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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열왕기상 3장 4절~15절)

by 【고동엽】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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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열왕기상 3장 4절~15절)

1945년 4월 12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서 이 날 미국인들은 믿기가 어려운 소식을 접합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겁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을 한 겁니다. 이 전쟁중에 이런 충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의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야 하는 부통령 헨리 투루먼 이었습니다. 루즈벨트는 미국에서는 아주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미국의 역사상 12년간 3회에 걸쳐서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1929년 시작된 미국의 대 공황에 지혜롭게 풀어간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국의 역사적인물이며 은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국민에게 이런 호소를 해서 더 유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경제공황이 아니고 두려움 그 자체에 있다고 국민을 격려하고 뉴딜정책으로 경제공황을 풀어갑니다. 특별히 그는 소아마비를 앓았던 인물입니다. 주로 휠체어를 타고서 12년의 대통령직을 수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분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 뒤를 이어서 대통령의 직임을 수행하는 투루먼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늘과 달과 모든 별들이 나를 향해서 떨어지는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엄청난 일에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국민여러분 여러분이 단 한번의 기도를 해봤다면 지금 나를 위하여 기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기도가 지금 필요합니다.” 온 국민을 향한 일생에 단 한번의 기도가 있었다면 지금 나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을 드립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이 되어지지를 않습니다. 경력으로 되어지거나 내 지식으로 되어지는 게 아닙니다.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공급으로만 가능함을 알았던 겁니다. 확실히 또 하나의 훌륭한 지도자가 일어난 겁니다.

저는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되는 솔로몬이 그래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위대한 인물인 부왕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부담이 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기도의 선택은 그런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선택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계속적으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선택의 기회가 없다면 그 인생은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선택의 능력이 없다면 그는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선택의 지혜가 없다면 그 인격은 파산한 인격입니다. 우리는 늘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선택을 내 마음대로 했습니다.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큰 책임입니다. 평생토록 나를 따르는 책임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생각해보십시오. 심는 것은 자유입니다. 무엇을 심든지 내 마음대로 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두어들일 때에는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두어야 합니다. 심은 것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고 그대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생을 사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심는 것은 자유로되 거두는 데는 강제성이 깃듭니다. 심판적입니다. 심을 때는 마음대로 심어놓고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참으로 비인격적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거둘 것까지 생각하고 심습니다. 후속 하는 결과를 요량하고 심습니다. 봄이면 가을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씨를 뿌릴 때에는 추수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뒤따르는 결과에 책임을 지면서 원인을 제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는 것이 바로 책임 있는 인격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말한 것도 책임을 지고 행동한 것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격자가 설 곳은 거기입니다. 후회라고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배고픈 고통이 아닙니다. 추운 고통이 아닙니다. 병약해서 아픈 고통이 아닙니다. 후회란 지극히 인간적인 의식을 가진 지성인의 고통입니다.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후회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하고 가슴아파합니다. 애당초의 잘못된 선택으로 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끊임없이 마음의 아픔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선택을 잘하는 게 이런 것이다. 이것을 알려주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솔로몬의 바른 선택을 보게 됩니다. 일순간의 바른 선택으로 솔로몬은 저의 일생을 아름답고 복된 삶으로 이끌어갑니다. 이 한번의 바른 선택이 솔로몬으로 솔로몬 되게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가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되었다고 으스대면서 축제나 벌이는 그러한 권력형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그 순간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요즘도 보면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나님 앞에 울부짖습니다, 마는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일이 잘 풀려나갈 때, 사업에 성공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참으로 보기 힘듭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권좌에 앉게 되면서 그는 맨 먼저 산당(山堂)에 가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기도를 합니다. 무엇보다 앞서, 그리고 으뜸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기도를 선택합니다. 이 행위 자체가 결과적으로 바른 선택이 되었습니다. 지혜의 근본이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처럼 형통한 날에, 영광된 순간에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바른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어여삐 여기시어 응답하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절)."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바라왔던 순간입니까? 지금이야말로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의 앞날은 이제 무엇을 구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그 순간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바른 선택을 합니다. 그 소중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바른 소원을 구하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바른 선택이 과연 솔로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역대하2장에 보면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의 승천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서 선지자가 되려는 엘리사가 그의 스승이 세상을 떠나려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정의 순간이 왔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너는 구하라. 귀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할 것을 너는 내게 구하라 이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을 하자면 너는 소원이 무엇이냐? 스승된 엘리야가 제자인 엘리사에게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하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예수님이 물어보십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해줄까?

솔로몬은 이 순간에 이런 대답을 합니다. 우선 솔로몬의 기본적인 지혜부터 생각해보십시다. 본문말씀을 보면 그는 '이것을 주십시오' '저것을 주십시오'하고 이것저것 잡다하게 구하지 않습니다. 6절 이하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에게는 은혜를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6절)." 입은바 은혜를 구구절절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밧세바, 그 여인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공짜라는 것입니다. 거저, 공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공로, 나의 의, 나의 능력으로써가 아닙니다. 오직 거저 주시는 은혜, 그로 말미암아 내가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나의 나된 것 자체가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만큼 인정하고 계십니까? 나의 행동, 나의 의, 나의 도덕성, 나의 부족함, 나의 허물, 나의 게으름…… 그럴진대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를 생각하면 엄청납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요새 정치인들의 행태란 가위 꼴불견입니다. 정치․경제․사회의 어떤 분야를 보아도 복 받을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주는 귀중한 음성은 기준이 어딘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있기 전에는 그들의 달력이 태양력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계기로 달력을 아예 바꿔버립니다. 우리로 하면 3월과 4월에 해당하는 봄철을 1월로 하는 새 달력을 작성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달을 아빕월또는 니산월이라고 합니다. 달력을 바꿨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삶의 기반과 출발을 어디로 삼느냐가 결정이 되어지는 겁니다. 기준이 바뀐다는 겁니다. 가치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유월절이 계기로 다시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유에서 우리는 솔로몬의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는 왕이 되서는 그의 기초를 하나님에게 두는 정말로 기가 막힌 출발을 한다는 겁니다.

그가 아비 다윗과 어머니 밧세바의 사이의 출생이 있습니다. 그게 그에게는 정말로 커다란 부담입니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어려운 출발입니다. 그래서 그가 마음의 부담을 안고서는 그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아이라서 하나님 아무런 일도 하거나 치루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가 왕이 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배경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7절에서는 "종은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일상 출입하는 길도 모르는 작은아이라고 스스로를 낮추고 있습니다. 연령이나 경험, 지식, 또 사회적 위치로나 인격적으로도 그러하겠습니다마는 여기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대체로 인생을 거진 다 살아버린 사람들은 뒤늦게야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그저 부족합니다'라고 쉽게 말합니다마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구나 스물 한 살의 나이라면 겁 없는 소리를 많이 할 때입니다. 내가 가장 많이 알고, 내가 가장 의롭고,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시건방지게 굽니다. 아버지가 살아온 생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왕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다릅니다.

'나는 작은아이입니다' '일상 출입도 할 줄 모릅니다'라고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면 살아 있는 사람이니 가르치고,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면 이미 죽은 사람이니 내다버려라.' 자신이 무지하다는 그 사실도 모르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지혜의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의 시작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도 모릅니다' ---- 여기서 출발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에서 솔로몬은 '너는 구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백성들을 공의롭게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나의 명예, 나의 욕망, 나의 충성에 매여 있는 사람은 우둔해집니다. 멍청해지고 맙니다. 내 안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들어오면 나에게서 정의감이 사라집니다. 내 명예에 연연하면 모르는 사이에 나는 바보가 되고 맙니다. 추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다윗은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그 맡겨진 사명을 위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내가 있다' '백성들을 바로 인도할 봉사자로서 내가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소원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의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저에게 맡겨진 귀한 사명을 위하여, 저의 백성을 위하여 지혜로운 마음을 소원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이어서 선악을 분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잘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래 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 없는 평화를 누리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합니다. 무엇이 유익한지를 일러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번영의 길을 묻고 있지 않습니다. 선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의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악을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 소유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닌 선을 묻고 있습니다. 흔히 번영이 먼저요, 자유가 먼저요, 권세가 먼저라고 생각해서 문제가 됩니다. 권력이야 누구에게 돌아가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중요한 것은 선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선입니까? 무엇이 의로운 길입니까? 이것이 먼저인데 순서가 뒤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나라의 번영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악을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혼탁한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선과 악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을 알게 해주십시오 ----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도덕성이 먼저요, 종교성이 먼저입니다. 결코 정치․경제․사회가 먼저일 수 없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이것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느라면 참으로 시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말씀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절)"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10절을 보면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시는데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2절). 또한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1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까지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활짝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통쾌한지 모릅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시원한 마음이 없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듯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까?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또한 본문을 보면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이브'이고 '지혜롭다'는 말은 '쉐미스'입니다. 쉐미스, 듣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직역을 해보면 hearing heart, listening mind가 됩니다. 곧 듣는 마음입니다. 좀더 의역을 하자면 receptive heart, 수용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어디에서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게 하여주십시오, 이것이 소원입니다, 하는 기도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 같은 소원이라면 사람이라도 누구인들 거절하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소원입니까? 어떤 형편에서든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게 하여주십시오, 아무리 방황하고 아무리 다급할지라도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스승인 엘리야가 너는 무엇이든 너의 소원을 말해라. 그랬더니 그가 저에게 당신의 갑절의 영감을 원합니다. 영적인 감동을 주십시오. 네가 참으로 어려운 것을 구하는구나. 그런데 내가 이제 승천을 할 터인즉 네가 나의 올라가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너에게 그것이 임한 것이다. 엘리야가 능력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는 영감이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영감이 있어야 합니다. 요새는 흔히들 말을 합니다.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인스프레이션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생각이 획돌아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이 바르고 창의력이 있는 그런 생각이 필요합니다. 바르고 의로운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자 그것을 주관하는 것이 영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에서 오는 그 감동 그것이 있어야 큰 일을 하는 겁니다. 영재교육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원천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영감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감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진을 보면 감동의 작품들이 찬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일을 한 사람 중에 죠지 뮬러란 고아의 아버지를 소개 합니다. 그는 참으로 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립니다. 그런데 그가 그의 어려움의 순간이면 하나님의 영감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찍은 것이 있습니다. 빵을 놓고서 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아시지요? 그는 모든 일에 영감을 구합니다.

중요한 문제를 놓고 기도 없이 결정하기에 앞날에 실책이 많고 우왕좌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지혜를 주십시오! 판단의 지혜를 주십시오!" 하고 함께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귀한 순간입니까? 하나님이여,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어디에서나 어느 순간에나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권력자이기 때문에 더욱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망하기로 들면 귀먹게 마련입니다. 지혜와 반대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카살'이라고도 하고 '나벨'이라고도 하고 '에윌'이라고도 합니다. 그 뜻인즉 고집, 어리석음, 우둔함, 건방짐, 무례함, 교만함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이것이 먼저입니다. 이것을 먼저 구할 때에 이 모든 것 ---- 번영과 자유와 평등을 그 다음에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입니다.

자 누구의 판단을 기다립니까?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해야 할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꿈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영감입니다. 상황이 아닙니다.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들을 수 있는 그런 인격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솔로몬이 구했던 그 지혜를 우리에게 주옵시고, 그에게 내리셨던 넘치는 지혜를 우리의 지도자와 우리 온 백성에게 주시옵소서. 엘리야의 영감을 구한 엘리사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아침에 주님께 지혜를 구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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