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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소금이다(마태복음 5 :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산상 보훈의 말씀을 하실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중심 되는 의미는 믿는 사람이 세상을 향해 어떠한 위치에 있는 것인가? 혹은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바로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향해서, 특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를 향해서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또한 어떻게 증인되며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말씀 중에 대표적인 비유 둘이 있는데 그 하나가 오늘 본문에서 대하는 소금이라는 말이요, 또 다른 하나는 다음 장에서 소개될 빛이라는 말입니다. 이 소금과 빛의 비유는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대단히 깊은 의미를 지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쉬운 이야기로 가장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과 같다! 너희는 소금이 되라!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이 간단한 말씀 속에 있는 무궁무진한 진리를 바로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결코 오늘만이 아닙니다. 두고 두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이 평범한 생활 속에서 매일처럼 새롭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소금이다! 소금이 되라! 너희는 이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소금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을 만날 때에는 너희가 소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너희는 소금이니, 소금이 되라! 여러분,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십니다.
이 간단한 비유 속에 참으로 무한한 진리를 담아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소금을 먹으며, 소금을 만지며, 소금을 사용하며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유의 성격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비스럽기도 하고 기발하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여러 가지 이론과 논리적인 설명으로 선하라, 사랑하라, 희생하라, 봉사하라 했다면 아마도 이렇게 나올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한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하고 복잡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간단하게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소금이 되라!는 이 한 마디로 그 전부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소금에 대한 이치를 배우면서 그 진리를 계속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소금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깨달음이 조금은 덜할 것입니다. 그것은 소금을 직접 손으로 만지며 맛을 보지 않으면 소금의 이치를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요즈음처럼 인스턴트 식품을 그냥 데워서 먹는 정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소금의 진가를 잘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음식을 요리해서 먹을 경우에는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의 소금을 빼 놓으면 제대로의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어느 식탁에나 소금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기야 소금 대신에 간장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소금이 들었기에 나는 맛입니다.
이 소금! 온 세계의 어느 식탁에도 소금이 없는 식탁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지혜로우신 것입니다. 매일 매일 보아야 하는 것이 소금이요, 그 소금을 볼 때마다 생각나게 만들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소금을 손에 쥘 때마다 "너희는 소금이다"하고 치세요. 저는 즐겨드는 설렁탕을 먹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어쩌다 소금 치는 일을 깜박 잊어버리고 그냥 맛을 보게 되면 어쩌면 그렇게도 맛이 없는지요. 그것은 아주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그럴 때에 소금을 들어 가르치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하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성경은 특별히 따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안 가지고 다녀도 상관없어요. "너희는 소금이다"하는 이 한 마디가 곧 성경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너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의도입니다.
소금이다! 빛이다! 하는 것은 가장 가깝고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세상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이며 그 관계의 방향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기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덕적 입장에서의 소금, 그리고 영적인 입장에서의 소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반드시 다해야 할 책임성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역할에 대한 책임은 예수님의 소원임 동시에 우리를 향하신 분명한 명령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하는 이 말씀은 존재론적인 말씀입니다. 단순히 어떻게 하라는 식의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는 소금이니 소금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바로 소금 자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존재 자체로서의 문제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님 당시의 원점으로 돌아가 당시에 있어서의 소금의 역할과 값어치 그리고 그 의미를 생각해 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을 두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마음에 뜻하신 바 소금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여야만 오늘 본문 말씀 역시 바르게 해석되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소금의 개념, 특별히 히브리 문화권적인 입장에서 유목민 생활을 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의 소금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바로 알고 바로 깨닫는 것은 성경적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을 한다손치더라도 우리는 "소금"하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짠맛을 내는 것이오, 방부제의 역할입니다. 이는 참으로 필요 불가결한 것이며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소금이 제물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거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점은 소금은 싼 것이요, 흔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다이어몬드다" 혹은 "너희는 세상의 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랬다면 우리는 시장에서 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어느 깊은 산 속에 숨어 아주 고결하게 자신만을 위하여 은둔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너희는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값싸고 천한 소금 말입니다. 저는 소금 하면 생각나는 재미있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마는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장례식이 있어서 염전이 있는 바닷가에 위치한 교회의 묘지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데 제가 타고 있는 장의차 바로 앞에서 웬 트럭 한 대가 쌀가마니를 가득 싣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커브길을 돌면서 그만 쌀가마니 하나를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뒤를 따르고 있던 우리의 장의차 기사가 그 쌀가마니 앞에 가더니 차를 세워 놓고는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서는 쌀가마니 딱 붙들고 이것은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보았으니 내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미 트럭은 멀리가 버렸고 내가 주웠으니 내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그 마을 사람들이 오더니 이번에는 우리 동네에 떨어진 것이니 우리들 것이라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쌀가마니 하나를 놓고 치고 받으며 마구 싸우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인데 지혜로운 여집사님 한 분이 "거 뭐 싸울 것이 있나? 저것이 뭔지 알고나 싸우지"라고 하고서는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쌀이 아니고 소금인 것입니다. 그것 잘됐구나! 하고 소금이니 이제 그만 싸우라고 하니까 아예 돌아 보지도 않고서 "아니야 쌀이야"하며 계속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는 소금을 한줌 퍼다 보이면서 이래도 싸울거냐고 하자 그때서야 다들 "괜히 싸웠구만"하고서는 계면쩍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소금 한 가마니의 값이 3백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제일 값싼 것이요 흔한 것입니다마는 그러면서도 귀한 것입니다. 금은 없어도 살수가 있습니다. 다이어몬드를 모르고는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 없이는 살수가 없으니 이것이 귀한 것이요 중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금은 평범하여 어떻게 말하면 천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꼭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과연 그러합니까? 그렇게 귀한 대접받으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귀족 대접의 특권적인 특정 인간의 대접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주 평범하고, 아주 서민적이며, 아주 깊이 대중 속에 들어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살지만 소중한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소금처럼 꼭 있어야 할 존재가 되라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소금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대 사회에 있어서 무역의 역할을 하던 대상들이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소위 실크 로우드(Silk Road)라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나온 말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떼를 지어 다니며 필요에 따라 이런 저런 물건을 서로 교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 상품 중에서 언제나 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옷감과 소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산에 있는 사람들은 산에서 나는 것들을 가지고 내려와 바닷가의 소금을 사가는 것입니다. 소금이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까요. 결코 이 소금이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저들 장사하는 사람들의 물품 중에는 반드시 포함되는 상품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묘하지를 않습니까? 바로 이런 이치를 두고 그렇게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개념이요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존재가 되라! 그러나 겉으로 나타나기에는 수수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외모나 그의 생활 자세로 보아서는 나타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사는 영적, 도덕적 역할은 소금 같이 꼭 필요한 존재로 나타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금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 이것은 먼저 생명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우리들도 병원에 가서 링게르 주사 같은 것을 맞는 것을 보면 불과 몇 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포도당입니다. 사실은 맹물에 포도당 조금과 소금 약간을 넣은 것일 뿐인데 이것을 맞고 살며, 그것을 맞으면 살아나게도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있어서 이 소금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양을 먹이는 유목민에게 있어서의 소금은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이 양들도 소금을 먹지 못하면 기운을 차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양에게는 반드시 소금을 먹여야 하는데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암염이라고 하여 돌덩이처럼 둥그런 소금이 있어서 그것을 풀밭 여기 저기에다 놓아두면 양들이 풀을 뜯어먹다가 그 소금을 빨아먹고는 하는 것입니다. 풀만 뜯어먹어서가 아니라 사실 이렇게 해서 양들이 기운을 차리고 힘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소금은 기운을 차리게 하는 것이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유목민이 이해하는 소금의 개념입니다. 소금 없이는 살수가 없다! 소금 없이는 양이 병들어 죽는 것으로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꼭 필요한 존재가 되라! 생명을 주고, 활력을 주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의미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우리가 쉽게 아는 대로 소금은 맛을 내는 것입니다. 욥기 6장 6절에 보면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며 맛을 내는 소금의 역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음식은 역시 소금으로 맛을 내게 됩니다. 소금은 적당히 칠 때에 비로소 제 맛의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음식이 각각 자기의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소금이 가미되기 전에는 결코 제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금은 소금이라는 자체의 맛보다도 맛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에도 소금의 의미가 들어가야 진정한 아름다움이 되고, 돈이 많은 것도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들어가야 돈이 돈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며, 학식이 높고 지식이 풍부하다 하지만 거기에 기독교적인 의미가 포함되지 아니하면 그 지식은 무효인 것입니다. 그 지식이 지식다운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신앙이 또 한번 합쳐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 같습니다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특별히 커피 맛이 좋은 식당이 있어서 거리가 조금 멀더라도 그리로 가자해서 들리고는 하였는데 커피는 같은 것이고 끓이는 원리도 같은 것일 텐데 왜 이집 것이 특별히 맛이 있는가 하고 궁금해 하다가 하루는 외국 사람이니 마음놓고 짓궂더라도 한번 물어 보자 하고서는 웨이터에게 "난 외국 사람이라 소문내지 않을 터이니 이렇게 맛있게 끓이는 비결이 무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양반도 짖궂게 내 귀에다 대고 "몰래 대줄게"라는 한 마디를 하고서 하는 말이 커피를 끓일 때 소금을 조금 치라는 것입니다. 사실 커피 맛이 참으로 까다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도 소금을 조금 쳐야 진짜 훌륭한 맛의 커피가 됩니다. 커피는 사실 우리 문화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적당히 먹고 씁쓸하면 다 좋다고 하는 처지이지만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아주 까다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도 소금을 쳐야 제 맛을 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음식의 맛이 결국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 요리의 비결이 소금을 어떻게 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일등 요리사는 소금의 신비로움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금의 맛을 여기 저기에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음식을 잘 만드는 비결입니다. 우리말에도 "간이 맞아야 음식이지"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간이 적당히 잘 맞아야지 이것이 빗나가면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썼더라도 그 음식은 틀린 음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짜도 안되고 싱거워도 안 되는 이런 의미에서의 맛입니다.
모든 음식이 각각의 다른 맛이 있지만 그 맛이 진정 맛 되게 하는 것, 맛있는 음식으로 하여금 맛있는 음식이 되게 하는 것이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맛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나 재능, 건강, 물질 등 우리의 가진 바가 많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 필요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신앙이 있어야 하고 기독교적인 의미가 부여되어야 하며 거기에 바로 크리스천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맛을 내는 사람! 삶의 의미를 주는 사람! 진선미의 가치를 바로 부여하는 사람! 다시 말하자면 거기에 크리스천이 있어서 가치가 바로 나타나게 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으로 말하더라도 예수 믿는 한 사람이 있어서 가정다운 가정이 되고 직장으로 말하더라도 그 직장이 직장 되는 것은 바로 그 크리스천 하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시는 말씀입니다. 맛과 힘과 효과 그리고 매력, 그리고 기독교의 기능입니다. 이 맛없는 세상, 이 맛없는 삶을 맛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곧 내게 유익한 것으로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여기에 고깃덩어리가 있다고 하면 이것은 이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 있어서 맛있는 음식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소금이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 모든 요소가 기독교인으로 말미암아, 바로 소금된 너희로 인해 유익한 것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매력의 진정한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령한 매력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조금 더 어려운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소금은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제사 의식에서 소제와 번제물에 소금을 뿌려 제사를 드렸으며 향을 쓸 때에도 소금과 함께 향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쓰여지는 것이 소금이었는데 여기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부정한 것을 정하게 하는데에 있어서 쓰여지는 두 가지가 있었던 바 그 하나는 피요, 다른 하나가 이 소금입니다. 여기에 대한 이해는 그 당시의 문화와 세계관에 의해서 풀이되어져야 합니다. 이는 왜냐 하면 그 당시의 문화는 그 당시 사람들의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소금에 대한 언어적인 개념은 부정을 몰아내고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학적으로 풀이하면 귀신을 몰아내고 잡귀를 쫓아내는 등의 영적인 세계에서의 부정함을 몰아내는 것에 소금을 썼습니다. 그 한 예가 아기가 태어나면 소금물로 목욕을 시키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위생적인 면도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잡귀로부터 손을 못 대게 보호한다는 의미가 큰 것입니다. 또 하나 가장 비근한 예는 전쟁에서 마구 쳐들어갈 때 피비린내가 나면 한쪽에서는 향내를 피워서 그 피비린내를 제거하고 또 한편으로는 길에다 소금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에서도 어떤 가정에서는 정월 초하룻날 집 주위에 소금을 뿌리기도 하고 달갑지 않는 손님이 들리기만 해도 소금을 뿌리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다 비슷한 풍속이라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정결케 하는 그 예식이 곧 하나님의 성전에 도입이 됩니다. 그리하여 소금은 악마와 잡귀를 막는 표정으로 쓰여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열왕기하 2장 19-22절 말씀에 보면 물이 좋지 못하여 사람이 죽기도 하고 농산물이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여리고의 샘물에 엘리사가 기도하여 새 그릇에 담은 소금을 뿌림으로 그 샘물이 좋아져서 마음놓고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금 한 그릇을 뿌렸다고 샘물이 다 짜지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무엇인고 하니 신학적 의미 내지 형이상학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당시의 문화적 개념을 여기에 상징적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소금은 위생적으로, 영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정결함의 요소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다음 네 번째로 생각할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방부제올습니다.
이 방부제라는 것은 이미 썩은 것을 썩지 않게 하여 소생케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썩지 않게, 혹은 썩을 수 있는 것을 썩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미 썩은 것이 소금을 친다고 살아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썩은 것은 썩은 것입니다. 그저 거기에서 멎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썩을 수 있는 채소, 썩을 수 있는 생선을 소금에 절이게 되면 썩지 않게 된다고 생각했을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죄지을 수 있는 사람이요, 타락할 수 있는 사람이며, 잘못될 수 있는 인간, 아주 썩어버릴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거기에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썩지를 않습니다. 아차 하면 쓰러질 것만 같은 위험한 순간의 남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 하나가 온전한 신앙인이 됨으로써 그 남편이 썩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넘어질 수 있는 처지인데 그리스도인이 거기에 있으므로 그로 인해 넘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것이 곧 방부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방부제라는 말에서 자칫 썩었던 것이 소생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썩을 수 있는 물건인데 그러나 여기에 신앙이 있고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음으로써 썩지 않는 것으로 바뀌어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넘어질 수밖에 없고, 모두가 다 썩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신앙에 힘입어 이만큼이라도 썩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에서 있어서나 가정, 혹은 사회나 직장, 이 세상 어디에 있어서도 당연히 썩어야 하고 썩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썩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절망하지를 않아요. 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그리스도인이 있기 때문에 망하지를 않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를 두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롯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롯이 소돔, 고모라로 가는 목적이 아무래도 그렇게 좋은 목적으로 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마는 어쨌든 소돔, 고모라에는 죄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죄악의 도성이 된 그 가운데 롯이 있었다면 롯 때문에 소돔, 고모라가 썩지를 않아야 되겠는데 이 사람 롯이 변변치를 않아서 소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소돔, 고모라는 완전히 썩었고 롯마져 감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롯까지도 절반은 썩었고, 맛을 잃었어요. 결국은 소돔, 고모라는 망하고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롯 한 사람만 온전히 서서 소금노릇을 제대로 했더라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소금이란 적은 분량을 말합니다. 아주 적은 분량인데도 전체를 짜게 만드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롯 한 사람은 소돔, 고모라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소금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 열 명만 있었더라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도대체 롯은 무엇을 하였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썩을 수밖에 없는 자를 썩지 않도록 막는 방부제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그러한 것이며 그와 같은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부정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그 부정을 막고, 불신과 타락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믿을 수가 있고 바로 설 수가 있다면 그가 바로 소금이요 방부제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바로 네 직장의 소금이다. 거기에서 방부제의 사명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다섯 번째로 생각할 것은 소금은 화목함을 말합니다. 때마침 김장철이라 아주 적절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아무리 뻣뻣한 배추라 하더라도 소금을 치고서 조금만 기다리면 부들부들해지고 맙니다. 또한 서로 섞이지 않던 것도 소금을 치면 잘 섞여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막 9 : 50)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뻣뻣하게 굴어서 네가 크냐 내가 크냐며 출신, 성분, 조상까지 들추며 자존심 내세우고 그러지 말고 소금을 치듯이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어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변화만이 아닌 화학적인 변화입니다. 적어도 기독교인이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혀 질이 달라지는 현상입니다. 이에 아무리 교만한 사람이라도 그 앞에서는 녹아지고, 아무리 허영된 사람도 그 앞에서는 진실해집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기독교인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화목을 이루는 세상의 소금! 서로 으르렁거리다가도 기독교인 때문에 화해가 되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4장 6절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소금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말이란 진정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슬픈 마음으로 누구와 만나 이야기를 하면 그와 만나는 동안에 그 슬픈 마음이 반으로 줄어들고, 기쁜 마음으로 만나면 내 기쁜 마음이 더 커져야겠는데 오히려 슬퍼지고, 슬픈 마음으로 만나면 더 슬퍼진다면 이건 참으로 곤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란 어떠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저 얼굴만 척 보아도 어느 사이에 마음이 달라지는 그런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화목케 하는 피이스 메이커(peace maker)인 이것이 소금인 것입니다. 잠언 15장 1절에 보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화를 벌컥 내려고 했다가도 그 사람만 대하게 되면 그만 그 분노가 다 수그러진단 말입니다. 그런 인격이 되어야겠는데 가만히 있던 조용한 사람까지 화나게 만든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것이지 결코 소금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화목케 하는 소금! 피이스 메이커가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녹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소금이 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녹아 자기는 없어지고 그리고 침투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소금이 소금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절대로 자기의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녹아 자기는 없어지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진정 그렇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소금을 두고 덜 짜고 더 짜다는 말은 합니다마는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말은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히브리 문화로 돌아가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이스라엘에는 암염이 있습니다. 저는 이 암염을 말로만 듣다가 6․25피난 때에 미군이 주는 배급에서 받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반찬으로 사용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암염이기 때문에 잘못 걸리면 한쪽에는 소금이지만 다른 한쪽에는 바윗덩어리인 것을 받게 되는데 바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소금을 빨아먹게 하기 위해 군데 군대 이 암염 덩어리를 갖다 놓았는데 어쩌다 그만 시원찮은 것이어서 조금 빨아먹고 나니 남는 것은 소금이 아닌 바윗덩어리만 남았단 말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맛이 나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이제 무엇을 하겠습니까? 본문 말씀에 의하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잘 이해는 못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이제는 양과 사람이 다니는데 거치적거리는 존재, 길거리에나 굴러다니는 거추장스런 바윗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면을 잃어버리면 그것처럼 거추장스럽고 골치 아픈 존재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소금을 만지고 먹으면서 이 말씀의 의미를 음미하며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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