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일을 당하여도 원망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졌으니 그 이상 이루어지는 소원은 모두가 덤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나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바 소원이 무엇입니까? 병원에 누워 있는 분이라면 "나의 소원은 건강한 몸으로 이 문밖을 나가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밖에 나가게 되면 이제는 돈 달라고 하게 되고 그리고 돈이 생기면 또 다른 소리하게 됩니다. 참으로 끝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덩어리보다도 더 두꺼운 그 욕심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니까? 그래서 가만히 보면 가난한 자가 오히려 더 만족해하고 부한 자는 더 크게 절망하는 것 같습니다.

소위 지체 높은 사람들이 더 문제가 많아서 심지어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여러분, 왜 이런 것이겠습니까? 그 욕망이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들고 "하나님 이것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하고는 그 마음이 변덕이 없어야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없더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오직 소원이 하나, 이제 애굽에서 나가 광야에서 죽더라도 자유인으로 죽고 싶었습니다. 그 소원은 성취되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너무도 좋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이 있었으며, 깊이 깊이 감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는 물이 없다고 원망입니다. 물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배가 고프다며 떡과 고기가 없음을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떡과 고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하는 저들의 이야기인즉 "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내었느냐?"고 원망입니다.

이것은 결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이 끝없는 원망의 이야기! 지금 내가 무엇을 원망하고 있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진정 원망할 만한 것이 되는가를 말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맨 처음 소원이 무엇이었는가를 찾아 거기에 만족할 것입니다. 원망은 결국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됩니다.

출애굽기 168절에 보면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망은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굽 땅에서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원망을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알았다 하시며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28-29)고 말씀하십니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였으니 죽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참으로 말조심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 전부가 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급하고, 아무리 괴로워도 말 조심은 하여야 합니다. 원망하는 죄! 그 죄의 결국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는 양심의 자유가 자유요, 영혼의 자유가 최고의 자유입니다. 그 때문에 원망하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없으며, 감사가 없는 곳에는 노예의 생활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오직 주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는 자는 증오의 노예가 되고 받기만 하는 자는 받는 것의 노예가 되어 더 받지 못함으로 괴롭고 원망합니다. 또한 감사할 때에만 자유가 있습니다. 부하고도 원망한다면 그는 노예로 사는 사람이요 가난하여도 감사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자유인입니다. 감옥에 있어도 찬송할 수 있다면 그는 자유인이요 넓은 세상을 뛰는 것 같으나 방탕한 자는 무서운 노예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직 참 믿음 안에서만 자유가 있습니다. 저들이 원망한 것은 자기 욕망, 자기 방법, 자기 시간 안에서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내가 권하는 시간에 주시기 않는다고,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안 된다고 하여 지금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 고집이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깨어질 때에 라야 진정한 감사가 있고, 감사하는 자만이 언제,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가 자유인입니다.

이제 오직 믿음! 오직 사랑! 오직 감사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진리에 살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깨끗하게 살아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함으로 다시는 우상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만을 사랑함으로 다시는 나 자신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찾아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유의 특권을 만끽하는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하시려고 엄청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의 뜻마저 알지를 못하고, 오히려 이자유를 죄의 기회로 삼아 방탕과 향락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가면서 스스로 노예 되고 있는 저희들의 비참한 모습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조그마한 소원, 조그마한 현실, 이것 때문에 지난날 받았던 그 엄청난 은혜를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약속도 보지 못한 채 원망과 불평으로 계속 노예 생활에 젖어드는 미련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이제는 진리를 따라 자유하게 하시고 사랑함으로 승리하게 하시며 감사함으로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고린도전서 10 : 1-10)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자유의 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유의 높은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자유하게 되는 것과 자유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자유의 학습은 어려운 길이요 긴 여정의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유를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자유의 소중함을 압니다. 또한 건강을 잃어버린 뒤에야 건강의 귀중함을 압니다. 돈을 잃어버리고야 돈의 소중함도 압니다. 젊음을 다 보내고 나서야 젊음의 나날과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후회로 남은 생을 삽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유할 때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할 때에 건강의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내 손에 돈이 있을 때에 이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그 돈을 향유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역사는 자유를 찾는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은 하나의 계시적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애굽에서 노예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담부지역(擔負之役)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노예라고 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행복이다, 불행이다, 가졌다, 못가졌다 하는 그런 이야기는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단지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죽을 뿐입니다. 이는 나만이 아니라 그 후손 대대로 말입니다. 그렇다고 몸만 노예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생각도 의식도 노예화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토록 비참한 처지에서 자유한다! 해방이 된다!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적 행사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바로에게 내리시고 그 재앙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십니다. 이제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도 아닌 60만 대군이 구원을 받아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갑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시니 그 길을 통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서게 됩니다. 완전한 출애굽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저들은 너무도 감격스러워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고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계속 찬양하고 감격의 눈물로 춤을 추었습니다. 이러한 감격은 우리 또한 충분히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815,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목사님께서 저희 집으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셔서는 장로님이신 저희 할아버지를 붙드시고 "우리가 해방이 되었습니다"며 온 집안 식구들을 다 모아 놓고 서로 끌어안으며 눈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기를 시작하여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특별히 일본 사람들이 마지막에 부리지 못하게 했던 찬송인 "예수의 이름 권세여"를 목이 터져라고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정말 한 달 동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그 때에 어디 일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저 놀고, 축하하고 찬송 부르고 춤추며, 동리마다 이렇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 바로 뒤에 공산당이 따라오고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무질서의 노예가 되는 것을 몰랐고 게으름과 방탕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유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코스가 40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40년 동안 자유를 학습하게 됩니다. 자유케 되었으나, 자유하는 공부를 무려 40년 동안이나 받게 됩니다. 그 기간에 자유의 뜻을 알고, 자유의 가치를 알며, 자유를 지켜나가는 법을 알고, 자유하는 생활을 익혀 나가게 됩니다. 그들은 지정학상으로 애굽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애굽의 영토로부터, 그리고 정치적 영역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경제 문제가 있었고, 또 다른 함정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모처럼 소중하게 얻은 그 귀한 자유를 어이없게도 쉽게 다른 것에 빼앗기고 마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생활을 보게 됩니다. 애굽으로부터는 자유했으나 사실상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었습니다. 자유할 수가 없었고 자유를 지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름만의 자유인일 뿐 실상은 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애굽에서 그처럼 굉장하게 나왔는데도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자유! 그 뜻이 무엇인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는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밝혀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는 저들이 우상 숭배를 한 것입니다. 저들은 몸은 나왔으나 마음은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몸은 출애굽을 하였지만 그들의 생각, 그들의 의식은 출애굽을 하지 못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애굽에서 하던 짓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여기까지 나와서도 그대로 다시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런고로 몸의 자유가 자유는 아니더란 말입니다. 정신적인 그 노예 생활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금 우상을 섬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섬기고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하는 말이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32:8)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시어 저들을 진멸하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우상이 곧 금 우상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무서운 죄악이 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매사가 물질에 의한 가치관으로 일관되고 만다는 것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옛날 우리가 들은 말에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돈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 결혼 중매를 하는 것을 보아도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요?"라며 돈부터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 때문에 만났으니 돈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요! 사람의 인격은 아랑곳없습니다. 알고 보면, 공부를 한다, 그 사람 머리가 좋다는 것에 대한 관심도 결국은 뒤늦게 돈 좀 벌고 살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 외 별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부가 돈, 기술도 돈, 만사를 물질, 물량적으로 평가하는 이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할 때 계를 많이 하던 어느 교인 한 분이 그 계가 깨어지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는데 그 충격 때문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심방을 가 보았더니 미쳐서는 돈만 헤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돈을 빼앗으면 난리가 납니다. 그것을 보며 제 속으로 "미쳐도 영 잘못 미쳤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간절한데 돈 때문에 못합니다. 사랑하고 싶으나 돈 때문에 못합니다. 진실하고 싶으나 돈 때문에 아니 됩니다. 고상한 인격을 바라고 싶으나 돈 때문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어쩌다가 이렇게도 꼼짝 못하는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느냐는 말입니다. 몸이 묶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묶였습니다. 의식이 묶였습니다. 생각도 느낌도 몽땅 묶여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비참한 노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저축을 많이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상자는 남대문 시장에서 지게를 지고, 리어카를 끌며 아주 어렵게 사는 사람인데 5천 만원을 저금했다고 하여 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나운서가 그 수상자에게 묻기를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말하자 그의 대답인즉 1억이 소원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저 사람 그 1억 벌려고 애를 쓰다가 도중에 죽으면 어떻게 되나 하고 대단히 가엾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것을 목적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이처럼 비참한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유의 목적을 아는 자만이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시는데 이를 어떻게 보면 조금 감질나게 하십니다. 만나를 주시려면 아예 한 1년 먹을 것을 한꺼번에 주셨으면 좋으련만 매일매일 주시고, 매일매일 거두어 먹게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마고 약속하셨고 그대로 지켜 줄 것을 원하셨습니다. 성서는 분명 매일매일 거두어서 매일매일 먹고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벌어서 죽을 때까지 먹고살겠다는 것은 성서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의 일용할 양식!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주시는 은혜로 살게 되어 있는 것이지 지금 내가 저축하고 어떻게 함으로 미래가 보장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고로 그날 일하고 그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가 되고 맙니다. 현대인의 이 무서운 우상! 여기에 매인 불쌍한 사람들을 봅니다. 어느새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질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물질이 최우선적인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자유하지 못 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친척이 찾아와도 또 무엇이나 얻으러 오는가 하여 반갑지가 않습니다. 매순간 순간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무슨 대단한 것도 아니요 언젠가는 다 내어놓고 가야함에도 이렇게 미련한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죽는 줄은 모르고 돈만 벌고, 그것만 쥐고 앉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속절없이 망하는 것인데 어쩌자고 이런 비참한 노예가 되었느냐는 말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간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향락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니까 육체 주도적인 생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어떤 이가 기록하기를 세계적인 문제아인 유대 사람 둘이 있는데 그들은 곧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로이드(Freud)라고 합니다. 하나는 물질주의인 유물사관의 대표요, 하나는 성 문제의 대표자라는 것으로 매우 함축성이 있는 이야기인 줄 압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우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모 대학 교수로 강의를 하면서도 늦게야 박사 학위를 받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쓴 끝에 박사 학위를 받고 나니 학장과 모든 교수들이 축하를 하면서 이제는 한턱 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바람에 큰마음 먹고 장로님이신 이 우 교수가 "그럼 오늘 저녁만은 제가 마음껏 대접을 할터이니 당신들 원하는 곳으로 가십시다"하고 가자는 대로 따라가 보았더니 다름 아닌 기생집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기생 파티를 하는 것입니다. 이 교수님이 참다못해 그 곳을 나오면서 하는 말씀이 "내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 가 보아야 하겠는데 오늘 저녁에 드는 비용이 얼마가 되든지 내가 다 내겠소" 하고는 싸인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학장님도 조금은 민망하게 생각을 하였는지 이 우 교수를 불러서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 교수님이 학장에게 "어쩌면 그렇게들 할 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학장의 대답이 무엇이냐 하면 "당신이야 예수를 믿으니까 그렇지, 우리는 예수도 믿지 않고, 천당도 안 믿는데 돈이 없어서 못 가지 돈만 있으면 매일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이 말에 이 우 교수님은 당장 사표를 내고 그리고 낙향하고 말았습니다. 현재 부산에 모 교회의 장로님이십니다.

그러고 보면 가난하기를 잘 하였지요! 돈이 많았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사느냔 말입니까? 그렇게 뼈가 빠지게 벌어서는 향락하고 방탕 하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면 이것이 노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참으로 비참한 존재입니다. 무엇 때문에 출세하자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돈을 벌고, 무엇 때문에 그 많은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토록 땀 흘려 수고해 온 마지막 종착역이 기껏하여 육체의 쾌락, 도덕적인 타락, 이것이었더냔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까? 어느 사이에 이렇게 노예가 되어버렸습니까? 정치에는 이기고 도덕에는 패했습니다. 기술에는 이겼으나 자기를 다스림에는 실패했습니다. 갖가지 하는 일이 전부 후회 막급입니다. 몸 버리고, 마음 버리고, 인격 버리고, 이제와 생각하노니 후회와 낙담이요 절망뿐입니다. 이것이 곧 노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바로 이것 때문에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정적인 무서운 함정에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 사랑을 동반하지 않는 육체의 행위를 간음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보면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의 사랑을 보기가 힘이 듭니다. 숭고한 사랑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육체적이요, 너무나도 물질적이며, 너무나도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동경하는 아가페(agape)적인 그 고상하고 숭고한 사랑을 어디에서 들어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래가지고 서야 어찌 인간이라 하겠습니까? 이 향락! 이 방탕! 이것은 실로 망국의 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빠져 들어갔고 여기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원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오직 감사하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믿습니다. 또한 앞으로 주실 약속도 어렴풋이나마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당하는 이 고난 때문에 과거의 은혜도 부정하고 앞에 있는 약속도 믿지 않은 채 이제도 원망만 남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하는 그 속에는 또 다른 무서운 노예 생활이 깃들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믿는 이상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원망이라는 것은 하나의 체질이요 습관입니다. 그 욕망의 지정표를 계속 옮기는 사람은 절대로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가도 가도 원망뿐입니다. 이는 무슨 말씀인고 하면 하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 소원이 또 문제란 말입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동차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자동차를 하나 샀습니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는 더 좋은 것, 그리고 그 다음에는 더 큰 것 해서는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 소원만 생각하십시오.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말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피난 나올 때에 성경책 한 권만 손에 쥐고 나오면서 오직 한 가지 소원하기를 자유롭게 교회에 나가 예배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주세요 하는 이 한 가지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일을 당하여도 원망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졌으니 그 이상 이루어지는 소원은 모두가 덤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나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바 소원이 무엇입니까? 병원에 누워 있는 분이라면 "나의 소원은 건강한 몸으로 이 문밖을 나가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밖에 나가게 되면 이제는 돈 달라고 하게 되고 그리고 돈이 생기면 또 다른 소리하게 됩니다. 참으로 끝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덩어리보다도 더 두꺼운 그 욕심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니까? 그래서 가만히 보면 가난한 자가 오히려 더 만족해하고 부한 자는 더 크게 절망하는 것 같습니다.

소위 지체 높은 사람들이 더 문제가 많아서 심지어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여러분, 왜 이런 것이겠습니까? 그 욕망이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들고 "하나님 이것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하고는 그 마음이 변덕이 없어야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없더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오직 소원이 하나, 이제 애굽에서 나가 광야에서 죽더라도 자유인으로 죽고 싶었습니다. 그 소원은 성취되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너무도 좋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이 있었으며, 깊이 깊이 감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는 물이 없다고 원망입니다. 물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배가 고프다며 떡과 고기가 없음을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떡과 고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하는 저들의 이야기인즉 "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내었느냐?"고 원망입니다.

이것은 결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이 끝없는 원망의 이야기! 지금 내가 무엇을 원망하고 있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진정 원망할 만한 것이 되는가를 말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맨 처음 소원이 무엇이었는가를 찾아 거기에 만족할 것입니다. 원망은 결국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됩니다.

출애굽기 168절에 보면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망은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굽 땅에서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원망을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알았다 하시며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28-29)고 말씀하십니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였으니 죽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참으로 말조심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 전부가 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급하고, 아무리 괴로워도 말 조심은 하여야 합니다. 원망하는 죄! 그 죄의 결국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는 양심의 자유가 자유요, 영혼의 자유가 최고의 자유입니다. 그 때문에 원망하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없으며, 감사가 없는 곳에는 노예의 생활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오직 주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는 자는 증오의 노예가 되고 받기만 하는 자는 받는 것의 노예가 되어 더 받지 못함으로 괴롭고 원망합니다. 또한 감사할 때에만 자유가 있습니다. 부하고도 원망한다면 그는 노예로 사는 사람이요 가난하여도 감사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자유인입니다. 감옥에 있어도 찬송할 수 있다면 그는 자유인이요 넓은 세상을 뛰는 것 같으나 방탕한 자는 무서운 노예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직 참 믿음 안에서만 자유가 있습니다. 저들이 원망한 것은 자기 욕망, 자기 방법, 자기 시간 안에서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내가 권하는 시간에 주시기 않는다고,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안 된다고 하여 지금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 고집이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깨어질 때에 라야 진정한 감사가 있고, 감사하는 자만이 언제,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가 자유인입니다.

이제 오직 믿음! 오직 사랑! 오직 감사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진리에 살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깨끗하게 살아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함으로 다시는 우상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만을 사랑함으로 다시는 나 자신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찾아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유의 특권을 만끽하는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하시려고 엄청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의 뜻마저 알지를 못하고, 오히려 이자유를 죄의 기회로 삼아 방탕과 향락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가면서 스스로 노예 되고 있는 저희들의 비참한 모습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조그마한 소원, 조그마한 현실, 이것 때문에 지난날 받았던 그 엄청난 은혜를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약속도 보지 못한 채 원망과 불평으로 계속 노예 생활에 젖어드는 미련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이제는 진리를 따라 자유하게 하시고 사랑함으로 승리하게 하시며 감사함으로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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