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한복음 21장 18절~23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재미있는 설화 한 도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공(細工)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높이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범선(帆船)이 되어 가지고 사람들의 왕래를 도울 뿐 아니라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높이높이 자라나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주겠다"라고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했던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공을 받아 작은 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가 핥아먹고 개가 핥아먹고 하는 먹이통이 되어 마구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되어 대양(大洋)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 마리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없을 때에는 쓸모 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한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엔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어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듯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단 말인가'하고 그는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숱하게 있을 좋은 처소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 천덕꾸러기 말구유에 태어나시는 것이어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할 수 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는 그 보잘것없는 조각배에 올라앉으시고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어서,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그렇듯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의 설화입니다.
여러분, 실패는 무엇이고 성공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떤 것이 영광이고 어떤 것이 굴욕입니까? 영광이 다 무엇이며 굴욕이 다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모두가 부질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 것입니까? 젊은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입학을 한다든지 바라던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마치 소원성취 다 한 것처럼 희희낙락합니다마는 몇 시간 못 가는, 한 낱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경은 하찮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져보아도 그렇고, 되어보아도 그렇습니다. 칭찬을 받아본들 그렇고 그러하며, 표창이나 훈장을 받아본들 그게 대숩니까? 지위도 명예도 별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야말로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만 참된 보람을 찾고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의 작품이라고 볼 때, 그 작품에서 어떤 사람은 조연적(助演的)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주연적(主演的)으로 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회사를 두고 본다면 '사장'은 주연급이고 여타의 직원들은 조연급이라 할 수 있으며, 가정에서는 가장(家長)이 주연급이요 다른 식구들은 다 조연급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연급들은 뭐가 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주연급에게 귀속시킵니다. 조연자인 나는 할 바를 다했는데 주연자가 멍청해서 잘못하니까 내 수고는 헛일이 되고 말았다는 투로 원망을 합니다. 한편 주연자는 어떻습니까? 이건 정치가 잘못된 탓이다, 위정자가 흐릿해서다, 결코 내 탓이 아니다 라고 책임을 미룹니다. 결국은 아무도 책임의식을 가지는 사람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스스로 주연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주연의식(主演意識) 내지 주인의식(主人意識)을 분명히 하고 살 것입니다. 작품의 성패가 나에게 달려 있다, 내 책임이 막중하다, 내가 이 일에 책임을 질 것이다---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야망이 없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나라의 왕이 되시면 자기는 그 우편에 앉아 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맙니다. 꿈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적어도 그는 "내가 예수님의 수제자요"하고 나서서 수제자된 구실을 다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같이 지든지 끝까지 따랐어야 할 사람인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형편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내 양심부터가 나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예언하실 때에 베드로는 결코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하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부끄러워 결국은 도망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부활하십니다. 베드로는 지금 너무나도 비참해진 자신을 스스로 저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각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지난날은 묻지 아니하시고, 과거의 잘못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렇게 물으실 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느냐, 지금도 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하고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어떤 설명도 더하지 아니하시고 베드로에게 전도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내가 십자가를 짐으로 구속한 고귀한 양들을 네가 맡아서 먹이라고 하는 중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는 베드로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심이요, 다시 한번 인정해주시는, 엄청나게 망극한 은혜인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운명을 미리 정해주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18절)"---여기서 '팔을 벌린다'고 함은 십자가에 못 박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임을, 평생 충성을 다하고 끝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소화합니까? 베드로가 좀더 신중한 사람이었다면,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을 수 있음은 복이라든지, 나같이 허물 많은 사람에게 이렇듯 엄청난 일을 맡기심은 영광이라든지, 늙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은 큰 은혜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주님처럼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렇듯 놀랍고 영광된 은혜의 시각에, 바로 그 시각에 베드로는 실수를 합니다. 그는 이 큰 영광을 은혜가 아닌 형벌로 소화합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이같은 형벌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축복은 생각지도 않고 "손을 벌리고 죽는다"라는 사실만을 염려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20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사도 요한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요한이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대신 '사랑하는 제자'라고 한 것인 줄 압니다. 베드로는 이 요한에 대하여 퍽이나 신경을 씁니다. 마음을 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지만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재판정에도 갔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그 현장에서 그 장면을 목도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 십자가 밑에서 지킨 제자였습니다. 요한과 비교할 때, 베드로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에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요한으로 인하여 마음이 산란해져 있음을 책망하시며, 너의 임무는 오직 나를 따르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는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지금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을 비롯하여 자기가 맡게 될 중요한 사명까지 모든 것을 율법적 관계에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자기의 의(義)에 대한 대가도 아니요, 자기 경건에 대한 특별한 보상도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에게 맡겨질 사명이나 수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에 대해서 보상적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핍박과 고난, 심지어는 순교까지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순교야말로 으뜸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그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꼭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 절대적인 성실, 절대적인 정직, 자기 진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정직함이 필요합니다. 나의 모습에 대해서나, 자기 처지에 대해서나, 자기 운명에 대해서나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좌우전후를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은혜 앞에 정직할 수만 있으면 됩니다.
둘째, 순수한 동기가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동기란 선명해야 할 것이요, 불변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외에 다른 동기가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위를 가만히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좋은 뜻으로 출발했다가 마지막에 가서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시작한 일입니까?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셋째, 오직 한마음이어야 합니다. 감추어진 의미나 뜻이 따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단순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뿐이 시요,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할 것입니다.
넷째, 위선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되며, 평가를 받으려 해서도 안됩니다. 이 같은 위선자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페트라르카(Petrarca, Francesco)는 '사람이란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그 마음속에 평안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 평화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가 탐욕입니다.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 분수에 넘치도록 더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둘째는 분노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냉정함을 찾아서 항상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야망입니다. 지나친 야망이, 즉 무엇이 되어보고자 하는 성취욕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넷째는 자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랑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써서 그들로부터 존경받고 칭찬 받으려고 하는 마음, 무엇인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평화를 깨뜨립니다. 사람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다섯째는 질투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질투입니다. 질투는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질투는 열등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은 결코 남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넉넉한 사람은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줄곧 1등만 하는 사람은 10등 하는 사람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높이 오른 사람은 낮은 사람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질투를 하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내 인격의 성장이 정지된 때입니다. 거기가 끝이요 한계입니다. 질투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내가 내려가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내 인격과 내 도덕성과 내 존재가 벌써 비참해지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더 올라갈 힘과 성장할 힘이 없을 때에 앉은 채로 남을 끌어내리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질투입니다. 나보다 앞서는 자를 끌어내리려는 그 마음은 비참한 열등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이웃을 바로 볼 수도 자기를 바로 볼 수도 없게 됩니다. 이렇듯 어느 사이에 질투의 노예가 될 때에 우리는 무서운 운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스스로 부름 받았다고 하는 자기의식을 분명히 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간도, 업적도, 양상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절대적 충성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 기뻐하신다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자기 위치를 망각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9절)"---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베드로가 죽는 목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목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도 하지만 죽음으로써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내가 성공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내가 실패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야만 영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만 생각할 것입니다. 오히려 핍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질 수 있는 으뜸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째서 이 시각에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신의 고난 당하는 것이 자신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에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압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을 압니다.
성경을 봅시다.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 교회가 시작될 때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체포되어 목베임을 당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해볼 겨를도 없이 교회가 시작되는 벽두에 순교하고 맙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러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베드로는 노년까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뒤늦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습니다. 그는 복음의 전파와 순교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반면에 사도 요한은 처음에는 밧모섬에 정배가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마는 다시 에베소로 와서 백 세가 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은혜를 입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에베소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요한복음을 쓰고, 밧모섬에서 묵시를 받고, 그리고 세상을 떠납니다. 사도 요한은 오래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각양(各樣)이며, 또한 개인적입니다. 오래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하면 당장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도 성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이런 모양으로 어떤 사람은 저런 모양으로, 모든 사람을 다양하게 다원적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이렇듯 여러 모양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동시에 세상에서 평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시간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잘못되었느냐 잘되었느냐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좀더 먼 훗날에 평가해야 합니다. 종말론적인 평가를 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늘 하나님과 절대적 관계에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종속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존재의식이 종속될 때에는 노예입니다. 가치관이 종속될 때에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서는 안됩니다. 비록 결혼을 해서 평생을 같이할 부부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내에게 매인 것도 아니요 남편에게 매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떳떳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남편을 탓하면서 내 운명을 그르쳐서도 안되고, 아내를 탓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해서도 안됩니다. 자식이 귀하지만 자식 위해 내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 모습은 내가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매일 것이 아닙니다. 남을 탓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주변의 여건이나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윌리엄 커레이(William Carey) 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사람으로 인도에 가서 선교 활동을 많이 한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의 한 분입니다. 그는 언어에도 능통하여 성경을 34개 국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인은 물론 모든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높이 존경하여 그를 만나고자 했으며 또한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어느 날, 큰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윌리엄 커레이를 모시고 베푸는 환영회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으레 못된 사람이 끼게 마련인가봅니다. 그곳에도 윌리엄 커레이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에 배가 아파서 망신을 주려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에게 참으로 무례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젊었을 때에 구두를 만드는 직공이었다면서요?" 과거를 들춥니다.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순간에 이렇듯 불쾌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물음에 윌리엄 커레이는 껄껄 웃으면서 평화로운 얼굴로 대답합니다. "자매님께서는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 줄 모릅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라 깁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신다가 해진 구두를 깁는 직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를 부르심으로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선교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일순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받는 보상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시나, 그 점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까? 그것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갈 뿐입니다. 남에게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이 때로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보상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것은 결코 좋은 마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증상이 깊어질 때에 나 자신의 페이스(pace)를 잃어버리게 되고 필경에는 내 존재, 내 운명까지 비참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습니다. 모름지기 나는 내가 할 일을 할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며 세 명의 종에게 각각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 나누어 맡겼습니다. 성경말씀에는 없으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이 원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 대한 질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한 달란트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마저 그 돈과 함께 땅에 묻어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간의 달란트를 주셨든지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든지 충실하게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보상도 바라지 말 것이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음쓰지 말 것입니다. 고난이 있습니까? 은혜의 계기입니다. 순교가 있습니까? 영광입니다. 우리는 업적이나 스코어나 성적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닙니다.
우리는 충성만 다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네가 마음을 쓰고 있는 요한을 머물게 하든 떠나게 하든, 그것은 베드로 너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감당해야 할 유일한 의무는 오직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확인시키고 계십니다. 너는 나만을 따르고 사랑하면 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한복음 21장 18절~23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재미있는 설화 한 도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공(細工)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높이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범선(帆船)이 되어 가지고 사람들의 왕래를 도울 뿐 아니라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높이높이 자라나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주겠다"라고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했던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공을 받아 작은 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가 핥아먹고 개가 핥아먹고 하는 먹이통이 되어 마구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되어 대양(大洋)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 마리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없을 때에는 쓸모 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한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엔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어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듯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단 말인가'하고 그는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숱하게 있을 좋은 처소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 천덕꾸러기 말구유에 태어나시는 것이어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할 수 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는 그 보잘것없는 조각배에 올라앉으시고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어서,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그렇듯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의 설화입니다.
여러분, 실패는 무엇이고 성공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떤 것이 영광이고 어떤 것이 굴욕입니까? 영광이 다 무엇이며 굴욕이 다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모두가 부질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 것입니까? 젊은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입학을 한다든지 바라던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마치 소원성취 다 한 것처럼 희희낙락합니다마는 몇 시간 못 가는, 한 낱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경은 하찮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져보아도 그렇고, 되어보아도 그렇습니다. 칭찬을 받아본들 그렇고 그러하며, 표창이나 훈장을 받아본들 그게 대숩니까? 지위도 명예도 별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야말로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만 참된 보람을 찾고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의 작품이라고 볼 때, 그 작품에서 어떤 사람은 조연적(助演的)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주연적(主演的)으로 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회사를 두고 본다면 '사장'은 주연급이고 여타의 직원들은 조연급이라 할 수 있으며, 가정에서는 가장(家長)이 주연급이요 다른 식구들은 다 조연급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연급들은 뭐가 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주연급에게 귀속시킵니다. 조연자인 나는 할 바를 다했는데 주연자가 멍청해서 잘못하니까 내 수고는 헛일이 되고 말았다는 투로 원망을 합니다. 한편 주연자는 어떻습니까? 이건 정치가 잘못된 탓이다, 위정자가 흐릿해서다, 결코 내 탓이 아니다 라고 책임을 미룹니다. 결국은 아무도 책임의식을 가지는 사람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스스로 주연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주연의식(主演意識) 내지 주인의식(主人意識)을 분명히 하고 살 것입니다. 작품의 성패가 나에게 달려 있다, 내 책임이 막중하다, 내가 이 일에 책임을 질 것이다---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야망이 없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나라의 왕이 되시면 자기는 그 우편에 앉아 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맙니다. 꿈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적어도 그는 "내가 예수님의 수제자요"하고 나서서 수제자된 구실을 다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같이 지든지 끝까지 따랐어야 할 사람인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형편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내 양심부터가 나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예언하실 때에 베드로는 결코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하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부끄러워 결국은 도망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부활하십니다. 베드로는 지금 너무나도 비참해진 자신을 스스로 저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각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지난날은 묻지 아니하시고, 과거의 잘못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렇게 물으실 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느냐, 지금도 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하고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어떤 설명도 더하지 아니하시고 베드로에게 전도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내가 십자가를 짐으로 구속한 고귀한 양들을 네가 맡아서 먹이라고 하는 중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는 베드로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심이요, 다시 한번 인정해주시는, 엄청나게 망극한 은혜인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운명을 미리 정해주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18절)"---여기서 '팔을 벌린다'고 함은 십자가에 못 박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임을, 평생 충성을 다하고 끝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소화합니까? 베드로가 좀더 신중한 사람이었다면,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을 수 있음은 복이라든지, 나같이 허물 많은 사람에게 이렇듯 엄청난 일을 맡기심은 영광이라든지, 늙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은 큰 은혜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주님처럼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렇듯 놀랍고 영광된 은혜의 시각에, 바로 그 시각에 베드로는 실수를 합니다. 그는 이 큰 영광을 은혜가 아닌 형벌로 소화합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이같은 형벌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축복은 생각지도 않고 "손을 벌리고 죽는다"라는 사실만을 염려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20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사도 요한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요한이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대신 '사랑하는 제자'라고 한 것인 줄 압니다. 베드로는 이 요한에 대하여 퍽이나 신경을 씁니다. 마음을 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지만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재판정에도 갔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그 현장에서 그 장면을 목도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 십자가 밑에서 지킨 제자였습니다. 요한과 비교할 때, 베드로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에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요한으로 인하여 마음이 산란해져 있음을 책망하시며, 너의 임무는 오직 나를 따르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는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지금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을 비롯하여 자기가 맡게 될 중요한 사명까지 모든 것을 율법적 관계에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자기의 의(義)에 대한 대가도 아니요, 자기 경건에 대한 특별한 보상도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에게 맡겨질 사명이나 수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에 대해서 보상적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핍박과 고난, 심지어는 순교까지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순교야말로 으뜸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그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꼭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 절대적인 성실, 절대적인 정직, 자기 진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정직함이 필요합니다. 나의 모습에 대해서나, 자기 처지에 대해서나, 자기 운명에 대해서나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좌우전후를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은혜 앞에 정직할 수만 있으면 됩니다.
둘째, 순수한 동기가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동기란 선명해야 할 것이요, 불변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외에 다른 동기가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위를 가만히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좋은 뜻으로 출발했다가 마지막에 가서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시작한 일입니까?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셋째, 오직 한마음이어야 합니다. 감추어진 의미나 뜻이 따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단순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뿐이 시요,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할 것입니다.
넷째, 위선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되며, 평가를 받으려 해서도 안됩니다. 이 같은 위선자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페트라르카(Petrarca, Francesco)는 '사람이란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그 마음속에 평안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 평화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가 탐욕입니다.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 분수에 넘치도록 더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둘째는 분노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냉정함을 찾아서 항상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야망입니다. 지나친 야망이, 즉 무엇이 되어보고자 하는 성취욕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넷째는 자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랑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써서 그들로부터 존경받고 칭찬 받으려고 하는 마음, 무엇인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평화를 깨뜨립니다. 사람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다섯째는 질투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질투입니다. 질투는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질투는 열등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은 결코 남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넉넉한 사람은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줄곧 1등만 하는 사람은 10등 하는 사람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높이 오른 사람은 낮은 사람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질투를 하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내 인격의 성장이 정지된 때입니다. 거기가 끝이요 한계입니다. 질투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내가 내려가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내 인격과 내 도덕성과 내 존재가 벌써 비참해지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더 올라갈 힘과 성장할 힘이 없을 때에 앉은 채로 남을 끌어내리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질투입니다. 나보다 앞서는 자를 끌어내리려는 그 마음은 비참한 열등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이웃을 바로 볼 수도 자기를 바로 볼 수도 없게 됩니다. 이렇듯 어느 사이에 질투의 노예가 될 때에 우리는 무서운 운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스스로 부름 받았다고 하는 자기의식을 분명히 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간도, 업적도, 양상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절대적 충성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 기뻐하신다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자기 위치를 망각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9절)"---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베드로가 죽는 목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목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도 하지만 죽음으로써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내가 성공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내가 실패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야만 영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만 생각할 것입니다. 오히려 핍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질 수 있는 으뜸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째서 이 시각에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신의 고난 당하는 것이 자신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에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압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을 압니다.
성경을 봅시다.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 교회가 시작될 때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체포되어 목베임을 당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해볼 겨를도 없이 교회가 시작되는 벽두에 순교하고 맙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러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베드로는 노년까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뒤늦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습니다. 그는 복음의 전파와 순교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반면에 사도 요한은 처음에는 밧모섬에 정배가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마는 다시 에베소로 와서 백 세가 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은혜를 입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에베소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요한복음을 쓰고, 밧모섬에서 묵시를 받고, 그리고 세상을 떠납니다. 사도 요한은 오래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각양(各樣)이며, 또한 개인적입니다. 오래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하면 당장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도 성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이런 모양으로 어떤 사람은 저런 모양으로, 모든 사람을 다양하게 다원적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이렇듯 여러 모양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동시에 세상에서 평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시간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잘못되었느냐 잘되었느냐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좀더 먼 훗날에 평가해야 합니다. 종말론적인 평가를 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늘 하나님과 절대적 관계에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종속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존재의식이 종속될 때에는 노예입니다. 가치관이 종속될 때에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서는 안됩니다. 비록 결혼을 해서 평생을 같이할 부부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내에게 매인 것도 아니요 남편에게 매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떳떳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남편을 탓하면서 내 운명을 그르쳐서도 안되고, 아내를 탓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해서도 안됩니다. 자식이 귀하지만 자식 위해 내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 모습은 내가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매일 것이 아닙니다. 남을 탓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주변의 여건이나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윌리엄 커레이(William Carey) 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사람으로 인도에 가서 선교 활동을 많이 한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의 한 분입니다. 그는 언어에도 능통하여 성경을 34개 국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인은 물론 모든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높이 존경하여 그를 만나고자 했으며 또한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어느 날, 큰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윌리엄 커레이를 모시고 베푸는 환영회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으레 못된 사람이 끼게 마련인가봅니다. 그곳에도 윌리엄 커레이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에 배가 아파서 망신을 주려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에게 참으로 무례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젊었을 때에 구두를 만드는 직공이었다면서요?" 과거를 들춥니다.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순간에 이렇듯 불쾌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물음에 윌리엄 커레이는 껄껄 웃으면서 평화로운 얼굴로 대답합니다. "자매님께서는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 줄 모릅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라 깁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신다가 해진 구두를 깁는 직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를 부르심으로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선교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일순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받는 보상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시나, 그 점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까? 그것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갈 뿐입니다. 남에게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이 때로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보상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것은 결코 좋은 마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증상이 깊어질 때에 나 자신의 페이스(pace)를 잃어버리게 되고 필경에는 내 존재, 내 운명까지 비참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습니다. 모름지기 나는 내가 할 일을 할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며 세 명의 종에게 각각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 나누어 맡겼습니다. 성경말씀에는 없으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이 원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 대한 질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한 달란트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마저 그 돈과 함께 땅에 묻어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간의 달란트를 주셨든지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든지 충실하게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보상도 바라지 말 것이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음쓰지 말 것입니다. 고난이 있습니까? 은혜의 계기입니다. 순교가 있습니까? 영광입니다. 우리는 업적이나 스코어나 성적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닙니다.
우리는 충성만 다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네가 마음을 쓰고 있는 요한을 머물게 하든 떠나게 하든, 그것은 베드로 너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감당해야 할 유일한 의무는 오직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확인시키고 계십니다. 너는 나만을 따르고 사랑하면 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고린도전서 10 : 1-10) (0) | 2023.11.27 |
---|---|
말씀 따라 사는 청년(시편 119편 9절~16절) (0) | 2023.11.26 |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22절) (0) | 2023.11.14 |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히브리서 6장 9절~15절) (0) | 2023.11.11 |
신앙인의 자기 인식(로마서 6장 6절~11절) (0) | 2023.1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