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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순종하라(골로새서 3장 18절~24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어떤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화폭에 그려보겠다고 마음먹고 그 '아름다운 것'을 찾아나섰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지나가는 군인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평화입니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두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대답이 화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친, 그런 것이 어디 없을까?' 그런데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이 세 가지를 한데 모아놓은 소재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 성과도 없이, 화가는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문에 들어서는 그를 보고 아이들이 "아빠"하면서 달려옵니다. 그 때, 그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에서 믿음을 보았습니다. '아, 여기에 믿음이 있구나!' 또한 남편이 오랫동안 집을 비웠는데도 아내는 여전히 정숙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로 영접해줍니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그는 집안에 들어설 때에 모든 생각을 다 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참 평화를 느꼈습니다. 비로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정을 화폭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더는 방황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기독교는 가정적 종교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펴면, 맨처음 창세기 1장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입니다. 이 창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주례하셔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가정 되게 하시는데, 이것이 창조 역사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거기에 핵심을 두고 창조 이야기는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맨처음 이적을 나타내신 데가 혼인잔치집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혼인잔치집에 찾아가셔서 축복하신 것이 예수님 행하신 이적의 첫번째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정 이야기를 통해서 선택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현대의 슬픔은, 사람마다 가정을 떠나서 행복을 찾는 데 있습니다. 딴데서 기쁨과 향락을 찾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독신주의에서 자유를 찾고, 방종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섬기는 일에서, 봉사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길에서 떠남으로 인하여 세상은 점점 더 어지러워지고,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은 신앙 위에 세워집니다. 그런데 요새는 너무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가정이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이것으로 끝입니다. 옛날 어른들의 생각도 간단합니다. 부모가 정해준 것, 여기에 한술 더 뜨면 천정배필(天定配匹), 또 하나 얘기하자면 '이것이 팔자다'합니다. 더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만큼 안정을 이루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느 사이에 이 고전적 진리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셨고, 하늘이 맺어주었다는 이런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로, 정신나간 사람의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얘기합니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만나고 저것 때문에 만나고, 취미가 어떻고, 지식이 어떻고, 수준이 어떻고, 성경이 어떻고…… 별소리를 다 해봐야 죽을 때까지 맞추어도 못 맞춥니다. 맞는 사람이 없어요.
같은 사람도 없어요. 바른 조화를 찾을 수가 없어요. 가정이 가정되게 하는 신앙적 기초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셨다---여기서부터 출발해야, 그 위에 세워져야만 진정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섭리적 의미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고로 다른 아무 조건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시작도 끝도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셨다---그 한가지로 살아가면 틀림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둘이 마주 보고, 둘이 자기의 욕구를 상대방을 통해서 충족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랑이란, 둘이 한 방향을 생각한다는 데 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신앙적 가치, 신앙적 목적이 아니고는 가정은 가정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은 아버지의 왕국입니다. 어머니의 세계입니다. 어린이의 천국입니다. 신기하게도 가정이라는 것은, 율법과 은혜의 가장 효율적인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거기 에 질서와 자유가 있고, 의와 사랑이 서로 만나고, 권위와 평화의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창립 40돌을 맞은 어느 고아원의 축하 잔치에 가보았습니다. 그곳의 원장님이 이 고아원을 세우고 40년 동안 죽 아이들을 키워왔습니다. 원장님 자신에게는 8남매가 있습니다. 5남3녀 입니다. 이 아버지는 대단히 엄합니다. 제 자식들을 전부 고아들과 똑같이 키웠습니다. 고아들이 자는 방에 자녀를 하나씩 다 집어넣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무엇이든지 똑같이 해야 한다고 명령ㅎ습니다.
어느날, 아이들의 할머니가 밤에 몰래 손자손녀들을 불러다 고구마 몇 개를 먹였습니다.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다고, 아이들은 참으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던 다음날, 이 사실이 그만 아버지한테 발각 되어서 아이들은 얼마나 맞았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아버지는 엄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 밑에서 자녀들은 참으로 자유를 느꼈고, 참으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이제 자녀들이 모두 훌륭하게 잘되어가지고, 40돌을 맞는 그 시간에 모여서 옛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그 때가 제일 좋았다고, 우리는 형제가 많아서 좋았다고, 친구가 많아서 좋았다고, 그렇게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아버지의 엄한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자녀들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요새와서는 이 권위가, 이 왕권이 무너지기 때문에 어느 사이에 자녀도 자녀되지 못하고, 자유도 자유되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자유가 방종이 되고, 절망으로 바꾸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부모에게 대하여는 딱 이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공경은 사랑입니다. 위로 향하는 사랑입니다. 존경을 겸한 사랑입니다. '공경하라' '순종하라'---성경은 이 두 가지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7절을 보세요.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지니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신명기 21장 18절로 21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대단히 준엄합니다.
옛날 우리 한국에는 유교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효를 모든 윤리의 기본으로 생각했습니다. 늘 '효도해야 하느니라'하고 강조합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기독교는 효가 없다고, 이 서양사람들의 종교는 효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유교학자에게 어느 목사님이 이 성경말씀 두 구절을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효가 없다는 것이 무슨 소리요? 기독교는 이렇습니다. 보세요. 효도하지 않는 놈은 때려 죽이라, 돌로 쳐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입니까?" 이 유교학자, 정말 그런 성경말씀이 있음을 보고는 그 때부터 예수 믿었다 합니다. 그 런 이야기가 우리 한국교회사에는 많습니다. 특별히 중국에도 많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윤리는 효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과 매칭(Matching)되었습니다. 그래, 중국사람에게 주는 전도지에 보면, 세상에서 효를 가장 강하게 강조하는 종교는 기독교다, 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들어 먹힌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돌로 쳐죽이라---이런 이야기는 정말 성경만이 가르쳐주는 무서운, 효에 대한 교훈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18절에 보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합니다.
여기에서 '복종'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휴포타소'입니다. 이것은 질서적 복종을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복종입니다. 또 20절에 보면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합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휴파큐오'입니다. 이것은 청종적 순종입니다. 청종적 복종입니다.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에는, 첫번째로 노예적 순종이 있습니다. 상대가 무서워서, 혹은 억지로 그럴 수밖에 없기에 노예적으로 굴종하는, 그런 의미의 순종입니다. 두 번째로 조건적 혹은 실리적 순종이 있습니다. 일단 순종해놓으면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네의 효에 대한 교리를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옛날에는 효 자체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군주에게 즉 왕에게 순종토록 하기 위해서 효를 가르친 것이다. 좀더 나아가 옛날에 효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산으로 땅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어서이다, 땅이 없이는 부지런할 수도 없고 일할 수도 없다, 살아나가는 길은 오로지 땅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가진 땅을 꼭 물려받아야 한다, 그런고로 아버지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유산을 노려서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얘기입니다. 효를 실리적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네 전통 명절인 팔월 추석이나 정월 초하루 같은 때를 보세요. 민족 대이동이라고 할 만큼 서울사람들이 전부 시골로 내려갑니다. 왜들 그렇게 가는지, 이에 대하여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땅을 유산으로 받으려면 이런 때에 가야 된다, 안가면 그 부모가 자식생각하기를 "이 나쁜 놈, 팔월 추석에도 안 오는 너 같은 놈에게는 유산은 한푼도 없다"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효가 실리적 수단이라고 한다면 그 효는 있으나마나합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보모와 조상에게 제사를 많이 드리는 것도 생각해보세요. 그래야 복 받는다, 그래야 잘산다 생각해서, 그런 동기에서가 아니겠습니까? 이 실리적 순종이라는 것은, 이 조건적 순종이라는 것은 참으로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경과 순종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존경과 감사와 사랑의 동기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보다 높습니다, 그가 나보다 지혜롭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 더 높임을 받아 마땅합니다---그래서 순종해야 됩니다. 진정한 존경으로 순종해야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들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한번보고 싶어합니다.
지금처럼 사진도 많고, 텔레비전으로라도 볼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옛날에는 실제로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든 먼데서든, 모두들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가로 모여듭니다.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자리에 누워 있어 거동이 불편한지라 이 노인은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얘야, 나 말이다, 임금님 얼굴 한번 뵈었으면 좋겠구나." "얘, 그렇게 하시지요." 효자 아들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는 어머니를 업고 70리길을 걸어서 임금님 행차하시는 길까지 왔습니다. 제 어머니를 아기 업듯이 단단히 받쳐 업고서, 어떻게든 어머니가 임금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모자(母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멈춰라!" 그리고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어떻게 된 사영니냐?"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 "참으로 효자로고." 임금님은 그 자리에서 효자 아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다른 마을의 아주 못돼먹기로 소문난 불효자는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안가겠다는 제 어머니를 강제로 업고,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목에 가서 떡하니 서 있었습니다. 역시나 임금님이 이 모습을 보고 흐뭇해합니다. "이 근방에는 효자도 많구나.
기특한 일이로고. 너는 무슨 사연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왔느냐?" 불효자는 효자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네사람들이 "아닙니다, 임금님. 저 놈은 천하에 몹쓸 불효자입니다.
임금님께 상을 받으려고 효자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하고 일러바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흉내라도 효도는 흉내라도 내어야 하느니라." 그리고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 흉내라도 내보세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어쩌면 그렇게도 부모님이 꼭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합니까?
중국 고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효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가장 큰 효는 공경이요, 다음의 효는 욕을 돌리지 않는 것이요, 다음의 효는 봉양이라.' 제때에 밥그릇이나 드렸다고 해서 효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공경함이 바로 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어느 기자가 젊은이를 상대로 '효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했는데, 전체의 60퍼센트가 '속상하지 않게 해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6.2퍼센트가 '그저 극진히 대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효가 실종된 것입니다. 부모님을 대접하는 자는 있어도 효도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어두워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모든 일에--좋은 부모에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예요. 못된 부모에게도 순종해야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성경의 효자 제1호는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27세나 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갑니다. 이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 127세입니다. '이삭아, 하나님께서 너를 잡아 제물로 바치라신다.' 아마 어떤 자식이든지 간에 열이면 열, 만이면 만, 다 마다할 것입니다. '나이 많이 드시더니 아버지가 드디어 노망이 드셨군. 세상에 어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이라신담'하고 당장에 항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종합니다. 전설에는 이삭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 "그러면 그대로 하세요." 그는 아무 말 없이 제단 위에 놓입니다. 이것이 이삭입니다. 너를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랍신다---이에도 이삭은 순종을 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은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십자가인데 내가 지지 않겠느냐 하심입니다. 가장 큰 효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충성도, 그 이상의 효도 없을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저술가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이 어느 여름날, 비가 막 쏟아지는데도 복잡한 장터에서 홀로 몇 시간이고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도 인사도 받지 않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립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 꼼짝 않고 고스란히 비를 다 맞으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집요하게 그 사연을 물어보자 그제야 그는 "사실은 50년 전, 우리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낡은 책을 사고 파는 헌 책 장사를 하셨었지. 그런데 손님들과 어느 날 어떤 책을 갖다주기로 약속하셨던 모양이야……"하고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내 몸이 아주 좋지 않구나. 네가 나 대신 오늘 하루만 시장에 좀 나가주렴." 아들은 발끈 합니다. "헌 책 장사하시는 것도 창피스러운데 내가 그런 심부름을 할 것 같아요?" 그는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힘들어도 내가 나가야지."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장터에 나가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인지, 그 날 이후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50년이 지난 지금, 그 아들이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부탁을 거역했던 것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한 것, 아버지를 공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겠기에 내가 나를 벌주려고 여기 서 있는 것이네." 여러분, 얼마나 더 벌을 받아야 알겠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의 덕을 익히지 못한 사람, 참으로 불행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세상 어느 직장에 가서든 제대로 붙어 있지 못합니다. 순종을 못 배웠으니까 그렇습니다. 참으로 불행합니다. 순종을 기쁨으로, 순종을 자랑으로, 순종을 자유로 경험하면서 순종할 수 있는, 그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20절)."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지혜를 얻고, 영광을 얻고,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 겸하여 장수(長壽)가 있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효가 그 가정의 가풍이 되고 윤리가 될 때, 그와 그 가정에 주께서 주시는 축복이 길이길이 함께 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골로새서 3장 18절~24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어떤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화폭에 그려보겠다고 마음먹고 그 '아름다운 것'을 찾아나섰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지나가는 군인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평화입니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두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대답이 화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친, 그런 것이 어디 없을까?' 그런데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이 세 가지를 한데 모아놓은 소재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 성과도 없이, 화가는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문에 들어서는 그를 보고 아이들이 "아빠"하면서 달려옵니다. 그 때, 그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에서 믿음을 보았습니다. '아, 여기에 믿음이 있구나!' 또한 남편이 오랫동안 집을 비웠는데도 아내는 여전히 정숙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로 영접해줍니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그는 집안에 들어설 때에 모든 생각을 다 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참 평화를 느꼈습니다. 비로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정을 화폭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더는 방황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기독교는 가정적 종교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펴면, 맨처음 창세기 1장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입니다. 이 창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주례하셔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가정 되게 하시는데, 이것이 창조 역사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거기에 핵심을 두고 창조 이야기는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맨처음 이적을 나타내신 데가 혼인잔치집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혼인잔치집에 찾아가셔서 축복하신 것이 예수님 행하신 이적의 첫번째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정 이야기를 통해서 선택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현대의 슬픔은, 사람마다 가정을 떠나서 행복을 찾는 데 있습니다. 딴데서 기쁨과 향락을 찾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독신주의에서 자유를 찾고, 방종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섬기는 일에서, 봉사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길에서 떠남으로 인하여 세상은 점점 더 어지러워지고,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은 신앙 위에 세워집니다. 그런데 요새는 너무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가정이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이것으로 끝입니다. 옛날 어른들의 생각도 간단합니다. 부모가 정해준 것, 여기에 한술 더 뜨면 천정배필(天定配匹), 또 하나 얘기하자면 '이것이 팔자다'합니다. 더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만큼 안정을 이루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느 사이에 이 고전적 진리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셨고, 하늘이 맺어주었다는 이런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로, 정신나간 사람의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얘기합니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만나고 저것 때문에 만나고, 취미가 어떻고, 지식이 어떻고, 수준이 어떻고, 성경이 어떻고…… 별소리를 다 해봐야 죽을 때까지 맞추어도 못 맞춥니다. 맞는 사람이 없어요.
같은 사람도 없어요. 바른 조화를 찾을 수가 없어요. 가정이 가정되게 하는 신앙적 기초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셨다---여기서부터 출발해야, 그 위에 세워져야만 진정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섭리적 의미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고로 다른 아무 조건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시작도 끝도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셨다---그 한가지로 살아가면 틀림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둘이 마주 보고, 둘이 자기의 욕구를 상대방을 통해서 충족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랑이란, 둘이 한 방향을 생각한다는 데 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신앙적 가치, 신앙적 목적이 아니고는 가정은 가정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은 아버지의 왕국입니다. 어머니의 세계입니다. 어린이의 천국입니다. 신기하게도 가정이라는 것은, 율법과 은혜의 가장 효율적인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거기 에 질서와 자유가 있고, 의와 사랑이 서로 만나고, 권위와 평화의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창립 40돌을 맞은 어느 고아원의 축하 잔치에 가보았습니다. 그곳의 원장님이 이 고아원을 세우고 40년 동안 죽 아이들을 키워왔습니다. 원장님 자신에게는 8남매가 있습니다. 5남3녀 입니다. 이 아버지는 대단히 엄합니다. 제 자식들을 전부 고아들과 똑같이 키웠습니다. 고아들이 자는 방에 자녀를 하나씩 다 집어넣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무엇이든지 똑같이 해야 한다고 명령ㅎ습니다.
어느날, 아이들의 할머니가 밤에 몰래 손자손녀들을 불러다 고구마 몇 개를 먹였습니다.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다고, 아이들은 참으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던 다음날, 이 사실이 그만 아버지한테 발각 되어서 아이들은 얼마나 맞았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아버지는 엄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 밑에서 자녀들은 참으로 자유를 느꼈고, 참으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이제 자녀들이 모두 훌륭하게 잘되어가지고, 40돌을 맞는 그 시간에 모여서 옛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그 때가 제일 좋았다고, 우리는 형제가 많아서 좋았다고, 친구가 많아서 좋았다고, 그렇게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아버지의 엄한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자녀들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요새와서는 이 권위가, 이 왕권이 무너지기 때문에 어느 사이에 자녀도 자녀되지 못하고, 자유도 자유되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자유가 방종이 되고, 절망으로 바꾸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부모에게 대하여는 딱 이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공경은 사랑입니다. 위로 향하는 사랑입니다. 존경을 겸한 사랑입니다. '공경하라' '순종하라'---성경은 이 두 가지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7절을 보세요.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지니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신명기 21장 18절로 21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대단히 준엄합니다.
옛날 우리 한국에는 유교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효를 모든 윤리의 기본으로 생각했습니다. 늘 '효도해야 하느니라'하고 강조합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기독교는 효가 없다고, 이 서양사람들의 종교는 효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유교학자에게 어느 목사님이 이 성경말씀 두 구절을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효가 없다는 것이 무슨 소리요? 기독교는 이렇습니다. 보세요. 효도하지 않는 놈은 때려 죽이라, 돌로 쳐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입니까?" 이 유교학자, 정말 그런 성경말씀이 있음을 보고는 그 때부터 예수 믿었다 합니다. 그 런 이야기가 우리 한국교회사에는 많습니다. 특별히 중국에도 많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윤리는 효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과 매칭(Matching)되었습니다. 그래, 중국사람에게 주는 전도지에 보면, 세상에서 효를 가장 강하게 강조하는 종교는 기독교다, 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들어 먹힌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돌로 쳐죽이라---이런 이야기는 정말 성경만이 가르쳐주는 무서운, 효에 대한 교훈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18절에 보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합니다.
여기에서 '복종'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휴포타소'입니다. 이것은 질서적 복종을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복종입니다. 또 20절에 보면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합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휴파큐오'입니다. 이것은 청종적 순종입니다. 청종적 복종입니다.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에는, 첫번째로 노예적 순종이 있습니다. 상대가 무서워서, 혹은 억지로 그럴 수밖에 없기에 노예적으로 굴종하는, 그런 의미의 순종입니다. 두 번째로 조건적 혹은 실리적 순종이 있습니다. 일단 순종해놓으면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네의 효에 대한 교리를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옛날에는 효 자체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군주에게 즉 왕에게 순종토록 하기 위해서 효를 가르친 것이다. 좀더 나아가 옛날에 효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산으로 땅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어서이다, 땅이 없이는 부지런할 수도 없고 일할 수도 없다, 살아나가는 길은 오로지 땅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가진 땅을 꼭 물려받아야 한다, 그런고로 아버지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유산을 노려서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얘기입니다. 효를 실리적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네 전통 명절인 팔월 추석이나 정월 초하루 같은 때를 보세요. 민족 대이동이라고 할 만큼 서울사람들이 전부 시골로 내려갑니다. 왜들 그렇게 가는지, 이에 대하여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땅을 유산으로 받으려면 이런 때에 가야 된다, 안가면 그 부모가 자식생각하기를 "이 나쁜 놈, 팔월 추석에도 안 오는 너 같은 놈에게는 유산은 한푼도 없다"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효가 실리적 수단이라고 한다면 그 효는 있으나마나합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보모와 조상에게 제사를 많이 드리는 것도 생각해보세요. 그래야 복 받는다, 그래야 잘산다 생각해서, 그런 동기에서가 아니겠습니까? 이 실리적 순종이라는 것은, 이 조건적 순종이라는 것은 참으로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경과 순종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존경과 감사와 사랑의 동기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보다 높습니다, 그가 나보다 지혜롭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 더 높임을 받아 마땅합니다---그래서 순종해야 됩니다. 진정한 존경으로 순종해야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들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한번보고 싶어합니다.
지금처럼 사진도 많고, 텔레비전으로라도 볼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옛날에는 실제로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든 먼데서든, 모두들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가로 모여듭니다.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자리에 누워 있어 거동이 불편한지라 이 노인은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얘야, 나 말이다, 임금님 얼굴 한번 뵈었으면 좋겠구나." "얘, 그렇게 하시지요." 효자 아들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는 어머니를 업고 70리길을 걸어서 임금님 행차하시는 길까지 왔습니다. 제 어머니를 아기 업듯이 단단히 받쳐 업고서, 어떻게든 어머니가 임금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모자(母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멈춰라!" 그리고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어떻게 된 사영니냐?"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 "참으로 효자로고." 임금님은 그 자리에서 효자 아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다른 마을의 아주 못돼먹기로 소문난 불효자는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안가겠다는 제 어머니를 강제로 업고,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목에 가서 떡하니 서 있었습니다. 역시나 임금님이 이 모습을 보고 흐뭇해합니다. "이 근방에는 효자도 많구나.
기특한 일이로고. 너는 무슨 사연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왔느냐?" 불효자는 효자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네사람들이 "아닙니다, 임금님. 저 놈은 천하에 몹쓸 불효자입니다.
임금님께 상을 받으려고 효자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하고 일러바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흉내라도 효도는 흉내라도 내어야 하느니라." 그리고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 흉내라도 내보세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어쩌면 그렇게도 부모님이 꼭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합니까?
중국 고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효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가장 큰 효는 공경이요, 다음의 효는 욕을 돌리지 않는 것이요, 다음의 효는 봉양이라.' 제때에 밥그릇이나 드렸다고 해서 효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공경함이 바로 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어느 기자가 젊은이를 상대로 '효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했는데, 전체의 60퍼센트가 '속상하지 않게 해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6.2퍼센트가 '그저 극진히 대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효가 실종된 것입니다. 부모님을 대접하는 자는 있어도 효도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어두워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모든 일에--좋은 부모에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예요. 못된 부모에게도 순종해야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성경의 효자 제1호는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27세나 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갑니다. 이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 127세입니다. '이삭아, 하나님께서 너를 잡아 제물로 바치라신다.' 아마 어떤 자식이든지 간에 열이면 열, 만이면 만, 다 마다할 것입니다. '나이 많이 드시더니 아버지가 드디어 노망이 드셨군. 세상에 어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이라신담'하고 당장에 항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종합니다. 전설에는 이삭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 "그러면 그대로 하세요." 그는 아무 말 없이 제단 위에 놓입니다. 이것이 이삭입니다. 너를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랍신다---이에도 이삭은 순종을 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은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십자가인데 내가 지지 않겠느냐 하심입니다. 가장 큰 효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충성도, 그 이상의 효도 없을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저술가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이 어느 여름날, 비가 막 쏟아지는데도 복잡한 장터에서 홀로 몇 시간이고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도 인사도 받지 않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립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 꼼짝 않고 고스란히 비를 다 맞으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집요하게 그 사연을 물어보자 그제야 그는 "사실은 50년 전, 우리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낡은 책을 사고 파는 헌 책 장사를 하셨었지. 그런데 손님들과 어느 날 어떤 책을 갖다주기로 약속하셨던 모양이야……"하고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내 몸이 아주 좋지 않구나. 네가 나 대신 오늘 하루만 시장에 좀 나가주렴." 아들은 발끈 합니다. "헌 책 장사하시는 것도 창피스러운데 내가 그런 심부름을 할 것 같아요?" 그는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힘들어도 내가 나가야지."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장터에 나가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인지, 그 날 이후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50년이 지난 지금, 그 아들이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부탁을 거역했던 것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한 것, 아버지를 공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겠기에 내가 나를 벌주려고 여기 서 있는 것이네." 여러분, 얼마나 더 벌을 받아야 알겠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의 덕을 익히지 못한 사람, 참으로 불행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세상 어느 직장에 가서든 제대로 붙어 있지 못합니다. 순종을 못 배웠으니까 그렇습니다. 참으로 불행합니다. 순종을 기쁨으로, 순종을 자랑으로, 순종을 자유로 경험하면서 순종할 수 있는, 그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20절)."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지혜를 얻고, 영광을 얻고,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 겸하여 장수(長壽)가 있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효가 그 가정의 가풍이 되고 윤리가 될 때, 그와 그 가정에 주께서 주시는 축복이 길이길이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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