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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 사는 것(갈라디아 2장 18~21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인테넷에 올라온 글입니다. 고장난 현금 인출기에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겁니다. 사람이 그 인출기에 몰려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나라 이야기는 아닙니다. 호주의 한 시골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주유소에 설치된 자동 현금 인출기가 고장이 나서 찾으려고 하면 찾으려는 금액보다 돈이 더 나오는 겁니다. 자동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넣고서 100달러를 찾으려고 하면 50달러짜리 두 장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80달러를 찾으려고 그러면 20달러 짜리 4개가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50달러짜리가 4장이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돈이 나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겁니다. 나중에 은행에서 알게 되었고 돈을 더 많이 받아간 사람들을 컴퓨터의 기록으로 조사를 하고 돈을 다시 돌려받는 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대부분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80달러를 찾아야 하는 사람이 200달러가 나오는 인출기 앞에서 횡재를 한 듯이 기분이 좋았을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에는 근본적으로 욕심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있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고 이러한 욕심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욕심에 대하여 전혀 다른 방법과 의식을 향해서 도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 아니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말씀을 하십니다.
자 여지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의식을 바꿔야 하는데 그것에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참으로 귀한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절)"-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을 벗고 이제 죄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를 얻은 자의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과거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고통스러웠던 일은 의식 무의식간에 잊으려 애쓰고 또 잘 잊는 편이며, 좋았던 일은 되도록 잊지 않으려 하고 또 비교적 오래 기억하는 편입니다. 당시에는 죽을 지경이라면서 푸념해놓고도 세월이 지난 뒷날에 가서는 '그 시절이 좋았어. 그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운운하면서 당시를 좋게 회고하곤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과거지향적 성향입니다. 흔히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그런 건 잊어 버린지 오래야'하고 대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과거는 그렇게 쉽사리 잊혀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살아가노라면 이제는 잊었다 싶었던 과거가 잠재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감정에 관계되는 일일 때에 그렇습니다. 어느 때에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던 특별한 감정은 세월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잊혀 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잠재의식 깊은 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가 어느 순간에 문득 되살아나곤 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체험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과 내가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세월이 흐릅니다. 그 좋지 않은 관계를 그러구러 잊어버리고 살아온 것 같은데 우연히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좋지 않았던 때의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이 감정은 의식 속에는 없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노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생각은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바로 그 생각입니다.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잠재의식 속에 깊이 감정으로 변화되어 숨어 있던 것이 때로는 우리의 일생을 지배하고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로 돌아가는 성향이 있습니다. 의식 속에 새겨두지 않았는데도 문득문득 그 옛날로 돌아갑니다. 좋은 예로 입맛을 들 수 있습니다. 음식의 맛은 세월과 함께 많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먹던 된장찌개 같은 것을 만나게 되면 '어머니가 해주시던 된장찌개 맛'이 그리움으로 되살아나 입맛이 옛날로 돌아갑니다. 무서울 정도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떼 내어 우유를 먹여 기르면 집짐승인 강아지처럼 키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순하게 잘 자란 호랑이가 좀 커서 동족인 호랑이를 어쩌다 한번만 만나면 순식간에 사나운 호랑이로 되돌아갑니다. 사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일은 잘 안되다가도 무의식 상태로는 급하게 돌아갑니다.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한국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 내내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하다가 저녁에 돌아와서는 식구들과 한국어로 대화합니다. 이렇게 되면 종일 노력한 것이 무효화합니다.
사람의 이러한 성향은 신앙생활에도 드러납니다. 목적은 현재를 토대로 하여 바로 세웠으나 그 방법은 잠재의식 속의 옛것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는 틀림없는데 얼마 후에 보면 우상 섬기던 방법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무슨 일에든 열성으로 점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빼놓지 않고 점을 보러 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서 점을 보러 다니던 과거를 까맣게 잊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잘 믿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비슷한 행태가 나타납니다. 바로 '예언기도'라는 것에 끌립니다. 예언기도 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장차의 일을 묻습니다. 이른바 '예수 점'을 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곤란합니다. 성경책을 앞에 놓고 기도한 다음에 펼칩니다. 우연히 펼쳐진 장에 씌어 있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점괘로 받아들입니다, 꽤 오래 전부터 이런 속신(俗信)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서양사람들도 보면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별의별 이상한 미신과 우상이 극성을 부립니다. 13이라는 숫자를 싫어하고 금요일을 싫어하는 것들이 전부 성경적인 내용에서 나온 현상입니다.
이와 같이, 무의식적으로 과거에 복귀하는 성향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의식 가운데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되돌아가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절에 다니다가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은 무의식중에 절에 다니던 방법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무당을 섬기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꼭 무당식으로 시끄럽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리됩니다. '강신(降神)'과 성령 받는 것을 혼동합니다. 조용한 가운데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요란하게 진동하고 시끄럽게 떠들어야 되는 줄 압니다. 나아가서는 엑스타시(ecstasy)-환각상태가 와야만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무당식 믿음입니다. 여기에 무슨 신학적 뒷받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식중에, 자기도 모르게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주시는 귀중한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돌아가는 많은 이들을 향한 주님의 귀한 음성입니다. 자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전혀 어떤 일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가치관이나 그 기준으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유대사람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입니다. 수천 년 동안 율법을 지켜왔고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율법, 소위 전승까지도 엄격히 지켜왔습니다.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부칙이 있습니다. 원칙보다 부칙을 더 많이 만들어 놓고 열심히 지킵니다. 이를테면 안식일을 지켜라 할 때, 안식일을 지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는 바늘을 몇 번 떠야 한다, 켜 있는 불은 끄지 말아야 하고 꺼진 불을 다시 켜서는 안 된다, 옷고름이 풀어졌으면 매지 말아야 하고 매어 있는 고름은 풀지 말아야 한다-이런 식입니다. 안식일에 길을 걸을 때에는 몇 발걸음까지만 걸어야 한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사항들을 복잡하게 잔뜩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를 지키려고 기를 씁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이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이런 것 저런 것 매일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자유 합니까?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해서 감격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어가면서 나타납니다. 좀 더 진실하게 살아야 되겠다, 이제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되겠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지, 선하게 살아야지-이렇게 다짐하고 나아가는데, 어느 결에 또다시 저도 모르게 율법주의로 돌아가 있습니다. 나는 선하게 살고 바로 믿으며 오랜 시간 기도한다 하며 스스로 만족해합니다. 그 정도 기도해서 되겠느냐, 더 해야 한다, 기도가 짧으면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으니 좀 더 길게 하자-단계적으로 점점 확대(escalate)되어 갑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만 철야기도를 했더니 감기에 걸렸다, 그러니 앞으로는 두 번씩 해야 되겠다-이렇게 율법주의자로 돌아가 있습니다. 예수의 공로, 예수의 은혜는 저만치 밀어놓은 채 스스로 더 선하게, 스스로 바르게, 스스로 더 열심히, 스스로 더 수고하고 공로를 세워야 되겠다는 사람이 되어 있더라는 말입니다. 과거에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깐 고삐가 느슨해진 겨를에 그만 다시금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옛날의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는 유대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라 처음도 끝도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중세 암흑기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교리 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공로가 없이 구원받지 못 한다' - 이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없이 공로를 세우지 못 한다'고 해도 아리송하지만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은혜가 있어야 공로를 세울 수 있고 공로를 세워야 구원받는다, 공로의 근본은 은혜다' 다시 연결하면 '구원의 시작은 은혜로 되는 것이고 구원의 끝은 공로로 되는 것이다'-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찬찬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 믿을 때에는 매사가 감격스럽고 은혜스럽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믿고 오래 믿을수록 점점 힘들어집니다. 처음 믿는 사람이 제일 명랑하고 좋습니다. 좀 더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울상이요 죽을상입니다. 불식간에 스스로 율법에 매여 허덕입니다. 하루에 성경을 몇 장 봐야 된다, 기도를 몇 시간해야 된다, 금식을 해야 된다 -요목 조목 나열해 놓고 그 중의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큰일 것처럼 여깁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을 볼 때에는 오직 은혜로 판단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로 시비를 삼지 마십시오. 겉으로 나타나는 형식을 보고 옳다 그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지 말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Nobody knows.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를 놓고 겉으로 봐서는 당연히 바리새인이 낫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바리새인이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세리를 더 높이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시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마는 우리는 부지중에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로 기울어집니다. 항상 되돌아가려는 못된 성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완전히 벗어나야 정녕 은혜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요 신학이 역설하는 바요 우리의 경험이 증거 하는 바입니다. 한순간 삐끗하여 율법주의로 들어서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명심하고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율법 폐기론자나 자유방임자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율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저러다가 마구 방종하겠다. 하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6장 전체에 걸쳐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하고 변증합니다. 여러분, 교육받은 바 혹은 경험 안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한사람을 놓고 엄한 율법으로 다스리는 것과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의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이겠습니까?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이솝우화 한 도막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북풍과 태양이 서로 힘이 더 세다고 말다툼을 벌입니다. 결국 그들은 내기를 하기로 했는데,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쪽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북풍이 먼저 세찬 바람을 불어보냅니다. 나그네는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밉니다. 더 세찬 바람을 불어보내니까 오히려 옷을 하나 더 걸쳐 입습니다. 북풍은 손을 들고 맙니다. 이번에는 태양의 차례입니다. 태양은 지평선 바로 위에서부터 천천히 볕을 내리쬐어 나그네가 덧입었던 옷을 벗게 합니다. 태양이 점점 더 밝게 타오르자 나그네는 마침내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옷을 모두 벗어 던지더니 강물로 뛰어듭니다-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됩니다. 남이 시켜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두려움에 못 이겨 마지못해 하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감사하고 감격하여 눈물과 함께 하는 회개가 참 회개입니다. 매 맞을 게 두려워서 '잘못했습니다'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쫓기는 소리올시다. 참된 회개는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율법의 관계에서 은혜가 승리한다는 것을 성경은 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봅시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 절)." 퍽이나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은혜를 찾기 위하여 율법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헐었던 것을 세우는 것이 됩니다. 전에 헐었던 것은 무엇이며 헐었다가 다시 세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시종일관 은혜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와 율법의 유기적 관계를 바르게 설명한 대목입니다. 바울은 깊은 경험을 바탕으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꿰뚫고 있습니다. 귀중한 진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내가 믿음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됩니다. 동일시(identity)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은 죽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영으로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대로 율법을 향하여 죽은 것입니다. 법적 관계에서 완전히 죽었습니다. 제아무리 엄한 법이라도 법은 산 자에게 해당합니다. 죽은 자를 가두어놓는 감옥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말에 지독한 욕이 하나 있습니다. '육시랄'이 그것입니다. 죄인 중에서도 아주 못된 죄인에게는 송장에까지 매질 칼질을 하는데 이것이 '육시(戮屍)'입니다. 죽은 시체를 꽁꽁 묶어서 때립니다. 죽음만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기에 시체에까지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때려봤댔자 시체가 아픔을 느끼겠습니까? 전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만큼 큰 죄인이다, 죽음으로도 사함 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죽음보다 더한 형벌은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 형벌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감옥에 갇힌 죄인일지라도 죽으면 해방됩니다. 죽으면 감옥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많은 비유를 들어가면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완전히 죽어지면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살아서 꿈틀거리면 안 됩니다.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금 율법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철저하게 죽어야 율법이 항복합니다. 필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함께 내가 완전히 죽어지는 것-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곧 십자가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나와의 관계를 믿음으로 이어놓아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가 대신 죽고 계시기 때문에, 나의 몸이 살아 있을지언정 정신이나 영은 완전히 죽어진 상태로서 살아야만 합니다. 손톱만큼이라도 나로서 살려고 한다면 그 순간에 율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율법을 향하여는 죽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향하여는 살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I am crucified with Christ.)-실로 장엄한 말씀입니다. 내가 못박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스칼라 상타(Scala Sancta)'라고 하는 유서 깊은 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밟고 올라가셨던 빌라도 법정의 계단을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그 계단의 수가 스물여덟입니다. 그 계단을 오르내리면 구원받는다 하는 속설 때문인지 무릎으로 기면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눈에 뜁디다. 마르틴 루터도 계단마다 입을 맞추며 무릎으로 기었답니다. 그런데 오르락내리락 아무리 해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에 죄 사함 받은 기쁨이 오지 않습니다. 마침내 '이게 아니다'하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는 깨닫습니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마침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지 않습니까? 'Daily Baptism'은 루터가 단골로 사용한 말입니다. '매일 세례' 그렇습니다. 세례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날마다 죽으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날마다 사는 것-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의미를 가졌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계시되어 있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하나님의 은혜가 완성됩니다. 사랑의 계시인 동시에 의의 계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완전히 죽을 때에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신비로우면서도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가 내 생명이요, 그가 내 뜻이요, 그가 내 목적이요, 그가 내 생애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사도 바울의 힘차고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오로지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라고 하는 이 고백이야말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인테넷에 올라온 글입니다. 고장난 현금 인출기에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겁니다. 사람이 그 인출기에 몰려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나라 이야기는 아닙니다. 호주의 한 시골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주유소에 설치된 자동 현금 인출기가 고장이 나서 찾으려고 하면 찾으려는 금액보다 돈이 더 나오는 겁니다. 자동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넣고서 100달러를 찾으려고 하면 50달러짜리 두 장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80달러를 찾으려고 그러면 20달러 짜리 4개가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50달러짜리가 4장이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돈이 나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겁니다. 나중에 은행에서 알게 되었고 돈을 더 많이 받아간 사람들을 컴퓨터의 기록으로 조사를 하고 돈을 다시 돌려받는 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대부분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80달러를 찾아야 하는 사람이 200달러가 나오는 인출기 앞에서 횡재를 한 듯이 기분이 좋았을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에는 근본적으로 욕심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있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고 이러한 욕심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욕심에 대하여 전혀 다른 방법과 의식을 향해서 도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 아니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말씀을 하십니다.
자 여지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의식을 바꿔야 하는데 그것에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참으로 귀한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절)"-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을 벗고 이제 죄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를 얻은 자의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과거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고통스러웠던 일은 의식 무의식간에 잊으려 애쓰고 또 잘 잊는 편이며, 좋았던 일은 되도록 잊지 않으려 하고 또 비교적 오래 기억하는 편입니다. 당시에는 죽을 지경이라면서 푸념해놓고도 세월이 지난 뒷날에 가서는 '그 시절이 좋았어. 그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운운하면서 당시를 좋게 회고하곤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과거지향적 성향입니다. 흔히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그런 건 잊어 버린지 오래야'하고 대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과거는 그렇게 쉽사리 잊혀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살아가노라면 이제는 잊었다 싶었던 과거가 잠재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감정에 관계되는 일일 때에 그렇습니다. 어느 때에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던 특별한 감정은 세월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잊혀 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잠재의식 깊은 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가 어느 순간에 문득 되살아나곤 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체험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과 내가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세월이 흐릅니다. 그 좋지 않은 관계를 그러구러 잊어버리고 살아온 것 같은데 우연히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좋지 않았던 때의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이 감정은 의식 속에는 없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노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생각은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바로 그 생각입니다.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잠재의식 속에 깊이 감정으로 변화되어 숨어 있던 것이 때로는 우리의 일생을 지배하고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로 돌아가는 성향이 있습니다. 의식 속에 새겨두지 않았는데도 문득문득 그 옛날로 돌아갑니다. 좋은 예로 입맛을 들 수 있습니다. 음식의 맛은 세월과 함께 많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먹던 된장찌개 같은 것을 만나게 되면 '어머니가 해주시던 된장찌개 맛'이 그리움으로 되살아나 입맛이 옛날로 돌아갑니다. 무서울 정도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떼 내어 우유를 먹여 기르면 집짐승인 강아지처럼 키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순하게 잘 자란 호랑이가 좀 커서 동족인 호랑이를 어쩌다 한번만 만나면 순식간에 사나운 호랑이로 되돌아갑니다. 사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일은 잘 안되다가도 무의식 상태로는 급하게 돌아갑니다.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한국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 내내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하다가 저녁에 돌아와서는 식구들과 한국어로 대화합니다. 이렇게 되면 종일 노력한 것이 무효화합니다.
사람의 이러한 성향은 신앙생활에도 드러납니다. 목적은 현재를 토대로 하여 바로 세웠으나 그 방법은 잠재의식 속의 옛것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는 틀림없는데 얼마 후에 보면 우상 섬기던 방법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무슨 일에든 열성으로 점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빼놓지 않고 점을 보러 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서 점을 보러 다니던 과거를 까맣게 잊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잘 믿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비슷한 행태가 나타납니다. 바로 '예언기도'라는 것에 끌립니다. 예언기도 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장차의 일을 묻습니다. 이른바 '예수 점'을 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곤란합니다. 성경책을 앞에 놓고 기도한 다음에 펼칩니다. 우연히 펼쳐진 장에 씌어 있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점괘로 받아들입니다, 꽤 오래 전부터 이런 속신(俗信)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서양사람들도 보면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별의별 이상한 미신과 우상이 극성을 부립니다. 13이라는 숫자를 싫어하고 금요일을 싫어하는 것들이 전부 성경적인 내용에서 나온 현상입니다.
이와 같이, 무의식적으로 과거에 복귀하는 성향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의식 가운데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되돌아가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절에 다니다가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은 무의식중에 절에 다니던 방법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무당을 섬기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꼭 무당식으로 시끄럽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리됩니다. '강신(降神)'과 성령 받는 것을 혼동합니다. 조용한 가운데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요란하게 진동하고 시끄럽게 떠들어야 되는 줄 압니다. 나아가서는 엑스타시(ecstasy)-환각상태가 와야만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무당식 믿음입니다. 여기에 무슨 신학적 뒷받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식중에, 자기도 모르게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주시는 귀중한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돌아가는 많은 이들을 향한 주님의 귀한 음성입니다. 자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전혀 어떤 일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가치관이나 그 기준으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유대사람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입니다. 수천 년 동안 율법을 지켜왔고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율법, 소위 전승까지도 엄격히 지켜왔습니다.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부칙이 있습니다. 원칙보다 부칙을 더 많이 만들어 놓고 열심히 지킵니다. 이를테면 안식일을 지켜라 할 때, 안식일을 지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는 바늘을 몇 번 떠야 한다, 켜 있는 불은 끄지 말아야 하고 꺼진 불을 다시 켜서는 안 된다, 옷고름이 풀어졌으면 매지 말아야 하고 매어 있는 고름은 풀지 말아야 한다-이런 식입니다. 안식일에 길을 걸을 때에는 몇 발걸음까지만 걸어야 한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사항들을 복잡하게 잔뜩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를 지키려고 기를 씁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이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이런 것 저런 것 매일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자유 합니까?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해서 감격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어가면서 나타납니다. 좀 더 진실하게 살아야 되겠다, 이제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되겠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지, 선하게 살아야지-이렇게 다짐하고 나아가는데, 어느 결에 또다시 저도 모르게 율법주의로 돌아가 있습니다. 나는 선하게 살고 바로 믿으며 오랜 시간 기도한다 하며 스스로 만족해합니다. 그 정도 기도해서 되겠느냐, 더 해야 한다, 기도가 짧으면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으니 좀 더 길게 하자-단계적으로 점점 확대(escalate)되어 갑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만 철야기도를 했더니 감기에 걸렸다, 그러니 앞으로는 두 번씩 해야 되겠다-이렇게 율법주의자로 돌아가 있습니다. 예수의 공로, 예수의 은혜는 저만치 밀어놓은 채 스스로 더 선하게, 스스로 바르게, 스스로 더 열심히, 스스로 더 수고하고 공로를 세워야 되겠다는 사람이 되어 있더라는 말입니다. 과거에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깐 고삐가 느슨해진 겨를에 그만 다시금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옛날의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는 유대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라 처음도 끝도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중세 암흑기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교리 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공로가 없이 구원받지 못 한다' - 이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없이 공로를 세우지 못 한다'고 해도 아리송하지만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은혜가 있어야 공로를 세울 수 있고 공로를 세워야 구원받는다, 공로의 근본은 은혜다' 다시 연결하면 '구원의 시작은 은혜로 되는 것이고 구원의 끝은 공로로 되는 것이다'-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찬찬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 믿을 때에는 매사가 감격스럽고 은혜스럽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믿고 오래 믿을수록 점점 힘들어집니다. 처음 믿는 사람이 제일 명랑하고 좋습니다. 좀 더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울상이요 죽을상입니다. 불식간에 스스로 율법에 매여 허덕입니다. 하루에 성경을 몇 장 봐야 된다, 기도를 몇 시간해야 된다, 금식을 해야 된다 -요목 조목 나열해 놓고 그 중의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큰일 것처럼 여깁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을 볼 때에는 오직 은혜로 판단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로 시비를 삼지 마십시오. 겉으로 나타나는 형식을 보고 옳다 그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지 말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Nobody knows.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를 놓고 겉으로 봐서는 당연히 바리새인이 낫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바리새인이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세리를 더 높이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시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마는 우리는 부지중에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로 기울어집니다. 항상 되돌아가려는 못된 성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완전히 벗어나야 정녕 은혜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요 신학이 역설하는 바요 우리의 경험이 증거 하는 바입니다. 한순간 삐끗하여 율법주의로 들어서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명심하고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율법 폐기론자나 자유방임자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율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저러다가 마구 방종하겠다. 하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6장 전체에 걸쳐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하고 변증합니다. 여러분, 교육받은 바 혹은 경험 안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한사람을 놓고 엄한 율법으로 다스리는 것과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의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이겠습니까?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이솝우화 한 도막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북풍과 태양이 서로 힘이 더 세다고 말다툼을 벌입니다. 결국 그들은 내기를 하기로 했는데,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쪽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북풍이 먼저 세찬 바람을 불어보냅니다. 나그네는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밉니다. 더 세찬 바람을 불어보내니까 오히려 옷을 하나 더 걸쳐 입습니다. 북풍은 손을 들고 맙니다. 이번에는 태양의 차례입니다. 태양은 지평선 바로 위에서부터 천천히 볕을 내리쬐어 나그네가 덧입었던 옷을 벗게 합니다. 태양이 점점 더 밝게 타오르자 나그네는 마침내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옷을 모두 벗어 던지더니 강물로 뛰어듭니다-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됩니다. 남이 시켜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두려움에 못 이겨 마지못해 하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감사하고 감격하여 눈물과 함께 하는 회개가 참 회개입니다. 매 맞을 게 두려워서 '잘못했습니다'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쫓기는 소리올시다. 참된 회개는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율법의 관계에서 은혜가 승리한다는 것을 성경은 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봅시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 절)." 퍽이나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은혜를 찾기 위하여 율법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헐었던 것을 세우는 것이 됩니다. 전에 헐었던 것은 무엇이며 헐었다가 다시 세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시종일관 은혜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와 율법의 유기적 관계를 바르게 설명한 대목입니다. 바울은 깊은 경험을 바탕으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꿰뚫고 있습니다. 귀중한 진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내가 믿음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됩니다. 동일시(identity)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은 죽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영으로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대로 율법을 향하여 죽은 것입니다. 법적 관계에서 완전히 죽었습니다. 제아무리 엄한 법이라도 법은 산 자에게 해당합니다. 죽은 자를 가두어놓는 감옥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말에 지독한 욕이 하나 있습니다. '육시랄'이 그것입니다. 죄인 중에서도 아주 못된 죄인에게는 송장에까지 매질 칼질을 하는데 이것이 '육시(戮屍)'입니다. 죽은 시체를 꽁꽁 묶어서 때립니다. 죽음만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기에 시체에까지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때려봤댔자 시체가 아픔을 느끼겠습니까? 전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만큼 큰 죄인이다, 죽음으로도 사함 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죽음보다 더한 형벌은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 형벌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감옥에 갇힌 죄인일지라도 죽으면 해방됩니다. 죽으면 감옥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많은 비유를 들어가면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완전히 죽어지면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살아서 꿈틀거리면 안 됩니다.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금 율법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철저하게 죽어야 율법이 항복합니다. 필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함께 내가 완전히 죽어지는 것-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곧 십자가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나와의 관계를 믿음으로 이어놓아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가 대신 죽고 계시기 때문에, 나의 몸이 살아 있을지언정 정신이나 영은 완전히 죽어진 상태로서 살아야만 합니다. 손톱만큼이라도 나로서 살려고 한다면 그 순간에 율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율법을 향하여는 죽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향하여는 살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I am crucified with Christ.)-실로 장엄한 말씀입니다. 내가 못박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스칼라 상타(Scala Sancta)'라고 하는 유서 깊은 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밟고 올라가셨던 빌라도 법정의 계단을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그 계단의 수가 스물여덟입니다. 그 계단을 오르내리면 구원받는다 하는 속설 때문인지 무릎으로 기면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눈에 뜁디다. 마르틴 루터도 계단마다 입을 맞추며 무릎으로 기었답니다. 그런데 오르락내리락 아무리 해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에 죄 사함 받은 기쁨이 오지 않습니다. 마침내 '이게 아니다'하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는 깨닫습니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마침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지 않습니까? 'Daily Baptism'은 루터가 단골로 사용한 말입니다. '매일 세례' 그렇습니다. 세례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날마다 죽으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날마다 사는 것-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의미를 가졌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계시되어 있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하나님의 은혜가 완성됩니다. 사랑의 계시인 동시에 의의 계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완전히 죽을 때에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신비로우면서도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가 내 생명이요, 그가 내 뜻이요, 그가 내 목적이요, 그가 내 생애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사도 바울의 힘차고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오로지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라고 하는 이 고백이야말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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