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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애굽기 4장 1절~9절)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사람이 어떤 일을 하자면 그전에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많습니다. 건강도 있어야 하고, 지식도 있어야 하고, 얼마간의 경험도 있어야 합니다. 지도력과 지혜도 겸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 더 근본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한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념이라고도 하고, 혹은 확신이라고도 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남이 나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믿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남이 나를 믿어줄 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나입니다. 내가 내게 확신이 있어야 남들 눈에도 내가 '그는 믿을 만하다'고 믿음 가는 인격으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믿고 남이 나를 믿어 준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공부는 혼자 하고 일은 함께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으나, 이제는 공부도 일도 함께하여야 합니다.
연구를 해도 혼자서는 이루지 못합니다. 여러 사람이 서로 도우며 협력하는 가운데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어떤 일에서도 협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주어야 연구도 할 수 있고, 일을 진행시킬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를, 또 남이 나를 믿지 못하면 모든 일이 다 무효로 돌아갑니다. 다 망하고, 다 무능력해집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에 바로 그 믿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지금 모세의 처지를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값이면 그가 좀더 나이 젊었을 때에 부르셨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입니다. 한 40세쯤 되었을 때-바로의 궁전에서 공부도 많이 하고, 공주의 아들로서 권세를 행사하고 있을 그때에 불러서 쓰셨더라면 어땠을까? 왜 하필이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40년 동안이나 장인의 양치기로밖에 살지 못한 인생 실패자를 부르셨을까? 같은 값이면 왜 40세의 원기 왕성한 청년 모세를 부르시지 않고 80세에 이른 무기력한 목동 모세를 부르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양치는 현장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제는 기력도 없고, 의용도 없고, 욕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너무나도 엄청난 일입니다. 430년 동안 노예생활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입니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생활에 익숙하고, 노예적인 사고방식에 젖어버린 사람들-이 할일 없는 사람들을 건지라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60만 대군을 말입니다. 그것도 건져서 바로 이웃으로 옮겨놓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 시내 광야를 지나, 저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라-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적인 상식이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실 이것은 모세의 간절한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오랫동안 기도해온 기도 제목이요, 그의 욕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그 기도의 응답이, 간절한 소원에의 성취가 이루어지려 합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43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적으로는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 칩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더라도 모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나를 통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무 늙었고, 나는 좋지 않은 과거를 지녔습니다. 애굽에서 사람을 쳐죽인 살인자입니다. 도망자에다 실패자요, 다혈질이라서 성미가 급하고 불같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 포기한 상태에 있는 헛점투성이의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구원의 엄청난 역사가 오늘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나 모세는 아닐 것입니다, 나는 예외입니다, 나를 통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모세는 거듭거듭 사양을 되풀이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모세가 무자격한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아무 것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변명하는 말이 백성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그럴 수 밖에요. 내가 나를 못 믿는데 누가 나를 믿어 주겠습니까? 누가 나를 믿고 따라와 주겠습니까? 이 비참하고 초라한 나를 누가 따라주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안 된다고 안 된다고 하나님 앞에 극구 사양을 합니다. 10절 이하를 보면 모세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핑계까지 댑니다. 아마도 그는 입이 더눌(語訥)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나무라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도대체 누구 앞에서 그따위 변명을 늘어놓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가 결국 하나님의 손에 강제로 붙들려 쓰임 받는 것을 봅니다.
신앙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그 무엇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하나의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워낙 무자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 하더라도 나같은 사람과 함께 하실 리가 없고, 나같은 사람이 감히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다고 지레 절망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내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절)"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16절)"-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할 말을 다 가르쳐주시고, 또 다른 사람들이 모세를 볼 때에 그를 하나님처럼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라, 훌훌 털고 일어나 어서 가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소명(召命)입니다.
첫째, 그분은 인간의 부족과 허물을 묻지 않으십니다. 이미 다 알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도 더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며, 나의 약한 것 부족한 것을 다 알고 부르시는데 그 앞에서 감히 어떻게 사양할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 가능케 하도록 부르십니다. 가능하고 않고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요, 모세에게 속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능케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저를 부르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그 놀라운 지혜로 부르십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오묘한 섭리 중에 효과적으로 저를 부르십니다.
넷째, 큰 구원의 경륜, 그 속에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역사를 경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시리라는 뜻 안에서 모세를 이 땅에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륜 안에서 이제 모세 하나를 들어 쓰시고자 하십니다. 모세가 있고 나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큰 역사 속에 포함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부족하든 말든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니 쓰임 받을 뿐입니다.
다섯째, 최종적인 승리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꼭 이루어지도록-그 최종 승리, 그 종말론적 역사가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 약속이있고, 그 보증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제 모세는 아무 말도,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강하게 나오시니 모세도 이제는 도리가 없는 줄 깨닫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모세한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무엇을 좀 주세요. 희한한 것, 좀 굉장하고 깜짝 놀랄만한 능력과 표적을 주세요.' 굉장한 것, 마술적이며 초자연적인 것, 초인간적인 것-기적적인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뜻밖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아마도 모세는 적이 실망하여 대답했겠지요. "지팡이니이다." 이야기가 그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기대하고 있던 바와는 너무나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니이다." 이 말씀을 추리해보면 성경에는 없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됐어! 그것이면 됐다." 지팡이-그 이상의 것을 주시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 내게 있는 것-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에 속한 것임을 모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출생부터 매우 비상했습니다. 비상한 시점에 태어나 갈대 상자에 담아지고 나일강을 떠내려간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요,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 40년 동안 애굽의 문물을 공부하게 된 것도,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 양을 치면서 겸손을 배우고 인내를 배우고 지도력을 키우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렇게 80년이라는 긴 과정을 준비시켜 오늘 그 손에 지팡이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팡이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지팡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죽은 나무 막대기-그것을 들고 있는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순간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요, 거기에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로 태어났기에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 속에 마른 지팡이 하나가 모세의 손에 들려진 것입니다. 소박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이 소유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건, 재산이건, 건강이건, 지위건, 그 모든 것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 이 사건 하나가 있고 내가 있습니다.
이방 나라에서 이방 왕의 왕후가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삼촌 모르드개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너 잘살라고 왕후가 되었는 줄 아느냐! 네 민족이 어려운 경우를 당하였을 때에 건지라고 왕후가 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내게 주시고 준비시켜놓으신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가장 부한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집에 살든, 무슨 물건을 가졌든, 그것이 가장 좋은 줄 아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내게 있는 것의 뜻을 아는 사람,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가진 바를 은사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이 가진 바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그 사람이 가장 유능한 인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의 의미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제 그 지팡이를 바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이 많습니다마는 여기에서 몇 가지만 열거해보겠습니다.
재미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던지라, 잡으라, 넣으라, 취하라, 부으라, 치라, 건너라, 들라, 낮추라…… 아주 간단한 문장들입니다. 던지라 하시면 던지는 것입니다. 왜 던지느냐고 물을 것이 없습니다. 잡으라면 잡고 건너라면 건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가진 것, 그것을 통하여 역사 하실 때에 내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제 지팡이 사건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두말 않고 던집니다.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다시 잡으라 하셔서 잡으니 도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마술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커다란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표징-믿음을 주기 위한 표적입니다. 이 표적은 모세를 향하신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모세의 생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그에게 주시는 지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보십시오. 평범한 지팡이입니다. 그러나 양을 지키는 목자의 지팡이가 이제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팡이가 됩니다. 어찌 생각하면 모세의 일생은 그 지팡이로 시작해서 그 지팡이로 끝났습니다. 그 지팡이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알았고, 그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고, 그 지팡이로 반석에서 물을 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민수기 20장을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보자 불식간에 욱하는 성정이 되살아났습니다. 패역한 백성이라고 저주하면서 신경질적으로 반석을 쳤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순종했어야 할 자리에서 내 감정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절)." 너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놀라운 말씀입니다. 무서운 심판입니다. 안타깝게도 모세는 거기에서 끝나버린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되, 시키신 대로 정확하게 순종하여야 합니다.
지팡이 사건에는 바로 그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는 다스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보십시오. 손에서 놓으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다스리지 못하고 놓으면 뱀이 됩니다. 원수가 되고 악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음 장면을 봅시다. 모세가 뱀을 보고 피합니다. 그러나 그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무서워도 잡으라 하실 때에는 잡아야 합니다. 잡으면 나를 돕
는 지팡이가 됩니다. 원수라도 잡으라 하실 때에 그 꼬리를 잡으면 은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롭게 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잡으라고 할 때에 바로 잡으면 역경도 축복의 계기가 됩니다. 내 실패, 이 절망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만 들으면 엄청난 성공의 디딤돌이 됩니다.
이제 문둥병 발한 손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네 손을 품에 넣으라." 네가 손을 사용할 때마다 가슴에 대어보거라, 손과 마음이 따로따로 놀면 안된다, 마음이 나쁠 때에 네 손도 악해지고, 마음이 바를 때에 네 손이 손됨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지난날처럼 사람을 쳐죽일 것이 아니요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게 손을 써야 하는 것이다-이러한 말씀일 것입니다.
모세는 걱정합니다. '저들이 나를 믿지 않고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3:18)" 가만히 보면 이 대화가 매우 심각합니다. 모세는 안 들을 것입니다 안들을 것입니다 하고, 하나님은 들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듣는다면 듣는 줄 알아라!' 하고 호통치시는 것 같습니다. 또 4장 41절에는 '백성이 믿으며……' 하는 말이 나옵니다. 모세는 믿지 않을 겁니다 믿지 않을 겁니다 했지만 결과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백성이 믿었습니다.
나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는 것을 물으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게 있는 것의 목적과, 그 놀라운 의미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쓰이면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물고기 잡는 어부 베드로로 사람 낚는 어부를 만드셨습니다. 핍박자를 불러서 사도 바울을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할말이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그대로 내놓는 것입니다. 던지라 할 때 던지고 바치라 할 때 바칠 뿐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잡으라 할 때 잡는 것이요, 가라 할 때 가는 것뿐입니다. 그리할 때 기적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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